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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노마 필드 『고바야시 다키지 평전』, 실천문학사 2018

절대적 존재감을 지닌 투사의 인간적 면모

 

 

김경원 金京媛

국문학 박사, 번역가 kkw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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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 작가 중에 누구보다도 먼저 손꼽히는 인물은 코바야시 타끼지(小林多喜二, 1903~33)일 것이다. 『게 가공선(蟹工船)(1929) 같은 작품과 비극적인 죽음은 그에게 절대적인 존재감을 부여해준다. 이렇게 기술하면 좀 형식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내가 홋까이도오대학에 체류하는 동안 마주한 분위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오꾸사와(奥沢) 묘지에서 열린 코바야시 타끼지 추도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조촐했지만 엄숙하고 기품있는 행사였다고 기억한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자리에 일본공산당원도 꽤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 책 『고바야시 다키지 평전』(강윤화 옮김)의 저자 노마 필드(Norma Field)가 코바야시 타끼지를 현대로 불러낸 이유를 망각과 무관심 때문이라고 밝혔을 때 살짝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내 경험과는 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소련이 무너지고 난 뒤부터 당신의 이름은 무관심의 대상, 또는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존재로 다루어지거나 심지어는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되어 있었”(「프롤로그: 다키지 선생님께」, 16면)다는 진단이 ‘어떤 프로문학 작가를 망각과 무관심 속으로 던져버린 일본사회’라는 범주를 넘어서서 보편성을 내포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해 21세기에 들어선 이 세계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묻고 있다고 생각한다. 코바야시 타끼지는 충분히 그 답변이 될 만하다.

우선 코바야시 타끼지를 어엿한 프롤레타리아문학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작 『게 가공선』 이야기를 해보자. 이 작품은 대형 게잡이배 안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비인간적 처우를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조난당한 배의 구조요청을 무시하는 처사나 어부와 잡부를 고문 가하듯 학대하는 만행은 공분을 일으켰다. 노마 필드는 코바야시 타끼지가 게 가공선의 참혹한 현실을 ‘집단’ 주인공을 통해 형상화하려고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계급적 단결과 행동이라는 프롤레타리아문학의 긴급한 과제를 실천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고, 따라서 집단 주인공의 설정이 기법의 차원이 아니라 노동자의 마음을 진심으로 움직이기 위한 실천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거짓 해피엔딩을 피하면서 절대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으로 끝을 맺은 점도 그러한 실천의 연장선에 있다.

발표와 함께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게 가공선』은 곧장 연극무대에 올랐을 뿐 아니라 1933년에 이미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로 번역되었다. 흥미롭게도 2008년 일본에서 40만부를 웃도는 판매로 베스트셀러에 등극했고, ‘게공선’이라는 낱말은 그해 신조어와 유행어 대상(大賞)으로 뽑혔다. 혹자는 일본공산당의 당원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고도 할 정도다. 그러나 특히 젊은이들에게 각광을 받았다는 것은 일본사회의 그늘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 책을 읽는 여러 재미 중에 코바야시 타끼지의 인간적인 면모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노마 필드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잔혹한 고문에 희생당한 투사보다는 뚜렷하고 다채로운 개성과 따뜻한 품성을 지닌 청년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그 청년은 맛있는 식당을 찾으면 단골로 정해놓고 다녔고, 첫 월급으로 동생에게 바이올린을 사주었다. 또 이소노 소작쟁의에 참여했다가 “일개 노동자와 같은 자들의 입에서 ‘착취’ 같은 단어들이 상식처럼”(이하 인용문 번역은 평자가 다소 수정했음)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물론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그가 스물한살 때 만난 연인 타끼는 열여섯이었고 성매매를 하고 있었다. 항구도시 오따루(小樽)에는 성매매가 성행했다. 타끼는 “소학교에서 1, 2등 하며 졸업했지만”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매춘하는 곳으로 팔려왔다. 그는 9개월 만에 빚을 대신 갚아주고 타끼를 영업소에서 빼내왔다. 청년 코바야시 타끼지는 열렬한 사랑을 통해 성매매를 둘러싼 질투와 동정과 윤리적 갈등, 자기 안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대한 성찰 같은 번민을 맛본다. 그는 자신에게 타이르듯 말한다.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지극한 괴로움도 겪어야만 해.”

코바야시 타끼지의 삶을 통해 일본의 타이쇼오(大正) 교양주의(1920년대 전후, 자아의 충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타이쇼오 데모크라시에 의해 부상한 교양 중시 경향)를 엿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독서, 창작, 회화, 음악 등 다양한 문화를 남에게 질세라 익히고 누리는 풋풋한 청춘 군상의 지적 경합과 우정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오따루 고등상업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선택한 코바야시 타끼지는 매년 외국어 연극 공연에 참여했다. 또 그가 졸업한 1924년에 제출된 논문들 중에는 사회문제나 사상을 다룬 것이 꽤 있었다. 코바야시 타끼지는 졸업논문을 통해 “학문은 ‘머리로만 하는 고민’도 아니고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단순한 해석’도 아니다. 더구나 ‘이념을 위한 이념’은 절대로 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1928년 3월 15일 일본공산당 탄압 때 총검거자 수는 토오꾜오와 오사까에 이어 홋까이도오가 세번째로 많았다.

하지만 코바야시 타끼지의 삶을 가장 집약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은 죽음일지도 모른다. 노마 필드는 코바야시 타끼지의 『1928년 3월 15일』을 가리켜 ‘고문문학의 세계적 걸작’이라고 언급하면서 그가 당한 고문은 이 작품이 묘사한 것보다 훨씬 잔인했다고 말한다. 체포당한 지 단 세시간 만에 그는 빈사 상태에 이르러 사망했다. 운명적인 죽음의 형식, 처참한 고문 끝에 숨이 끊어진 활동가, 이것은 그가 일본공산당의 자긍심이자 영웅으로 길이 남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부여해준다. 사족이지만 일본공산당은 유럽의 정당들처럼 ‘사회’나 ‘민주’를 조합한 당명으로 변경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 책을 읽은 바로는 그것이 무산정당 중 일본공산당만 자국의 아시아 진출을 제국주의로 보고 계속 반대한 일과 코바야시 타끼지라는 존재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여하튼 그의 죽음은 폭력을 딛고 넘어서는 인간의 존엄을 웅변하는 듯하다. 그가 사망하자 루쉰은 조전을 보내고, 중국 문학자들은 모금활동을 벌였다. 프랑스공산당 기관지 『뤼마니떼』는 항의운동을 호소했고, 뉴욕 인터내셔널 퍼블리셔스는 그의 살해 소식을 전하며 작품집을 출간했다. 죽음을 통해 그는 일본을 뛰어넘어 넓은 세계로 성큼 나아간 셈이다.

이제 코바야시 타끼지가 어느 편지에선가 “사이사이로 붉은 단층을 보여주는 계단처럼 산이 솟아 있는 그 마을을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고 토로했던 오따루 이야기를 잠깐 하고 이 글을 맺을까 한다. 오따루는 100년 전 자본주의적 번영과 모순의 응집으로 긴장감이 넘쳤던 것과 달리, 오늘날에는 무척 사랑스럽고 아름다우면서도 느른하다. 내가 2001년 처음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더라도 오따루는 눈에 띄게 쇠락했다. 여행객들이 그저 한나절 관광을 즐기는, 삿뽀로의 근교 도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코바야시 타끼지가 이를 본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만약 이 책의 독자 가운데 오따루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코바야시 타끼지의 절대적 존재감이 서려 있는 홋까이도오척식은행 오따루 지점(현재 니또리似鳥미술관), 오따루문학관, 오꾸사와 묘지를 둘러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