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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좋은 삶, 좋은 역사가

애리프 덜릭의 삶과 학문을 기억하며

 

 

황동연 黃東淵

미국 쏘카대학(Soka University of America) 아시아학 담당 교수. 저서 『새로운 과거 만들기』, Anarchism in Korea 등과 역서 『포스트모더니티의 역사들』이 있음.

 

 

한국 학계에도 잘 알려져 있는 전지구적 담론 비판자이자 저명한 역사학자인 애리프 덜릭(Arif Dirlik, 1940~2017)이 2017121일 저녁 미국 오리건주 유진(Eugene)시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영면했다. 그와 동지적 관계인 많은 학자들,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제자들과 학생들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논의하길 주저하거나 혹은 그냥 스쳐버리는 문제들에 대해 애리프는 늘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비판을 가하곤 했는데, 이제 그의 글과 강연을 더이상 대할 수 없다는 슬픔과 아쉬움은 많은 이가 공유하는 바일 것이다. 그의 제자인 내가 받은 개인적 충격과 슬픔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지난 25년간 나를 제자이자 동료 그리고 동지로서 대하며 학문적 가르침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영감을 주던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이 추모의 글을 통해 그런 슬픔과 감사의 마음을 그의 영전에 전하고, 동시에 내가 아는 애리프의 삶과 학문에 대한 기억의 단편을 한국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애리프는 19401123일 터키 남부의 메르신(Mersin)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스탄불에 있는 로버트대학에서 1964년 전기공학 전공으로 졸업 후, 풀브라이트 장학생에 선발되어 미국 뉴욕주 소재 로체스터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러나 1960년대 전세계를 휩쓸던 급진주의 물결은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그는 중국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마침내 같은 대학의 사학과 교수인 해리 하루투니언(Harry Harootunian)과 랠프 크로지어(Ralph Crozier) 등의 지원하에 전공을 중국사로 변경했다. 박사학위 취득 2년 전인 1971년부터 그는 듀크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해 2001년까지 동 대학 사학과 및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01년 가을 오리건대학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긴 그는, ‘비판적 이론과 초국가적 연구 센터’(Center for Critical Theory and Transnational Studies)의 소장도 맡아 많은 학술회의를 조직하였다. 2006년 오리건대학에서 공식 은퇴한 후에도 그는 세계 여러 대학과 연구소의 방문교수, 석좌교수, 명예소장 등의 직책을 맡으며 폐암 선고를 받은 20174월까지 열정적으로 연구와 강연을 지속했고 또 후학 양성과 지원에도 힘썼다.

무엇보다 애리프는 중국 사회주의, 특히 중국 공산주의와 중국 아나키즘 역사 연구의 권위자였다.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사회와 국제질서를 바꾸려는 생각 속에서 중국혁명에 대한 관심을 키웠던 개인적 배경으로 인해, 그는 서구중심적이고 근대주의적이며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역사, 역사인식, 역사방법론, 그리고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하는 목적론적 방법론과 인식을 통렬히 비판하곤 했다. 나아가 그는 학계의 모순과 권력화에 대한 분노도 그대로 글로 표현하는 가장 진보적인 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1990년대 이후 탈식민주의적 연구방법론과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연구로 확장되었다. 그는 맑스주의 역사학자였지만, 이른바 ‘정통’ 맑스주의자는 아니었다. 역사와 현실을 함께 바라보면서, 사회과학의 여러 비판적 이론을 역사이해에 접목하며 탈학제적 접근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고 나아가 전지구주의적 자본주의하 세계의 여러 현상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자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경력은 그가 출판한 저서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혁명과 역사』(Revolution and History) 『중국 공산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Chinese Communism) 『중국혁명 속의 아나키즘』(Anarchism in the Chinese Revolution) 『중국혁명 속의 맑스주의』(Marxism in the Chinese Revolution) 『탈혁명 중국의 사회와 문화』(Culture & History in Postrevolutionary China) 등이 중국혁명에 대한 그의 관심의 산물이라면, 『탈식민의 분위기』(The Postcolonial Aura) 『전지구적 근대성』(Global Modernity)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눈뜨기』(After the Revolution: Waking to Global Capitalism) 『포스트모더니티의 역사들』(Postmodernitys Histories) 『전지구적 교수법』(Pedagogies of the Global) 등은 역사학자로서 전지구주의와 전지구적 근대성에 대한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저서다. 30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편저 포함)와 많은 논문의 일부는 한··3국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국가에서도 각각 번역 출판되었다. 국내에서는 저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눈뜨기』(설준규·정남영 옮김, 1998)와 『포스트모더니티의 역사들』(황동연 옮김, 2005)이 창비를 통해 번역 소개되었고, 그의 논문 중 일부도 번역되어 한국 독자에게 알려져 있다.

그가 중국혁명사 연구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대안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대안이었다. 그런 이유에서겠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역사인물의 하나가 마오 쩌둥(毛澤東)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오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마오가 중국이 처한 현실과 환경 속에서 맑스주의를 ‘중국화’하며 중국혁명의 이론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리고 그 이론을 통해 혁명을 성공시킨 후 혁명의 보수화나 탈혁명화를 막기 위해 ‘혁명 속의 혁명’을 추구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평가하고자 했다. 즉 그는 이론의 보편성과 ‘지역적 적용’ 사이에 일어나는 모순적이고 변증법적인 관계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소련 사회주의의 몰락과 중국 사회주의의 세계 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귀속은, 그로 하여금 전지구주의 혹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심을 키우게 했다. 나아가 그런 ‘근대적’ 체제의 전지구적 확장과 공고화(혹은 정당화)에 복무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도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의 논리적 귀결점은 지역 기반(place-based)의 정체성과 사회운동의 중요성, 탈헤게모니의 다양한 역사들의 존재, 식민근대성 문제, ‘전지구적 근대성’ 등이었다.

애리프는 형식이나 권위주의를 싫어했다. 그는 늘 소탈했고, 제자들 나아가 동료교수들의 이런저런 지원 요청에 바로바로 응답했다. 그리고 사회적·학문적 약자를 항상 지원하고 보호했다. 그가 그렇게 혐오하던 미국의 최대 학술학회의 하나인 아시아학협회(Association for Asian Studies)는 권력화된 학문이 집단화된 상징이었지만, 그 학회의 연례발표회에 젊은 학자들의 문화대혁명 관련 비판적 논문 발표를 지원하기 위해 토론자로 참석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는 모든 종류의 차별에도 단호하게 반대했고 그런 신념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 예가 바로 미국 원주민들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원주민 출신 학자들과의 교류와 그들에 대한 지원이었다. 그가 듀크대학을 떠나 오리건대학으로 옮긴 이유의 일부도, 내가 아는 한, 그의 이런 신념과 관련이 있다. 더구나 그는 학문과 학자들이 권력화되고 부패하는 것 같으면 과감히 자신의 기득권부터 버렸다. 그래서 그는 세계적 권위를 갖는 이런저런 학술지의 편집위원회에서 아무런 미련 없이 위원직을 던지고 나오곤 했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분석력, 그리고 집중력을 겸비한 학자였다. 그의 독서량은 가히 초인간적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중요한 논문 한편을 그야말로 신속히 완성했다. 학술회의 참가 요청에는 가능한 한 모두 응했기에 해외 학술회의, 세미나, 강연 등을 위해 한달에 서너번 정도 국외행 비행기를 타곤 했다. 무엇보다 그런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그는 강건했고 또 풍부한 문제의식을 통해 다양한 유의미한 글을 신속히 마감시간에 맞춰 완성할 능력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애리프는 실천하는 학자였기에 그의 주위에는 늘 미국 원주민운동가, 시민운동가를 비롯한 사회운동가들이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에 그는 귀를 기울이며 그 내용을 글에 담았다.

그런 그를 지도교수로 모셨고, 후에 동료이자 동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서 큰 행운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28월말 그의 듀크대학 연구실에서다. 첫 학기 시작 전 그의 첫인상은 부드럽지만 치밀한 ‘선생님’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을 편안하게 대하라고 당부하면서도 그는 나에게 이것저것 학기 시작 전에 준비할 것들을 꽤 많이 정해주고 당부하였다. 첫 대면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영문으로 번역한 나의 석사논문과 함께 그의 요청에 따라 한국에서 가져온 한국 아나키즘에 관한 자료들을 보여주자 몹시 기뻐하던 그의 표정이다. 그는 나에게 그 자료들을 활용해 첫 학기 컬로퀴엄 수업의 과제물로 제출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그는 동아시아 각국의 급진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두는 민족이나 국가라는 단위가 아닌 더 넓은 시각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내게 말했다. 나아가 그는 인습적인 역사시각에서 벗어나 중국 국민당 좌파를 연구할 것을 당부했다. 솔직히 나는 당시 그가 말하는 의미를 잘 몰랐다. 또 몹시 의아했다. 중국 국민당 좌파를 전공하려는 내가 ‘왜 한국 아나키즘에 대한 글을 과제로 제출해야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는 처음 만남에서부터 내가 가야 할 학문의 길을 예시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말한 인습적 시각에서 벗어나 중국의 대일합작 문제에 대한 학위논문을 썼고, 나아가 ‘권역시각’을 통해 민족을 단위로 하는 역사를 비판하는 책과 여러 논문을 쓰고, 그런 바탕에서 마침내 한국 아나키즘에 관한 저서도 출판했기 때문이다. 나의 전공인 중국근현대사를 중국이라는 민족사 범주에서 벗어나 지역사라는 큰 틀 속에서 보게 된 것, 한국사로 내 연구영역이 확장된 것 모두 그의 영향이다.

항암치료도 받지 않으며 폐암과 싸우던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178월 하순 버클리시 근처의 한 커피숍에서다. 당시 그는 여전히 정력적으로 미국과 세계 정치를 논했고, 여러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두시간여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여느 때처럼 내게 말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그는 속으로는 거의 탈진해 있었음에도 내게 그런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던 짧은 글도 완성해주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문장이 되었다. 임종을 곁에서 지킨, 그의 평생 동지인 록샌 프라즈니악(Roxann Prazniak)에 따르면, 애리프는 자신이 “좋은 삶”을 살았다고 자평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명문 듀크대학 교수를 역임한 경력이나, 석학으로 대우받는 학자였다는 그의 유명세 때문이 아니다. 강한 성격과 비판적 시각으로 인해 그를 시기하고 공격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그를 소모적 논쟁을 일으키는 ‘기이한’ 학자로 치부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학문적·사상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많은 동료 학자, 친구, 그리고 학생들이 있었다. 그의 주위에 그런 동료나 친구가 있게 한 원천은 바로 그의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날카롭고도 깊이있는 비판적 분석력, 나아가 전공 분야를 훌쩍 뛰어넘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예리한 기억력과 관찰력이었다. 그런 그를 따르는 학생들이 늘 주변에 있던 것도 그에게는 즐거움이었고, 자신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그는 요청이 있으면 늘 논문을 읽고 평을 해주며 추천서를 써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위에 있던 그런 좋은 동료, 제자, 친구들 때문에 그는 “좋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애리프 덜릭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의 학문세계와 문제의식이 만든 거의 유일한 문제로 그가 학문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학문이 정치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점은 너무 당연하다. 학문이 순수하고 비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 자체가 바로 그들의 정치적 판단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애리프는 정치적이기 위해 학문을 한 것이 아니라, 학문이 현실로부터 괴리되지 않도록 늘 노력한 것이다. 그가 자신의 학문을 “1960년대의 산물” “정치성을 지향한 학문”이라고 떳떳이 말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결국 그는 역사, 넓게 보면 학문의 존재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나는 그가 늘 말하던 “좋은 역사”나 “좋은 역사가”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애리프의 영면은 1960년대 이후 미국학계를 중심으로 성장한 진보적 학문세대의 마감을 의미할 수 있다. 그 세대는 미국 시민사회의 민주인권운동과 함께 태동하여 미소 양국의 패권경쟁을 비판했고, 미국학계의 전반적 보수화, 권력화, 학문의 권력에의 예속화와 그 결과물인 ‘지역연구’(Area Studies)를 비판, 거부하며 민중에 기반한 평화공존 지향의 학문을 주장했다. 한국학계로 치면 ‘1980년대 세대’와 문제의식 등을 많이 공유한다. “1960년대의 산물”인 애리프 덜릭의 삶과 학문이 역사가인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1980년대를 돌아보며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선생님, 감사했습니다. 이제 편히 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