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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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도진순 『강철로 된 무지개: 다시 읽는 이육사』, 창비 2017

미시사로 비추어 본 시와 역사의 만남

 

 

이정숙 李貞淑

현대문학 연구자 punky525@hanmail.net

 

 

179_453풍속사든 미시사든 한국사를 문화론적으로 조명한 저작들의 주요 필진은 국문학 연구자들이었다. 자료발굴을 통해 새로운 연대기를 발견한 문학연구자들이 잊힌 개념을 거시사 속에 새롭게 배치하거나 거시사에 균열을 가하기 위해 ‘서사적’ 서술을 시도한 것이다. 이에 대한 역사학계의 독후감이 주로 사적(私的)으로 제출되었다는 점은 학문 간 소통의 측면에서 다소 아쉬운데, 결론을 말하면 대중서로서는 인정할지언정 정사(正史)의 범주로 미시사를 입회시키기는 난감하다는 입장이 다수였다. ‘문학적’ 서술은 곧 허구라는 인식이 두 학문 간의 경계를 엄연히 그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역사학자가 한국문학사의 중요 시인인 이육사(李陸史)의 시세계를 조명했다. 나올 책이 나왔다는 반가움이 우선 앞섰는데, 저자 도진순(都珍淳)이 김구와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 연구로 정평이 난 역사학자라는 점이 시와 혁명을 결합한 이육사의 삶의 면모를 남달리 밝혀낼 것이라는 기대감도 한몫했다.

독자의 기대지평의 견지에서는 이육사의 ‘전체’를 총망라한 책이 나올 시기는 한참 지났다고 하는 편이 알맞다. 그만큼 독자는 기다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역사적 인물이라는 후광이 오히려 시 해석의 상상력을 가로막은 측면이 있는 터라, 역설적으로 이해의 빈자리가 가장 큰 시인이 이육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저자가 역사학자인 덕분에 이 해석의 봉인을 열 수 있었다는 점은 국문학 연구의 입장에서도 다행한 일이다.

저자는 식민지 근대라는 모순 상황에서 스스로 고독한 혁명가의 길을 택한 시인의 내면을 천착한다. “근대화의 길은 육사를 광야에서 해방하는 길이 아니라, 광야로 되돌리는 길이었”(239면)던 터, 서구적 근대를 추종했던 일제의 근대화 노선이 지닌 모순들을 직시했던 이육사는 점차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시어를 연마하는 데로 나아가야 했다. 밀정의 감시 속에서, 검열과 조선어금지정책이라는 외부국면이 시적 상황으로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시경』에서 비롯한 시적·사상적 전통이 혁명문학의 길에서 조우하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육사의 시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사 시의 특징인 상징적 시어를 확정적으로 해석하는 문제와 더불어, 그 언어들이 탄생한 문화적 기반을 복원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 친가와 외가의 가계도에 서린 독립운동의 흔적과 절개를 따라 안동과 서울, 경주와 포항과 대구, 토오꾜오와 베이징과 상하이로 이육사가 거쳐간 자취들은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두보, 루쉰, 예이츠, 니체와 맞통하는 사상의 여정이자 봉건사상을 비판하면서 죽음으로까지 나아갔던 사회주의사상과 의열투쟁의 세계인 까닭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저자가 이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복원한 미시사의 진수를 보여주는 점이다.

여덟편의 논문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청포도」 「절정」 「꽃」 「광야」처럼 익숙한 시들을 사열하고 ‘강철로 된 무지개’ ‘광야’ ‘청포도’ ‘백마 타고 오는 초인’같이 마침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육사의 시어를 재해석한 부분은 해석의 즐거운 도모를 보여준다. 본격 시 연구서이지만 미시사를 가로지르는 방법론 덕분에 저자 자신도 고전문헌뿐만 아니라 포도와 꽃과 별자리의 세계까지 종횡무진 누빈 노력이 상당하다. 그중 개인적으로 꼽는 해석의 백미는 한시인 「만등동산(晩登東山)」과 「주난흥여(酒暖興餘)」 두편에 대한 저자의 번역이다. 저자에 따르면 육사의 시세계는 육사의 폐결핵을 기점으로 ‘극채화(極彩畫)시절’과 ‘수묵화시절’로 나뉜다. 요양 후 육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행을 감행하는데, 이때 ‘아체(我棣)’라고 표현한 절친 신석초에게도 말하지 못한 항일혁명가 윤세주에 대한 깊은 우정과 혁명투사로서의 고독이 한시에 투영돼 있다. 육사가 친구들과 모여 이 한시들을 짓던 날짜를 특정하기 위해 저자는 많은 수고를 기울이는데, 이 시점 이후 수묵화로의 잠행이 시작되는 까닭이다. 검거와 투옥 그리고 저자가 ‘최후의 시’라 칭한 「광야」와 「꽃」이 비롯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시인의 내면을 추적하는 저자의 여정에서 「광야」와 「꽃」에 대한 분석은 말하자면 도착지에 해당한다. 기존의 해석을 뒤집으면서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237면) 하고 육성을 토하는 부분도 「광야」에서이다. 「청포도」에서 ‘청포도’가 익지 않은 풋포도이며, 이 포도가 익을 무렵 도착할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란 곧 혁명동지 윤세주라는 점이나 「절정」의 ‘강철로 된 무지개’가 비극적 황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시황을 죽이고자 한 형가의 고사에서 비롯한 흰 무지개로써 일제 체제에 대한 반역을 뜻한다는 점, 「광야」의 ‘천고의 뒤’가 막연히 인간진보를 믿고 향하는 근대의 시간이 아니라 ‘척박한 땅’을 가리키는 식민지 현실로서의 ‘曠野(광야)’의 극복을 뜻한다는 분석들은 역사학자의 안목으로 시적 정황 자체를 재해석하여 의미부여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 점이 기존 연구와 변별되는 이육사 시 해석에 대한 관점이 출발한 지점일 것이다. 독립운동의 의지로 수렴되는 시인의 내면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내면의 굳건함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부분이 기존 연구들과 변별되는 지점이면서 역동적이고 흥미롭다. 그런데 미시사 서술에서 유추적인 해석을 매우 경계하는 것과 달리 저자는 몇몇 군데에서 유추로 보이는 해석을 확정적으로 기술한다. ‘사실’의 말뚝을 벗어나는 순간 서술하는 본인이 공허하여 흥미를 잃게 되는 것이 미시사 서술의 한 특징임을 고려할 때, 「절정」에서 형가의 고사나 「나의 뮤-즈」에서 건달바의 고사가 당대 지식장의 보편적인 상식이므로 육사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나, 불교의 수미산의 세계는 육사의 다른 시에도 편린이 보이므로 같은 의미의 속을 지닌다고 상정하는 대목은 어렵사리 찾아낸 문화사의 한 장면을 육사의 시에 꼴라주하는 과잉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미덕은 상징어로 상쇄된 시인의 서정을 그가 쓴 소설 「황엽전」이나 여러편의 수필을 인용하여 펼쳐 보여준다는 점이다. 1975년에 발간된 정음사 문고판을 소장하고 있지만, 저자가 인용한 구절이 아름다워서 평자도 수필 「은하수」가 수록된 정본 전집을 새로 구할 정도였다. 어린 시절 이육사가 밤새 고서 낭독을 하다가 바라본 여름 밤하늘의 무수한 별자리가 주는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그린 「은하수」에는 즐거운 음률로 오언, 칠언 절구 한시를 짓고 외며 골목 장원을 뽑는 근대의 일상적 풍경이 그려져 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전혀 낯선 아름다움의 질서에 설렘마저 느끼게 되는데, 그러한 고향의 아름다운 범절이 무참히 훼손되는 풍경을 목도하는 것이 이육사가 대결한 식민지 근대의 도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는 길이었을까? 이런 점이 보다 지성사·사상사의 관점에서 조명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극심한 가난과 혁명의 투쟁이 주는 고독한 긴장 속에서 죽음의 시적인 완성을 꾀한 육사의 풍모를 정신적 배경으로 삼는 변증법이 후속연구들로부터 가해지기를 바라본다. “마치 물구나무서 있는 듯하여 참으로 불편했다”(4면)는 육사 시 해석에 대한 역사학자의 일갈에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통섭해오는 방식이 그 한 방편으로 전개되기를.

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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