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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려령 金呂玲

1971년 서울 출생. 소설집 『샹들리에』, 장편소설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가시고백』 『너를 봤어』 『트렁크』 등이 있음.

 

 

 

장편연재 2

일주일

 

 

유철은 이스탄불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총선 출마를 결심했다. 어쩌면 답이 정해진 여행이었다. 여의도를 떠나고 싶었지만 떠나도 갈 곳이 없었다. 의정활동으로 그나마의 강의경력도 단절된 상태였다. 전국 대학 어디에도 그를 위한 빈 강의실이 없었다. 총선은 유철에게 당장 구직의 문제였다. 단절되지 않은 경력으로 출마하는 것이 그나마 유리할 거였다. 선택에서 제외된 상실과 실업의 공포를 견딜 만큼 갖춰놓은 것도 없었다. 경남이 험지라 하나 취업준비생에게는 그렇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곧 실업자가 될 처지에 놓였으니 지역을 따질 여력도 없었다. 괴롭지 않고 외롭지 않은 밥벌이가 어디에 있는가. 금배지 달고 의전받는 생활을 하는 동안 어느새 그것들에 익숙해져 제 일에 투정 부리는 오만을 저질렀다. 투정이 지나치게 빨랐다. 더 부지런히 살아보자. 그러다보면 문득 생의 선물 같은 일주일이 또 오지 않겠나. 그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견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였다. 유철은 그것으로 총선에 대한 고민을 끝냈다.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온 유철을 맞이한 것은 이혼서류였다. 아직 트렁크도 풀지 못한 상태였다. 아내 정희가 그것을 들고 다시 나가라는 듯 서류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유철이 막 도착한 갈증으로 생수를 들이켜고 있을 때였다.

“우리 그만 이혼하자.”

“후우……”

유철이 긴 숨을 내뱉었다. 정희는 유철의 이스탄불행을 달리 해석하고 있었다. 자신과의 정리를 위한 여행으로 여겼다. 유철은 그런 정희의 생각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부부였다. 한집에 사는 불편한 타인이 된 지 오래였다. 당신하고 사는 거 이제 힘들다,는 정희 말에도 유철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그랬을 거라고, 짐작한 일이었다. 둘의 균열은 오래전부터였다. 둘에게 집은 대화 없는 침묵의 공간이었다. 침묵은 둘을 점점 멀어지게 했다. 그나마의 대화도 뚝 끊긴 것은 과거 유철의 비례대표 공천 때문이었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선택에서조차 정희는 외면당했다. 전혀 몰랐었다. 어느날, 이러저러한 일로 입당했다고 통보한 것이 전부였다. 정희가 국회의원이 되는 거냐고 물었고, 유철이 어쩌면,이라고 답했다. 어쩌면. 그 대답이 왜 그리 상처가 됐을까. 강의로 밖에서 말을 많이 하니 집에서는 좀 쉬고 싶겠지. 서운해도 그런 마음으로 참아왔던 침묵의 나날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렇구나, 하고 물러난 정희는 어린 혜승만 보고 살았다. 혜승은 엄마, 엄마, 불러주니까. 그러던 어느날, 유철이 그런 말을 했다. 둘째 가질래? 아니. 정희는 서로 갈구하는 사랑 없이 생산만을 위한 섹스를 거부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나를 안고 싶을 때 안아. 그 말이 어떤 전조라도 된 듯 그때부터 관계도 소원해졌다. 유철은 자신을 저토록 거푸 부정한 정희에게 낙담했다. 남편이 아내에게 어떤 진심을 더 보여야 하나. 아이를 낳고 함께 살고 싶은 아내, 그 이상의 진심이 무엇인가. 정희는 정희대로 제 몸에 손을 대지 않는 유철에게 좌절했다. 진심으로는 나를 안을 수 없는 거니? 아이 낳으려고 결혼했어? 네 유전자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해서. 화해의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있으므로 그래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상대의 행동이 더이상 진심으로 와닿지 않으면서 골만 점점 더 패었다. 부부면서 각자 살게 된 이유였다. 징글맞게 잊히지 않는 어쩌면,이라는 말도 수시로 정희를 괴롭혔다. 유철은 그런 불확실한 단어로 중대한 어떤 일에까지 침묵했었다. 기실 정희는 그때부터 이혼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혼은 쉽지 않았다. 수저 두벌만 있어도 결혼한다는 낭만은 얼추 가능했지만, 그 수저를 버리고 떠나려니 수많은 관계가 얽혀버렸다. 함께 사는 불행보다 헤어진 불행이 더 크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야 했다. 가정은 지켜야지.

 

정희는 마지막 심정으로 유철과 가까이 눕기도 했었다. 유철이 이스탄불로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몸이 아직 그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회생 가능성이 남았을지도 몰랐다. 숨결과 살결을 느낄 수 있는 얇은 실크 잠옷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눈 감고 갈등하는 남자. 인간의 몸이 요물인 것이 매우 민감하게 상대의 감정을 읽어냈다. 입은 거짓을 말해도 몸은 거짓을 몰랐다. 유철의 고역을 정희의 몸이 그대로 읽었다. 어쩌면 그리도 차가울 수가 있나. 선의의 노력마저 수치스러웠다. 그동안 함께 산 의리로라도 그토록 냉정한 대응은 할 수 없을 거였다. 정희는 부부의 의리라는 말조차 다시 생각했다. 형식상의 부부를 지키기 위해 헤어지지 않는 것이 올곧은 의리는 아닐 것이었다. 지키면 지킬수록 불행해지는 의리. 내가 사랑하자고 했지 의리 지켜달랬니? 차라리 나하고는 사랑을 하고 의리는 다른 사람하고 지켜. 그 일이 있은 얼마 뒤 유철이 홀연 이스탄불로 떠났다. 그날 일로 그도 둘의 심각성을 각성했을 거라고, 정희는 생각했다. 그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정희도 제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 행복하자고 한 결혼이 서로 불행하므로 더이상 유지할 까닭이 없었다. 너도 싫지? 떠나줘. 내 침대에서 나가.

“혜승이는 내가 키울게.”

“여행 다녀올래? 어디든 가서 너 있고 싶은 만큼 있다 와.”

“당신 없는 데서 있고 싶은 만큼 있으려고.”

“충분히 생각했나?”

“했어.”

유철이 다시 서류를 보았다. 아내가 생각을 마쳤다. 유철 또한 마음에도 없는 미련으로 상황을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가장 밀접한 스킨십을 갖는 관계가 부부임에도 그것을 서로 거부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멀어졌다. 차라리 남남이 더 나았을 정도로. 하늘이 어떤 연유로 이런 둘을 부부의 연으로 묶었는지 몰라도, 정희가 이제 그것을 둘이서 풀자고 했다. 하늘에서 어떤 처벌을 받을지라도 사는 동안에는 좀 행복해야겠노라고. 하늘이 부부로 죽어야만 거둔다면 차라리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겠노라고. 유철도 그만 마음을 정했다. 만들면서 가꾸는 사랑, 나는 모르겠다. 사랑하면 만들어지더라. 미안하다.

“하자.”

 

이혼에 합의한 유철이 잠실의 한 오피스텔을 급히 얻어 나왔다. 이혼의 상처를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국정감사를 마치고는 총선에 대비했다. 유철은 김보좌관과 긴밀하게 협조하며 만전을 기했다. 비례대표 때와는 달랐다. 최대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싸움이었다. 김보좌관이 그동안의 경험으로 유철을 뒷받침했다. 선대위와는 별개로 뒤에서 전체 흐름을 파악해 기민하게 유철에게 조언했다. 이혼으로 내조 유세가 날아갔으니 그만큼 더 뛰어야 했다. 유철은 해볼 만한 인물이었다.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선거는 똑똑한 자가 아니라 매력 있는 자가 이긴다. 이왕 혼자 된 몸, 후방 지원 배우자가 없으면 전방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달리면 그만이었다. 솔로는 솔로만의 자유로운 매력이 있는 법이다. 예상대로 유철의 경남 공천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이 지역이라면 몸 사리는 의원이 많았다. 유철의 고향에서 공천받았으면 금상첨화였겠으나 아쉽게도 옆의 인근 도시 지역구로 낙점됐다. 진보진영이 승리하기에 까다로운 지역이었다. 선대위가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유철도 매끈하게 잘 움직였다. 몰래 손질받은 사람처럼 혈색도 좋아졌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유권자들을 찾아다녔다. 유철은 옆 도시 출신이라는 친근감으로 밀착도를 높였다. 유철의 깍듯한 미소와 신사적인 몸짓이 젊은 층을 움직였다. 눅눅하지 않은 차분함이 세련된 듬직함으로 어필됐다. 기대고 싶은 아저씨. 그의 출신 지역과 국방위 경력이 어른들을 움직였다. 싹이 보이는 젊은 친구. 지역의료원을 폐지하고 아이들 급식 문제로 소란을 피운 상대당 도지사의 행실도 한몫했다. 그 결과 유철이 상대 후보를 근소한 표차로 앞질러 당선되었다. 보수 텃밭에서 세련되고 안정적인 진보가 먹혔다. 설마설마한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유철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유철이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다. 그 결과 대통령이 탄핵되었고, 곧 조기 대선이 확정됐다. 그리고 자당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럼에도 정국은 여전히 혼란했으므로 승리를 만끽할 여유가 없었다. 청와대의 발 빠른 내각 구성으로 눈뜨면 새 인물이 속속 발표됐지만, 전 정권 사람들이 주요 요직을 내려놓지 않은 상태였다. 누구는 눈치껏 나가려다 잡히고, 누구는 눈치 없이 꿋꿋이 버티고, 누구는 오라면 오겠고 가라면 가겠습니다, 하는 오픈마인드로 살얼음판을 견디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벌써 제 몫 챙기려다 여론의 뭇매로 은근슬쩍 꼬리 내리는 의원도 더러 있었다. 저게 왜 잔칫집에서 진상을 떨어. 박수 칠 때 떠나고 싶냐? 대선은 끝났지만 국민들의 눈은 여전히 매서웠다. 유철은 시간이 허락되는 한 주민들을 만났다. 국회가 열리는 주중에는 서울에 있어도 주말에는 꼭 지역구로 내려갔다. 대선에 이겼다고 해서 주민들의 삶이 당장 바뀐 것도 아니었다. 의원실로 접수되는 민원과 미팅 요청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천 청소나 경로잔치 같은 각종 지역행사에도 최대한 참석했다.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정치인이 되어 그들과 함께했다. 사랑. 여자. 이혼한 뒤 그런 것은 뒷전이었다. 그랬는데 도연이 또각또각 걸어와 자신 앞에 서버렸다. 반갑습니다. 네. 자꾸 떠오르는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아뇨, 제 딸은 제 책을 읽지 않습니다. 읽었다면 책에 나온 내용을 저한테 물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하하. 김보좌관이 경전철사업 간담회 일정으로 재촉해도 유철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어떻게 또 당신 혼자 두고 가. 심지어 그곳은 자신의 지역구였다. 그럼에도 결국 또 먼저 자리를 떠야 했다. 그런 운명인가보다. 미안해요, 도연씨. 그뒤로 유철은 더욱 일에 매달렸다. 꼭 두달이었다. 김보좌관이 상반기 지역주민들과의 만남에 대해 말하기까지는 잘 버텼다. 김보좌관이 이 행사를 선포식 때 북콘서트처럼 하자고 제안했다. 유철 혼자 강연처럼 하는 것은 추세에도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선포식 때 그 작가님 어때요? 주민들한테도 친숙할 것 같은데요.”

유철의 입이 자제력을 잃고 도연을 부르고 말았다. 떠오르는 작가가 도연뿐이었고,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김보좌관도 찬성했다. 올해 시에서 회자되는 작가로 자주 방문하면 보기에도 좋았다. 문제는 섭외였다. 그까짓 거 뭐 어렵겠나 했다. 그런데 출판사가 도연의 연락처를 쉽게 넘기지 않았다. 중간 연락책처럼 끼어서 귀찮게 굴었다. 작가가 저밖에 없나. 김보좌관은 도연이 영 까다로운 것 같아 다른 작가를 섭외할 요량으로 유철에게 저간의 사정을 보고했다.

“예에, 그럼 제가 직접 말해볼게요. 제 초청이잖습니까. 그러고도 연락이 오지 않으면 다른 방책을 생각해봐야지요.”

그러고 넘긴 유철의 전화번호는 외부로 공개된 것이 아니었다. 최측근만 사용하는 번호였다. 기다립니다. 그 공항에서 당신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제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내게 한번만 더 와주십시오. 유철은 그렇게 사흘째 도연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

 

도연이 출판사로부터 넘겨받은 유철의 번호를 휴대전화 액정에 띄우고 손톱으로 톡톡 쳤다. 유철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어떡할까요. 갈까요? 한번은 보냈지만 두번은 못 보낼 것 같습니다. 도연이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팔로 안았다. 바라보는 상대와 그의 아내까지 의식해야 하는 사랑은 피곤했다. 행복해야 할 사랑에 피곤과 괴로움을 섞고 싶지 않았다. 도연은 타인의 상처에 눈감는 사랑의 이기심이 싫었다. 그러나 지금 유철이 내민 손을 잡는다면 분명 저러한 이기적인 사랑을 하고 말 것이었다. 그럼에도 액정을 내리지 못하고 유철의 번호를 계속 툭툭 치고 있는 것이다. 단지 번호만 알았을 뿐인데도 그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고 싶어 미치겠네. 손가락을 조금만 내리면 통화버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통화버튼까지 내려왔다. 보고 싶은 데에는 장사가 없었다. 도연이 길게 숨을 내쉬고 결국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에 미세한 악센트가 들어간 유철 특유의 억양이었다. 하도연입니다. 하아, 안도하는 듯한 유철의 숨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기다렸습니다.”

“지금 갈게요.”

“거기 있어요. 내가 가요.”

“내가 가고 싶어요.”

“그럼 택시 타고 석촌호수 다리 앞으로 와요. 내가 있을게요.”

도연이 대충 머리를 올려 묶고 얇은 카디건을 걸쳤다. 학원 수업으로 인영은 아직 오지 않았다. 도연이 냉장고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엄마 나갔다 올게. 늦으면 먼저 자. 도연이 집을 나왔다. 도연의 등 뒤에서 전자키가 쉬익 소리를 내며 잠겼다.

 

택시가 양쪽에 호수를 낀 긴 다리를 건넜다. 다리 앞에 유철이 있었다. 이스탄불에서처럼 캐주얼 차림이었다. 도연이 저 남자분 앞에 세워주세요,라고 했고, 기사가 능숙하게 유철 앞에 택시를 세웠다. 도연이 내리고 택시가 떠났다. 유철이 예의 그 뒷짐을 지고 도연을 맞았다. 도연도 똑같은 뒷짐으로 그와 마주했다.

“의원님.”

“작가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소가 터졌다. 다시 조우한 유철과 도연이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웃음이었다. 어쩐지 미안하고 어쩐지 후련했다. 유철과 도연이 호숫가 둘레 산책길을 걸었다. 서로 너의 정체가 그거였냐고 촌스럽게 따지지 않았다. 몰랐어도 문제없었듯 알았어도 문제없는 거였다. 다시 만난 설렘과 반가움으로 그 순간을 즐겼다.

“이번 행사 누가 기획했어요?”

“김보좌관님이 기획하고, 제가 섭외했습니다.”

“저는 섭외 몇순위였어요?”

“영순위. 그 밑으로는 없습니다.”

도연이 얼굴을 돌려 유철을 빤히 보았다.

“전부터 느낀 건데, 유철씨는 참 가만히 뻔뻔해요.”

유철이 인정하듯 껄껄 웃었다. 유철과 도연은 그새 호수를 한바퀴 돌았다. 돌아 도연이 택시에서 내린 곳까지 왔다. 유철이 도연을 말없이 보았다. 너무 짧은 만남이어서 잘 가,라는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숙소가 있음에도 차마 그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보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여자. 이곳은 이스탄불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방랑이 허용되지 않는 서울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할 말 있어요?”

“그냥, 조금만 더 보고 싶어서요.”

“그럼 오늘 같이 잘래요?”

“잘합니까?”

“아시다시피요.”

도연이 유철에게 손을 내밀었고, 유철이 힘껏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알지요, 아주아주 잘. 유철과 도연은 그대로 호숫가 뒤에 있는 유철의 오피스텔로 걸어갔다.

 

시간이 흘렀어도 몸이 서로의 감촉을 고스란히 기억했다. 둘은 변하지 않은 몸의 감각에 안도하며 마음껏 몸을 맡겼다. 보고 싶었어요. 방송에 좀 나오지 그랬어요, 내가 찾아가게. 왔을까요? 당연히. 둘이 있는 것이 좋아도 너무 좋아서 마주 보고 입 맞추고 또 마주 보던 밤이었다. 도연이 유철의 팔을 베고 누워 그를 꼭 안았다. 포근하고 편안했다. 유철이 제 다리를 도연의 다리에 감아 몸을 밀착시켰다. 완벽한 밀착이었음에도 도연의 몸에 거리낌이 없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의 곡선에 맞춰 안겼다. 의심의 여지 없이 내 남자라는 확신이 있을 때나 가능한 몸의 반응이었다. 그 편안함에 오히려 당황한 도연이 유철에게서 가슴을 살짝 떼었다.

“전에 나 앙카라에 갈 때 유철씨 안 갔잖아요. 혹시 여권 때문이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갑자기 생각났어요. 여행사에서 여권 달라고 할 때 주춤했잖아요.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여권 때문에 그런 거죠? 관용여권이라. 맞죠? 가짜 강사님.”

“혼자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요?”

“나도 그랬어요. 그런데 침대 좀 어떻게 안 될까요?”

“좀 시끄러웠죠?”

“삐걱삐걱, 얘가 너무 느끼는 것 같아요.”

“하하하. 어떻게 해볼게요.”

숙소를 얻고 급하게 놓은 간이침대였다. 둘은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를 내는 좁은 침대에서 키득키득 오랫동안 수다를 떨었다. 근데 그…… 그 작가 알아요? 알아요. 사인 좀 받아주세요. 그 깐깐한 의원님 사인하고 바꿉시다. 오케이. 행사 때 필요한 거 있어요? 마이크. 테이블에 고정시켜주세요. 들었다 놨다 하는 거 불편해요. 보는 사람들도 정신 사납고요. 알았어요. 다른 건요? 글 쓰는 노동자들을 위해 마감무효법 좀 만들어주세요. 당장 추진해볼게요.

 

 

2

 

도연은 잠결에 누가 입을 맞추는 것에 깜짝 놀랐다. 눈을 떠보니 유철이었다. 말끔한 정장차림이었다. 도연이 아, 하고 도로 눈을 감았다.

“조찬회의가 있어요.”

“나는 누가 그런 회의 하자고 하면 칼 들고 갈 거예요.”

“더 자요, 전화할게요.”

도연이 눈 감은 채 입술을 쭉 내밀었다. 유철이 도연에게 입을 맞춰주고 오피스텔을 나갔다.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가 그대로 있길 바랐다. 이스탄불에서처럼 아직 잠든 그녀에게 다가가 더 잘래요? 하고 묻고 싶었다. 그러면 그때처럼 다 잤어요, 하고 잠결에도 안아줬으면. 일단 침대부터 알아봐야겠군. 유철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아직 제 집에 도연이 있다. 기분 좋은 출근길이었다. 유철이 출근하고 얼마 뒤, 도연이 벌떡 일어났다. 못살아. 도연이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인영의 잔소리가 벌써 귀에 쟁쟁했다. 서두르면 등교 시간을 맞출 수도 있었다. 도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피스텔을 나갔다.

 

도연이 집으로 들어가 조용히 신발을 벗을 때, 인영이 방에서 불쑥 나왔다.

“이제는 말도 안 하고 외박이야?”

“연애하느라 바빠서 전화 못했어.”

“웃겨. 엄마 요즘 만나는 사람 없잖아. 또 누구랑 밤새 술 마셨지? 작가들은 왜 그렇게 시간개념이 없어? 왜 밤에만 돌아다니는데!”

“우리가 음지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라……”

“됐고, 나 교통카드 충전해야 해.”

도연이 얼른 지갑에서 삼만원을 내주고 인영을 배웅했다.

“딸, 잘 다녀와.”

인영이 도연을 흘겨보고 집을 나갔다. 늦지 않게 도착해 인영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도연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엎어졌다. 못다 잔 잠을 마저 자야 했다. 잠든 도연이 다시 눈을 뜬 것은 오후에 유철의 문자를 받고서였다. 다음주 수요일 시청 소강당. 2시. 시간 되면 조금 일찍 와서 여기 식구들하고 점심식사 했으면 합니다. 도연이 답을 보냈다. 12시까지 갈게요. 그리고 편집자 시정에게 전화했다. 그때 그게 이러저러하게 됐는데 함께 갈 수 있겠느냐 물었고, 시정은 그게 그렇게 이렇게 된 거였군요, 비행기표 예매하고 연락드릴게요,라고 답했다. 시정이 함께 가줘서 다행이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도 전화했다.

“엄마, 다음주 수요일 시간 돼? 나 지방 행사 있어.”

“그날 바로 올라오니?”

“너무 멀어서 피곤하면 자고 다음날 오려고.”

“인영이는 괜찮니? 즈이 아빠 재혼한 거 알고 힘들어하던데.”

“안 괜찮겠지. 혼자 이겨내는 중이야.”

“기특한 것. 너는 만나는 남자 없니?”

“어제 좋은 남자랑 자고 왔어.”

“말을 말자. 알았어, 전날 미리 갈게.”

언제쯤이면 결혼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번 해봤고 해보니 연애가 더 잘 맞았다. 2세 때문이라면 예쁜 딸이 옆에 잘 있다. 그런데 왜 그리 닦달하나. 당신 딸 멀쩡하게 잘사는 거 알면서 왜 그러는지 몰랐다. 해보니까 안 좋습디다. 어지간히 합시다,들!

 

○○시 지역주민들과의 만남이 있기 전날, 도연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집으로 왔다. 아버지가 큰 수박을, 어머니가 각종 밑반찬이 든 찬합을 들고 왔다. 도연이 수박을 건네받아 쟁반에 놓고 칼을 들었다. 그러고는 기세 좋게 수박 가운데를 푹 찌르더니 너무 깊이 박힌 칼을 빼내지 못해 끙끙거렸다.

“이게 왜 안 빠져. 아빠, 수박이 칼을 물었어.”

“나와라.”

도연의 아버지가 칼 손잡이를 쥐고 그대로 북북 수박을 갈랐다. 아버지는 도연이 늘 불안했다. 도무지 야무진 구석이 없었다. 집안 어른들은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렇다고 하지만, 제가 한번 마음먹은 것에는 놀라울 만큼 집중하는 아이였다. 그러면 됐지 뭐, 하고 키웠는데 나이를 먹어도 서툰 일이 많았다. 도연은 제 오빠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은 엄격하게 키웠다. 반면 도연은 늦게 본 딸내미라 저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그래도 누구한테 미움 살 행동은 하지 않았다. 캐러멜만 쥐여주면 오랫동안 얌전히 있었다. 오물오물 먹는 모습이 예뻐 나중에 언놈이 데리고 갈까 미리 질투도 했었다. 도연과 결혼할 남자는 아버지 기준에 완벽하게 부응해야 했다. 그런 놈이 아니면 절대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그랬는데 도연이 대학 4년 때 언놈을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나 임신했어요.”

실습현장에서 만난 녀석이었다. 애를 지우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둘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차마 반대할 수가 없었다. 내 딸이 좋아하는 남자라니까, 아버지 어머니 있는 데서도 쪽쪽 입 맞추며 좋아하니까, 그래 해라, 하고 아버지도 허락했다. 도연은 그랬다. 좋으면 그냥 좋아하는 아이였다. 좋아하는 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도 있고,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을 세련된 사랑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도연은 그런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내 입이 저절로 말하는데 어떡해. 사랑합니다. 애들이 애를 낳고 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잘 사는가 싶던 어느날, 도연이 그와 헤어지겠다고 했다. 바람피우더냐? 아니. 그럼 너야?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부부면서도 같은 것을 전혀 다르게 보았다. 가치관이 너무 달라 하루가 멀다 하고 부딪쳤다. 그렇게 하는 게 맞지. 내 생각은 달라. 말을 해야 알지, 말을! 말하고 싶지 않아. 왜 남편한테 말을 못해? 내 남편이 너라서. 그가 팬티를 벗기는 게 폭력으로 느껴졌을 때, 도연은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헤어져야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부모님이 용납할 이혼조건이 아니었다.

“남들은 다르게 살 것 같으냐? 부부의 연이 그렇게 지독한 거다.”

부부가 뭔데 그토록 싫음에도 함께 살아야 합니까. 도대체 부부의 연이 뭔데 단 한번의 선택으로 평생을 살라고 하십니까. 인간이 그토록 완벽한 존재입니까. 실패한 결혼을 인정할 수 없어 억지의 삶을 살 수는 없었다. 실패에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새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도연은 그러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통념에 어긋났으므로 말하는 순간 얻는 것보다 잃는 의미가 더 많았다.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너무 아픈 눈물이었다. 더 살라고 하면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았다. 도연은 좋고 싫음이 명확했다. 완충 작용을 할 가운데가 없었다. 아버지가 가장 염려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예스와 노를 번복하지 않았다. 합니다, 하면 하는 것이고 안 합니다, 하면 안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 번복하려 들면 저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차갑게 변했다. 그렇게 싫으냐? 싫어요. 헤어져라. 결혼하고 꼭 삼년 만이었다. 도연은 이혼하고 나서야 밝아졌고 종래의 예쁜 딸로 돌아왔다. 이제는 무슨 글을 쓰면서 이름 좀 난 모양이지만, 아버지는 그럼에도 도연 옆에 든든한 배우자가 있길 바랐다. 아버지와는 다른 버팀목으로 도연 옆에 있길 바랐다.

“너 남자 있다고?”

“있어.”

“결혼도 생각하고?”

“연애만 할 거야. 나는 연애가 체질인 것 같아.”

“결혼해도 애 안 낳으면 연애하는 것처럼 살 수 있다.”

“내가 벌써 낳아버렸잖아.”

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가져온 반찬을 다른 그릇에 옮겨 담던 어머니도 한숨 쉬었다. 도연이 어머니에게로 갔다. 무슨 나물을 이렇게 잔뜩 해 왔어, 하고 맨손으로 맛을 보았다. 먹어라 잔뜩…… 어머니가 도연에게 젓가락을 내주었다. 저녁은 어머니가 해 온 반찬과 어머니가 한 반찬으로 차렸다. 밥은 도연이 올렸다. 그러나 둘의 것만 하다가 네명의 것을 하려니 밥물 맞추기에 실패했다.

“엄마, 밥이 너무 되게 됐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기에 밥도 제대로 못하니?”

그러자 도연의 아버지가 슬쩍 도연의 역성을 들었다.

“전기밥솥 밥이 안 되면 얼마나 안 된다고 그래?”

“아빠, 좀 심하게 잘못됐어.”

“괜찮아. 된밥이 위에는 좋다더라.”

학원수업이 있는 인영을 기다리는 바람에 저녁이 많이 늦어졌다. 인영은 외할머니 오는 날만큼은 제대로 된 집밥을 먹을 수 있어서 군것질도 하지 않고 돌아왔다. 역시 맛있는 찌개와 각종 반찬으로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문제는 씹어도 씹어도 잘 부서지지 않는 된밥이었다. 엄마가 밥했지? 누룽지야? 반찬이 좋으니까 그냥 먹어. 인영아, 집에 소화제 있니? 어허, 이 사람이, 괜찮구먼 왜 그래? 당신 내 밥 좀 더 드실라우? 난 됐어. 당신 위 안 좋은 것 같던데? 좋아. 식사를 마치고 도연이 설거지를 끝냈을 때는 자정이 가까웠다.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며 잠들 것이었다. 어머니는 도연과 함께 자기로 했다. 도연이 어머니가 먼저 누워 있는 제 방 침대로 쏙 들어갔다.

“얘, 너 사실은 남자 없지? 아빠한테 거짓말한 거지?”

“있어. 내일 만나러 가잖아.”

“행사 간다며?”

“일도 하고 연애도 할 거야.”

“제발 좀 그래라. 얼른 자.”

도연이 씩 웃으며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

 

도연과 시정이 공항으로 마중 나온 김보좌관의 차에 올라탔다. 유철은 지역 사무실 직원들과 한정식 식당에서 도연 일행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김보좌관의 차가 공항로를 빠져나와 지방도로를 달렸다. 김보좌관은 과속방지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만 속도를 잠깐 늦추고 나머지는 레이싱 하듯 달렸다. 그 속도면 공항에서 짜장면을 주문하고 출발해도 식사에 늦지 않을 것 같았다. 굴곡진 길마저 휘이익 휘익 돌았다. 간담이 서늘해진 도연과 시정이 안전벨트를 꽉 쥐었다. 시정씨, 우리 가는 식당 앞에 피니시라인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러면 1위는 우리가 확실해요. 다행히 유철이 기다리고 있는 식당은 지방도로 출구에서 멀지 않았다. 김보좌관의 차가 한식집 앞에서 멈췄다. 도연과 시정이 살아 온 것에 안도할 지경이었다. 도연이 차에서 내려 심호흡을 하고 식당을 살폈다. 까만 기와로 지붕을 덮은 한옥이었다. 각종 분재와 석등으로 꾸민 정원도 고풍스러웠다. 김보좌관이 유철과 통화했다.

“작가님 도착하셨습니다.”

도연과 시정이 김보좌관을 따라 정원 가운데를 통과했다. 예약된 후원 내실로 가는 길이었다. 내실 문 앞에는 신발들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김보좌관이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먼저 와 있던 여섯이 모두 서서 도연 일행을 맞았다. 도연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유철이 도연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오는 데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네. 공항에서 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습니다.”

뒤따라 들어온 김보좌관이 도연에게 유철 옆자리를 권했다. 도연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시정에게 자신 옆으로 오라고 했다. 시정은 매우 센스 있고 우직했다. 이런 어색한 자리에서 도연에게 난감한 질문이나 부탁이 들어오면 매끈하게 잘 처리했다. 대개 도연의 휴대전화 번호나 메일주소를 알려달라거나, 혹은 본 김에 하는 청탁 또는 강연 요청이었다. 그러면 시정이 바로 제 명함을 내밀었다. 도연은 시정이 옆에 있어야 든든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음식이 나왔다. 유철이 미리 주문한 이 집 대표 메뉴였다. 식사하는 동안 이러저러한 말이 오갔다. 보낸 대본은 마음에 드느냐, 의원님은 좀 알고 있었느냐 등등의 질문이었다. 도연은 의원님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쓰신 책을 읽어보고 대략 감만 잡았다고 했다. 질문이 도연에게 이어지자 눈치 빠른 시정이 질문의 방향을 유철에게로 돌렸다.

“의원님은 선생님 책 좀 읽으셨어요?”

“이번에 선정된 책하고 전에 쓰신 거 몇권 읽어봤습니다.”

“어떠셨어요?”

“재밌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역시 시정이었다. 어떤 자리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사인을 받으려 해도 웃으며 줄 세울 사람이었다. 시정 때문에 웃느라 정신없는 도연에게 유철이 식사를 권했다.

“작가님, 이따가 일해야 하는데 웃지만 말고 좀 드세요.”

“네. 거기 화전 좀 주세요.”

유철이 화전 접시를 들어 도연이 손대지 않은 생선조림과 자리를 바꿨다.

“두분이 그렇게 계시니까, 꼭 부부 같습니다. 하하하.”

김보좌관이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맞장구로 거들었다. 진짜 딱 그러네요. 하늘하늘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도연과 남색 정장 차림의 유철이 나란히 앉으니 그래 보이기도 했다.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먹으면서도 김보좌관이 비슷한 농담을 이어갔는데, 도연이 이거 맛있네요, 하고 말을 돌렸다. 그러자 유철이 제 수정과를 도연에게 내밀었다. 더 드세요. 도연이 깜짝 놀랐다. 과민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둘이 있을 때 유철이 종종 하는 행동이었다. 고맙습니다. 도연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의 수정과를 받아 마셨다.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을 거였다. 후식을 다 먹어도 행사까지 조금 여유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일단 시청 청사 1층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갈이 깔린 주차장은 힐을 신고 걷기에 불편했다. 도연이 까치발로 걷자 유철이 팔꿈치를 잡아주었다. 고맙습니다, 도연이 인사했고 유철이 고개를 까딱했다. 차가 세대. 어느 것을 타야 하나, 도연과 시정이 잠시 머뭇했다. 유철이 도연의 팔꿈치를 놓고 차 문을 열었다.

“작가님은 제 차로 가시지요. 가면서 말 좀 맞춥시다. 보좌관님이 편집장님 좀 잘 모셔주세요.”

시정이 도연에게 작게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시정이 김보좌관의 차로 갔다. 유철이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출발하라고 했다. 일행을 태운 두대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유철은 앞선 차량들이 식당 옆길로 사라질 때까지 기어를 바꾸지 않았다. 대신 기어 쪽으로 손을 뻗어 도연의 손을 잡았다.

“뽀뽀하고 싶지요?”

“네.”

“이따가 많이 해줄게요.”

유철이 기어를 바꾸고 서서히 출발했다.

“침대 바꿨어요. 더 필요한 거 있어요?”

“없어요. 하하하.”

유철은 김보좌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느긋하게 달렸다. 과속방지턱이 아직 멀었는데도 미리 속도를 줄였고, 가는 도중 신호등에도 자주 걸렸다. 그럼에도 함께 차 안에 있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유철의 차가 시청 청사 쪽으로 들어서자 출입문 앞에 서 있던 김보좌관이 손짓했다. 미리 주차할 자리를 맡아두었다. 유철이 안내받은 곳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자 몇몇 시민들이 의원님! 하고 소리쳤다. 도연이 그들을 피해 먼저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시정이 미리 사둔 레모네이드를 도연에게 내밀었다. 시정은 도연의 취향을 잘 알았다. 사무실 직원들은 행사 준비로 먼저 들어가고 없었다. 도연과 시정이 음료를 마시며 창 너머로 유철을 보았다. 유철은 시민들과 사진 찍느라 바빴다. 시정이 도연에게 낮게 말했다.

“저 의원님, 대놓고 정치인 냄새가 안 나요. 그렇다고 너무 안 나는 것도 아니고. 포지션을 잘 잡았어요. 슈트발 좀 봐. 어깨하고 등에 군살이 없어서 핏이 똑 떨어져요. 아까 식당에서 재킷 벗은 거 보셨어요? 와이셔츠에 넥타이만으로 패션을 완성시키더라고요.”

도연이 끄덕끄덕 시정의 말에 호응했다. 무언가를 집중해서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것에는 편집자가 최고였다.

“저분 사모님이 관리를 되게 잘하는 것 같아요.”

도연이 이번에도 역시 으음, 호응한 뒤 서둘러 다른 화제로 돌렸다.

“그건 그렇고, 시정씨 동생 요맘때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주 남았어요. 얘가 주책인 게, 첫날밤에 어떤 자세로 해야 예쁘겠냐는 거예요. 그날 입을 속옷을 물어보는 사람은 봤어도, 그런 걸 물어보는 애는 처음이에요.”

“그게 옷하고 똑같아요. 예쁜 사람들이 해봐요. 뭔들 안 예쁘겠어요.”

“하긴 그러네요. 뭐, 지 신랑 지가 알아서 잘 부려먹겠죠.”

“하하하. 그거는 시키거나 해주는 게 아니라 같이하는 거예요. 동생이 아직 경험이 없나봐요?”

“둘이 여행을 얼마나 많이 다니는데요.”

“함께 여행한다고 다 자는 건 아니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만, 날짜까지 잡은 애들이 손만 잡고 자도 이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러셨어요?”

“나는 손잡는 것보다 키스가 빨랐고, 결혼보다 임신이 빨랐어요.”

“손도 안 잡고 키스하셨어요?”

“나 서 있는데, 그 사람이 툭 키스하고 가더라고요.”

“가만히 계셨어요?”

“나도 좋아하고 있었거든요. 하하하.”

그때, 사진 찍어주는 것으로 대민봉사를 마친 유철이 김보좌관과 함께 커피숍으로 들어왔다.

“두분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세요?”

“제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언니 제치고 가는 동생 흉 좀 봤어요.”

유철이 빙긋 웃었다. 곧 행사 시작이었다. 모두 소강당 대기실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김보좌관이 앞장섰다. 대기실로 가는 중에도 몇몇 시민이 의원님! 하고 불렀다. 유철이 웃으며 일일이 인사를 했다. 정치인도 참 힘들겠다,고 도연은 생각했다.

 

유철의 짧은 인사말로 행사가 시작됐다. 유철이 인사를 마치고 내려가자마자 진행요원들이 테이블을 무대로 올렸다. 테이블용 작은 스탠드마이크도 두개 놓였다. 사회자는 핸드마이크를 사용하고 도연과 유철만 스탠드마이크를 사용했다. 도연은 안 그래도 불편한 무대에서 마이크를 든 손까지 불편한 것이 싫었다. 옆사람의 말이 길어지면 잠시 내려놓기는 해도 질문이 오면 곧 다시 들어야 했다. 한번은 멍하니 다른 사람 말을 듣고 있다가 작가님? 하고 질문하기에 그대로 대답했는데, 마이크 들고 얘기해주세요, 하는 바람에 적이 당황했었다. 이날은 그럴 염려가 없었다. 무대가 정리되고 유철과 도연이 함께 무대로 올라갔다. 청사 입구에서는 아무도 도연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회자가 소개를 하니 그제야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시 올해의 작가, 하도연입니다.”

사회자가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 분위기를 띄웠다.

“작가님, 우리 의원님 지나치게 잘생긴 것 같지 않습니까?”

“질문이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냥 잘생기셨습니다.”

그 말에 유철이 넥타이 매듭을 만지며 껄껄 웃었다.

“그럼 그냥 잘생긴 의원님께 묻겠습니다. 작가님은 어떠신 것 같습니까?”

“지나치게 예쁘십니다. 하하하.”

“미묘한 답인데요. 어떠세요, 지나치게 예쁘신 작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유쾌한 출발이었다. 본 질문은 대개 유철이 답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청년 일자리, 경전철의 수익구조, 중소기업의 열악한 노동환경, 재래시장의 공용주차장 설립 등 지역 현안에 관한 질문이었다. 유철은 진지하고 차분하게 제 의견을 말했다. 도연은 외부인 눈에 비친 지역감정에 대한 사견, 지역 예술인에 대한 처우와 활동 제약, 예술가는 타고나는 것인가, 하는 질문 등을 받았다. 유철과 도연이 무대에서 재치있는 우스갯소리를 못하는 사람들이라 종종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했다. 하지만 행사의 전반적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경과보고처럼 유철 혼자 하는 것보다 좋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도연과 유철은 주민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사인도 한 뒤 행사를 마무리했다. 도연은 행사를 마치자마자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가는 중에 유철에게 문자를 받았다. 7시 비행기로 올라갑니다. 맛있는 거 사 갈게요.

 

*

 

먼저 잠실 오피스텔에 도착한 도연이 준비해 온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돌돌 말면 가방에 쏙 들어가는 면 재질의 홈웨어 원피스였다. 스타킹을 벗으니 그제야 다리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발가락을 폈다 오므렸다 하며 구두로 고생한 발도 쉬게 했다. 보통 때는 스니커즈를 신어서 구두를 신은 날은 종아리까지 아팠다. 도연이 벗은 옷가지를 들고 오피스텔을 둘러보았다. 지난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발에 치이던 잡다한 물건들도 거의 사라졌다. 창가 책상 앞으로 이인용 소파가 아담하게 놓였고, 새로 산 침대는 파티션으로 잘 가려져 있었다. 그저 사무실만 같았던 오피스텔이 살짝 아늑하게 바뀌었다. 무엇을 들여서가 아니라 무엇을 치워서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이었다. 도연이 들고 있던 옷가지와 가방을 소파 한쪽에 내려놓았다. 이제 유철이 올 때까지 잠시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간밤에는 아버지가 크게 틀어놓은 TV 소리에 잠을 설쳤고, 아침에는 밥을 챙기는 어머니 때문에 늦잠도 못 잤다. 그 상태로 지방행사를 다녀왔더니 밀린 졸음이 쏟아졌다. 침대 좋은 걸로 바꿨네, 하며 푹 잠든 도연이 억지로 눈을 뜬 것은, 제 몸 위로 올라와 마구 키스를 퍼붓는 유철 때문이었다.

“뭐야, 잠깐만요, 잠깐만요.”

“신랑도 안 왔는데, 각시가 먼저 자면 됩니까?”

여전히 비몽사몽인 도연이 허탈하게 웃었다.

“졸려 미치겠네. 일단 한번 합시다.”

도연은 잠결에 키스하고 잠결에 그를 깊이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잠기운이 얼마나 센지 계속 나른하고 졸렸다. 몽중 섹스. 도연은 그 상황이 어이없어 흐흐 웃었다.

“하란다고 진짜 하네. 맛있는 거 뭐 사 왔어요?”

“우리 지역 명품 도시락. 수제떡갈비도시락이에요.”

“으음. 맛있겠어요.”

“빨리하고 먹을까요?”

“아니. 이렇게 하는 것도 되게 좋아요. 흐흐흐…… 웃겨 죽겠네.”

“언제까지 할까요?”

“밤새워.”

둘이 함께 있는 것이 좋았고, 같이 한 프로그램을 마치고 온 것도 좋았다. 오늘 잘했어요. 유철씨가 잘 끌어줬잖아요. 불편한 질문에 대신 답도 해주고. 나는 안 불편했으니까. 그래도 이런 건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알았어요. 식었지만 도시락은 맛있었다. 함께 마신 맥주도 좋았다. 유철이 도연에게 오피스텔을 언제든 자유롭게 쓰라고 했다. 그러나 도연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철의 공간을 자유롭게 점유할 여자는 자신이 아니었다. 나는 이만큼만 가지겠습니다. 도연이 유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얼마 마시지 않은 맥주가 슬슬 올라오는 것 같았다. 유철이 도연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가만히 물었다.

“내가 프러포즈 하면 받아줄래요?”

“남편급 애인 정도로 받아줄게요.”

“내가 남편으로 싫은 건 아닌 거죠?”

“싫진 않죠.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요?”

“당신 남편이고 싶어서……”

“혹시…… 이혼 생각하는 건 아니죠?”

“벌써 했죠.”

“이혼했다고요?”

“네. 도연씨보다는 많이 늦었지만요.”

“그걸 왜 이제 얘기해요!”

하하하. 유철이 도연을 와락 안고 소파에 눕혔다. 아 진짜……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아요? 유철이 흥분해서 아무 말이나 퍼붓는 도연에게 연신 입을 맞추었다. 아, 잠깐만! 미안해요, 나도 당신 이혼한 거 몰랐었어요.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어요. 도연이 유철을 꼭 안았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나. 그동안 둘이 꼭 같은 마음으로 상대의 배우자를 거론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래서였구나. 이곳에 처음 온 그날, 몸이 먼저 알아버렸다. 유철이 거리낌 없이 폭 안았으므로 몸이 당연하게 안겼다. 몸이 본능적으로 제 짝을 감지했다. 그래서 그렇게 편했던 거였다. 도연이 유철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그 말 꼭 듣고 싶었는데, 이년이나 걸렸네요.”

“이제 많이 해줄게요. 세상에, 술이 확 깨네.”

“우리 시원하게 호수 산책하고 올래요?”

“가요.”

둘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오피스텔을 나왔다.

 

유철이 도연의 이혼을 알게 된 것은 이날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오후에는 주민들과의 만남 행사 뒤풀이 회식이 있었다. 유철과 김보좌관은 다음날 국회 일정으로 먼저 일어서야 했는데, 유철이 공항으로 가기 전에 시에서 유명한 한 도시락집부터 들렀다. 이 집 대표 메뉴 도시락을 예약해둔 것이다. 두개라. 김보좌관이 유철을 보좌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보좌관의 의심이 역시로 바뀌었고, 비행기 내에서는 확신으로 굳었다. 의심은 도연을 섭외하는 과정에서 시작됐었다. 유철이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만 사용하는 번호를 도연에게 넘겼다. 단순 섭외라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의원님이 그 여자한테 마음이 있나? 딸이 있다고 했다. 유부녀와 잘못 얽히면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었다. 김보좌관은 유철 모르게 익히 친분을 쌓아둔 출판계 인사를 통해 도연의 간략한 정보를 얻어냈다. 오래전에 이혼한 상태였다. 상당한 판매부수를 기록한 대표 도서도 있었다. 그 사람이었구나. 의외였고 나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유철과 도연이 서로 연락이 닿았다는 말을 들었다. 유철이 섭외에 성공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김보좌관의 촉이 둘에게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슬쩍슬쩍 둘을 연관 짓는 농을 던지면서 주시했다. 숫기 많은 유철이 도연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나 이날 행사 전 식사 자리에서의 유철은 더이상 숫기 많은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수정과를 도연에게 건네준다거나, 주차장에서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주는 행동도 자연스러웠다. 도연은 또 어떤가. 그의 그런 행동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호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회식 자리에서 공항으로 가기 전에 김보좌관이 유철의 차를 의원실 주차장으로 옮겼는데, 도무지 호기심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끝내 블랙박스 메모리를 빼내어 제 스마트폰에 끼우고 말았다. 뽀뽀하고 싶지요? 네. 그런 대화가 녹음되어 있었다.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이미 가까워진 것 같았다. 김보좌관은 비행기 내에서 슬쩍 유철을 떠보았다.

“도시락을 두개나 사셨네요? 약속 있으십니까?”

“예.”

“예에, 그런데 작가님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재혼을 안 하셨대요?”

“재혼이요?”

“딸이 있어서 힘드셨나?”

“뭐, 딸이 있다고 못했겠습니까. 그럴 만한 남자가 없었겠지요.”

“이혼했어도 워낙 유명한 작가라 눈이 높겠지요?”

“보좌관님은 이런 얘기를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제가 출판 쪽에 아는 사람이 있거든요.”

“예에……”

“혹시 저 도시락을 기다리는 사람이 작가님입니까?”

유철이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 맞군요. 잘 만나고 있습니다. 잘 어울리십니다. 도연의 이혼은 그렇게 알게 된 거였다. 몰랐었다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몰랐음에도 만났다고 하면 말만 길어질 터였다. 그럼에도 입술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남편을 질투하며 전전긍긍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오피스텔에 있을 도연이 너무 보고 싶었다. 자신들의 침대에서 잠든 도연을 보자마자 마구 키스를 해댄 이유였다. 도연의 남자는 과거의 그가 아니라 현재의 자신이었던 것이다.

 

늦은 밤의 호숫가는 호젓했다. 주변 건물들과 가로등의 빛이 호수에 잠긴 야경도 좋았다. 차분하면서 동시에 화려한 밤풍경을 즐기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유철과 도연이 주변을 둘러보고 산책로로 내려왔다. 저 멀리 한 연인이 앞서 걷고 있었다. 술에 취했는지 호숫가 화단 울타리에 기대어 잠든 남자도 있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밤 도연과 유철이 느릿느릿 걸었다. 유철이 도연의 한 손을 끌어당겨 뒷짐 진 모습이었다. 여기에 그 오리가 있었어요. 러버덕이라고. 직접 봤어요? 네, 왔었어요. 나는 그게 왜 있는지 당최 모르겠던데. 사실 나도 왔지만, 그걸 보자고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유철과 도연이 마음 맞아 험담하는 사람들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걔가 평화 메시지를 달고 다닌다잖아요. 그런데 하필 나 왔을 때 철퍼덕 드러누워가지고, 딸하고 싸웠어요.”

“왜요?”

“원래는 전날 오기로 했는데 내가 자느라 못 왔거든요. 그래서 다음날 왔더니 덩치도 산만 한 오리새끼가 술 먹은 것처럼 퍼져 있더라고요.”

도연이 퍼진 오리가 있었던 곳을 보며 웃었다. 그 모습이 예뻐 유철이 도연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 도연도 그런 유철이 예뻐 다시 입을 맞췄다. 가벼운 키스는 연인의 즐거운 놀이였다. 그러면서 도란도란 호숫길을 걸었다. 유철이 자신의 일주일은 월화수목금금금으로 구성됐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주말도 별 감흥이 없다고. 도연은 월월월월월월월이라고 했다. 자신은 늘 월요병 걸린 것처럼 피곤하다고. 지금도 피곤해요? 네. 그럼 들어가요.

 

다음날 아침, 유철이 먼저 일어나 국회로 갔다. 도연은 조금 더 잔 뒤 오후가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예상보다 일찍 온 도연을 보고 반색했다.

“일찍 왔네?”

“어. 아빠는?”

“어제 갔어. 너 왔으니까 엄마 가도 되지?”

“어디 가?”

“엄마 친구들하고 온천 가기로 했었거든. 지금 가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럼 얼른 가. 고생했어.”

“인영이는 학교 갔다.”

“그랬겠지.”

어머니가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도연이 어머니의 용돈을 챙겼다. 고맙다. 어머니가 도연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고 집을 나갔다. 온천 약속이 있었구나. 오기 전에 알았더라면 부르기 곤란했을 것이었다. 늘 그랬다. 도연이 엄마 나 어디 가, 하면 어머니는 알았다,로 답했다. 그것으로 포기해야 할 일정이 있을 텐데도 그런 사정을 도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인영이 도연에게 모든 것의 ‘첫’이듯 아마 도연도 어머니에게 그러했을 것이다. 도연은 알아서든 몰라서든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누렸다. 어머니여야 안심이 됐다. 그러나 안심과 미안함은 별개여서 늘 마음이 무거웠다. 어머니가 거실 커튼을 떼어 빨아 널었다. 가스레인지가 새것처럼 빛났다. 냉장고 속 오래된 반찬들을 버리고 당신이 새로 해 넣었다. 그냥 놀다 가지.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 거예요. 어쨌거나 잘 살고 있잖아요. 이만큼 컸고 이만큼 살았으면 또 그만큼 살겠지요. 그만 걱정하세요. 자식 걱정만큼 부질없고 헛된 수고가 또 있겠습니까. 도연이 커피 물을 올렸다. 간밤에 잠도 푹 잤으니 어쨌든 깨끗한 집에서 종일 책을 읽고 싶었다.

 

도연은 그동안 좀체 읽기 힘들었던 책을 챙겼다. 방해받지 않기 위해 휴대전화도 꺼두었다. 책상 노트북 옆으로 작은 독서대도 올렸다. 독서대에 책을 놓고,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배고프면 라면도 끓여 먹으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겼다. 내용이 파악되고 읽기에 속도가 붙었다. 그러다가 문득 뒷목이 뻐근해 목을 잡고 스트레칭을 했다.

“엄마야! 너 왜 그렇게 서 있어. 언제 왔니?”

인영이 문지방에 서서 도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꼭 이런 일로 실시간 검색어로 떠야 해?”

“뭐가 떴어?”

“한밤의 밀애, 연인인가 불륜인가.”

“불륜 아냐.”

“왜 온 동네 떠들면서 만나고 그래? 쪽팔려서 진짜……”

인영이 휙 돌아 제 방으로 가버렸다. 도연이 노트북을 열어 곧장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아! 마우스를 잡은 손에 힘이 쑥 빠졌다. 기사 제목만 봐도 감이 왔다. 늦은 밤 호수에서 무슨 일이? 한밤의 밀애 혹은 불륜? 자극적으로 호기심을 유발하는 제목이었다. 기사마다 간밤에 유철과 호수를 산책했던 사진이 실렸다. 사위가 어두웠으나 두 사람을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입을 맞추는 사진과 유철이 도연의 손을 잡고 뒷짐 진 사진이었다. 그 와중에 ○○시 올해의 책 도서 선정에 유철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됐다. 제목은 저래도 기사 내용은 관계자의 말을 빌려 현재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했다. 도대체 관계자가 누구인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유철과 도연 자신뿐이었다.

“살다 살다 별 사진을 다 찍히네.”

도연이 댓글을 살폈다. 그래서 불륜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기사 똑바로 안 쓸래? 아래 난독증 있냐? 기사에 좋은 관계라잖아. 그런데 각도상 몰래 찍힌 사진이 아님. 우리 집에도 저 작가 책 있는데, 난 별로. 여기서 주시할 것은 도서 선정 과정입니다. 저 의원이 관여했다면 심각한 겁니다. 현재시각 5시 50분. 인터넷발 첫 기사는 오전 11시 30분에 났다. 괜히 전화기 전원은 꺼가지고. 도연이 곧 전원을 켰다. 여기저기에서 문자가 와 있었다. 도연은 문자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유철에게 전화했다. 예에, 하고 유철이 전화를 받았다.

“유철씨가 관계자예요?”

“의원실에서 나간 해명입니다. 보좌관님이 물어보더라고요.”

“으음. 알았어요. 그럼 다 된 거죠?”

“한번은 명확한 입장을 밝히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유철씨가 기자한테 직접 말하지 그랬어요.”

“도연씨한테 물어보고 하려고 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더라고요.”

“책 좀 봤어요.”

“그럼 내가 말할까요?”

“네.”

“혹시 인영이도 기사 봤어요?”

“걔가 말해줬어요. 이따가 얘기 좀 하려고요.”

“네에. 저기…… 말 좀 잘해주세요.”

“그래볼게요.”

도연이 픽 웃고 전화를 끊었다.

 

도연이 인영의 방으로 가기 전에 담배부터 한대 피웠다. 세상에서 딸이 가장 어려운 존재다. 명백한 잘못을 하고도 부모에게는 도움을 요청하며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딸은 달랐다. 잘못이 아님에도 딸의 규정으로 말미암아 죄인으로 몰려 사죄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인과관계는 필요 없었다. 딸의 감정법에 따른 유무죄의 판결이었다. 낮 동안 벌어진 요란한 소동이 인영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안 그래도 자신을 공개시키는 직업을 가진 엄마였다. 인영은 그것이 자랑이기도 하고 불만이기도 해서 결과적으로 불만이었다. 도연도 그런 인영의 심중을 헤아려 최대한 노출을 자제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터졌다. 요란하게 연애한 죄. 아마, 이번 죄목은 그러할 것이었다. 도연이 담뱃불을 끄고 인영의 방으로 갔다. 똑. 똑. 대답이 없었다.

“엄마 들어간다.”

인영이 유튜브로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도연이 책상 옆 침대에 걸터앉았다. 인영은 여전히 동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딸, 우리 불륜 아냐.”

“알았어.”

“그래도 전에 만난 사람들보다는 낫지 않니?”

“뭐래…… 하나도 안 섹시하더구만.”

“아냐, 가만히 섹시해. 만나볼래? 너 슈트 좋아하잖아. 이 아저씨 맨날 슈트 입어. 월화수목금금금. 잘생겨서 슈트도 안 잡아먹어.”

“뭐래는 거야 진짜!”

“너도 이번에는 좋아할 것 같아서.”

“엄마 담배 피웠지? 담배 피우면서 키스하고 싶어?”

“우린 잘해.”

“그래서 길에서도 했어?”

“키스는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야. 그렇긴 한데, 이제 길에서는 안 할게.”

“맘대로 하세요. 나가, 나 이거 봐야 해.”

“알았어, 이따가 저녁 먹자.”

“으이구, 늙어 보이게 국회의원이 뭐야……”

“안 늙었어, 기집애야!”

“밥 줘!”

도연이 인영을 확 째려보고 방을 나왔다.

 

이날 밤, 유철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간략한 해명서를 올렸다. 둘은 ○○시 올해의 책 선포식 날 만났으며, 그뒤로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둘 다 아픈 경험이 있어 신중하게 만나고 있다는 우회적인 말로 불륜이 아님도 확실하게 해두었다. 의혹으로 제기된 ○○시 올해의 책 도서 선정 과정에 대해서도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날 해프닝에 덩달아 화들짝 놀란 ○○시 선정팀에서 발 빠르게 보도자료를 냈는데, 그 기사도 링크해두었다. 기사에는 후보 선정과 투표과정이 도표로 자세히 나와 있었다. 그 정도였다. 더이상 요란 떨 필요가 없었다. 만나냐고 물었으니 만난다고 답한 것뿐이었다. 덕분에 축하인사가 이어졌다. 예쁘게 만나라는 격려도 있었다. 유철은 제 글 아래 붙은 댓글을 읽으며 가만히 웃었다. 고맙습니다. 도연도 간략한 유철의 해명이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은 조용히 만났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을 뿐이었다. 이런 사랑도 있고 저런 사랑도 있는 거지, 하고 웃어 넘겼다. 요란한 연인 신고식이었다.

 

*

 

김보좌관이 메모리에 저장했던 동영상과 사진을 정리했다. 이만하면 좋은 성과였다. 비행기에서 둘의 관계를 확인한 순간부터 김보좌관은 손이 간질간질했다. 둘의 시너지가 좋았었다. 우리나라 군인 복지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어떤가요? 많이 부족합니다. 생활관만 해도 평균적으로 군인 한 사람에게 할당된 평수가 교도소 수감자보다 더 좁아요. 이런 문제 말고도 개선해야 할 사항이 많습니다. 국방위에서 심도있게 논의 중인데요, 군인들의 복지와 인권이 나아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책 안 읽는 시대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립니다. 매체의 변화도 변수가 될 것 같기는 한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 책 안 읽는 시대라기보다는 책 말고도 좋은 매체가 많은 시대죠. 책만 우아한 매체가 아닙니다. 물론 여전히 찬반이 분분한 도서정가제, 안 좋은 경기 등도 변수가 되겠지요. 그런데 쓰는 입장에서는 환경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독자들을 잡지 못한 저 같은 사람의 책임이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적당한 질문과 대답으로 서로를 누르지 않으면서 서로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도연은 유철의 연인으로 아주 좋았다. 잘 활용하면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 지방의원인 유철을 전국에 소개할 수도 있었다. 유철은 비례대표 의원 시절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번 총선에서는 다른 막강한 영입 인사들에게 국민들의 시선이 쏠렸다. 유철이 그나마 주목받은 때는 경남에서의 야당 당선인 시절이었다. 그러나 곧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다. 경남에서의 당선이라는 호기가 초대형 이슈에 묻혔다. 피지 못한 봉오리 의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보좌관은 늘 저 봉오리를 틔우고 싶었다. 그런 차에 나타난 도연이었다. 둘이 좋아 만나다가 누가 물으면 네, 하고 말 일이 아니었다. 정치인이면 연인도 정치적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했다. 그렇다고 자신 혼자 꾸며낼 사항도 못 됐다. 놀란 연인이 어떤 발표를 할지 몰랐다. 깔끔하게 가야 했다. 김보좌관은 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잡을 때까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유철을 잡았다.

“의원님, 잠깐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

유철과 김보좌관은 공항 밖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일 있습니까?”

“오늘 사진 몇장만 찍겠습니다.”

“누굴요? 저요?”

“두분이요. 나쁘지 않게 사용하겠습니다.”

“사용한다는 건……”

개인적인 이슈로라도 유철의 인지도를 올려야 했다. 유철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인지도였다. 지방의원도 중앙에서 자주 거론돼야 지역구에서 더 환영받았다. 의원들이 기회만 되면 여기저기 얼굴을 내미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인지도가 높아지면 당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인지도만큼 따라붙는 눈과 입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유철이 굵직한 사안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자신을 드러낼 방법이 없었다.

“더 많은 사람이 알기 전에 하셔야 합니다. 작가님이면 가능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의원님은 모르는 일입니다. 두분이 잠시 나와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을 사용한다. 유철이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갈등했다. 시간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흘렀고 잊히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국회의원은 잊히는 두려움이 유독 큰 직업이었다. 어떤 성과를 내도 벌써 잊히고는 했다. 눈에 각인시켜놓지 않으면 보고도 금세 잊었다. 다른 지역으로 강연을 가면 커다란 현수막이 붙었음에도 저 사람 누구야? 하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동료 의원과 함께하면 객석의 눈은 상대 의원에게 쏠렸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당연 도연은 그런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런 짓을 꾸미나. 유철은 도연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고, 김보좌관의 제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바로 해명하시면 됩니다. 작가님께는 죄송하지만, 때로는 감추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습니다. 언짢으시겠지만 의원님한테는 절실한 일입니다. 두분이 만나는 건 사실이잖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찍힌 사진이었다. 동영상으로 촬영한 뒤 좋은 장면을 캡처했다. 그 사진을 지역의 한 신문사에 익명으로 제보했다. 순진한 열혈 시민이 국회의원과 소설가의 불륜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화 몇통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한 사안이었다. 그랬기에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보냈다. 그래야 사진만으로도 흥미를 끌 수 있는 기사를 만들 수 있었다. ○○시 올해의 책 도서 선정 의혹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김보좌관이 추측하건대, 기사 작성 과정에서 발생한 의혹 같았다. 덕분에 시에서 해명 보도자료를 내면서 일이 더 커졌다. 일이 잘 풀리려니 의도치 않은 행운이 겹쳤다. 포털에 실시간으로 이름이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야말로 절묘한 사진 덕이었다.

 

김보좌관은 닳고 닳은 의원들에게 신물이 났다. 권력욕이 너무 강한 새내기 의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보좌관 팔자라는 것이 스스로 누굴 가릴 처지가 못 됐다. 더럽다, 더럽다, 이토록 더러운 판이 있나. 때려치우고 장사나 하자. 그러했던 그를 잡은 것이 당시 당대표였다. 본디 자신이 몸담은 판이 가장 더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기 전에 사람 하나만 보고 갑시다. 진유철 의원하고 동향이지요? 비례대표 영입 소문은 보좌진들 사이에 암암리에 퍼지기 마련이라 이미 유철의 이야기도 당선 전부터 들은 터였다.

“보좌관님이 진의원 좀 봐주셨으면 하는데, 어떠십니까?”

의원의 정치력은 그의 보좌진을 보면 대충 그림이 나왔다. 제아무리 잘난 의원도 그에 상응한 수족이 없으면 임기 내내 헛발질했다. 게다가 유철 같은 인물은 오히려 보좌진에게 휘둘리기 십상이었다.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 관행입니다. 정치적 소신 따위는 관행 앞에서 번번이 무너졌다. 그런 사태를 염려한 듯 당시 대표가 김보좌관을 유철에게 붙였다. 그는 정무와 정책 능력을 고루 갖춘 20년차 베테랑이었다. 유철이 어떤 위인인지는 몰라도 벌써 버리면 안 되는 인물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랬기에 김보좌관은 이 초짜 의원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걸어보기로 했다.

“잘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비례대표 시절 유철만큼 마음고생 심한 의원도 없을 거였다. 그는 화제의 영입인사가 아니었다. 특정 분야에서 이름 날린 전문가도 아니었다. 구색용으로 한번 사용하고 버릴 카드가 덜컥 당선됐다. 당신들의 작은 목소리도 잘 듣고 있으니 우리 당에 표를 주십시오. 그런 유철에게 무게감 있는 일이 맡겨질 리 없었다. 활동을 나가도 비례대표 의원에게는 쉽게 내주지 않는 정보가 많았다. 비례가 왜 저렇게 설쳐. 잘하면 잘해서 못하면 못해서 문제였다. 지역구 재선의원이 되었다고 크게 변한 것도 없었다. 국회에는 삼선은 돼야 의원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여전했다. 그나마 경남을 뚫은 것이 기특해 먼저 알은체하는 의원이 조금 늘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유철은 여전히 지방의 존재감 없는 한 의원이었다. 김보좌관은 어떻게든 그의 인지도를 높이고 싶었다. 아직 갈 길이 먼 유철에게는 꼭 필요한 무기였다. 그동안 유철의 의정활동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이미지 관리도 현재까지 무난했다. 다만 확장성이 문제였다. 그런 고민 중에 마침 기회가 생긴 것이다. 지역으로 한정된 인지도는 유철이 더 깊을지 몰라도, 전국적으로 퍼진 인지도는 도연이 더 넓었으니까. 아닌 말로 유철에게만 좋은 일도 아니었다. 이번 일로 도연 역시 회자되었다. ○○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도서도 급부상했다. 둘은 서로를 살리는 그런 연인이었다. 김보좌관이 정리한 동영상과 사진 파일을 자신의 비밀 하드로 옮기고 기분 좋게 컴퓨터를 껐다.

 

*

 

유철과 도연은 해명 외에는 서로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세간에 알려졌다고 날마다 만나 불붙은 사랑을 확인하지도 못했다. 그러기에는 유철이 너무 바빴고, 도연은 새 작업으로 두문불출했다. 그저 늦은 밤 몇분의 통화로 만족했다. 내가 전화하는 거 방해돼요? 네. 하지 말까요? 네. 싫습니다. 이런 시답잖은 얘기로 고작 몇분 떠들었다. 그때가 아니면 각자의 일에 충실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연인이 됐어도 누구나 알 만한 연애는 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유철이 도연에게 지역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 도연도 그러자고 했다. 안 써지는 글 잡고 끙끙대느니 한 삼일 푹 쉬고 오는 게 나았다. 공개 뒤 처음 떠나는 동반 여행이었다. 공항에서 간혹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행에 방해될 만큼은 아니었다. 누가 의원님! 하면 유철이 자연스럽게 예에, 하며 웃어줬다.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던 도연은 작가님! 하면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같이 손 흔들기도 뭣하고 모르는 척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유철은 공항에서 자신의 특권을 누리지 않았다. 사비로 항공권을 예매했고 도연과 함께 일반 탑승구역에서 대기했다. 비행기에 나란히 앉아 한시간여를 보내도 지난번 호수에서 찍힌 사진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도란도란 이야기만 나누었다.

“요리 잘해요?”

“맛은 몰라도 몸에는 좋을 것 같다는 말이 있었어요.”

“으음. 그래도 하지 마세요. 그냥 거기 있는 거 먹어요.”

“왜요?”

“몸에 좋은 음식이 맛있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하하하.”

 

김해공항에 도착한 유철과 도연이 출구로 나왔다. 도연의 트렁크는 유철이 끌었다. 둘이 나오자마자 정면에서 유철의 한 비서관이 사진을 찍었다. 지난번 행사로 도연과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철이 비서관에게 물었다.

“비서관님, 왜 나오셨습니까?”

“의원님 차 가지고 왔습니다.”

“택시 타고 들어간다니까요.”

“작가님도 오셨는데 함께 가시라고요.”

“택시는 따로 타고 갑니까?”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김포공항에서와는 매우 다른 반응이 김해공항에서 터졌다. 이곳에서는 유철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도연이 잡은 손을 놔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도연이 손을 빼려고 하자 유철이 더욱 세게 잡았다. 여기저기서 스마트폰으로 둘을 사진 찍었다. 정치인도 연예인과 비슷하구나. 도연은 이왕 잡은 손 놓지 않고 그대로 걸었다. 유철이 비서관에게 자신의 자동차 열쇠를 돌려받고 뒷자리에 도연의 트렁크를 실었다.

“비서관님 타세요. 가는 길에 모셔다 드릴게요.”

“저는 여기서 일이 있으니까, 두분 먼저 가십시오.”

“왜 그러세요. 타세요.”

“에헤이, 작가님 기다립니다.”

“아이참……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유철의 차가 공항을 빠져나갔다. 비서관이 공항에 나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서울에 있는 김보좌관이 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을 사진 찍으라고 한 것이다. 요란한 공개 뒤에는 둘이 함께한 모습이 없어 마지못해 인정한 쇼윈도 커플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조용하다, 조용하다, 이토록 조용한 커플이 있을까. 김보좌관은 비서관이 전송한 사진들을 받아 좋은 사진을 추렸다. 도연의 트렁크를 유철이 끌고 다정하게 손잡은 사진이었다. 김보좌관은 그 사진을 공식 페이스북에 올렸다. 열일하시는 우리 의원님, 오늘도 지역 현안에 바쁘십니다. 오늘은 우리 시 올해의 책 작가님도 함께 방문하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임무를 끝낸 비서관이 휘파람을 불며 택시를 잡았다.

 

유철과 도연이 지역구 사무실 근처 유철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상시국회 체제로 실상은 잠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나 유철은 이곳에 와야 비로소 집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방 두개짜리 이십여평 되는 아파트였다. 방 하나는 침실로 하나는 서재로 사용했다. 유철이 도연의 트렁크를 거실에 내려놓고 두 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떤 방 쓰실래요?”

“당신 있는 방이요.”

유철과 도연은 이제는 누가 봐도 상관없을 사랑을 마음껏 누렸다. 만나기 위해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됐다. 서로를 위해 애써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됐다. 노심초사가 사라지고 여유와 안도가 자리했다. 도연씨는 어떻게 할 때 제일 좋아요? 유철씨가 내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자체. 섹스는 매우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행위였다. 그대로의 날것이기에 오히려 아무하고는 관계할 수 없었다. 도연은 그 자체로 좋았다. 서운하네, 내 놀라운 능력에 칭찬 한마디는 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말해 뭐해요, 맨날맨날 놀래요. 유철씨는 내가 어떻게 할 때 제일 좋은데요? 더 해달라고 조를 때. 더 해주세요. 배고픈데, 밥 먹고 더 하면 안 될까요? 뭐라도 좋았다. 스팸과 김치만으로 끓인 부대찌개는 밥반찬과 소맥 안주로 더없이 좋았다.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여기도 침대 바꿀까요? 과묵한 애를 왜 바꿔요. 그러다 도연이 먼저 깊이 잠들었고, 곧 유철도 스르륵 잠들었다.

 

*

 

도연이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에 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벌써 열한시가 넘었다. 보통 때는 즐기지 않는 소맥을 먹었더니 언제인지도 모르게 잠들었었다. 유철은 도연의 휴대전화에 메시지를 남겨놓고 이미 출근한 상태였다. 오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나갑니다. 점심때쯤 다시 문자할게요. 도연이 휴대전화를 들고 방을 나왔다. 밤의 조명이 사라진 낮의 집은 밋밋하기가 그지없었다. 사무실 같은 잠실보다야 낫지만 있을 것만 있는 리조트 같았다. 도연은 숙취가 올라 라면이나 끓여 먹을 요량으로 싱크대를 살폈다. 어디를 봐도 라면 하나 없었다. 냉장고에도 마땅한 먹을거리가 없었다. 집에 있는 거 먹으라더니 간밤에 먹었던 즉석 밥도 없고 부대찌개마저 바닥이었다. 배고파 죽겠네. 쌀은 어디 있나. 도연이 싱크대를 살피고 있을 때 유철에게 문자가 왔다.

—일어났어요?

—네.

—점심 뭐 먹을래요?

—뭐가 있어야 먹죠.

—뭐 먹고 싶어요?

—육개장.

—빨리 보낼게요. 맛있게 먹어요.

—고마워요. 당신도 점심 맛있게 먹어요.

유철은 도연과 함께 식사하고 싶었으나 일정이 빠듯했다. 지금도 지역주민 대표들과의 간담회에 급히 달려가는 중이었다. 농업지역에 공단이 들어서는 무분별한 난개발로 민원이 많았다. 앞에서 농사짓고 뒤에서 공장 돌리는 지역은 물론, 주택이 공장에 둘러싸인 지역도 있었다. 간담회를 마치면 교육청으로 가서 학교 무상급식에 대한 방책을 논의해야 했다. 애들 밥 먹이는 것을 가지고 이랬다저랬다 오락가락하는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철은 마음 맞는 타 지역구 의원들과 시민들의 힘을 모아 이참에 법으로 못박아둘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협의할 것과 준비할 것이 많았다. 그것 말고도 참석해야 할 자리가 많았다. 그래도 도연의 점심은 챙기고 싶었다. 집에 도연이 있다. 이토록 퇴근이 기다려진 적이 없었다.

 

도연은 뭐가 온다니까 그전에 트렁크를 풀었다. 먼저 제 화장품들을 챙겨 유철이 화장대로 사용하는 서랍장 앞에 섰다. 그의 화장품과 헤어제품을 한쪽으로 모았다. 그러면서 생긴 여분의 공간에 휴대용기에 덜어온 제 화장품을 놓았다. 수분크림이 없는 유철의 화장품도 체크했다. 얼마 안 되는 옷가지지만 그것들도 일단 옷장에 넣어두기로 했다. 도연이 옷가지를 들고 유철의 침실 옷장을 열었다가 움찔했다. 세탁소에서 찾아와 보호 비닐도 벗기지 않은 셔츠와 양복이 차르르 걸려 있었다. 유철이 세탁물을 몰아서 세탁소에 맡긴 때문이었다. 보통 서울로 가는 날 맡기고 지역으로 오는 날 찾았다. 언제라도 때와 장소에 맞춰 입을 수 있도록 준비해둔 것이다. 물론 잠실 옷장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갓집과 예식장을 한날 다녀야 할 때도 있어 어디에든 준비해둬야 했다. 도연은 자신의 옷가지와 속옷을 유철의 와이셔츠 밑 빈 공간에 넣었다. 그리고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식사 왔습니다.”

유철이 중국집에서 육개장과 유린기를 보냈다.

“결제는 됐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배달원이 집을 나갔다. 짬뽕 냄새가 나는 육개장이었다. 도연이 육개장 국물부터 쭉 마시고 유린기를 먹었다. 고기도 좋아하고 튀김도 좋아하는 도연에게 딱 맞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았다. 도연이 남은 육개장은 버리고 유린기는 덜어두었다. 빈 그릇은 잘 씻어 밖에 내놓았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배부르게 먹었으니 세상 부러운 것이 없었다. 중국요리를 먹고 피우는 담배는 어떤 후식보다 맛있었다. 아, 좋다! 도연이 내친김에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소화도 시킬 겸 청소나 할 생각이었다. 있을 것만 있는 단출한 살림이어서 손도 많이 가지 않았다. 거실에는 이인용 소파와 작은 탁자가 전부였고, 주방에는 의자 두개짜리 이인용 식탁이 전부였다. 집 안 어디에도 장식용 소품이 없었다. 그런다고 자신이 화분이라도 하나 놓을 생각은 없었다. 쓸데없이 피곤한 예쁜 짓으로 유철을 화분 노예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연인이 사준 화초에 잎이라도 하나 떨어지면 괜히 찜찜할 거였다. 유철이 이렇게 산다면 그의 라이프 스타일인 것이다. 자신이 그의 생활에 관여해도 되는 양 이것저것 챙겨 넣고 싶지 않았다. 도연이 사용한 걸레를 빨아 베란다에 널고 날씨를 확인했다. 화창했다. 외출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도연이 기분 좋게 샤워하고 유철의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도 말렸다. 그러다가 거울을 보면서 잠시 고민했다. 흠. 화장을 해야겠군. 보통 때는 선크림 하나 바르고 말았지만 이날은 안 될 것 같았다. 머리도 차분하게 손질했다. 너무 멋을 내면 오히려 촌스러우니 적당히 보기 좋은 차림도 했다. 무릎까지 오는 플레어스커트에 목이 살짝 파인 셔츠를 입었다. 거기에 발이 편한 스니커즈를 신었다. 시장 구경 가는데 이렇게 신경 쓰는 날이 올 줄이야. 도연이 집을 나왔다. 문 앞에는 아직 찾아가지 않은 중국집 빈 그릇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도연이 자신 앞에 멈춘 택시에 올라탔다.

“중앙시장으로 가주세요.”

“기름시장 말하는 거지요?”

“아, 예에……”

이름처럼 시내 중심지에 자리한 시장은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최신 쇼핑몰과 극장을 중심으로 번화한 곳이었다. 그뒤로 재래시장이 얌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시장임을 알 수 있었다. 말끔하게 개축한 가게도 많았지만, 벽이 온통 검은 그을음으로 덮인 옛 가게도 많았다. 참기름 들기름으로 유명한 시장답게 초입부터 기름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막 짜낸 고소한 냄새와 오래 진이 밴 냄새가 섞여 시장의 세월을 증명했다. 옛적에는 이 지역 깨 농사가 좋아서 콩기름보다 흔한 게 참기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현지인들은 중앙시장이라는 새 이름보다 기름시장이라는 옛 이름에 더 친숙했다. 그럼에도 왜 이름을 바꿨는지 도연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연이 개중 한 집으로 들어가 들기름 참기름을 한병씩 샀다. 이토록 고소한 냄새를 맡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연이 기름병을 제 가방에 넣고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길폭은 좁았으나 사람이 많지 않아 복잡하지는 않았다. 도연이 호떡 좌판에서 커다란 옛날 호떡을 하나 샀다. 호떡 하나가 어른 손바닥만 했다. 호떡을 담은 종이컵을 들고 좀더 안으로 들어간 도연이 다시 발길을 멈춘 곳은 도넛가게였다. 기름에 둥둥 떠오른 밤톨만 한 찹쌀도넛이 맛있어 보였다.

“이거 천원에 얼마예요?”

“천원에 천원입니다.”

아. 도넛을 넋 놓고 보다가 말이 엉켜버렸다.

“작가님 순 맹탕이네. 천원어치 줄까요?”

도넛가게 주인이 유철도 없이 혼자 있는 도연을 알아보았다. 그동안 도연의 사진이 실린 기사도 꽤 있었다. 그러나 일상에서 그녀를 알은체하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부러 북콘서트를 찾은 독자도 옆으로 지나가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무대에 올라 소개를 받고서야 비로소 아, 저 사람이구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십년 글 쓰고도 그랬는데 유철을 만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그게 다 요란한 연인신고식 덕분이었다. 도연이 그저 가만히 웃었다.

“한개 더 드립니다. 근데 의원님은 같이 안 나오셨네요?”

“의원님이 바쁘셔서 낮에는 같이 못 다녀요.”

“그래도 시장 한번 나오셔야지, 얼굴 잊어버리겠습니다.”

“말씀 꼭 전해드릴게요.”

그때 뒤에서 누가 도연을 불렀다. 돌아보니 대학생 커플로 보이는 두 사람이 도연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고는 함께 찍어도 되는지 물었다. 그럼요. 이 커플은 자신들의 트위터에 도연의 사진을 올렸다. 귀여운 커플이었다. 도연이 시장 끝 대로변까지 걸어갔다. 가는 중에 도연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고, 몰랐다가 옆에서 알려줘서 알게 된 사람도 있었고, 애초에 몰랐고 앞으로도 관심 없을 사람도 있었다. 도연이 대로변 화장품 가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유철에게 줄 수분크림을 하나 샀다. 계산하는 중에도 누가 어머, 어머, 진짜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연이 서둘러 유철의 집으로 돌아왔다.

 

유철은 닭강정을 들고 저녁 일곱시쯤 돌아왔다. 최대한 서두른 퇴근이었다. 도연이 닭강정을 몇개 집어 먹었다. 그러는 동안 유철이 가벼운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도연이 보기에 조금 서두른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가자고 재촉했다. 다 저녁에 무슨 산인가. 그러나 또 갈 만하니 가자고 했겠지 싶어 도연도 가벼운 외투를 걸쳤다. 유철이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차 타고 가야 할 정도로 멀어요?”

“되게 멀지는 않고, 한 이십분쯤 걸릴 거예요.”

차로 이동하는 중에 유철이 가고 있는 산에 대해 소개했다. 조금 높은 언덕 같은 산이며 중턱에 좋은 정자가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도연이 닭강정을 두고 온 것을 후회했다.

“정자에서 먹으면 좋았을 텐데. 속초에 유명한 닭강정집 있는 거 알아요? 그쪽이 원조라는 말도 있어요.”

“에헤이, 우리 지역이 원래 기름에 튀기고 버무리는 건 선수예요.”

“지역 자부심 진짜…… 그런 분이 시장은 왜 그렇게 안 갔어요?”

“무슨 말 들었어요?”

“의원님 통 안 와서 얼굴 잊겠대요.”

“그동안 동선이 맞질 않아서 못 갔어요. 다음주에 꼭 가볼게요.”

유철이 산 아래 공터에 차를 세웠다. 들은 대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시 남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다. 능선이 말 등처럼 부드럽게 굴곡졌고, 사람 손이 많이 타지 않은 산이었다. 지방마다 너도 나도 만드는 산책로도 없었다. 여기 사람들은 그런 길이 없어도 꼭대기까지 가는 것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괜히 산만 해칠까 염려스러워 손을 대지 않았다. 정자로 난 길도 그러했다. 일부러 낸 길이 아니라 사람이 다녀서 나버린 길에 계단만 놓은 거였다.

“이 계단은 왜 중턱까지만 놓은 거예요?”

“사연이 있어요. 정자에 가서 말해줄게요. 명당자리예요.”

산중턱 계단이 끝난 곳 우측으로 작은 공터가 있었다. 그곳에 평상에 가까운 소박한 정자도 있었다. 어르신들이 막걸리 마시면서 동네를 내려다보기에 좋은 위치였다. 넓은 처마는 눈과 비를 막기에 좋을 것 같았고, 마루에 깐 두툼한 장판은 오래 앉아도 편안할 것 같았다. 도연과 유철이 신을 벗고 정자로 올라섰다.

“어떻게 딱 요만한 공터가 생겼대요? 일부러 만든 거예요?”

“원래는 여기에 임자 없는 묘가 있었답니다. 원체 오래된 묘라 동네 사람들이 오며 가며 손을 봐줬는데, 드디어 임자가 나타난 겁니다. 이리저리 따지고 보니까, 그래그래 그때 그런 집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동네 노 할머니가 겨우 기억해낸 거죠. 묘 임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네 할아버지가 어디어디 산에 혼자 계시니 그만 모시고 온나, 하셨답니다. 그래 묘를 이장하면서 빈터가 생긴 거지요. 처음에는 나무를 다시 심을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보이는 마을이 장관인 거라. 낮에 보면 저 끝까지 한눈에 들어와요. 그 할아버님이 명당에 계셨던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무 대신 정자를 세웠대요.”

“그러니까 여기가 묘지였다는 거죠?”

“무서워요?”

정자 뒤로 도수 낮은 외등 하나 있을 뿐이어서 산 전체가 으스스했다. 도연은 자신이 마치 봉분에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서워 죽겠네. 그러나 유철이 세상 편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서둘러 내려가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낮에 시장 어땠어요?”

“좋았어요. 그런데 기름시장이라는 좋은 콘텐츠를 두고, 왜 매력 없이 중앙시장이라고 해요?”

“인제는 기름집이 거의 사라져서 기름을 앞세우기가 뭣합니다.”

“자갈치시장도 자갈치가 많은 건 아닐걸요? 유래의 문제 아닐까요?”

“그게 인제는 시장 주변이 번화해서 젊은이들이 많이 찾거든요. 거기다 대고 기름시장이라고 하면 섹시하지가 않잖아요. 반대가 만만치 않아요.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관건인데, 참 어렵습니다.”

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제 눈에 좋은 것만 보고 홀연 떠날 거면서 괜한 훈수를 둔 것 같아 어쩐지 무안했다.

“도연씨, 여 내려와서 글 쓰면 잘 써질 것 같지 않아요?”

“나는요, 쓸 거만 있으면 나이트클럽에서도 쓸 수 있어요. 그만 가요.”

도연이 신발을 신고 유철 앞에 섰다. 안 가요? 유철이 정자에 걸터앉아 도연의 허리를 안고 으으음 소리를 냈다. 도연이 몸을 기울여 유철과 얼굴을 가까이 했다.

“왜요, 명당에서 한번 할래요?”

“아뇨, 여기 CCTV 있어요.”

화들짝 놀란 유철이 벌떡 일어섰다. 도연이 씩 웃고 먼저 계단을 내려왔다. 유철이 저 앞에 있는 자신의 차를 향해 리모컨을 눌렀다. 어두운 공터에서 삐빅 소리와 함께 반짝 불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유철 덕에 도연은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 쓸 수 있었다. 도연은 그것이 좋았다. 잘 만큼 자고 일어나 시간에 구애 없이 끼니를 챙겨 먹었다. 그런 뒤에는 소일거리도 안 되는 집안일을 하기도 하고 인근 도서관을 찾기도 했다. 그러다가 저녁때가 되면 조금씩 담긴 채소를 사다가 볶고, 남은 것을 무쳐 두가지 반찬을 만들었다. 저녁을 밖에서 먹고 온 유철이 그런 도연의 식탁을 보고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한 젓가락 달래지도 못하겠네요. 이렇게 쪼금씩 어떻게 만들어요?”

“금방 올라갈 건데 남으면 안 되잖아요. 아.”

도연이 흰 쌀밥에 채소무침을 올려 유철에게 내밀었다.

“맛있죠?”

“네. 근데 버리더라도 이렇게 쪼끔씩 하지 말아요. 한입 얻어먹으면서 죄책감 느끼잖아요. 식당 밑반찬도 이거보다는 더 나와요.”

유철은 도연이 제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것이 좋았다. 출근할 때 립밤을 발라주며 예쁘다고 말해주는 도연이 좋았다. 도연이 옷가지를 착착 갤 때 역시 좋았다. 자신의 트렁크 팬티와 러닝셔츠 위에 도연의 팬티와 브래지어가 놓이는 것이 좋았다. 이것 좀 갖다 놔요, 하고 도연이 다 갠 빨래를 내미는 것도 좋았다. 내 거는 옆에 따로 뒀죠? 알아서 잘 뒀어요. 그렇게 좋았던 삼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마지막 날에는 상가 세탁소에 유철의 세탁물을 맡겼다. 이제 도연의 물건만 정리하면 됐다. 도연이 제 화장품을 챙기려 하자 유철이 막았다.

“이거는 두고 가요. 왜 힘들게 들고 다녀요.”

“뭘 자꾸 놓고 가래요?”

“필요하면 내가 다시 다 사줄게요.”

“됐어요. 다음에 내려오면 빨래 걷어서 잘 개놔요.”

“네에.”

유철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도연이 입을 맞추며 유철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 놓고 가면 맨날 올 것 같죠?”

“가끔 오면 되지요. 아, 띵띵 부었지요?”

“어디서 어리광이에요!”

도연이 트렁크를 정리하고 자물쇠를 채웠다.

 

유철과 도연은 김해공항에서 김포공항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날아왔다. 수분크림 꼭 발라요. 땀을 많이 흘려서 피부 거칠어져요. 나는 그런 거 모르겠던데요? 환절기 때 티 나요. 아아, 바를게요. 서울에서 쓸 거는 안 사줘요? 직접 사세요. 같이 가요, 화장품 두고 왔잖아요. 집에 아직 많습니다. 그런데 그 공직자법 말이에요, 연인끼리 사주는 것도 문제가 되나요? 더 좋은 것도 있었는데 유철씨 그거 걸릴까봐 못 샀어요. 문제 삼자면 문제가 되겠지요. 지난번에 사준 넥타이도 아마 그럴 거예요. 그거 세일할 때 싸게 주고 산 거예요, 하하하. 이제 또 한동안은 문자나 전화통화로만 만날 것이었다. 조심해서 가요. 네. 두 사람은 각자의 택시를 타고 헤어졌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