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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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1972년 서울 출생. 200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한밤의 퀼트』가 있음. yhpoem7201@hanmail.net

 

 

 

흰 밤 구름

 

 

팔다리를 흔들며 걸어야지 어제의 두엄더미는 그대로 남겨두고

열뜬 짐승처럼 구름이 그늘을 찾아 돌아다니는 사이

 

부서진 담벼락 너머 캄캄하게 펼쳐진 노을산() 당근밭

이웃의 망아지가 자라는 곳

내가 선물한 고삐에 묶여 자라는 망아지들의 비리비리한 잔등을 후려치며

 

고대 쿠마이 빛나는 동전과도 같은 달이

서슴없이 굴러가다 깨뜨린 그 여름의 창문

일곱 색깔 반지 모양 사탕에 취해

몽땅 썩어버린 꿈의 어금니

그을린 피로 떠도는 망루, 꼭대기에 올라 녹슨 종을 울려도

조금도 진동하지 않는 세계와

영원히 아이의 소리로 우는

조롱이 걸린 그 어느날의 창고 앞에서

 

나는 물었네, 코를 흠흠거리며

‘이상하지 흙과 몸이 조금도 구분되지 않아* 나는 분명 여기에 묻혀 있는데’

집 안에 깃들지 못한 깃털들이 추위에 떠는 밤에

 

그러나 걸어야지 착한 구름과 함께

질척한 땅을 오롯이 밟아본 적 없는 맨발과

그러면서도 매번 기억의 토사물을 게워내는 하수도 바닥, 파헤치느라 때가 잔뜩 낀 손톱을 뭉텅뭉텅 지우면서

 

시간의 잡풀들이 더 덥수룩해질 때까지 푹푹 썩을 때까지

망아지들아 너희는 살찌고 이웃은 더 분주해야지

나팔꽃 속에는 불타는 시계가 꽃술처럼 솟아 있네

 

밤이 눈 못 뜬 쥣과 동물처럼 우리의 뜨락을 갉아먹고 있다고

이웃의 귀를 빌려 들으면서

 

구름은 나를 지나 그대 뜰에 가서 죽을 것이다

 

이웃은 말하고 나는 입술을 천천히 오므린다

처음 배우는 이국어를 따라하듯이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

*보르헤르트 「라디」에서.

 

 

 

가을이 오면

 

 

나는 최선을 다해 착해진다

안개 속에서는 안개의 일부로

빗속에선 깨지지 않는 빗방울로

물 아래에서는 거품으로 부서지는 물방울의 마음을

날아가는 물고기 영혼을 올려다보는 시체의 동그란 눈동자를

삼년 후는 이년 후보다 훨씬 고독해야지

언젠가 오래된 책갈피에서 툭 떨어지는

아버지를 만난다 해도

이렇게 은밀하게 오, 아버지 여행중이시다니

스스로 낳은 활자들을 꾸역꾸역 잡수시는

조금은 쓸쓸한 여러개 털북숭이 다리와 아주 작아져 이제는 보일 듯 말 듯한 점과도 닮은

은회색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집어

탁 터뜨린다 해도 한방울 눈물처럼 축축해진 글자들이

기어코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간다 해도

나는 최선을 다하는 독서광으로서

스무개의 잔잔한 가을 아래서 나의 서술어는 멋지게 떠오른다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는 돌멩이보다

낙하 직전의 돌멩이가 취한 포즈를 맘껏 사랑해야지

사람의 껍질을 얇게 벗겨내 책을 만들듯이

나를 벗겨내 나를 기록해온 그림자에게도

터지지 않는 투명한 물방울 속에 누워

비명 행성의 이마에 변치 않는 한줄을 손글씨로 새겨넣는 아름다운 너에게도

더 아름다운 기침과 가래에게도

고백은 한번에 열리는 여러개의 문처럼 수줍어질 때

나의 전쟁은 매번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고

꿈은 이제부터 나무들의 몫

문밖 나무들의 목덜미가 검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