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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설계-비평
장은정 張銀庭
문학평론가, 문학웹진 『비유』 편집위원. 주요 평론으로 「지켜내는 반복: 2010년대 시를 향한 하나의 각도」 등이 있음. riyunion@naver.com
1. 비평 없는 문학잡지?
『악스트』(Axt)가 창간되었을 때, ‘소설 전문 잡지’라는 정체성보다는 ‘비평 없는 문학잡지’ 쪽에 방점이 찍혀 소개되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창간 시점이 공교롭게도 표절사태와 맞물려 있었고, 평론가 중심의 문예지 체제에서 그 원인을 찾는 관점들이 압도적이었기에 당시 언론은 『악스트』를 기존 문예지의 새로운 대안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정작 『악스트』는 이러한 진단에 동의하지 않았다. 새롭다면서 혁신적으로 보이진 않는다는 한 독자의 비판적 의견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 바 있다. “『악스트』는 기존 문예지에 혁신을 가져오려는 의도로 기획된 잡지는 아닙니다. 또한 뭔가를 바꾸려는 비판적인 마음으로 시작한 잡지도 아닙니다.”1 그렇다면 『악스트』는 스스로를 어떻게 설명하고 싶어할까? 왜 비평이 없느냐는 또다른 독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문학에 관한 의미와 가치를 다루는 글은 대부분의 문학잡지에서 중요한 지면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집중하자는 것이 『악스트』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 다만 인터뷰를 직접 진행함으로써 소설가들의 고유한 소설적 철학과 입장을 듣고 묻는 과정을 통해 다른 방식의 소설적인 담론이 만들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2
마지막 문장에 주목하자. 소설가들과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다른 방식’의 소설적인 담론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는 것. 이것은 비평적 행위가 아닌가? 『악스트』는 각 호마다 소설가 한명의 얼굴을 표지 전면에 배치한다. 이 구성 때문에 편집위원들은 매호 어느 소설가를 『악스트』의 얼굴로 내세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인터뷰를 진행하며 ‘어째서 이 소설가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만 한다. 또한 편집위원들이 직접 인터뷰어가 되어 소설가들과 대화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악스트』가 소설가의 여러 철학과 입장 가운데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선별해 보여주는 일이다. 당연히 이 역시 문학에 관한 의미와 가치를 다루는 비평적 행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비평 없는 잡지’라는 특이성은 두겹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존 문예지에서 중요한 지면으로 기획되었던,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기반으로 하나의 주제를 밀도있게 탐구해나가는 이른바 ‘본격 비평’을 수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평 없는 잡지라는 판단이 옳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비평을 문학잡지에서 다루지 않기로 결정한 행위 자체는 근본적으로 비평적 행위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설계-비평’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기존 문예지에서 중요했던 비평 장르의 지면은 현저히 줄었지만 새로운 문학잡지가 문학을 독자에게 제시하는 구조 자체는 명확히 비평적 행위를 통해 구성된 결과다. 다만 이러한 비평적 행위는 문학잡지에서 구조화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설계-비평’이라는 개념을 통해 여러 문학잡지를 살피는 일은 각 잡지의 구조화된 비평적 행위를 논의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이는 『악스트』 이후를 지시하는 시기적인 개념으로도 유용하다. 1990년대 이후부터 『악스트』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여러 문학잡지들의 구성이 대동소이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최근 등장한 잡지들은 매우 상이한 구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 문제의 꿈
문학잡지는 쓰는 자와 읽는 자가 교차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문학잡지가 변화한다는 것은 쓰는 자와 읽는 자가 교차되는 방식을 다르게 조정하는 일이며 이는 최종적으로 문학이라는 장르 자체의 형질 변화로 이어진다. 최근 창간된 잡지들은 기존 문예지에서 보통 70매 내외였던 단편소설의 분량을 50매 내외로 줄이거나 30매 내외의 아주 짧은 픽션을 싣는 코너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이제 소설가들은 같은 규격으로 소설을 써오던 습관을 버리고 지면마다 다르게 주어지는 규칙에 맞춰 사유의 호흡을 바꿔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는 곧 단편소설이라는 장르의 변화로 이어진다. 비단 쓰는 자들에게만 요구되는 변화는 아니다. 독자 역시 이전의 문학잡지가 정해놓은 여러 장르의 규칙이 한 시대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 불과했음을 체감하면서, 여러 형식의 글들과 더불어 모험하겠다는 태도 없이는 이 변화들을 경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문학잡지들은 쓰는 자와 읽는 자 모두에게 이전과는 다르게 쓰고 읽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그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설계-비평’이라는 개념으로 대답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문학잡지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부터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잡지의 정체성을 핵심적으로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창간사는 물론이고, 잡지를 만든 사람들이 모여 나눈 좌담, 인터뷰와 보도자료에 이르기까지 각 잡지들이 스스로를 설명하는 자료를 모두 모은다 해도 그것이 그 잡지에 대한 총체적 이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명의 작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전적으로 책임지는 작품에서마저도 작가의 의도와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인데, 잡지의 의도에 동의 혹은 반발하면서 써내려간 필자들의 글을 모아 만드는 잡지는 그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요소3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표(의도)한 것과 실제 구현된 것은 다를 수 있으며 잡지를 읽는 독자의 경험은 오히려 두 요소의 간극 사이에 놓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문학잡지의 ‘설계’를 어떻게 논의 가능한 비평의 대상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세가지 층위로 세분화할 수 있을 듯하다. 우선 첫번째는 권두언이나 창간사 등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스스로 적어 내려간 글을 검토하면서 그들이 기존 문학잡지의 무엇이 문제라고 여기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그것은 각 문학잡지들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두번째는 그 잡지에서만 볼 수 있는 대표적 코너 혹은 기획에서 기존의 문학잡지가 가진 문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는지 살피는 일이다. 이는 각 잡지들이 독자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독자들에게 문학의 어떤 지점을 강조하는지를 분석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의 분석들에 기반해 각 잡지들의 ‘설계’가 어떻게 문학에 대한 ‘비평’으로 작동하는지 입체적으로 구성해보고자 한다.4
우선 그들이 자신의 출발점을 어떤 위치에서 이해하는지 살펴보자. 『악스트』는 창간호의 「outro」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우리가 들고 있는 도끼가 가장 먼저 쪼갤 것은 문학이 지루하다는 편견입니다. 『악스트』는 지리멸렬을 권위로 삼은 상상력에 대한 저항입니다. 우리는 매혹당하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 나눌 수 있는 쾌락을 나누고 싶습니다.”5 이 인용문에서 『악스트』는 “문학이 지루하다는 편견”을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정확히 그 편견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그 지루함을 “지리멸렬을 권위로 삼은 상상력”에 의한 것이라 판단하고 이에 저항하고자 한다. 『릿터』의 편집장 서효인은 출판사의 직원이 아닌 평론가들이 편집위원 체제하에 일주일에 한번, 혹은 한달에 한번 모여 회의를 하는 시스템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빠르게 변하는 사회적 현상이나 맥락에 적절히 개입하지 못하고 그 이슈가 지나가버리는 일이 많았다고 진단하면서, “실무를 할 수 있는 사람과 권한이 있는 사람이 한몸을 이루고 있어야 그것이 잡지라는 결과물에 오롯이 투영될 수 있지 않나”6 생각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2016년 가을 혁신호를 펴낸 『문학과사회』의 경우는 어떨까. 강동호는 표절사태를 50여년간의 계간지 체제가 역사적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해석하면서 “시대를 가로지르는 근본적인 퇴조 현상,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권태와 우울, 그리고 패배주의적 허무”7가 문예지 퇴조의 근본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혁신호 이후 『문학과사회』의 목표는 이 근본적인 퇴조 현상과 그에 따른 여러 부정적 감정을 극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문학3』 역시 “제도로서의 문단 혹은 문학장의 구조 속으로 들어간 문학”이 “그 구조의 지속성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변형”8시킴으로써 ‘문학-삶’의 관계가 ‘문학시스템-문학’의 관계로 바뀌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문학시스템 속에서 구체적인 삶이 소외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문학3』에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어떻게 의미와 상상력을 되돌려줄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최근 일이년 사이 동시다발적으로 새롭게 창간(혁신)된 문학잡지들을 한데 묶기는 쉽지만, 그 출발점은 이토록 상이하다. 현실에 대한 이해란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욕망과 밀접한 것이어서 문제의식은 곧 꿈꾸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문학 읽기의 즐거움을 회복하거나, 사회현상과 맥락의 변화 속도에 맞게 대화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것, 지금의 시대가 가진 퇴조에 따라붙는 부정적 정서들을 극복해나가는 일, 문학시스템에서 자동화된 문학을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소외된 삶에 의미와 상상력을 찾아주는 일, 이 모두는 단지 무엇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다르게 만들어나가며 자신들이 꿈꾸는 일에 가닿으려 하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목표(의도)한 것과 실제 구현된 것은 다를 수 있기에 각 잡지가 지향하는 바가 잡지의 구성에서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더욱 핵심적이다.
3. 설계
소설 전문 잡지를 표방하는 『악스트』가 표지를 어떻게 구성하느냐는 소설의 어떤 요소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대한 비평적 선택이다.9 즉 매호 표지마다 소설가의 사진과 이름을 가장 크게 하단에 배치한 것은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소설가임을, 소설가의 여러 면모 중에서도 소설가가 ‘얼굴’을 지닌 존재임을 부각한다. 이러한 구성 덕분에 『악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한명의 소설가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로 경험된다.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쳐 커버스토리 인터뷰를 읽는 것은 표지에서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소설가가 대화하기 시작하는 일, 즉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그 때문에 『악스트』의 메인 코너는 단연 편집위원들이 커버에 실린 소설가와 대화하는 인터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기획은 한명의 작가를 중심에 놓고 신작과 근작, 작가초상과 작가론 등을 배치하여 그 작가를 다양하게 조명하는 이전 문예지들의 기획과 유사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한 작가가 작품을 통해 구축하는 세계를 담론의 층위로 옮기는 비평 장르를 작가의 직접적인 발화로 대체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최근에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같이 싣기도 한다.
사회적 현상이나 맥락의 속도에 발맞추고자 하는 『릿터』의 바람은 매호 선정되는 키워드10 “하이픈은 지속이며 단절이고, 논쟁적 전선이자 새로운 세대의 기대지평을 나타내는”12 표지(標識)로 기능한다. 본권과 별도로 구성되어 휴대하기 편하게 만들어진 것은 문학잡지가 이전처럼 책상 앞에서 자세를 잡고 읽는 두꺼운 전문서적이 아니라 가방에 넣고 어딜 가든 쉽게 펼쳐볼 수 있어서 일상 속에 쉽게 스며들어야 한다는 의식하에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악스트』 『릿터』와는 달리 ‘하이픈’의 키워드가 표지에 디자인되는 방식이 잡지보다는 완성된 단행본에 가깝다는 점이다. ‘하이픈’은 고정 코너를 따로 마련하지 않고 그때마다 제시된 키워드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게 매번 다르게 구성된다. 이는 기존 문예지의 기획·특집 코너를 더욱 전면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3』은 그중에서 가장 총체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문학잡지’가 아니라 ‘문학플랫폼’으로 다르게 정체화하고 있다. 종이잡지로서의 ‘문학지(誌)’는 문학플랫폼으로서의 한 요소이며 온라인 매체 ‘문학웹(web)’과 문학적 행동 ‘문학몹(mob)’이 상호작용을 하며 『문학3』을 이끌어간다. 문학지로서 『문학3』의 가장 대표적인 코너는 ‘중계’와 ‘현장’이다. 일반적으로 작품들이 문학잡지에 발표된 이후 평론가들의 격월평 혹은 계간평이라는 형식으로 이야기되는 데 반해 『문학3』에서는 기존의 작가들뿐 아니라 타 장르 예술인, 청소년, 정치인 등 다양한 독자들이 뒤섞여 해당 호의 신작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문학작품에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누구나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13 것을 잘 보여주는 이 코너는 문학을 전문가의 영역에 가두지 않고, 독자들이 문학을 통해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나가는 매개로 삼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현장에 기반한 에세이를 싣는 ‘현장’ 코너 역시 주목할 만하다. 미적 형상화라는 과정을 통과하기 전의 규범화되지 않은 삶의 역동성을 담아내려는 이 코너의 시도 역시 문학시스템에 의해 소외되어 있던 구체적인 삶에 의미와 상상력을 되돌려주려는 실천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4. 설계-비평
다양한 문학잡지들의 등장은 ‘어떤 독자에게 어떤 문학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각자 다르게 접근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현재 발표되는 작품들뿐 아니라 이 작품들을 싣는 문학잡지라는 매체가 쓰는 자와 읽는 자 모두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을 함께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악스트』가 문학을 대하는 태도는 양가적인데, 한편으로는 읽기의 즐거움을 회복시켜줄 소설들을 골라 소개하는 정보지의 역할을 수행할 때14 문학은 다른 여러 콘텐츠 중 하나로 자리매김 되지만, 그중에서도 소설가들의 대화를 가장 중요한 코너로 내세우는 순간에는 문학에 대한 기존 문예지의 전통적 태도를 이어받으며 여전히 소설가들에게 삶에 대한 진실을 증언할 수 있는 위치를 부여한다.
사회적 현상과 맥락의 속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릿터』의 태도에는 문학이 동시대의 산물이지만 언제나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반시대성을 지닌다는 오래된 테제에 도전하는 바가 있다. 기존의 계간지가 오히려 한 발자국 늦는 것, 현재성 속에서 새롭게 체험되지만 사실은 반복에 불과한 것을 성찰하기 위한 형식이었음을 염두에 둘 때, 격월간지라는 『릿터』의 짧은 주기는 현재성에 충실하게 반응함으로써 시간의 격차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들을 누락할지 모른다는 염려를 자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 중요한가?’를 선별하는 기존 문예지의 기획을 이어받되 주제를 적극적으로 창작에 개입시키는 서사실험은 사회적 현상의 변화에 속도감 있게 대응하면서도 시간의 흐름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는 문학적 방식의 대응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것일 수 있다. 다만 이 실험의 성공은 참여하는 소설가들이 이 짧은 분량을 ‘가벼움’으로 이해하지 않고, ‘지금 여기’를 사진을 찍듯 서사의 방식으로 포착해내는 실험이라고 받아들일 때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문학과사회』의 ‘하이픈’ 시리즈는 키워드 선정을 통해 문학에 대한 기존의 여러 태도와 관념을 재검토하면서 ‘지금 여기’를 이전과 다르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중이다. 비평지의 성격을 유지한다는 점15에서는 사실 기존 문학잡지들이 해왔던 작업과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이픈’ 2017년 여름호의 키워드였던 ‘시-인’의 경우, ‘노동-직업’ ‘제도-등단’ ‘세대-단절’ ‘시장-독자’ ‘운동-연대’ 항목으로 다시 세분화하여 18명의 시인이 각 주제에 대해 쓴 글들을 모은 것은 시인에 대한 기존의 관습적 접근에서 벗어난 신선한 기획이었다. 이처럼 ‘하이픈’은 문학에 대한 기존의 여러 관념을 재구성하면서 현재성을 문학에 기입해나가는 중이다.
문학플랫폼으로서의 『문학3』은 ‘모두의 말이 모두의 것이 되는 순간’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독자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듯하다. 다른 문학잡지들에 있어서 독자가 수용자로서만 간주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일반 독자들이 직접 지면에 참여하여 수록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계’ 코너에서 독자는 수용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가 된다. 문학웹이나 문학몹 역시 독자의 참여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근래 창간된 잡지 중에 『문학3』이 가장 진보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지점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은 작년 12월 26일에 창간한 문학웹진 『비유』(http://view.sfac.or.kr)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창간되는 문학웹진이라면 현재의 문학 지형도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살핀 바를 정리한 것이다. 이제 막 출발한 잡지들의 성취를 따지기엔 아직 이르다. 다만 각자가 꿈꾸는 문학을 더욱 개별적으로 추구해나가는 일이 ‘지금 여기’의 문학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새로운 문학잡지들에서 비평 지면이 현저히 줄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비평의 종말로 보이는 듯하다. 작품론이나 주제 평론이라는 특정한 평론의 형식만을 비평으로 국한할 때는 그 판단이 옳은 것이겠으나 이토록 다양한 문학잡지의 등장에서 비평은 이제 행위로서 더욱 확장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비평 장르가 다루는 대상 역시 ‘문학이란 무엇인가’ 답하기 위해 개별 작품뿐 아니라 작품이 생산되고 있는 조건과 매체의 영향 등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기존의 비평 장르를 포함하지 않는 새로운 문학잡지의 등장을 비평이 스스로 갱신해나가는 계기로 삼는다면, 그동안 읽어본 적 없었던 새로운 비평의 출현 역시 가능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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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 일동(대표집필 정용준) 「outro」, 『악스트』 2015년 9/10호 283면.↩
- 같은 곳.↩
- 새로 출간된 문학잡지들이 이전의 문예지들과 다른 점 중 하나는 각 잡지의 정체성을 디자인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새로운 잡지들의 ‘모든’ 요소를 기반으로 하나의 잡지를 규정할 수 있으려면 디자인에 대한 전문적 비평이 따로 필요할 것이나 이는 필자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로서 이 요소를 제외하고 논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혀둔다.↩
- 이 글은 출판사가 발행하는 문학잡지를 제도권으로 규정하고, 제도권 내부에서의 변화에 국한하여 검토하고자 『악스트』(2015년 7월 창간)와 『릿터』(Littor, 2016년 8월 창간), 『문학과사회』 혁신호(2016년 가을호) 이후의 ‘하이픈’ 시리즈, 『문학3』(2017년 1월 창간)을 다룬다. 물론 이들이 최근에 창간된 문학잡지의 전부는 아니다. 『영향력』(2016년 2월 창간), 『소녀문학』(2016년 10월 창간), 『베개』(2017년 5월 창간), 『젤리와 만년필』(2017년 7월 창간) 등 새로운 문예지들이 속속 등장했다. ‘전업작가가 아닌 사람이 일과를 마치고 부엌 식탁에 앉아 써내려간 글’들을 묶는 『영향력』이나, 소수자와 약자들에게 내면화되기 쉬운 차별적인 규칙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소녀문학』, 읽고 쓰는 행위를 넘어 ‘문학/하기’를 실천하고자 하는 『베개』, 자리를 부여받지 못한 길고양이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자리를 모색하는 『젤리와 만년필』 모두 각자의 문제의식을 뚜렷하게 지닌 문학잡지들이다. 이들은 제도권 내에서 발행되는 문학잡지와는 다른 환경에서 발행되고 있기에 잡지를 둘러싼 좀더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며, 기존의 등단제도와 문단 권력 문제를 주요한 문제의식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깊이있게 살피기 위해서도 더욱 섬세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다른 지면에서 상세히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편집위원 일동(대표집필 백가흠) 「outro」, 『악스트』 2015년 7/8호 256면.↩
- 서효인 「문예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 강동호 외 『지금 다시, 문예지』, 미디어버스 2016, 68~69면.↩
- 강동호 「새로운 싸움을 모색하며」, 『문학과사회』 2016년 가을호 33면.↩
- 「문학은 모두의 말이 모두의 것이 되는 순간입니다」, 『문학3』 2017년 1호 3면.↩
- 그동안 『악스트』가 표지로 내세운 소설가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호부터 차례로) 천명관, 박민규, 공지영, 듀나, 파스칼 키냐르, 이장욱, 정유정, 김연수, 윤대녕, 다와다 요코, 김탁환, 은희경, 위화, 황정은, 데이비드 밴, 이인성.↩
- 『릿터』가 그동안 선정한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1호부터 차례로) 뉴 노멀, 페미니즘, 랜선-자아, 부동산크리피, 4월 16일, 기르는 삶, 느슨한 공동체, 몸-테크놀로지, 결혼 플롯, 커버링.에 압축되어 있다. 이 키워드는 표지 디자인으로 매번 다르게 시각화되고, ‘ Issue’와 ‘ Flash Fiction’ 코너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기존 문예지들에 존재하던 기획·특집 코너는 대개 평론가들로 구성된 편집위원들이 비평적 의제를 매호 선정하고 이 의제를 다양하게 풀어나갈 여러 평론가들의 평론으로 구성되었다. 사실 ‘ Issue’ 코너는 문학평론 대신 짧은 칼럼으로 채워진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니지만 그럼에도 문학잡지가 매호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해 대답해야 할 의무를 짊어진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런 점에서 ‘ Flash Fiction’ 코너는 주목할 만하다. 중요하게 던져진 키워드를 소설가들이 짧은 픽션으로 다룬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중요한 문제들이 서사적 상상력과 함께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비평적 해석이 들어간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들에게 키워드를 주고 이야기를 쓰게 하는 것은 일종의 서사실험이라 할 수 있다.
『문학과사회』의 경우는 어떤가. ‘하이픈’ 시리즈는 혁신호를 내지 않았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별책이다. 하이픈(-)을 사이로 두개의 키워드가 놓인다.[11. 『문학과사회』 2016년 가을호 이후 선정된 ‘하이픈’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1호부터 차례로) 픽션-세대론, 비평적-페미니즘적, 역사들-문학성, 시-인, 이론-이론, 루프-저자.↩
- 『문학과사회』 2016년 가을호 이후 선정된 ‘하이픈’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1호부터 차례로) 픽션-세대론, 비평적-페미니즘적, 역사들-문학성, 시-인, 이론-이론, 루프-저자.↩
- 강동호, 앞의 글 38면.↩
- 홍수연·최의진·정유진·이수정 「중계: 유일한 기쁨」, 『문학3』 2017년 3호 182면.↩
- “문학잡지의 많은 기능 가운데서 정보를 확인하는 기능이 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악스트』는 정보를 찾아나서고 그 정보를 수요자인 독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문학정보 매개체 잡지가 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백다흠 「문예지의 변신은 문학의 변신인가? 『악스트』의 사례」, 『지금 다시, 문예지』 36면.↩
- “어려워도 매력적인 어려움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전반적으로 잡지가 비평적 재미를 못 줬던 것 같습니다. 비평지를 예전부터 고수하고 있지만 비평적 재미를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한 모색을 강화화겠다, 이렇게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백다흠·강동호·서효인·정지돈·한유주·김용언 「종합토론: 정주와 질주, 문학잡지의 향방에 관하여」에서 강동호의 말, 같은 책 1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