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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한국현대사의 영화화

「택시운전사」와 「1987」을 중심으로

 

 

김영진 金泳辰

영화평론가, 명지대 교수. 저서 『평론가 매혈기』 『영화가 욕망하는 것들』 『이장호 vs 배창호』 등이 있음. hawks1965@hanmail.net

 

 

1. 한국영화의 역사적 재현 방식

 

1980년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정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것이 한때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보수 우위였던 국민들의 정치적 각성에 다다르기까진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울어진 운동장 체제에 기반한 정치시스템도 늘 보수 우위였고 진보로 구분되는 야당이 다른 보수세력과 연합하지 않고 정권을 잡는 데는 촛불혁명이 필요했다. 이 시국에 나온 두편의 한국현대사를 다룬 한국영화 「택시운전사」(감독 장훈, 2017)와 「1987(감독 장준환, 2017)은 산업화와 반공 등 국시로 정의되던 대한민국 건국신화를, 독재와 민주의 대립에서 출발해 민주주의의 승리로 귀결되는 이항 대립의 가치투쟁으로 변화시키는 듯하다.

지금까지 우위에 있었던 보수적인 정치권력은 민주화투쟁이 대문자 역사로 서술되는 것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한국영화 역시 꽤 오랫동안 한국현대사의 교차점에 선 광주민주화운동과 그후에 이어진 반독재투쟁을 정면으로 다루기보다는 광주에서 일어난 역사적 트라우마가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성찰한 「꽃잎」(감독 장선우, 1996), 「박하사탕」(감독 이창동, 1999) 수준에 머물러야 했다. 이 영화들에서 광주항쟁에 관한 복합적인 서술은 본격적인 발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멈추고 그 상흔이 개인의 영혼에 삼투된 과정을 규명하는 데 집중한다.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피해자를 패배의 서사 안에 가둔다. 피해자는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현재에서 과거의 상흔을 끄집어내는 것만으로는 미래의 서사를 준비하지 못한다.

역사적 기억의 정체를 규명하고 그것이 개인의 경험에 미치는 영향을 반추하려는 것은 역사적 비극 자체가 제대로 서술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을 껴안는다. 절실하게 역사적 비극의 트라우마를 형상화하려 했던 「꽃잎」과 「박하사탕」은 주인공의 절규로 끝난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 한국영화는 광주항쟁과 그후 일어난 1980년대의 반독재투쟁을 다루면서 낭만적인 영웅서사를 조금씩 도입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휴가」(감독 김지훈, 2007)는 순결한 피해자 집단을 전면화하고 그들이 불의에 대항한다는 영웅서사를 부분적으로 꾀했다. 이 경우도 광주항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복합적인 맥락을 조망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불온시된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체였던 시민들의 위치 변경을 시도한 것이다. 「변호인」(감독 양우석, 2013)의 경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주인공이 속물 변호사에서 반독재투쟁에 힘을 보태는 인권변호사로 거듭나는 진화과정을 극화하면서 피해받는 민중을 대변하는 소영웅과 그의 정의감에 공명하는 집단의 세가 확산되는 것을 결말로 제시함으로써 희미한 승리의 서사 반경을 취했다.

촛불정국 이전에 기획되어 변화된 정국 분위기 속에서 개봉해 큰 성공을 거둔 「택시운전사」와 「1987」은 대문자 역사로서의 민주화투쟁을 대중적인 신화로 주조하려는 시도가 상당한 수준 이상으로 형상화된 결과물이다. 이 영화들을 통해 대중은 비로소 광주민주화운동의 시민들, 1980년대의 반독재투쟁 참여자들을 영웅 주인공으로 동일시할 수 있었다. 이 자기동일성의 기제는 순결한 피해자라는 캐릭터 묘사 범주와 그들이 처한 비극에 부수되는 파토스를 극대화하는 데서 나오거나(「택시운전사」), 순결한 피해자들이 승리서사의 집단적 주인공이 되는 카타르시스를 만끽하게 하는 데서 나온다(「1987」).

이 영화들에서 재현된 서사와 이미지들은 실제 일어난 현실에 기초한 것이라 해도 극영화로선 필연적으로 박진감을 고취하는 수많은 수사법으로 인해 전통적이고 제한적 의미만 갖게 된다. 19876월 민주항쟁이 거둔 역사적 승리는 2016년 광화문광장의 촛불혁명을 통해 계승 반복되었으나 「1987」은 역사적 반복 이면의 성찰을 유도하는 대신 선의 승리와 악의 심판이라는 익숙한 명제를 되풀이하는 데 몰두한다. 「1987」과 「택시운전사」가 제기하는 것은 실제 있었던 역사를 얼마나 그럴듯하게 재현하느냐를 넘어서 관객인 우리가 과거와 오늘의 현실에서 형태를 달리해 되풀이되는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문제의식이다.

 

 

2. 「택시운전사」, 순결한 피해자를 위한 비가

 

「택시운전사」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군함도」(감독 류승완, 2017)와 달리 압도적인 절찬을 받았으며 「군함도」가 받은 ‘악의적’ 역사왜곡에 관한 비판도 가볍게 피해갔다. 이를테면 「군함도」의 대탈출 장면이 비난받은 것과는 달리 이 영화의 택시 추격전 클라이맥스는 허구가 분명한데도 별다른 저항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이 영화는 그밖에도 대중영화로서의 몰입도를 위한 고려와 좀더 안전하게 관객의 위치를 재조정하려는 의도에서 실제와 다른 캐릭터와 서사를 만들어낸다.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와 함께 광주로 들어간 녹음기사 헤닝 루모어(Henning Rumohr)는 서사에서 완전히 누락되었고 힌츠페터가 1980523일 광주로 다시 돌아와 시민군의 자치 아래 질서가 유지되고 있던 상황을 필름에 담았던 사건도 빠졌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택시운전사 김만섭은 실존 모델이었던 인물이 상당한 정치의식을 가졌던 것과 달리 정치에 무관심한 소시민으로 새롭게 재창작되었다. 521일 광주에서 시민군이 조직되었던 상황도 영화의 서사에서 빠졌다. 이것 역시 불온한 정치권력에 맞선 저항의 주체였던 광주시민들을 순결한 피해자의 이미지로 그리고자 했던 의도로 읽힌다.

「택시운전사」가 선의로 만들어진 상업영화로서 굉장한 프로파간다 효과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영화는 광주항쟁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지닌 죄의식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위로한다. 당장 먹고살기 바빠 정치적 각성의 기회가 없었던 주인공 김만섭 캐릭터는 19805월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 사건을 전혀 몰랐던 더 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도 효과적인 감정이입을 가능케 하는 매개자다. 사우디에서 돈을 벌었으나 아내의 병을 수발하느라 재산이라곤 개인택시 한대만 남은 중년의 남자로서 결국 아내를 잃고 홀로 어린 딸을 키우며 열심히 사는 김만섭은 위르겐 힌츠페터를 손님으로 태워 광주에 내려가기 전까지는 광주에서 무슨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보도통제가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보통 시민들과 같은 처지에 있던 그는 군인들의 차단막을 용케 통과해 광주시내로 들어가면서 서서히 변하는데 감독 장훈은 그걸 정치적 각성의 과정으로 그려내는 대신 광주시민들과의 정서적 일체감을 이루는 상황을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그 촉매가 되는 것은 밥이다. 김만섭이 힌츠페터와 우연찮게 통역으로 동승하게 된 광주 현지 대학생 문재식을 태우고 광주의 축제 같은 시위행렬 복판에 도착했을 때 처음 받게 된 것은 이름 모를 젊은 여성이 준 주먹밥이었다. 시위대가 군인들과 대치하는 상황을 근처 건물 옥상에서 힌츠페터 일행이 취재하고 있을 때 김만섭은 주먹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역시 음식은 전라도 음식이 맛있다고 말한다. 어린 딸을 걱정하며 하룻밤을 지새우고 먼저 광주를 빠져나온 김만섭이 순천의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받아든 국수와 주먹밥은 그가 체험했던 광주에서 느낀 사람들의 인간적 체온을 새삼 환기한다. 김만섭이 그걸 먹으면서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겨냥할 수 있는 감정이입의 최대치를 이룬다. 이 장면은 김만섭이 헤어나오지 못했고 헤어날 수 없는 먹고사는 것의 존엄함을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장시키는데, 이때까지 김만섭의 행동동기로 유일했던 홀아비 가장으로서의 부양 책임감을 이웃들과의 연대 속에서 도모하는 책임감으로 격상시키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 연대적인 의미는 한시적인 상태로 소멸할 수밖에 없는데, 김만섭은 딸을 안전하게 키워야 하는 가장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힌츠페터가 한국을 떠나며 연락처를 물었을 때 거짓으로 알려준다.

영웅적인 행위를 했으나 일시적으로만 그럴 수 있었던 김만섭의 처지를 보충해주는 것은 그의 곁에 위치한 다른 사람들의 자기희생적인 행위다. 김만섭이 폭압적인 군인들의 시위 진압 이유를 물었을 때 자신도 모른다고 했던, 대학가요제에 참가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왔다는 문재식이나, 김만섭처럼 처자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김만섭과 힌츠페터가 광주를 탈출할 수 있게끔 택시를 몰고 보안사 요원들을 막는 택시기사 황태술과 그의 동료들은 죽음에 이르는 희생을 보여준다. 김만섭을 도와줬던 광주시민들의 죽음은 힌츠페터와의 재회를 차단한 채 남은 인생을 살았던 김만섭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일정한 부채감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이 영화의 서사 논리대로라면 그의 일시적인 영웅적 행위는 문재식과 황태술을 비롯한 광주시민들의 자발적인 희생이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다. 이 장치를 통해 영화를 보는 우리는 김만섭의 부채감과 당시 광주시민들의 희생에 대한 애도를 동시에 공유하게 된다.

주인공 일행이 스쳐 지나가는 광주시내의 벽보나 깃발 등을 통해 잠깐씩 보이기는 하지만, 「택시운전사」가 화면 속에서 끝내 고유명사 ‘전두환’을 불러내지 않은 것은, 분노보다는 자기위로에 주력한 이 영화의 영리하고 소심한 전략일 것이다. 이 영화는 다른 도시의 대학생들이 무기력하게 침묵하고 있을 때 전두환의 집권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광주의 대학생들이 유일하게 봉기했고 군대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며 시민들이 동참한 광주항쟁의 경과 진단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상황의 인과가 그려지지 않고 절대 악의 근원이 적시되지 않은 가운데 무자비한 군대와 그에 대항하는 무구한 시민들의 대립이 묘사되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공격받는지 모르는 채로 절망하고 슬퍼하고 서로 돕고 위로할 뿐이다.

불쌍한 우리 편과 사악한 공권력의 이분법을 강조하는 서사는 재난을 다루는 대다수 한국영화들의 상투형인데, 역사를 다룬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공식으로 되풀이된다. 이제까진 주로 권력의 사악하고 무능한 하수인으로 경찰이 등장했지만 이 영화에서는 군대가 나온다는 것이 다른데, 특히 도청 앞에서 죽어 있거나 다친 사람들을 주변의 시민들이 구해내려 움직일 때 군인들이 그들을 저격하는 장면이 주는 공포는 직시하는 것이 힘들 만큼 고통스럽지만, 이 장면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저항하고 맞서 싸우는 시민들의 이미지가 아니라 (당시에 관한 증언들 가운데는 군인들이 조준하고 있는데도 젊은이들이 반복적으로 거리에 나와 태극기를 감고 구호를 외치다가 쓰러졌다는 내용도 있다) 희생을 감수하며 서로 돕는 순수한 피해자들의 연대의 이미지다.

우리 편은 저들의 만행에 이토록 순결하게 희생당했다는 이미지를 전시하면서 그걸 보고 가슴 아파하며 동참하지 못했던 우리의 죄책감을 재확인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안전하다. 허술하게 연출됐으나 모두가 관대하게 받아들인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김만섭과 힌츠페터의 광주 탈출을 위해 무명의 택시운전사들이 벌이는 희생의 제의 장면을 떠올려보자. 유해진이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택시기사 황태술은 죽기 직전에 택시의 열린 창문으로 김만섭에게 (관객을 향해) ‘우리는 염려 말고 무사히 빠져나가 광주의 진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보고 광주의 비극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직접 찾아보라고 권하는 이 영화의 메시지다.

「택시운전사」에서 차마 발화되지 못했던 악의 근원은, 겉만 근사하지 허둥대며 매번 임무에 실패하는 이 영화 속 보안사 요원들과는 달리, 여전히 기세등등하며 적지 않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1980년의 광주시민들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유일하게 절대적 악의 권력에 맞섰다. 그 힘의 뿌리를 확인하는 대신, 이 영화는 그들을 고립무원의 상태로 끝까지 내버려뒀던 우리의 무능과 죄책감을 위로한다.

 

 

3. 「1987」, 소영웅들의 승리서사로 접수한 역사

 

1987」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내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중반부까지는 단정한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 카메라가 불쑥불쑥 인물들에게 다가가며 역사적 상황의 진실을 캐려는 공격적인 의지를 가장하기는 하지만 모자이크식으로 상황을 축조하며 등장인물들이 한조각의 진실을 밝혀주고 차례로 퇴장하는 구성은 한국영화에서 전례가 드물었다. 카메라가 입회하고 있으나 그것이 서사의 진전을 위해 인물의 감정을 강요한다는 인상이 들지 않는 경지에서 「1987」은 역사를 다룬 영화가 가닿을 수 있는 성취에 이를 뻔한다. 한 시기의 역사가 영웅서사에 기초하지 않고 다양한 인물들이 동시 발생적으로 겪는 사건을 축으로 한 페이지씩 넘어간다. 이 조각들의 리듬을 단단하게 꾸미기 위해 카메라가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그렇다 해도 재현의 진실성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영화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장준환의 연출은 조금씩 조급해지며 박처장이 고문가해자의 진실을 알린 교도관을 심문할 때 인물들의 감정에 과잉 이입하는 단계에 이른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고 박처장이 어린 시절 ‘빨갱이’에게 당한 경험을 회상할 때 그의 비극적 파토스는 유난히 강조되며 동시에 심문받는 피해자의 콧물 눈물 자국 선명한 얼굴이 화면에 부각된다. 전체를 부감하는 것에서 개인의 감정으로 초점을 이동시킨 서사는 여주인공 연희가 이한열의 죽음을 알게 되는 후반부에서 한 개인의 각성과 진화를 거리의 시민들의 연대와 묶으면서 승리의 서사로 바뀐다. 순수한 청년의 불우한 죽음에 공명하는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올 때 화면은 문득 기록 화면으로 바뀌고 인물 감정에 집중했던 서사를 진실감으로 고양시킨다. 지금까지 본 모든 것이 허구가 아닌 실화에 기초했다는 증명처럼 붙여진 마지막 기록 화면들은 역사적 사건의 재현을 화면의 이미지가 아니라 서사의 환원성에 의존해 처리했던 대중적 장치를 감추기 위한 보완물이다.

영화 표현의 이상향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이미지로 뭔가를 표현하는 데 있다. 프랑스 평론가 앙드레 바쟁(A. Bazin)은 「비뗄로니」(1953) 등의 초기 펠리니(F. Fellini) 영화에서 겉으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듯한, 주인공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장면들이 중요한 함축을 띠는 것에 주목했다. 그가 「까비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끝으로의 여행」(1957)이라는 비평 에세이에서 영화가 인물들이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공간을 만들어주었을 때 서사가 정지되는 순간이 현대영화의 본질이라고 했던 지적은 오늘날 자주 망각되고 무시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스타일이 등장인물과의 자기동일시에 봉사하는 데 멈추지 않고, 즉 등장인물의 감정을 수식하는 보완물로서의 기능에서 벗어나 인물이 위치한 공간을 응시할 때 이미지의 물질성은 활력을 띠고 서사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단순하게 직선적으로 잇는 진부한 틀에서 벗어나 관객으로 하여금 이미지를 이미지 그 자체로 사유하게 하는 동력을 얻는다는 것을 뜻한다. 「1987」의 초중반까지의 서사와 스타일은 관객에게 주체적으로 이미지와 대면할 것을 요구하는 가능성을 띠었으나 차츰 실제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편으로 실제의 역사를 인물들의 매력을 통해 전달해야 한다는 대중영화적 강박에 스스로 의탁한다.

이 영화의 초중반부가 역사와 정치를 관습적인 픽션의 규칙에 종속시키지 않고도 실재하는 현실의 느낌을 스크린에 불러오는 데 성공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자아냈다면 후반부는 미스터리 구조를 추적극과 유사 로맨스 구성으로 환치한 후 여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춘 강력한 자기동일시를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에서 좋은 사람들은 매우 좋고 나쁜 사람들은 매우 나쁘다. 옛날 서부영화에서처럼 명확한 정의와 타락을 구분하고 그 각각의 경계 내에 캐릭터들을 배열한다. 경찰 고위간부를 비롯한 독재권력 하수인들의 캐릭터 면면이 강고한 악의 형태를 대변한다면 결과적으로 그에 맞서는 사람들은 일부의 선의로 전체의 선의를 완성해가는 조력자들이다. 특별한 이념적 시각이 드러나지 않지만 고지식하고 원칙론자인 검사가 고문치사 당한 학생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상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부검을 강행하는 것을 비롯해 박종철의 사망을 목격한 담당 의사나 부검의, 기자들이 자기 본분에 충실함으로써 부당하게 권력을 전횡한 이들에게 맞서는 쾌감은 이한열의 죽음이라는 또다른 비극 앞에서 상실감을 느끼는 개인의 슬픔과 그 개인들의 슬픔이 집단화하며 더 큰 항쟁으로 확대되는 승리의 서사로 이어진다.

이는 「1987」이 관객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는 핵심이다. 승리하였으나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그 승리를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갖는 부채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승리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안도하는 자기동일성으로 환원되는 서사는 정치와 역사를 대중영화 안에 자리 잡게 한다. 여기서 정치는 안전한 수준에서만 전경화되며 픽션의 내부에서 극적인 진동을 만들어낸 다음, 결론 부분에선 일시적 승리로 끝나는 역사적 현실을 적시하는 것으로 신중하게 관객의 감정을 통제한다. 좋은 캐릭터와 나쁜 캐릭터를 따로 얘기하기는 쉽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정치를 소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특정 시기의 제도권력이 나쁜 것이라는 항의만으로 진실의 복합성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런 단면적 항의에 걸친 분노, 상실감, 연민, 공감의 감정적 필터로 걸러내지 못하는 현실의 층위는 훨씬 복잡하다. 추상화된 민중의 선한 의지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이 「1987」에선 선악의 대결로 재배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은 정서적으로 격앙된 반응을 일으키며 동시에 강력한 정치적 진술을 들었다는 느낌을 준다. 한국사회는 이미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구도로만 비추기에는 너무 복잡한 사회가 됐지만 이 영화는 현 시점에서도 대중이 분열되지 않은 감정을 갖고 올바른 정치적 진술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영화이다.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우리 사회의 수준을 증거하는 영화이고 정치적 메커니즘의 진실을 감정적 자기동일시로 바꿔 받아들이게 하는 영화이다. 픽션의 관행적인 규칙에 의존하지 않고 현장에 입회한 듯한 유사 기록영화적인 스타일로 만드는 것은 한국의 영화산업 조건에서 불가능할 것이다. 그 대신 이 영화는 정치란 일상생활이며 우리가 타인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라는 것을 매우 관행적인 로맨스영화 구조를 급차용해 웅변한다. 타인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 「1987」은 우리가 어떻게 누군가에게 권력을 사용하도록 위임했는가를 현재형으로 묻는다.

 

 

4. 결론을 대신하여: 「공동정범」의 경우

 

역사적 고통을 주인공이 진화하는 유사 영웅서사의 틀과 강력한 감정이입 화면 효과로 도취시켜야 하는 대중영화 스타일로 접근한 것이 「택시운전사」와 「1987」의 공통점이다. 이 두편의 흥행작과 비교하면 김일란과 이혁상이 함께 연출한 「공동정범」(2016)은 극장에서 미미한 주목을 받았지만 두 영화에 대한 보완물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역사를 현재 시점에서 집요하게 재반추하는 창조적 반복을 통해 관객의 주체적 자리를 마련하는 혁신적 시도를 담는다. 「공동정범」은 용산참사를 다룬 「두개의 문」(감독 김일란·홍지유)의 속편 형태를 취한다. 「두개의 문」이 감옥에 간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폭력의 대리자이자 가해자인 경찰을 주인공으로 삼아 용산참사 그날의 비극을 일종의 박력있는 법정드라마처럼 구성해 진실의 조각들을 모으려는 시도였다면, 「공동정범」은 감옥에서 풀려난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진실을 구하려는 시도이다. 이 시도는 실패한다. 영화 속 피해자들의 기억은 서로 일치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고인 불화의 감정들만 드러난다. 그들이 각자, 또는 함께 증언하는 장면에서 그날 망루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전체 맥락을 유추하게 만드는 조각이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그 이미지의 조각들을 종합적인 맥락으로 재구성하게 해줄 피해자들의 증언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용산참사 직후 열린 재판은 경찰 한 사람의 사망 원인을 찾아내는 데 맞춰졌다. 「두개의 문」은 그 참사의 비극이 철거현장 망루에서 무리한 시위를 벌인 시민들의 책임인지, 무리한 진압을 강행한 정부 집행자들의 과오인지 법정기록을 통해 물었다. 「공동정범」은 감옥에서 풀려난 다섯명의 생존자들에게 그날의 팩트를 묻지만 이 영화에서의 카메라는 끝내 진실의 담지자로서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김일란과 이혁상은 이미지를 증거로 과시하지 않은 채 거듭 반복해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참사현장의 이미지와 피해자들의 진술은 순차적으로 조응하는 게 아니라 자주 어긋난다. 관객은 비극의 그날에 대한 진실을 스스로 질문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공동정범」은 역사적 기억의 선형적, 인과론적 고리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단절과 왜곡, 이미지의 불완전함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이 불연속적인 사건의 고리에 관객인 우리가 가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현실에서 취한 이미지의 원본을 게시하는 다큐멘터리의 특징이 극영화와 다른 이런 구조를 가능하게 만든 측면도 있으나 이는 과거에 가려졌던 것이 현재에 밝혀지고 미래에 심판이 기다린다는 직선적 시간관에 편승한 편의주의적 해피엔드라는, 극영화의 조합된 감동과 다른 것이다. 동시에 이 영화는 순결한 피해자의 이미지와 그 피해자들을 박해받는 영웅의 이미지로 조정하는 것도 마다한다. 승리의 서사가 주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우리 편의 일체감을 상상적으로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정치라는 복합적이고 모순된 메커니즘을 대면하고 우리 안의 분열과 망각을 깨달으면서 최선의 길을 상상하도록 영화가 안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영향력의 가치를 「공동정범」이라는 독립 다큐멘터리를 통해 재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