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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식민성과 세계문학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을 중심으로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저서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 역서 『지식의 불확실성』 『한 여인의 초상』(공역) 등이 있음. yoohuisok@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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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담론의 위력은 서구 인문학계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실감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석연하지 못한 쟁점들도 적잖이 남아 있다. 그중 하나는 (서구문명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때로 침탈의 무기로 오용된 반면, 너무도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바깥의 적’은 오히려 식민지 내부에 더 강력하게 숨어 있더라는 역설일 것이다. 이는 식민성(coloniality)의 극복을 명시적으로 내세우는 비서구 작가들일수록 더 난감하게 맞닥뜨린 문제이기도 했다.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염상섭 『만세전』, 1924)—‘내지(內地)’에서 식민지조선으로 귀환하여 내뱉은 이인화의 일갈은 독립 전후 ‘아프리카문학’의 회귀서사(narrative of return)에서도 착잡하게 되풀이된다.1 그 과정에서 당연시된 모든 이분법들은 서사의 용광로로 사라진다. 근대와 반근대, 전통과 반전통, 봉건과 민주, 계몽과 반계몽, 전통종교와 외래종교 등 온갖 종류의 반목은 주인공의 분열된 내면풍경을 형성하는바, 흑백논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그곳은 잿빛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독자의 판단 정지를 조장하기 일쑤인 잿빛 내면풍경이 식민현실의 역사적 딜레마를 명징하게 되비추어 모종의 여명(黎明)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수단 출신 작가 타예브 쌀리흐(Tayeb Salih, 1929~2009)의 ‘와드 하미드 싸이클’(Wad Hamid Cycle) 가운데 하나인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1969, 이하 『계절』)이 바로 그런 사례가 아닌가 싶다.2 주인공의 타살(『모호한 모험』)이나 타락(『더이상 평안은 없다』) 또는 추락(『버려진 바오밥나무』)으로 귀결되는 회귀서사 중 가까스로 ‘숨통’을 틔운 예외적인 면모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탈식민문학’으로 분류되는 작품 가운데 드물게 식민성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복합적 통찰과 자기성찰이 통렬할뿐더러 되받아쓰기(writing back)의 탁월한 성취로도 손꼽힌다. 이런 『계절』에서 우리가 세계문학의 새로운 활로를 상상할 수 있다면 독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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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분단도 그렇지만 세계사에서 ‘해방’ 이후 오히려 식민지현실의 잠재된 모순이 더 폭력적으로 꼬이는 사례는 적지 않다. 독립(1956) 이후 장기 내전(1955~72, 1983~2005) 끝에 두 나라로 쪼개진 수단도 그렇다. 이집트를 하위파트너로 삼은 영국의 분리지배가 야기한 수단의 질곡은 식민지해방의 어둠이 어떤 것인가를 웅변한다. 이런 수단을 포함한 아프리카의 문학들이 자신의 존재를 ‘작품’으로 세계에 알린 것은 대략 1950년대 전후다. 세계문학 무대에서도 후발주자인 셈이다.3
하지만 이런 뒤늦음이 문학의 후진성인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저항문학’의 상투성을 넘어선 작품도 적지 않으려니와, 때늦음으로 인해 오히려 식민지근대를 주도한 서구문학과는 다른 차원에서 식민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더 절박하게 제기하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지역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토착적인 것들이 철저하게 파괴된 상황에서, 그것도 모어(母語)가 아닌 식민제국의 언어로 창작한 아프리카의 작가들에게 ‘식민지근대’는 그 자체로 결코 안주할 수 없는 시대였을 법하다. 제국과 식민조국 모두에서 겪는 회귀서사 주인공들의 ‘이중의 소외/억압’도 안주할 수 없음의 시대적 징후인지 모른다.
이야기는 수단 독립 전후, 즉 1차 수단내전과 약간 겹치는 시기, 아랍계 이슬람이 주류인 수단 북부 나일강변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4
내가 고향 사람들에게 돌아오기까지, 여러분, 정말 오랜 시간이—정확히 7년, 그 기간 동안 나는 유럽에서 공부했습니다—지났습니다. 나는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이 나를 스쳐갔습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일강 구비에 있는 이 작은 마을, 고향 사람들을 향한 커다란 그리움을 품고 내가 돌아왔다는 겁니다.(3면)
이렇게 독자를 불러내는5 ‘나’는 환영 인파 속에서 짐짓 야릇하게 미소만 짓던 한 남자를 떠올린다. 무스타파(Mustafa, 선택된 사람 또는 선지자) 싸이드(Sa‘eed, 행복한)라는 그 사내는 수도 하르툼(Khartoum)에서 5년 전(1948년)에 흘러들어와6 정착한 외지인이다. 그간 농사를 포함한 마을의 대소사에 지혜롭고도 실용적인 조언을 해왔지만 과묵해서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나’는 그에게 초장부터 강하게 끌린다. 그러던 어느날 농사일로 모인 자리에서 사달이 난다. 강권한 술을 받아 마시다가 싸이드가 즉흥적으로—모든 출세를 보장하는 바로 그 영어로—영시를 완벽한 발음으로 읊조린 것이다. “영국의 한 무명 시인”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향한 ‘나’는 경천동지할 충격을 받는다. 그의 정체가 더 궁금해진 ‘나’는 안달이 나고, 그는 절대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영국 유학을 포함한 자신의 남모를 사연을 들려준다. 그 결과 “무스타파 싸이드는 나의 의지에 반(反)하여 내 세계의 일부, 머릿속에 박힌 하나의 생각, 떠나지 않으려는 유령이 된다.”(42면)
2부는 물난리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싸이드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홍수 나기 직전에 ‘나’에게 (두번째) 아내인 호스나와 두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남기고—더불어 자기의 내실(內室) 열쇠를 맡기고—흔적도 없이 사라진다(1953년). 이제 그로부터 2년이 지나 27세가 된 ‘나’는 하르툼 소재의 교육부 관리가 되어 고향을 오가면서 싸이드를 둘러싼 전설 같은 각종 일화를 듣게 된다. 물론 그사이에 하르툼 정가의—아프리카의 신생국 어디에서나 벌어졌었을—타락과 부패는 여지없이 까발려지고, 사치와 방탕의 정치가들이 혹세무민하는 정치적 실상도 신랄하게 폭로된다.
하지만 『계절』은 사실적 배경도 인물의 내면 묘사와 연동하여 부각하는 작품이다. 서사의 초점은 미망인이 된 호스나와 그녀의 상황으로 모아진다. 70대 마을 노인인 와드 라이스가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는 중이다. 그는 얄궂게도 후견인인 ‘나’에게 중매를 서달라고 부탁한다. 호스나를 향한 연심 때문에라도 더 난감해진 ‘나’는 그녀에게 신의 뜻에 맡기라고 충고하고 하르툼으로 떠난다. 이후 와드 라이스는 호스나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결혼을 강행한다(1956년). 하지만 그가 결혼을 결사적으로 거부해온 호스나를 범하려다가 칼부림이 일어나고, 그녀와 더불어 와드 라이스도 거세당한 채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평화롭던 마을에 역사상 초유의 참극이 일어난 것이다. 서둘러 시체를 처리한 마을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함구하나 하르툼에서 급거 돌아온 화자는 기어이 살인의 전말을 알아낸다.
소설의 3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이 갑자기 뒤집어졌다. 사랑? 사랑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이건 증오다. 나는 증오를 느끼고 복수하려 한다. 내 적은 내 안에 있고, 나는 그에게 맞서야만 한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상황의 아이러니를 의식하는 일말의 감각이 있다. 나는 무스타파 싸이드가 떠나버린 지점에서 시작한다. 내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반면 어쨌든 그는 최소한 선택을 한 것이다.(111면)
“지금까지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100면)에게 끌리는 감정을 간신히 눙친 결과가 참극으로 이어졌기에 ‘나’의 회한은 쓰라리기만 하다. 이제 ‘나’는 싸이드가 맡긴 열쇠를 들고서 “후견인이자 (싸이드 아내의—인용자) 연인, 그리고 적”으로서(112면) 그의 내실 앞에 서 있다. 그 어두운 ‘비밀의 방’을 불태워 없애버리겠다고 되뇌면서.
나는 두번째, 세번째 창문도 모두 열어젖혔지만 바깥에서 들어오는 건 더 짙은 어둠뿐이었다.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은 눈앞에서 순간 폭발했고, 어둠 속에서 입을 다문 채 인상을 찌푸린 얼굴이 나타났다. 알지만 생각나지 않는 얼굴. 나는 증오심을 품고 그 얼굴에 다가갔다. 그것은 나의 적인 무스타파 싸이드였다. 얼굴은 목이 되고, 목은 두 어깨가, 다시 가슴이, 그러다가 몸통과 두 다리가 되자, 나는 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음을 발견했다.(112면)
싸이드라는 적이 어느 순간 ‘나 자신’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나’가 마주하게 되는 이 상징적인 장면에 이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렇게 어둠이 물러간 방에서 ‘나’는 오롯한 영국식 벽난로와 함께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 하지만 아랍어서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지식의 보고와 마주한다. 동시에 그가 남긴 저서들, 비망록, 일기, 자작시, 사진, 초상화 등을 하나씩 짚어본다. 그 과정에서 못다 들려준 비극적 사연의 전말이 싸이드 자신의 독백으로 변주된다. 환청과도 같은 싸이드의 혼잣말이 끊기고 이윽고 먼동이 터온다. ‘나’는 불 지를 생각을 접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촛불을 끄고 방문을 닫았다. 또다시 불 지른다고 해서 나아질 게 없었다. 나는 그(싸이드—인용자)가 계속 떠들도록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가 말을 끝맺도록 하지 않았다. 그녀의 무덤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열쇠는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던져버리리라. 그러나 곧 생각을 바꿨다.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난 뭔가를 해야만 했다. 발걸음은 어느새 강가로 향했다. 먼동이 트고 있었다. 수영으로 이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삭여야만 했다.(137면)
작품은 그런 기분으로 강에 뛰어들었다가 “남쪽과 북쪽의 중간 지점”에서 힘이 빠져버린 화자의 심리를 간결하게 포착한다. 이야기는 수단이 독립된 해에 이렇게 끝난다.
이 순간 내가 만약 죽는다면 태어난 그대로 죽으리라 생각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한평생 나는 선택한 적도, 결정을 내린 적도 없었다. 이제 나는 결단을 내리려 한다. 나는 삶을 선택한다. 나는 살아갈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함께하고픈 사람들이 내게 있고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기에. 삶에 의미가 있든 없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용서할 수 없다면 잊기 위해 노력하겠다. 힘과 기지를 써서 살아가겠다. 나는 윗몸이 물 위로 떠오를 때까지 팔과 다리를 힘겹게, 격렬하게 움직였다. 무대 위에서 고함치는 희극 배우처럼 나는 안간힘을 다해 외쳤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1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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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한 논자는 『계절』이 “본질적으로 극시(劇詩)”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7 ‘극시로서의 소설’이라는 지적은 사실과 상징을 하나의 문맥으로 아우르면서 발생시키는 서사의 시적 효과에 착목한 것이다. (영국 유학에서 귀환했으되 여러모로 대조적인) 두 화자의 1인칭 독백이 교직되는 점도 그런 효과를 고양시키는 데 일조한다. 아프리카의 여러 회귀서사들과 『계절』의 가장 눈에 띄는 형식상의 차이도 그같은 교직 구조에 있다. 자신의 비밀스런 과거를 들려주는 싸이드와, 그런 과거를 자신의 현재 삶에 비추어 보면서 반추의 상념을 다시 독자에게 전달하는 1인칭 화자인 ‘나’가 번갈아 나타나는 구조다.8 서사에 독특한 리듬을 부여하는 이런 구조는 형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독자를 호명하는 1인칭 관조적 시점의 ‘나’와 그런 나를 청자로 하는 싸이드의 교차 서사는 식민지와 식민제국의 얽히고설킴을 임의적으로 분리하지 못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유학을 마치고 귀환한 ‘나’는 주로 독립 이후 수단 내부의 토속적 상황과 모순을 부각하는 데 동원되는 반면, ‘예리한 칼’과 같은 두뇌의 소유자로 유학을 떠난 싸이드는 식민제국의 심장부에서 창궐하는 아프리카에 대한 거대한 환상의 실체를 해부하기 위해 창조된 인물이다. ‘나’와 싸이드는 사안의 성격상 단일 시각으로는 제대로 해명할 수 없는 식민지와 식민제국의 복잡한 관계를 파헤치기 위한 짝패인 것이다.9 전혀 다른 성격의 ‘나’와 싸이드가 그렇게 합작함으로써 일어나는 중요한 서사적 효과 가운데 하나는, 남의 식민지근대와 북의 근대가 어떻게 하나의 ‘되먹임구조’를 이루는가에 대한 분석적 통찰이다. 『계절』은 서사에 피와 살을 입혀 이 되먹임구조의 파괴적인 작동방식을 드러내는바, 그로써 필자도 식민지/근대에 어떻게 대응해야 ‘탈근대’가 가능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북의 근대가 분쟁의 씨앗을 퍼뜨린 남의 식민지근대와 그런 식민지근대를 업보로 안고 있는 북의 근대, 분명 전선(戰線)은 두개건만 하나의 싸움이 있을 뿐이기에 더 골똘해지기도 한다.10
그런데 하르툼에서 유복자로 태어나(1898년) 3년간 학교를 다니다가 9세 때 카이로로, 거기서 다시 15세의 나이로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난 싸이드가 대체 어떤 사연을 들려주었기에 ‘나’는 그토록 그에게 집착하는가. ‘나’를 사로잡은 싸이드의 고백은 다섯개의 가명으로 영국 백인여성들을 동시에 성적으로 유린한 ‘성애극’(性愛劇)에 관한 것이다. 비수에 비유된 비상한 두뇌가 성애극을 연출하는바, 싸이드는 식민제국의 심장부에 똬리를 튼 오리엔탈리즘을—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여성들의 편견들을—‘페니스’를 무기로 무자비하게 파괴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 것이다. ‘상상된’ 아프리카의 이미지들에 그토록 쉽게 빠져드는 여자들을 농락한, ‘아프리카적인 것’을 미끼로 쓴 그의 가차없는 애정편력은 성적 일탈을 초월하는 역사적 울림을 퍼뜨린다.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주의 판타지를 내면화한 각계각층의 여자들을 욕보이고 자살에 이르게 해서 끝내는 살인죄로 7년간 복역한 그의 파국은 콩고의 ‘야만인들’에게 신처럼 군림하다가 형언키 어려운 자기어둠 속에서 파멸한 『어둠의 속』(Joseph Conrad, Heart of Darkness, 1899)의 커츠의 말로를—부분적으로 화자 말로우도—떠올리게 할 만도 하다.11
그러나 콘래드의 텍스트에서 쌀리흐가 뭔가를 서사재료로 끊어왔다면 ‘바느질’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은 서사적 기예(技藝)에 비견할 만하다. 전설적인 천재로 통하는 싸이드의 가계와 행적에 20세기 수단의 식민지 역사가 투사된 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함직하다. 불가해할 정도로 외부세계에 무감각한 그의 유년 시절을 식민착취와 내전으로 황폐해진 수단인들의 상징적 내면 풍경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12 낮에는 경제학자로서 『아프리카의 능욕』(The Rape of Africa) 등의 저서를 쓰고 “아프리카 해방투쟁연맹의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밤에는 “나는 내 페니스로 아프리카를 해방시키겠다”(100면)는 선언을 전투적으로 실천한 싸이드의 내면은 (커츠의 정신세계가 그러하듯이) 불가해한 ‘어둠’에 가려 있다. 그렇다고 그 어둠이 (커츠의 최후에서 그러하듯이) 어떤 형이상학의 차원으로 비약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심리적 고뇌는 고향에 온전히 뿌리를 내릴 수 없기에 어디에서도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는 데서 증폭된다. “검은 백인”으로 떠받들어졌으나 정주할 수 없는 식민지지식인의 자기파괴적 열정이 어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런던에서는 거처의 모든 것을 아프리카풍으로 장식한 반면 수단 마을의 자기 내실은 빅토리아조 영국 지식인의 서재처럼 꾸민 행태도 싸이드의 의식세계가 어떻게 전도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단면에 불과하다. 쌀리흐는 ‘북’에서는 ‘남’을 꿈꾸고 ‘남’에서는 ‘북’을 꿈꾼 그의 방랑벽(wanderlust)을 현대인들이 겪는 소외의 한 징후로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징후를 철저하게 식민지근대에서 유래한 역사적 현상으로 파악한다. 가령 그의 성적 일탈이 ‘살인’으로 귀결되고 법정에서 그 죄를 다툴 때, 독자는 그의 소외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가늠하게 된다. 법정의 어떤 변호나 심문도 싸이드의 진실을 대변하지 못하는 바로 그 상황에서 말이다. 자신을 걸고 싸우는 두 입장—서구문명이 구제할 수 없는 야만인 대 폭력적인 서구문명의 희생자—모두를 싸이드가 부정할 때 독자는 그 소외와 배제의 원인을 식민제국과 식민지 어느 한쪽에서만 찾을 수 없게 된다.
“배심원 여러분, 무스타파 싸이드씨는 고귀한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성으로 서구문명을 받아들였지만 그 문명이 그를 절망으로 몰아갔습니다. 이 여자들을 죽인 것은 싸이드가 아니라 천년 전에 그들을 공격한 치명적인 병균입니다!”(로마의 영국 토벌을 가리킴—인용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조작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을 죽인 것은 납니다. 나는 갈증에 시달린 사막입니다. 나는 오셀로가 아닙니다. 나는 거짓입니다. 나를 교수형에 처해서 그 허위를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포스터킨 교수는 법정을 두 세계 사이의 싸움, 나 자신이 그 희생자들 중 하나인 싸움으로 만들어버렸다.(29면)
법정의 어느 누구도 “나는 오셀로가 아니”라는 싸이드의 자각을 이해할 수 없다. 커츠의 약혼자가 바로 그러했듯이, 끝까지 싸이드의 충실한 후원인으로 남은 로빈슨 부인의 그 거대한—무지(Moozie, 싸이드의 애칭)의 ‘위대한 순결’을 믿는—미몽이 사건 관련자들의 입을 통해 변주될 뿐이다. 그런데 ‘나는 거짓이요 허위’라는 싸이드의 고백이 자기 내면의 어둠을 직시하는 데서 나왔다면 ‘진짜 싸이드’는 누구란 말인가? 밤의 그 음탕한 싸이드가 아니라 낮의, 아프리카 해방투쟁의 전사 싸이드를 지칭하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정체를 숨기고 나일강변의 마을에 조용히 스며들었다가 사라진 그 싸이드를 가리키는 건가? 싸이드의 쌔디즘적 행각이 제국의 수도에서 스스로를 거짓으로 규정한 식민지유학생의 의도적인 행위라면, 그리고 밤과 낮이 철저하게 분열된 유학생의 그 교활한 호색이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 백인여성들의 식민주의적 환상을 통해 증폭되어 마침내 정복 의지로 비화했다면, 싸이드의 성애극은—쌀리흐의 발언을 들어 여러 학자들이 당연시한 것처럼—‘죽음과 에로스’라는 프로이트적 개념으로는 온전히 해명할 수 없다.
자칫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싸이드의 신비화로 치달을 수도 있었을 그 카사노바적 일탈은 치명적인 요부 ‘진 모리스’로써 종결된다. 싸이드의 모든 아프리카적 연출에 콧방귀를 날리고 그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진 모리스의 등장으로 반(反)오리엔탈리즘으로서의 유혹 서사도 뜻밖의 반전을 맞는다. 어찌 보면 ‘페니스로 해방’ 운운한 싸이드가 ‘임자’를 제대로 만난 형세다. 사실상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진 그녀는, 이를테면 『오셀로』의 정숙한 데스데모나가 악귀와도 같은 존재로 변신한 형상이다. 오셀로를 질투로 눈멀게 한 바로 그 손수건이 환기되는 대목을 읽어보자.
나는 왜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나?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바람기를 잘 알고 있었다. 집구석에 온통 부정(不貞)의 냄새가 스멀거렸다. 한번은 남자 손수건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내가 묻자, 그녀는 ‘당신 거잖아’라고 대꾸했다. ‘그건 내 게 아냐.’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당신 게 아니라면 어쩔 건데?’ 어떤 때는 담배 케이스, 만년필도 발견했다. ‘딴 놈을 만나는 거지!’ ‘만나면 어쩔 건데?’ 그녀가 되받아쳤다. 내가 소리쳤다. ‘기필코 널 죽여버리겠어.’ ‘흥, 또 시작이군.’ 코웃음을 치며 그녀가 받아쳤다. ‘왜 못 죽여?’ ‘뭘 기다리는 건데?’ ‘딴 놈이 날 올라탈 때까지 기다리나보군. 그래봤자 별수 없을걸. 침대 귀퉁이에 주저앉아 눈물 바람이나 하겠지.’(134면)
이런 대화에서도 더 생각해볼 것은 진 모리스라는 형상도 싸이드의 엽기적 행각을 식민지와 제국의 역학 구도에 자리 매기려는 작가의 비판적 자의식이 아니고서는 빚어지기 어려웠으리라는 점이다. 식민지에 대한 왜곡된 판타지에 탐닉하는 여성들이 싸이드의 ‘먹잇감’이 되는 것 역시 그같은 자의식과 무관치 않다. 그 점에서 진 모리스의 반항은 더 흥미로운 사례다. 그녀의 악다구니에 아무런 이유나 동기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그 반항은 반식민투쟁을 빙자해 ‘순진한 여성들’을 유혹하고 파괴한 싸이드에 대한 응징과 복수처럼 읽힌다.
하지만 더 중요한 논점은 진 모리스가 남성 주인공의 역정에 단순히 들러리 서는 여성이 아니듯이 싸이드의 서사도 남성 자아의 흔한 성장담이나 실패담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진 모리스가 그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도록 유도하는 가학/피학적 파국은 식민주의 판타지를 이용해—그 과정에서 스스로 ‘거짓’이 되는—파괴적인 성애극을 벌인 식민지유학생에게 내려진 (자기)징벌의 한 종류에 가까워진다. 한마디로 그같은 성애극에는 낭만적 식민서사에서 흔히 설정되는 주인(서구 백인남성)과 노예(비서구 여성)의 통속 구도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자기)징벌을 싸이드의 자기합리화로 비판하기 힘든 것도 그 때문이다. 성적 가학과 피학으로 얼룩진 도가니 같은 두 인물 간의 투쟁은 살인으로써 끝이 난다. 그런데 그의 그러한 ‘성적 모험’이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백인의 편견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허위의식까지를 제물로 삼았다면 비판의 칼날이 결국 식민지 내부의 모순을 향하는 것도 논리적 필연일 듯하다.
런던에서 감행된 싸이드의 파괴적인 성애극이 ‘나’의 고향에서 벌어진 또다른 욕망의 참극과 조응하는 것은 그런 맥락이다. 싸이드라는 존재가 화자인 ‘나’에게 일종의 유령이자 강박이 되어버린 상황은 앞서 소개했지만, ‘나’가 호스나의 비극에 절망하게 되는 심리는 스스로 ‘거짓’임을 자인하는 싸이드의 그것과는 다르다. 애초에 호스나를 노리는 와드 라이스의 구혼에 ‘나’의 심사는 뒤틀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단순히 호스나에 대한 ‘나’의 연심 때문만은 아니다. 이 참극의 배후에는 가부장제가 강고하게 유지되는 듯 보이지만 곳곳에 ‘틈새’가 존재하는 수단 북부 아랍계 사회 특유의 성적 모순이 존재한다. 할례받은 여자를 여왕처럼 떠받들면서도 축첩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사회에서 그런 종류의 ‘치정살인’은 언제고 벌어지고야 말 일이다. 따라서 ‘나’에게 참극의 전말을 들려주는, 가모장에 비견할 만한 빈트 마주두브 같은 여성도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족하지만 그같은 참살의 원인을 따져보자면 가정이 있는 ‘나’의 개명한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부각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독자도 ‘차라리 그녀와 결혼했더라면 그런 비극만은 없었을 텐데……’라는 ‘나’의 회한에 혀를 차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사안은 그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다.
이해 불가하기는커녕 한 여성이 자신의 자결권(自決權)을 죽음으로 증명함으로써 마을의 유구하고도 고루한 가부장주의에 일대 타격을 가한 사건이 바로 그 참극이 아닌가. 하지만 이 대목에서도 가부장제를 타도하는 ‘주체적 여성상’을 막바로 호스나에 대입하는 식의 읽기는 제동이 걸린다.13 호스나의 자결권을 발동시킨 것은 어린 자식들을 지키려는 모성 못지않게 ‘나’에 대한 그녀의 연심이다. 궁지에 몰린 호스나가 와드 라이스의 구혼을 피하는 ‘방편’으로 화자인 ‘나’와 결혼하려 하다가 좌절당하자 사생결단을 내린바, 그로써 (뜻하지 않게) 가부장제도 돌이키기 어려운 ‘부수적 피해’를 입는다. 그 점을 되새긴다면, 호스나에 관한 한 파괴와 죽음의 여신이라 할 만한 진 모리스와—물론 탕아로서의 싸이드를 난봉꾼 와드 라이스와도—일대일로 대응시키기 어렵다. 호스나의 결사적인 ‘항전’은 마을에서 철저하게 해괴망측한 일로 치부된다. 그런데 화자인 ‘나’가 절망에 이른 데는 그런 참극을 수수방관했다는 자책도 한몫하지만 그 요인은 더 복합적이다. ‘나’의 좌절은 마을의 거의 모든 이들이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불경으로 치부하는 그 ‘거세’의 의미를 밝혀줄 인물이 전혀 부재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호스나의 저항에 공감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몰지각에 분노하고 좌절하는 ‘나’는 역시 커츠의—“야만인들을 절멸시켜라”라는—‘문명적 야만’과 끝까지 모호한 거리를 유지하는 말로우와는 다른 인물이다. 전통적 가치를 표상하는 ‘나’의—“포옹할 때 나 자신이 바로 그 우주 심장박동의 한 음(音)인 듯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주는—할아버지(1865년생)마저 그런 참극을 인습적으로 해석한다는 사실이 ‘나’를 환멸의 끝자락으로 내몬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의 해석을 다시 ‘해석’하는 ‘나’의 성찰은 결코 간단치 않다. 하기는 식민제국의 내부 실상과 독립한 조국의 정치적 부패 및 타락상을 겪을 만큼 겪은 화자가 호스나의 비극에서 어떤 단순한 결론을 끌어낸다면 그것 자체가 사실주의에 반하는 처리일 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계절』의 결말은 독자에게 막막한 느낌을 안겨준다. 싸이드에게 그러했듯이 ‘나’에게도 식민제국과 조국 어느 쪽에서도 온전한 귀속함을 느낄 수 없는 소외의 그림자가 운명적으로 짙게 드리워진 결말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호스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몰이해에 분개하면서 싸이드의 진실을 깨닫게 되는 화자지만 그가 내린 결단은 어떤 면에서는 역시 잿빛에 가깝다. 물론 그는 개인의 개인성을 역설하고 전통주의를 고루한 것으로 비판함으로써 근대의 자유를 천명하는 듯하다. 동시에 “내 적은 내 안에 있고, 나는 그에 맞서야만 한다”라는 언명으로 대결의 자세를 취한다. 그럼에도 “무스타파 싸이드가 떠나버린 지점에서” 삶의 결의를 다짐하는 화자에게 콕 집어 말할 수 있는 전망이나 대안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능한 한 오래 함께하고픈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루한 인습에 젖어 있고 “완수해야 할 의무”가 뭔지 뚜렷지 않는 한 그렇다.
그러나 ‘나’의 삶의 결의가 바로 그렇게 분명치 않은 상황을 거슬러 나온 것이라면 전망의 유무에 얽매일 일은 아니다. 이 쟁점을 좀더 엄밀하게 다루는 데는 작가가 마주한 시대적 질곡을 염두에 둔 일종의 원근법적 읽기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눈부신 자유사상에다가 (외형일지언정) 적어도 물질적 삶의 개선에서는 저 멀리 앞서간 서구에서 견문을 넓힌 식민지지식인들이, 독립했으나 여전히 정신적 노예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자국으로 돌아왔을 때 실감하는 이중의 소외는 회귀서사들의 공통점이다. 그런 소외의 가장 극단적인 양상은 아마도 『모호한 모험』의 쌈바 디알료가 맞는 운명일 듯하다.14 서구의 백인들이 ‘정의롭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를 정복할 수 있었는지’ 알아보라는 특명을 받아 빠리로 유학을 떠난 그 청년이 귀향하여 맞는 무참한 죽음 말이다. 그의 죽음은 자국에서의 소외가 어떤 면에서는 식민제국에서의 소외보다 더 비극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모호한 모험』의 파국은 식민성 극복의 상(像) 자체를 선취하려는 데서 나온 불가피한 결말인지도 모른다. 이와 비교하면 『계절』은 선취보다는 이중의 소외와 구속이 정확히 어디서 연유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그렇다면 살려달라는 ‘나’의 외침, 좀더 정확히 말하면 식민제국과 식민국가가 합작한 맷돌 속에서 ‘가루’가 된 한 인간의 호소에서 우리는 뭘 새겨들어야 하는가. 스스로를 외마디 고함치는 희극배우에 빗댄 ‘나’의 의식에서 어떤 ‘통합된 주체’를 끌어낼 수 없기에 독자의 듣기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나’의 단말마 같은 외침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계절』에 대한 장문의 분석 끝에 그 외침을 “아랍 근대성의 사상들이 현재를 새롭게 발명하는 데 실패한” 반증으로 단정하는 하싼의 해석도 그중 하나다. 살려달라는 ‘나’의 외침이 과연 아랍 근대성 사상들의 승리를 증언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렇다고 그것을 실패나 패배로만 못 박을 수도 없겠다.15 필자는 쌀리흐가 간신히 틔운 이 숨통도 1960년대 이슬람세계의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나’의 삶의 결단만은 남과 북의 상이하면서도 서로 엇물린 식민성의 실체를—서로의 반향인 듯한 식민지지식인 싸이드와 식민지여성 호스나의 비극적 삶을—끝까지 직시한 데서 나온, 바로 그래서 식민지/근대에 대한 대응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으로 읽고 싶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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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상력의 자극은 여러 상념을 불러온다. 가령 국내에도 ‘모든 근대는 식민지근대’라는 명제를 걸고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근대=식민지근대 등식에서 정작 중요한 점은 식민지(역사)를 중심으로 식민주의를 파악하는 일국주의의 관성을 깨는 동시에 근대가 통째로 식민지근대로 정의될 때 은폐되는 문제들을 탐구하는 자세다. 식민성만 해도 그것을 식민지만이 아니라 식민지배 국가들에서 더욱 기만적인 형태로 발현되는—그런 면에서 사전적 의미에 반(反)하여—‘지구적 현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탈식민’의 참뜻을 구하기 어렵게 되어 있지만, 식민성 자체는 인종은 물론이고 성과 계급의 모순을 관통할 때에야 비로소 ‘보편적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다. 정전(canon) 다시쓰기—이른바 되받아쓰기—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살펴봄직하다.
되받아쓰기는 시대의 한계를 내포한 서구 고전에 대한 제3세계 지식인들의 비판적 재인식에서 촉발된 기획이다. 제아무리 위대한 고전이라 해도 성차별주의·인종주의·계급주의를 심문할 여지가 적잖다는 인식이 깔린 기획인데, 보편성의 대명사로 선전되는 서구의 고전을 모든 소수자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려는 되받아쓰기의 실제 성취도 우리는 냉정하게 되물어봐야 한다. 다른 한편, 서구문명의 재인식과 재해석을 동반한 되받아쓰기 기획이 탈식민운동의 자기성찰과 맞닿아 있음도 깊이 헤아려볼 일이다. “식민화와 문명화 사이는 무한한 거리가 있”고 식민화에서는 “단 하나의 인간적 가치도 나올 수 없다”는 단언에도 불구하고17 헤아림의 과정에서 식민주의도 선악이 혼재된 과보(果報)를 낳은 역사적 현상임이 드러나기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식민주의가 ‘세계문학’의 산실로 기능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서구중심주의자의 망언에 가깝겠지만, 식민주의로 인해 인간해방이 무엇인지를 더 근원적으로 성찰하는 탈식민문학이 탄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건 역사의 간지(奸智)라 할 만한데,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더 따져봐야 하는 역설이기도 하다. ‘나’의 정신에 뿌리내린 식민성에 가닿지 못하는 비판의 칼날만큼 자기기만을 조장하기 쉬운 것도 없지 않겠는가.
셰익스피어와 콘래드의 언어들을 되받아 무수한 시적 울림으로 변용시키면서 20세기 식민지 수단의 정치적 맥락으로 ‘번역’한 『계절』의 경우는 아랍판 동도서기에 해당할 19세기 나흐다(Nahda)운동이 아랍세계의 식민화로 좌절된 역사적 궤적을 치열하게 추적한 결과물이라 평가할 만하다. 이집트와는 또다른 차원의 변방식민지 출신 작가인 쌀리흐가 전통주의(=아랍 무슬림의 세계관)로의 회귀와 근대주의(=서구의 생활/사고방식)로의 투항 모두에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서사의 협로를 뚫기 위해 분투한 결과가 『계절』이라는 것이다. 세계체제의 남과 북을 마치 연기(緣起)의 굴레에 묶인 것 같은 현실로 파악함으로써 식민지근대에 대한 일체의 일면적 인식과 대응이 어떤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를 극화한 작품이 근대 극복의 실질적인 해법을 모색해온 이중과제론의 문제의식과 맞닿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절』을 세계문학으로 평가하는 논리도 좀더 엄밀해야겠다. 서구의 열강과 식민지들이 모두 연루된 식민지근대의 허위의식을 발본적으로 문제 삼은 『계절』이 세계문학이라면 그것은 수단의 ‘식민지 상황’에 확고하게 뿌리박으면서도 일국적 경계를 넘어선 영역으로 식민성의 복합적 면모에 대한 성찰의 지평을 넓혔다는 바로 그 점 때문일 것이다. 국경을 넘는 문학‘들’의—우리가 ‘괴테·맑스적 기획으로서의 세계문학’으로 지칭하는—연대 가능성도 거기서 발생하는바, 서구세계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분단현실에서도 식민성의 극복이 여전히 절박한 과제임을 실감케 함으로써 『계절』은 서구가 생산한 세계문학의 의의를 새롭게 심화하고 확대한 ‘작은 선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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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살펴본 아프리카의 회귀서사는 68혁명의 제3세계적 전조로 읽을 수도 있는 텍스트들, 가령 깐(Cheikh Hamidou Kane, 쎄네갈)의 『모호한 모험』(Ambiguous Adventure, 1961), 아체베(Chinua Achebe, 나이지리아)의 『더이상 평안은 없다』(No Longer At Ease, 1960)를 비롯해 부글(Ken Bugul, 쎄네갈)의 『버려진 바오밥나무』(The Abandoned Baobab, 1982) 등이다.↩
- ‘와드 하미드 싸이클’이라는 명칭은 쌀리흐의 작품세계 전체를 연구한 하싼이 (처음) 붙인 것으로 보인다. 와드 하미드는 가상의 마을 이름이고 『계절』의 배경 역시 그 마을이다. Waïl S. Hassan, Tayeb Salih: Ideology & the Craft of Fiction, Syracuse UP 2003, 10면.↩
- 2016년 기준, 54개국 약 12억명의 인구와 2136개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아프리카 대륙의 문학들을 ‘아프리카문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반화일 듯하다. 달리 더 나은 말을 찾지 못하여 관행적 표현을 따를 뿐이다.↩
- 필자가 텍스트로 삼은 것은 영역본 Season of Migration to the North; Mawsim al-Hijrah ila ash-Shamal (trans. Denys Johnson-Davies, NYRB Classics 2009)이다. 한역본으로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이상숙 옮김, 아시아 2014)을 참고하되, 영역본이 저자 쌀리흐와 역자의 긴밀한 공동작업의 결과물임도 감안한 것이다. 인용문의 번역은 영역본에 근거하여 필자가 했으며, 인용 면수는 영역본 기준이다. 『계절』 외에 지금까지 영어로 출간된 쌀리흐의 작품은 소설집 The Wedding of Zein (1968; New York Review Books 2009)과 미완성 장편 Bandarshah (Routledge 1996) 두권이고, 그외 단편들이 이런저런 잡지에 영역으로 실렸다. 자세히 소개할 지면은 없지만 아랍어원본과 영역본의 여러 차이에 관한 비판적 논의는 Lamia Khalil Hammad, “Cultural Colonialism in the Translation of Season of Migration to the North,” Trans-Humanities 9:1 (2016), 105~28면 참조.↩
- ‘여러분’(gentlemen)으로 호명된 ‘우리’를 청중으로 삼은 ‘나의 이야기’는 아랍세계 성직자들의 구어체 설교 형식을 교묘하게 차용한 ‘이야기꾼’(hakawati)의 형식이라고 한다. Benita Berry, “Reflections on the Excess of Empire in Tayeb Salih’s Season of Migration to the North,” Paragraph 28:2 (2005), 74면, 87면 각주 7 등 참조.↩
- 『계절』에서 구체적인 연도는 언급되지 않는다. 쌀리흐의 다른 영역본 작품들도 그러하다. 줄거리 정리에서 연도는 하싼의 정리에 근거한 것이다. Waïl S. Hassan, 앞의 책 183~85면.↩
- Ali Abdalla Abbas, “Notes on Tayeb Salih: Season of Migration to the North and The Wedding of Zein,” Sudan Notes and Records 55 (1974), 46면. 압바스는 리비스(F. R. Leavis)가 디킨즈의 『어려운 시절』(Hard Times, 1854)을 규정한 바로 그 표현들을 차용하면서 『계절』을 극시로 평가했다.↩
- ‘나’가 듣는 소문들 사이사이에 싸이드의 육성으로 환기되는 영국 유학시절이 마치 화자의 의식을 관통하여 나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그런 갈마듦의 서사적 효과다. 또한 그 사이사이에 마을의 풍속과 인물들의 삶이 절묘하게 배치된다는 점도 지적함직하다. 한마디로 필자가 시도한 줄거리 정리 따위로는 두겹으로 변주되는 서사가 새로운 변주음들을 동반하는 양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계절』의 화자들과 시점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로는 Nabih Kanbar, “La Circulation de la Parole dans La Saison de Migration vers Le Nord,” Tayeb Salih’s Season of Migration to the North: A Casebook, American University of Beirut 1985, 81~93면 참조.↩
- 그외에도 『계절』에는 오리엔탈리즘의 성격을 두고 날카롭게 대립하는 관점들이 제시되기도 한다. 아랍인 만수르(Mansour)와 영국인 리처드(Richard)의 (가상의) 변증법적 갑론을박이 대표적이다.(41~50면)↩
- 식민지/근대에 대한 그같은 ‘골똘한 문제의식’은 창비담론총서 1권으로 출간된 『이중과제론』(이남주 엮음, 창비 2009) 참조. 필자는 이중과제론이 하나의 담론으로 형성·구체화된 경과를 나름으로 정리하면서 현대성‘들’을 추가하여 이중과제론의 예각화를 시도한 바 있는데, 그 구체화는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졸고 「이중과제론과 현대성」, 『안과밖』 39호(2015년 하반기) 참고.↩
- 하지만 영국에 유학한 싸이드는 콩고의 오지로 떠난 커츠와 정반대의 동선을 그리고, 『계절』의 ‘나’와 콘래드의 말로우도 전혀 다른 인물이다. 다른 한편, 쌀리흐가 콘래드를 사숙하다시피 한 터라, 『계절』을 콘래드의 『어둠의 속』을 비롯한 여타 장편과 비교하는 작업은 비평의 당연한 일부이고 관련 평문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 콘래드와의 관련성은 최소한의 언급에 그치겠다.↩
- “의미심장하게도 싸이드의 알려진 생애는 수단의 식민화 과정과 일치한다. 그는 1898년에 태어났는데, 이해는 옴두르만의 마흐디 정권을 키치너(Herbert Kitchener, 제국주의 정복전쟁에서 악명을 떨친 영국 군인—인용자)가 유혈 진압한 이후 실질적으로 영국이 주도한 영국·이집트의 통치가 수단에 들어선 때다. 그는 수단이 오랜 투쟁 끝에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독립에 성공한 1956년에 (서사의 시공간에서—인용자) 사라진다.” Neil Lazarus, “‘Irrealism’ in Tayeb Salih’s Season of Migration to the North,” 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 Towards A New Theory of World-Literature, Liverpool UP 2015, 89면.↩
- 『계절』의 여성인물들에 관한 좀더 자상한 논의는 Oladosu Afis Ayinde, “ The female, the feminist and the feminine: re-reading Tayeb Salih’s Season of Migration to the North,” Studies in the Humanities 35:1 (2008) 참조.↩
- C. H. Kane, Ambiguous Adventure, trans. Katherine Woods, Melville House 2012.↩
- Waïl S. Hassan, 앞의 책 128면. 하싼은 작가/화자의 좌절을 1967년 6월의 이른바 낙사(Naksa, 좌절 또는 실패)로 표상되는 아랍세계의 치명적 패배(제3차 중동전쟁)를 예언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읽는 입장이다. 반면에 칸바르는 화자의 외침을 “정화와 해방의 행위”로 평가하는데, 그것은 “화자가 모든 책임을 떠맡은 최초이면서 유일한 사건”이라는 취지다. Nabih Kanbar, 앞의 글 84면.↩
- 필자의 이런 ‘충동’과는 별개로 『계절』에 대한 쌀리흐 자신의 발언을 환기할 필요도 있다. 쌀리흐는 한 강연(1980.5.9)에서 『계절』의 핵심 주제 중 하나를 “아랍 무슬림세계 대 서구 유럽세계의 대결”로 규정하면서 두 세계의 관계를 낭만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환상을 깨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나는 소설에서 이런 환상들에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런 환상은 양쪽 모두에 존재하고, 아랍인도 그같은 환상의 희생자임을 기억합시다. (이 작품이 최소한 영어로는 읽힐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아랍인이든 비아랍인이든,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양한 사상들 사이에서 불편하기를 바랍니다. 너무도 불편해서 마지막 순간에는 마음을 결정해야만 하면 좋겠습니다. (소설에서는—인용자) 모든 가정(假定)들이 문제시되는 것입니다.” Mona Takieddine Amyuni, “Introduction,” Tayeb Salih’s Season of Migration to the North: A Casebook, 16면.↩
- Aimé Césaire, Discourse on Colonialism, trans. Joan Pinkham, Monthly Review Press 2000, 3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