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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지금 러시아에선 무슨 일이?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와 기억의 정치학
이문영 李文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저서 『현대 러시아 사회와 대중문화』 『톨스토이와 평화』 『평화를 만든 사람들: 노벨평화상 21』(편저) 등이 있음. peacemoon@snu.ac.kr
* 이 글은 2017년 12월 13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주최한 국제학술회의 ‘North Korea in Transition’에서 발표한 원고 “Soviet Nostalgia in Post-Soviet Russian Pop Culture”의 일부를 요약, 보완한 것이다. 본문 중 노스탤지어 관련 내용은 졸고 “Nostalgia as a Feature of ‘Glocalization’: Use of the Past in Post-Soviet Russia,” Post-Soviet Affairs, vol. 27, no. 2 (2011), 「탈사회주의 국가의 사회주의 노스탤지어 비교 연구」, 『슬라브학보』 26권 2호(2011)를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1. 21세기 러시아를 배회하는 유령, ‘소비에뜨 노스탤지어’
러시아혁명 100주년이었던 2017년,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학술행사와 전시회가 열리고 많은 기념서적이 출판되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정작 러시아는 어떨까. 21세기의 러시아인은 혁명을,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된 소련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소련이 무너진 지 채 십년도 되지 않은 1990년대 중반 이미 러시아 땅에서는 “소비에뜨 노스탤지어”가 대중적 현상으로 관찰되기 시작했다. 때로는 회상과 그리움이라는 정서적 반응으로, 때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재성찰의 방식으로, ‘소련’은 탈사회주의 러시아의 문제적 키워드로 부상했다. 이후 이 현상은 해가 갈수록 위력을 더해, 현재 ‘제국 부활’ ‘유라시아주의’와 더불어, ‘체제 전환 이후 러시아’를 요약할 3대 키워드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 그것은 러시아 대중정서의 근간이자 문화산업의 키워드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혁명의 본원이자 탈사회주의화의 진앙이었던 러시아에서 목도되는 소비에뜨 노스탤지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현상은 어떤 과정을 통해 러시아 사회의 상식으로 정착했고, 1990년대와 2000년대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체제나 이념보다 변화에 완고한 ‘정서, 가치, 태도의 집합체’로서 러시아인의 ‘문화적 자기규정’에 이 현상은 어떻게 반영되는가. 또 소비에뜨 노스탤지어를 통한 과거의 소환은 ‘기억의 정치학’(politics of memory)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 이 글은 이에 대한 답을 차례대로 내려보고자 한다.
2. 1990년대 러시아의 소비에뜨 노스탤지어
(1) 브레즈네프, ‘좋았던 옛 시절이여!’
그리스어 ‘노스토스’(νόστος, 귀향)와 ‘알고스’(άλγος, 그리움)의 합성어인 노스탤지어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에 기인한 슬픈 심정’을 뜻한다.1 명백하게 ‘공간’ 범주로 출발한 이 개념은 실제 활용에 있어서는 자주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쓰이곤 한다. 이때 ‘고향’과 ‘과거’, 즉 공간과 시간의 치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상실’이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버린 시절.
중요한 것은 노스탤지어를 현재화하는 메커니즘도 ‘상실’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여러 학자의 지적처럼 “가장 좋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현재의 이해(利害)와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법이며,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촉발하는 것은 “현재 앞에서의 너무나 깊은 당혹감”이다.2 특히 익숙한 규범과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체계가 구축되지 않은 급격한 사회변동의 시기, 정치적·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혼란 속에 많은 사람들은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무력감을 경험한다. 이것이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현재로 소환하는, 즉 노스탤지어를 현재화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다. 노스탤지어 속에 환기된 시공의 이상성(理想性)은 현재 부재한 가치체계를 대신해 현실을 판단하는 척도이자 사고와 행동의 기준이 되며, 더 나아가 바람직한 미래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따라서 그 표면적인 과거지향성과 달리 노스탤지어는 자기재정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과 같이 매우 실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갖기 마련이다. 노스탤지어가 이념 및 가치체계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전환기 사회에 특징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러시아에 인 노스탤지어 붐의 메커니즘도 바로 이와 같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변동의 초기, 즉 뻬레스뜨로이까부터 체제 전환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노스탤지어는 결코 대중적 현상이 아니었다. 당시 대중적 정서를 지배한 것은 ‘어제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기대’였고, ‘깊은 당혹감’이 아니라 ‘절실한 희망’이었다. 과거는 그리움이 아니라 단절과 개혁의 대상이었다. 역설적인 것은 과거와 단절을 선언한 이때가 과거에 대한 고증과 복원이 러시아 역사상 가장 활발히 진행된 시기라는 사실이다. 접근이 금지됐던 문서보관소가 열리고 매스미디어의 기능이 정상화되면서, ‘기억하기’는 역사학자만의 과제가 아니라 일반대중의 일상이 되었다.
과거가 ‘기억’이 아니라 ‘추억’의 대상으로 질적 변화를 일으킨 시기, 즉 노스탤지어가 대중적 정서를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199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글로벌 시스템으로의 편입이 국가 위상의 바닥 모를 추락으로 이어지고, 심각한 경제위기가 계속되면서 개혁의 기대가 환멸로 변한 때다. 이제 대중에게 중요한 가치범주는 ‘변화’와 ‘개혁’에서 ‘안정’과 ‘질서’로 이동하고, 민주주의의 자율성보다 ‘강한 손’(strong hand)의 보호를 원하게 된다. 그 모범은 이미 자신들의 과거 속에 풍부하다. 그중 1990년대 러시아 대중이 가장 그리워한 시기는 뻬레스뜨로이까를 역사적 필연으로 만든 브레즈네프(L. Brezhnev) 시기였다. 그 시절의 ‘극심한 정체’가 ‘최대한의 안정’으로 재의미화되면서 ‘좋았던 옛 시절’의 상징으로 부상한다. 이를 통해 고대 루시, 제정러시아, 소련을 포함해 러시아 과거 전체와의 화해가 시도된다.
재미있는 것은 앞선 시기 과거와의 단절이 기억의 활발한 작업을 동반했다면, 이후 과거와의 화해는 망각의 기술을 우선적으로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과거를 그리워하기 위해서 그것은 이상적이어야 한다.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적 실재로서의 브레즈네프 시기가 아니라, “상상된 총체로서 그 시대에 대한 보편적 이미지”,3 즉 망각의 기술로 재구성된 이미지인 것이다.
러시아 3대 여론조사기관인 브치옴(VTSIOM), 폼(FOM), 레바다센터(Levada Center)의 각종 조사에 따르면 이미 1994년, 브레즈네프 시절에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더 많았다고 생각하는 러시아인이 전체의 36%를 차지했고, 1999년 이 비율은 절반을 넘어선다. 반면 나쁜 게 더 많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각각 16%, 10%에 불과했다. 1995년 “당신 같은 사람이 가장 살기 좋았을 것 같은 시절은?”이라는 질문에 러시아인 3명 중 1명, 즉 34%가 브레즈네프 시기를 꼽았다. 이 비율은 1997년에 36%, 2002년에는 49%까지 늘어난다. 2000년대 또다른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1%가 브레즈네프 시기를 행복한 시절로 기억했고, 응답자 연령이 36세 이상일 경우 그 비율이 75%까지 올라갔다.4
그렇다면 실제 브레즈네프 시기는 어땠을까. 1990년대 러시아인의 열광에 값하는 특성들이 당시 존재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는 1가구 1주택, 중등 이상의 교육 평준화, 생존이 아니라 삶의 미학에 대한 고려가 현실이 된 시기다. 일반 가정마다 소박하지만 풍요가 있었고, 제한적이지만 여가 개념도 존재했다. 더구나 몇십년간 전쟁도 없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 대한 일반적 표상을 전적으로 허구적인 이미지로 볼 수는 없다.5
그러나 이런 표상은 일면적이다. 당시 사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렸던 공식-비공식의 이원구조처럼, 풍요와 안정과 질서는 결핍과 정체, 비효율성과 동전의 양면이었다. 다음의 비유를 들어보자. “컵은 반은 차 있고 반은 비어 있었다. 그때는 컵이 비었다고들 생각했다. 이제는 컵이 꽉 차 있었다고 여긴다.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발생한 것은 왜일까?”6
노스탤지어는 기억하고자 하는 것만을 기억하게 한다. 이렇게 선택적 기억, 즉 선택적 망각의 원리에 재구성된 역사는 신화가 된다. 시간의 비가역성을 거슬러 현재로 소환되어 미래로 투사된 과거는 이미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 불과 십년 사이 소련이라는 과거의 의미가 이렇게 역전된다. 정말로 “러시아는 예측할 수 없는 과거를 가진 나라”다7 신화 속에서 소련이라는 과거는 역사와 사실로서가 아니라 상징과 이미지로 존재한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러시아 대중은 기념할 과거의 상징으로 스딸린(I. Stalin)을 새로이 소환함으로써 자신들의 과거를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2) 노스탤지어 문화산업의 등장: ‘착한 화해의 영화’
1990년대 소비에뜨 노스탤지어가 가장 활발하게 재현된 곳은 대중문화다. 수입된 서구 자본주의 문화의 공세 속에 무력하게 침몰해가던 러시아 대중문화의 부활은 무엇보다 이러한 ‘과거의 활용’에 기반해 이루어졌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연간 관람객 수가 40억명을 넘고, 시민 한명당 연간 극장방문 횟수가 무려 22회에 달했던 브레즈네프 시기와 달리, 1990년대 중반 러시아 영화산업의 현실은 “영화는 죽었다!”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참담했다. 1994년 모스끄바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의 83%가 수입된 서구 영화였고, 러시아 영화의 극장 점유율은 단 8%에 불과했다.
러시아 영화의 이러한 몰락은 당시 영화계를 장악한 ‘체르누하’(chernukha)와 관련이 깊다. ‘블랙 무비’로 해석될 수 있는 체르누하는 어두운 과거와 현실에 대한 비판을 핵심으로 한다. 이 장르는 체제 전환 초기 러시아 사회에 활발했던 기억하기 행위, 이를 통한 과거와의 단절과 관련된다. 그러나 혼란과 위기가 계속되면서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에 지친 대중은 체르누하가 전하는 진실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러시아 영화의 위기의 본질이다. 동시에 러시아 영화의 부활도 바로 이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1990년대 중반 아스뜨라한(D. Astrakhan)의 「모든 것은 잘될 거야」(1995), 셀랴노프(S. Seljanov)의 「슬픔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1995) 같은 “화해의 영화” “착한 영화”(good movie)로 분류될 수 있는 작품들이 속속 등장한다. 비슷한 시기 젊은 영화감독들 사이에서는 대중의 요구를 고려할 줄 아는 ‘산업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호소가, 미할꼬프(N. Mikhalkov)로 대표되는 기성감독들 사이에서는 ‘사명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강조가 호응을 얻으며 러시아 영화의 부활을 위한 움직임이 조직화된다.8
다음은 미할꼬프의 연설 일부다. “과거 소련을 묶어주었고, 현재 미국을 단결시키는 애국적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러시아 영화가 ‘국가적 영웅의 신화’를 창조해야 한다.”9 강조점은 다르지만 두 그룹의 공통성은 과거의 따뜻한 수용, 즉 ‘러시아성’(Russianness)의 가치와 그 역사적 연속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러시아 영화로 관객의 귀환이 시작되었다. ‘노스탤지어의 영화화’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형성된 노스탤지어 현상을 문화적으로 재현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3. 2000년대 러시아의 소비에뜨 노스탤지어
(1) 스딸린이 돌아왔다
2000년대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의 특징은 그 현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사회주의 건국의 아버지인 레닌(V. Lenin)도, ‘좋았던 옛 시절’의 상징인 브레즈네프도 아닌, 스딸린이라는 점이다.
사실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의 발생 초기 스딸린은 그 대상이 되지 못했다. 소비에뜨 노스탤지어는 두가지 유형으로 유통, 소비되었다. 첫번째는 사회주의 공식적 상징의 키치적 재현과 대량 유통이다. 두번째는 노스탤지어의 초점이 좀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사회주의 삶으로 이동해, 그 사회적 관계의 고유함, 일상의 세세한 디테일, 그것을 환기시키는 사회주의 일상/대중문화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10 하지만 스딸린의 경우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의 발생 초기 첫번째 유형에도, 두번째 유형에도 기입되지 못했다. 사회주의의 공식적 상징이 되기에는 그의 정치적 악행의 규모가 지나쳤으며, 그리운 사회주의 일상이 되기에는 그의 시대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궁핍하고 가혹했다.
하지만 스딸린과 그 시대에 대한 기억은 2000년대 들어 극적으로 역전된다. 2000년대 스딸린은 소비에뜨 노스탤지어라는 “전국가적 역사 리얼리티쇼의 데미우르고스”이자 “러시아 사회문화적 질서의 수퍼히어로”로 등극한다.11 1991년 “러시아의 역사적 인물 중 10년 후에도 기억될 사람은?”이라는 설문조사에서 스딸린을 선택한 사람은 응답자의 1%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 “20세기 러시아의 통치자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은?”이라는 설문에서 스딸린이 1위를 차지한다. 2010년대 여러 조사에 따르면 스딸린의 역사적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의 비율은 51%에서 78%까지 가파르게 상승한다. 레바다센터가 2016~17년 사이 발표한 스딸린 관련 조사보고서의 제목들, 즉 “스딸린에 대한 러시아인의 사랑이 최고조에 달했다” “스딸린 비판자 수가 역사상 최저로 떨어졌다” 등은 이 현상을 잘 요약해준다.12
마침내 제2차세계대전 승리 70주년을 맞이한 2015년, 러시아 전승기념일인 5월 9일 리뻬쯔끄에서 스딸린 흉상 개막식이 열렸다. 물론 동상 개막식 전날 밤 한 여인이 동상에 페인트를 뿌리고 망치로 부수려 해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고, 동상 설치에 반대하는 청원서가 날아들기도 했다.13 하지만 뜨겁게 이어진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후 리뻬쯔끄는 물론, 끄라스노야르스끄, 오룔, 우수리스끄 등 러시아 전역에 스딸린 동상이나 흉상이 새로 등장했고, 2015년 12월 21일 뻰자에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스딸린센터’가 문을 열었다.14 2017년 마침내 모스끄바 중심가에도 스딸린 기념비가 새로 세워졌다. 같은 해 브치옴이 벌인 조사 결과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62%가 스딸린의 업적과 관련한 동상, 흉상, 그림, 간판의 공공장소 설치에 찬성하는 것으로 드러났다.15
(2) ‘우리의 집단적 우리’, 「스딸린. 라이브」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에 대한 러시아 대중문화의 기민한 반응은 2000년대 들어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확대, 강화되고 있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브레즈네프」(2005), 「스딸린의 아내」(2006), 「사라진 제국」(2008) 등 소비에뜨에 헌정된 영화가 끊임없이 제작되고 있다. 또 소련 영웅들을 재조명하는 ‘전기영화’(bio-epics) 붐도 한창이다. 소련 대중음악 스타 브이소쯔끼(V. Bysotskij), 우주영웅 가가린(Y. Gagarin), 소련의 전설적 레슬러 뽀두브니(I. Poddubny)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 줄줄이 상영되었다.16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열릴 2018년에는 소련이 낳은 전설적 골키퍼 야신(L. Yashin)을 다룬 영화 「레프 야신, 나의 꿈의 골키퍼」가 개봉될 예정이다. 러시아의 2대 영화 전문 잡지 중 하나인 『세안스』(Cеа́нс)가 2008년 35/36호를 ‘소비에뜨 시절’(Back in the USSR)이라는 특집기획으로 꾸민 것은 이런 저간의 사정을 반영한다.
한편 2000년대 들어 스딸린이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의 강력한 히어로가 되면서 그에 대한 문화적 재현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중 스딸린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극적인 반전과 재신화화는 TV드라마 「스딸린. 라이브」(Stalin. Live)에 의해 정점에 달한다. 「스딸린. 라이브」는 러시아 3대 채널 중 하나인 엔떼베(NTV)에서 2006년부터 제작해 2007년 4월까지 40회에 걸쳐 방영된 회당 45분짜리 드라마다. 스딸린의 마지막 해를 배경으로 그의 정치활동뿐 아니라 내밀한 사생활과 내면을 조명한 이 드라마는 그를 유능한 지도자이자 매력적인 페르소나로 재현했다. 당연히 많은 지식인과 역사학자를 당혹감에 빠뜨리며 비판을 불러일으킨 이 드라마는 이후 매년 인기리에 재방송됨은 물론 2010년에는 속편 제작까지 시도되었다.17
물론 「스딸린. 라이브」의 경우는 스딸린 신화화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로,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스딸린이 누리는 현재의 인기가 그의 대테러와 공포정치에 대한 미화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역사인식이 스딸린의 재신화화 현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 오히려 스딸린의 그런 “악한 영웅”(evil hero)의 이중적 이미지가 더욱 치명적인 매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스딸린의 악마성을 역사상 유례없는 카리스마로 전환시킨 이 신화의 핵심은 사회주의 근대국가를 완성하고 이를 제국의 규모로 확장시킨 ‘거인’의 이미지다. 나아가 유명 러시아 영화학자 돈두레이(D. Dondurej)의 지적처럼 러시아인은 스딸린 속에서 “우리의 ‘집단적 우리’”(our ‘collective us’)를 발견한다.18 그것은 집단주의, 권위주의, 비합리성과 극단성 등 러시아 문화와 제도에 고유한 어떤 원형적 자질을 말한다. 스딸린이 대변하는 ‘러시아성’에 대한 가치적·심리적 동의와 무관하게 그 존재 자체가 스딸린 신화를 완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되고 있다.
이러한 스딸린 재신화화 과정, 더 보편적으로는 2000년대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의 구축과 활용은 한편으로는 자본의 논리와,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기획과 밀접한 상호관련을 맺으며 상승작용하고 있다. 먼저 전자의 경우, 스딸린 신화의 파괴적 힘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고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은 TV, 영화, 잡지, 광고 등의 미디어 자본이다. 현재 스딸린은 어떤 대중스타보다 높은 시청률과 수익성을 보장하는 “메가미디어적 거물”로 거부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한다.19 스딸린을 포함, 노스탤지어로 소환된 과거는 미디어 자본에 의해 최첨단의 기술력, 글로벌한 문화형식과 결합된다. 2000년대 러시아 문화산업의 본질을 요약하는 장르들, 즉 ‘민족주의 블록버스터’나 ‘국가이념의 드라마’는 이런 맥락에서 탄생했다. 70여년 전 스딸린이 “내용적으로는 사회주의적, 형식적으로는 민족적”을 외쳤다면, 현재는 “내용적으로는 러시아적, 형식적으로는 글로벌”을 외치는 듯하다. 표현은 반대지만 논리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글로벌한 문화코드로 부활하여 재신화화되는 ‘러시아적인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문제는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와 정치적 기획 사이의 상호규정성의 문제로 직결된다.
4. 노스탤지어와 기억의 정치학
(1) 노스탤지어 서사와 ‘긍정적 국가정체성 건설 프로젝트’
1990년대 중반 노스탤지어 현상이 당시 사회상황에 의해 대중으로부터 시작됐다면, 2000년대 이후 그것은 대중의 외부, 특히 ‘정치권력’에서 중요한 동력을 얻고 있다. 다시 말해 글로벌한 문화형식을 사회주의 전통과 결합해 러시아 과거의 문화적 가치를 소급해 도열시키는 과정이 뿌찐(V. Putin)이 끊임없이 유포하고 자극하는 ‘새로운 러시아 정체성의 신화’와 긴밀하게 연루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스딸린 신화’라는 문제적 현상이 집약적으로 함축하는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의 서사, 즉 사회주의 제국의 내러티브와 ‘집단적 우리’의 신화는 뿌찐 정부가 2000년대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한 ‘긍정적 국가정체성 건설 프로젝트’(Project of Construction of Positive National Identity)와 시기적으로나 이념적으로 결코 무관하지 않다. 뿌찐의 정치적 수사 전략은 ‘과거의 부활’과 ‘러시아의 부활’ 사이에 등식을 구성하는 것, 다시 말해 집단주의, 유라시아주의적 사명, 러시아 민족의 우월성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과거의 가치를 새로운 시대, 새로운 국가정체성의 본질로 호명하는 것이다.20 그는 다양한 입법적·행정적인 조치들, 국경일 등 국가 상징체계의 조정, 매스미디어를 통한 공익광고나 캠페인을 통해 이 새로운 정체성을 대중에게 공격적으로 전달해왔다. 이렇게 “소련과 결합된 것을 복구하고자 하는 상징적 기호와 함께 통치를 시작한”21 뿌찐 정권과 소비에뜨 노스탤지어 사이의 상호규정성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여러 학자들의 지적처럼 “러시아의 노스탤지어 행위는 대중주의적·제국주의적 프로젝트를 위한 정치적 원천이 될 위험성에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22
물론 2000년대 노스탤지어 현상이 전적으로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현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노스탤지어 현상에 공명하며 이를 함께 구성하는 대중적 동의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정체성의 구조와 내용이 대중의 자발적 선택보다는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추인되고, 정체 불분명한 신화의 형식으로 확대재생산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 이념이 개인 속에 내면화되어 대중의 자발적 선택 자체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노스탤지어의 주된 소통회로인 러시아 TV와 영화의 경우, 러시아 전국을 커버하는 6대 TV채널 모두 현재 사실상 정부 통제하에 있다는 점, 대작 영화의 지원이 거의 대부분 국가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극심한 사회적 양극화로 현재 러시아 지방이나 시골 거주자, 노인이나 연금생활자, 저소득층 등 소외계층이 사회와 소통하는 유일한 채널은 TV뿐이다.23 지방 거주자일수록,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노스탤지어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 ‘스딸린 신화’와 ‘뿌찐 현상’의 함수관계
소비에뜨 노스탤지어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해서 러시아가 소련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물론 없다. 실제 “소련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1994년과 2001년 모두 응답자의 다수, 즉 각각 70%, 76%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24 중요한 것은 과거로의 실제적인 회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대변하는 이념과 가치, 상징체계에 대한 수용성인 것이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련 시절이 더 좋았다거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러시아의 모든 것이 1985년 이전(즉 뻬레스뜨로이까 이전) 같다면 더 좋겠는가?” 또는 좀더 직접적으로 “소련과 사회주의체제가 복원되었으면 좋겠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응답자의 시기별 변화는 아래 표와 같다.25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의 비율은 전반적인 상승세를 보이며 2016년 60%에 육박하고 있다. 다음으로 1992년부터 2016년까지 소비에뜨 노스탤지어 수치의 변화를 담은 아래 그래프를 살펴보자.26
1990년대 말 최악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최고(75)에 달했던 노스탤지어 수치가 이후 경향적인 감소를 보이다 2012년 뿌찐의 3기 집권 이후 다시 반등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프의 2016년 노스탤지어 수치 56은 앞선 표의 2016년 비율 58%와 거의 일치한다.
왜 현재 그토록 많은 러시아인이 소련을 그리워하는가. 가장 큰 원인은 ① 위대한 강국에 대한 소속감의 상실, ② 단일한 경제 시스템의 붕괴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27 양자는 체제 전환이 초래한 가장 중요한 결과 두가지와 직결된다.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던 강대국의 붕괴, 어슷비슷 잘살거나 못사는 이웃이 아니라, 아예 종이 달라진 듯 가팔라진 계층 간 단절. 앞서 노스탤지어의 가장 큰 동력이 ‘현실 앞에서의 당혹감’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그리움의 강도는 당혹감의 정도를 반영한다. 현재의 노스탤지어 현상은 체제 전환 후 25년간 러시아인이 지속적으로 마주쳐야 했던 현실 앞에서의 깊은 당혹감의 다른 이름이며, 뿌찐의 권위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행보를 향한 대중의 열광 역시 이런 당혹감의 보상기제로 파악할 수 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와 크림반도 합병, 이에 따른 서방의 제재가 시작되면서 러시아 내 애국주의가 물결쳤다. 이 애국주의가 기존의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와 어우러져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많은 러시아인이 크림 합병을 조국 영토의 당연한 수복이라 여겼고, ‘레닌그라드 봉쇄도 견뎌낸 우린데 이깟 제재 정도야’라며 코웃음을 쳤다. 강한 러시아, 제국 부활을 향한 대중의 열망은 최고치에 이르렀고, 이에 비례해 뿌찐의 지지율도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크림 합병과 시리아 군사작전 이후인 2015년 11월 그의 지지율은 89.9%로 최고를 기록했다.28 현재 뿌찐은 2018년 대선 승리가 보장된 대체 불가능한 정치가일 뿐 아니라, 어떤 연예인보다 큰 인기와 매력을 지닌 대중스타기도 하다. 그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진 보드카, 티셔츠, 초콜릿, 향수 등 ‘뿌찐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그에게 헌정된 그림, 책이 줄을 잇는다. 뿌찐과 관련된 캐릭터 상품만을 파는 온라인 사이트도 생겼다.
이러한 ‘뿌찐 현상’과 2000년대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의 핵심인 ‘스딸린 신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강한 러시아, 제국 러시아 서사의 가장 강력한 주인공은 누구였는가. 그 ‘강한 손’의 현대적 계승자는 누구인가. 2001년 “당신에게 행동 모델이 되거나, 도덕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뿌찐과 스딸린이 나란히 2, 3위를 차지했다. 2017년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스딸린과 뿌찐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한다.29 이렇게 뿌찐과 스딸린은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러시아의 현재를 식민화하는 노스탤지어 제국의 통치자로 나란히 군림하고 있다.
5. 결론
노스탤지어는 보편적 정서이자, 인류를 풍요롭게 하는 문화 행위다. 실제 대중문화 속에 재현된 과거는 우리에게 따뜻한 그리움을 안겨준다. 최근 한국에 인 ‘응답하라’ 열풍이나, 아이유가 가녀린 목소리로 다시 부르는 양희은의 「가을아침」을 듣다보면 과거가 주는 설렘이 어떤 호소력을 갖는지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노스탤지어가 문화 외적 논리에 의해 외부로부터 부과되어 집단정서로 강요되고, 우리와 그들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기준이 될 때 그것은 더이상 생산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 노스탤지어 현상의 강화와 타자에 대한 거부가 비례한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30 체제 전환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성에 대한 지향이 오히려 낮아지고 ‘우리’로의 배타적 결속력이 강화되는 것, 이것이 자국 문화의 부활을 견인하며 확대재생산되는 것은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의 매우 우려스러운 특성이다. 뿌찐 집권 이후 경제적 안정성에 비례해 나날이 높아지는 전체주의적 경향과, 사회적 안정성의 확보 이후에도 유지·강화되는 노스탤지어 현상 사이에 상관관계를 부여하는 것은 따라서 그렇게 자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오는 3월 18일 러시아 대선이 치러진다. 그나마 가장 강력한 적수로 꼽히는 나발니(A. Naval’ny)의 후보 등록이 얼마 전 선관위에 의해 거부됐고, 그는 전국적인 대선 보이콧 운동에 나섰다.31 하지만 반(反)뿌찐 진영의 이런 움직임이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을지, 매우 회의적이다. 그 가장 중요한 근거 중 하나가, 앞서 설명한 바, 뿌찐을(이) 지원하는 소비에뜨 노스탤지어 정서다. 우리와 세계가 기념하는 혁명과 소련만큼이나 러시아인이 기억하는 그것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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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Boyer, “Ostalgie and the Politics of the Future in Eastern Germany,” Public Culture 18:2, 2006, 363면.↩
- Ю. Левада, “Человек ностальгический: реалии и проблемы,” http://ecsocman.hse.ru/data/
330/985/1219/02levada-7-13.pdf; Г. Зборовский и Е. Широкова, “Социальная ностальгия: к исследованию феномена,” СоцИс, No. 8, 2001, 34면.↩ - Б. Дубин, “Лицо эпохи Брежневскийпериод в столкновении различных оценок,” Мониторинг общественного мнения, No.3 (65), май-июнь 2003, 26면.↩
- Левада Центр, Общественное мнение 2016: Ежегодник, М. 2017, 263면; Б. Дубин, 앞의 글 25면; ФОМ, “Л. И. Брежнев и его время,” 2006.12.14.↩
- Б. Дубин, 앞의 글 25~32면; А. Кустарев, “Золотые 1970-е: ностальгия и реабилитация,” http://magazines.russ.ru/nz/2007/2/ku1.html.↩
- А. Кустарев, 같은 글.↩
- T. Sabonis-Chaffe, “Communism as Kitsch: Soviet Symbols in Post-Soviet Society,” A. Barker ed., Consuming Russia; Popular Culture, Sex and Society since Gorbachev, Duke University Press 1999, 378면. 강조는 필자.↩
- 1990년대 러시아 영화산업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졸저 『현대 러시아 사회와 대중문화』, 한울 2008, 83~102면 참조.↩
- B. Beumers, “Cinemarket, or the Russian Film in ‘Mission Impossible’,” Europe-Asia Studies, Vol. 51, No. 5, 1999.7, 875면에서 재인용.↩
- M. Nadkarni and O. Shevchenko, “The politics of nostalgia: A case for comparative analysis of post-socialist practices,” Ab Imperio, 2004, 498~504면 참조.↩
- Д. Дондурей, “Миф о Сталине: технологя воспроизводства,” http://kinoart.ru/archive/
2010/04/n4-article3.↩ - Б. Дубин, “Сталин и другие. Фигуры высшей власти в общественном мнении современной России,” Мониторинг общественного мнения, No.1, 2003, 13, 19면; Д. Дондурей, 앞의 글; 레바다센터 홈페이지(www.levada.ru) 참조.↩
- “В Липецке новый памятник Сталину облили розовой краской,” Новая Газета, 2015.5.8.↩
- “Сталинский центр открылся в Пензе,” Интерфакс, 2015.12.21.↩
- “Память о Сталине: за и против,” 2017.7.20. https://wciom.ru/index.php?id=236&uid=116323.↩
- 관련 영화는 다음과 같다. 「브이소쯔끼,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요」(2011), 「가가린, 최초의 우주인」(2013), 「뽀두브니」(2014).↩
- С. Экштут, “Круглый стол. Вредное мыло,” Искусство кино, No. 5, 2007.5.↩
- Д. Дондурей, 앞의 글.↩
- Д. Дондурей, 같은 글; Д. Дондурей, “ ТВ: на страже кризиса-итоги телесезона,” http://mail.kinoart.ru/archive/2009/02/n2-article20.↩
- Г. Зверева, “Русский проект: конструирование позитивной национальной идентичности в современном российском государстве и обществе,” Eurasian Review, Vol.1, 2008, 15~46면.↩
- Б. Дубин, “Интеллигенци-понятие сложное,” https://vz.ru/culture/2008/4/8/157965.htm.↩
- M. Nadkarni and O. Shevchenko, 앞의 글 516면.↩
- 현대 러시아 TV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앞의 졸저 122~49면 참조.↩
- Ю. Левада, 앞의 글.↩
- 같은 글; Левада Центр, 앞의 책 257면.↩
- 소비에뜨 노스탤지어 수치는 소련 해체 관련 조사에서 “소련이 해체되어 유감이다”라고 밝힌 응답자의 비율을 반영한 것이다. Левада Центр, “Распад СССР: причины и ностальгия,” 2016.12.5. http://www.levada.ru/2016/12/05/raspad-sssr-prichiny-i-nostalgiya.↩
- 두 원인의 응답 비율은 2014년 각각 56%와 55%, 2016년 43%와 53%다. Левада Центр, 앞의 책 257면.↩
- Левада Центр, “Путин на пике популярности,” 2015.11.5. https://www.levada.ru/2015/11/
05/putin-na-pike-populyarnosti.↩ - 2001년 설문의 1위는 러시아 제국의 건설자이자, ‘강한 손’의 계보에서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와 스딸린을 이어주는 뾰뜨르 대제였다. Б. Дубин, “Сталин и другие,” 20면; Левада Центр, Выдающиеся люди, 2017.6.26. https://www.levada.ru/2017/06/26/vydayushhiesya-lyudi.↩
- 1991년 러시아인의 60%가 서구를 ‘친구’나 ‘파트너’로 여긴 반면, 1997년엔 51%가 러시아를 이용해 자신의 이해를 해결하려는 ‘적’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사태로 제재가 이어지던 2014~15년 사이 조사에 따르면, 서구가 러시아에 적대적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82%, 크림반도 합병과 관련한 서구의 비판에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답한 사람이 62%로 나타났다. Б. Дубин, 앞의 글 16~17면; Левада Центр, “Россияне уверены во враждебности Запада,” 2015.11.2. https://www.levada.ru/2015/11/02/rossiyane-uvereny-vo-vrazhdebnosti-zapada.↩
- “Алексей Навальный призвал своих сторонников бойкотировать выборы,” Новая газета, 2017.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