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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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천양희 千良姬

1942년 부산 출생.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등이 있음.

 

 

 

생각이 달라졌다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 걸 어둠과 빛이

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音色이 달라졌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

 

웃음의 절정이 울음이란 걸 어둠의 맨 끝이

빛이란 걸 알고 난 뒤

내 독창이 달라졌다

 

웃음이란 이따금 울음을 지불해야 터질 수 있다는 생각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별처럼

나는 골똘해졌네

 

어둠이 얼마나 첩첩인지 빛이 얼마나

겹겹인지 웃음이 얼마나 겹겹인지 울음이

얼마나 첩첩인지 모든 그림자인지

 

나는 그림자를 좋아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졌다

 

 

 

어떤 순간

 

 

우물을 팔 때 인부들은 모래바닥을

파들어간다 우물 깊이 팔십미터 마지막으로

물길 터뜨리는 작업은 인부들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맡는다고 한다 늙은 인부가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은하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겸손하다고 한다 은하 높이 무한 매일매일

자신이 은하에 비해 너무 작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란다 작은 것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히말라야 설산을 아무 장비도 없이

넘어온 노스님에게 그 험한 길을 어떻게

왔느냐고 묻자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왔지요’ 했다고 한다 한걸음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무엇엔가 치떨리는 밤

적절한 말은 적절할 때 떠오르지 않고

썩은 나뭇가지 몇개 분질렀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마음은 열겠다

이것으로 겨우 내가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