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푸른역사 2018

우리가 들을 때

 

 

유현미 劉賢美

인하대 강사 coolhot85@hanmail.net

 

 

180_399

“들어라 세상아, 나는 말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2003년에 시작한 제1회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의 슬로건이다. 말한다는 선언보다 들어야 하는 세상이 먼저 호출되고 있다. 진실 말하기는 제대로 듣는 공감적 청중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여성들은 언제나 말해왔지만 제대로 듣는 귀는 언제나 부족했다.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 스피박(G. Spivak)은 이런 현실에서 “써발턴(subaltern)은 말할 수 있는가?”라 묻고, 말할 수 없다고 답했었다. 하위주체(써발턴)의 행위성을 간과한다기보다 들릴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지배적 재현 체계의 강고함과 편협함을 비추는 문제제기였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페미니즘의 이론적·실천적 고투는 이 질문의 자장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나는 거기 없었다, 기억나지 않는다’며 가해사실을 부인하고, ‘사랑이고 합의였다’고 피해를 왜곡하는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피해 경험을 드러내고 피해자임을 정당하게 인정받아야 하는 작업은 항상 긴급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피해자 정체성이 고착되어 “더 약자, 더 큰 피해, 완벽한 피해, 그 집단의 정통적인 피해(여성주의에서는 성폭력)가 중요시”(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217면)되는 피해자다움의 요구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도 이제는 명백하다. 피해자성의 재현은 정치의 가능성이자 한계로, 섬세한 줄타기가 필요한 작업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의 구술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작업들은 정확히 이 딜레마적 상황 속에서 발전해왔다. 접근 가능한 문서자료가 많지 않았던 1990년대 공론화 초기, 구술은 일제의 강제동원을 증명할 사실적 증거로 활용되었고, 주로 위안소에서의 피해 경험만 재현되었다. 그러나 위안소 피해에 국한되지 않는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과 피해 의미화를 살펴야 한다는 인식이 여성학과 구술생애사 방법론의 학문적 진전과 함께 성장했다. 구술은 여성의 “인생 전체를 포괄하여 짜여진” 형태로 새롭게 배치되었고, 연구자들은 피해자 정체성을 포함한 총체적 인간으로서 그녀들의 “에스프리”를 담고자 했다.(정대협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증언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풀빛 2011)

이처럼 2000년대 들어 “증언(의 재현)에 접근하는 시각과 방법이 풍부해”진 데 비해, “일본군‘위안부’ 제도와 그 역사에 대한 연구의 진척은 더디었다.”(본서 17면) 그런데 2011년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한국정부의 부작위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졌고, 이후 정부기관에서 발주한 여러 연구들이 진행되며 연구자와 기반자료가 다양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강정숙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연구, 어디까지 왔나」, 『창작과비평』 2016년 여름호)

이 책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사진과 자료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이야기』(전2권)는 그 계기로 싹튼 성과물이다. 서울시의 지원을 받은 연구팀은 해외의 기록관리소에 보관된 일본군과 연합군의 공문서 자료를 새로 수집하고 이를 기존의 구술내용과 결합해 피해여성들의 경험을 재구성했다. 언론기사, 소설, 군인 회고록, 위안소 업자의 일기 등 ‘위안부’ 제도에 얽힌 다양한 주체들의 사회적 시선을 읽을 수 있는 자료들도 16명 여성의 생애사를 중심으로 재배치했다.

이 책은 남성이나 일본 군·정부, 연합군이 생산한 자료를 가해자나 방관자의 것이라고 배척하거나 분리해 다루지 않는다. 그보다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차원적 자료들을 종합했다. 예를 들어 “여기서 만난 젊은 남녀는 언제, 어디서 목숨이 다할지 모른다는 마음을 찰나에 연소시킨다”라는 어느 일본군의 낭만화된 회고를 “그곳 생활은 참으로 끔찍했다. (…) 내가 돌아오면 다른 여자가 교대로 갔다”라는 여성의 구술과 교차해 제시한다. 일본군의 시선과 재현의 기만성, 낙후성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잘 보이게 만든다. 신선하고 의미있는 접근이다. 페미니스트 역사가 조운 스콧( Joan Scott)이 말한바 경험은 이미 해석이라면, 피해자뿐 아니라 다른 주체들이 생산한 자료도 그들의 해석을 담은 재현물로서 메타적으로 분석될 필요가 있다.

이같은 메타적 작업을 수행한 연구팀의 조사과정과 문서·시각자료에 대한 일종의 ‘해제’는 이 책의 주요한 축을 이룬다. “Brothels” “Geisha house” “Prostitutes” 등이 표기된 군 문서에서 전시 성통제 정책으로서 위안소 제도의 작동방식을 읽어내고, ‘가사노동자’ ‘노동자’ ‘간호부’라는 애매한 용어로 적힌 포로 심문카드나 귀환선 명부 정보를 구술과 매칭해 여성들의 위안소 이동 경로와 귀환 경로를 추적해낸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전 아시아·태평양에 걸쳤던 전선의 이동에 따라 일제가 식민지 하층여성을 광범위하게 동원하는 양상과, 여성의 몸·성·노동을 다양하게 착취하고 관리하는 양상을 목격할 수 있다. 또한 일본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를 성적으로 위안하는 기업‘위안부’로 조선 여성을 동원하는 양태까지 다룬다.

다차원적 자료들을 시각적으로 입체화해 배치한 편집전략은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위안소와 전장의 사진들, 여성들의 이동경로가 담긴 지도 등 풍부하게 시각화된 자료들을 보면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큰 실감을 가지고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책은 위안소 피해 경험을 세세하게 묘사하지는 않지만, 이 여성들의 전 생애에 걸친 고난을 직접 목격하고 감각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공감적 청중으로 이끈다.

지금까지 ‘위안부’ 피해 여성의 얼굴은 주로 끌려가는 ‘소녀’의 모습이나 우리 앞에 선 ‘할머니’의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한편에는 ‘위안부’ 피해가 시작된 순간이, 다른 한편에는 피해를 문제제기하고 싸우는 순간이 정박되어 있다. 이 책은 여기에 여성들이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해방되지 못하는 과정, 다시 말해 일본군에 의해 유기되고 어떤 사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등시민의 삶을 사는 이야기(‘버려지다’)의 축을 추가한다. 이로써 ‘위안부’ ‘피해’의 피해됨을 좀더 구조적으로 사고할 실마리를 던진다. 위안소를 나왔음에도 “살길이 없어 두세달도 안 돼” 위안소로 다시 “스스로 팔려” 간 어떤 여성의 삶의 조건, 낯선 곳에 버려져 여기저기를 헤매며 평생 “어딜 가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탈구되는 존재들을 만드는 구조 말이다.

일제 점령하 상하이에서 요리점, 유곽, 위안소의 운영이 군의 통제하에 연속·이행되는 현상을 관찰한 한 연구는 “공창이라고 해서 국가의 책임이 면해지지는 않는다. 하물며 공창과 다르다, 또한 같다고 말한다고 해서 위안부 문제의 국가적 책임이 면해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송연옥 「상하이에서 본 요리점, 유곽, 위안소의 연관성」, 『사회와역사』 115집) “주로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취약한 존재들을 끌어당기면서도 “네가 원해서 했잖아”라는 말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고 소진시키는 성산업을 긍정할 수 없다는 한 여성은 이 성산업을 가능케 한 “거대한 권력들의 공모”를 지적한다.(이소희 외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이연 2018) 마찬가지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서도 모든 수단을 통해 여성을 성적으로 도구화하는 시스템과 그 운영자들의 얼굴이 앞으로 더 소상히 그려져야 할 것이다. 전쟁수행, 국가안보, 경제성장의 명목하에 여성들을 동원해 이익을 얻는/얻은 자들의 얼굴 말이다. 이 얼굴들이 전면에 부각될 때, 고통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성폭력 피해 서사로 수렴되지 않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좀더 제대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