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지금의 경제성장론, 무엇을 말하는가
인태연 印兌淵
청와대 자영업비서관. 본 대화 시점에는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상임회장.
전병유 田炳裕
한신대 사회혁신경영대학원/교양대학 교수, 경제학. 저서 『다중격차』(전2권)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이상 공저) 등이 있음.
정대영 鄭大永
송현경제연구소장. 한국은행 금융안정분석국장 및 프랑크푸르트사무소장, 한국금융연수원 교수 등 역임. 저서 『관점을 세우는 화폐금융론』 『한국경제 대안 찾기』 등이 있음.
주상영 朱尙榮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경제분과 의장. 저서 『거시경제학』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 등이 있음.
전병유(사회)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지 어느덧 1년 3개월여가 지났습니다. 현 정부가 남북관계는 개선해나가고 있지만, 국내 문제 특히 경제 영역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용뿐 아니라 소비, 투자, 그리고 성장률까지 하향조정된 상황입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청와대 경제수석을 교체하고, 여러 경로를 통해 규제개혁과 혁신성장을 말하는 빈도가 높아졌고요. 이에 지난 7월 300여명이 참여한 ‘지식인선언네트워크’가 「문재인정부의 담대한 사회경제 개혁을 촉구하는 지식인 선언」을 발표하는 등 진보지식인사회에서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문재인정부의 그간 경제정책을 평가하고 향후 정책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된 저간의 사정입니다. 문재인정부는 취임 이후 소득주도성장을 주요 정책기조로 삼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우리 경제에 잘 작동할 것이냐에 대해 주류경제학계의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었고, 더구나 소득주도성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대한 사회적 논란 역시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오늘 모신 세분의 진솔한 토론을 기대합니다. 먼저 독자들을 위해 각자의 최근 활동과 관심사를 소개 부탁드립니다. 정부가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경제정책 기조를 마련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셨던 주상영 교수님 말씀을 먼저 들어볼까요?
주상영 제가 육칠년 전에 임금주도성장(wage-led growth)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습니다. 주류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일반적으로 임금을 비용으로 보니까 당시에는 이걸 성장으로 연결한다는 게 선뜻 납득이 안 됐습니다만 관심을 가지고 더 찾아보니 이것이 케인즈적인 사고에서 비롯되었고, 이를 연구한 학자들도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상황에 적용해 제대로 연구해보기로 했지요. 그런데 막상 소득주도성장론이 새 정부 경제정책의 핵심기조로 등장하고 나니까 한편으로는 희열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한 부담과 책임감을 갖게 됐습니다.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으로 위촉되면서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게 됐고요. 지난 수십년간 우리의 경제성장론이 너무 공급 중심, 이윤 중심으로만 흐르다보니 그로 인한 병폐가 지나치게 누적됐어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말이 사실 엄밀한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보다 앞선 선진국들도 꼭 그런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서도 꾸준히 국가가 분배에 관심 갖고 개입하는 정책을 펴왔습니다. 한국의 분배구조가 너무 망가졌기 때문에 단순히 복지만을 늘리기보다는 소득을 통한 1차 분배에 역점을 두면서 그밖의 통상적인 성장정책을 병행하는 길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임해왔습니다.
전병유 말씀하신 대로 소득주도성장은 한국경제가 지난 20여년간 시장에서 소득분배가 악화되었다는 것, 즉 노동분배율이 감소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격차가 확대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국은행에서 30여년간 근무하기도 했던 정대영 소장님 의견도 오늘 들어볼 수 있겠습니다.
정대영 저는 한국은행에서 2012년에 퇴직하고 송현경제연구소를 만들어 연구하고 집필하고 정책 제안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요즘은 갈수록 한국경제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6월에 충남 아산의 도고라는 곳으로 거처와 사무실을 옮겼는데요, 한국경제에서 가장 어려운 쪽 중 하나가 지방, 그리고 농업이니 이 문제를 더 가까이 접하면서 긴 호흡으로 한국경제를 고민해보려 합니다. 그와 관련해 또다른 관심 분야가 술입니다.(웃음) 술산업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농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농산물을 고부가가치화할 수 있는 분야지요. 우리가 술을 즐기고 잘 마시는 민족인데, 우리 술이라는 게 값싼 소주, 막걸리가 대부분이잖아요. 그래서 제대로 된 우리 술을 만들고 보급하면서 술 산업과 문화를 바꾸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금방 되는 일은 아닐 텐데 재미있게 하려 해요. 소득주도성장은 가계의 소득을 높이고, 이를 통해 소비와 투자 등 내수를 늘리는 정책이라는 점에서 방향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혁신성장, 공정성장, 포용성장 등 다른 성장담론과 같이 사용되면서 국민들이 헷갈려하고 신뢰하지 못하게 된 듯합니다,
전병유 오늘 논의의 핵심인 소득주도성장에서 꼭 고려해야 하는 부문이 자영업입니다. 최근에 소상공인들이 많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현장과 떨어져 있으면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재계와 노동계에 비해 목소리를 직접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기도 하고요. 청와대가 신설하는 자영업비서관에 인태연 회장님이 후보로 거론된 것을 언론보도를 통해 접하기도 했는데 반갑습니다.(본 대화 이후 8월 6일 공식 임명됨—편집자)
인태연 저는 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라는 단체에 속해 있습니다. 2013년에 남양유업 ‘갑질’ 사태가 터지면서 프랜차이즈, 복합쇼핑몰, 임대차 같은 ‘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활동해왔습니다. 자영업자가 통계청 조사로만 600만명 내외입니다. 그중 150만명 정도가 직원을 고용하고 있고요. 어림짐작이지만 이들이 평균 1.5명만 고용한다 쳐도 피고용인이 200만명이지요. 그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가족의 수가 10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무등록자까지 치면 대략 천만명이 자영업 부문에서 먹고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 딸린 식구까지 따지면 2천만명이 넘을 수도 있죠. 이렇게 인구학적으로도 엄청난 영역인데 자영업의 어려움이 사회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문제라는 인식이 지금껏 부족했던 것 같아요. 제가 몇년 전에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개념이 논의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천만명에 달하는 자영업 부문이 이 논의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청와대에서 자영업비서관을 두겠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전병유 저는 주로 고용 문제와 불평등, 한국경제 등에 대해 연구와 정책 자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최저임금과 소득분배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발언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 말씀을 듣고 생각을 정리할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새 정부 1년여, 경제사정은 어떠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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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정책은 하나의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담론과 이론을 실제 국가 차원의 성장전략으로 채택해서 현실에 적용한 해외사례도 찾아보기 힘들거니와 인수위를 거쳐 일관된 정책패키지로 설계하는 과정을 갖지 못한 채 시행하다보니 여러 논란이 불가피했다고 보입니다. 이같은 상황을 포함해 지난 1년여의 분위기에 대해 전반적인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정대영 경제상황이 지난해에 비해 많이 나빠졌다고 흔히 말하는데, 사실 2017년이 특별했던 해입니다. 경제와 직접 연관되는 건 아니지만 촛불과 탄핵을 거쳐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당한 기대심리가 있었죠. 갑질 문제 완화, 정규직 확대, 비정상의 정상화 등이 논의되면서 소비심리가 좋아졌고, 여기에다 부동산 경기와 수출이 좋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성장률이 좀 높게 나타난 것이고, 올해가 안 좋아 보이는 겁니다. 우리 경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상황이 나빠져왔습니다. 고용의 질이 특히 악화되었죠. 이미 그때부터 불평등·양극화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성장 자체도 둔화됐고요. 최근에 더 수면 위로 떠오른 자영업자 문제도 새로운 문제만은 아닙니다. 노무현정부 때도 식당 업주들이 솥단지 던지는 시위를 했고,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는 심지어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항의할 힘도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최저임금이 급격히 오르다보니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인 것 같아요. 지금 분위기를 그렇게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전병유 일반적으로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저성장 양극화의 기본적인 흐름이 유지됐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2017년에는 통계지표를 보니까 약간 좋았더라고요. 반도체 수출 호조와 건설경기 호황으로 경제성장률이 오랜만에 3%대를 넘어섰고요. 그랬다가 올해 들어서는 아직 지표상으로는 크게 하락한 것은 아닙니다만 현장의 체감 경기는 많이 차가워진 것 같습니다.
주상영 말씀하신 추세에 저도 동의합니다. 노동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인구 증가세가 지난 15년 동안 계속 둔화됐어요. 이제 생산가능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했고요. 실물자본 측면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투자가 중요하다고 강조해옴에 따라 자본축적은 꽤 큰 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국민소득에 대비한 경제 전체 실물자본의 양, 즉 자본산출계수 또는 자본심화도라고 하는데, 이게 2000년대 중반부터 선진국 수준인 3.2, 3.3 정도까지 도달했거든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이 값이 오르는 동안에는 물적자본의 축적에 의한 고성장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자본에 대해서도 결국에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동합니다. 요컨대 이제는 노동력 증가에 의한 성장, 자본축적에 의한 성장 모두 그 여지가 별로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 영향을 수치로 정확히 나타내기는 어렵지만, 대략 해마다 경제성장률의 0.1~0.2%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왔다고 봐야 합니다. 작년에 반도체 호황, 건설 수요 등을 통해서 3% 이상 성장했습니다만 특별한 호재가 없는 이상 다시 원래대로 저성장 추세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전병유 인구와 자본 측면에서 구조적인 장기 침체 국면에 진입했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은데요, 자영업 현장에서도 비슷하게 느끼시나요?
인태연 자영업자들에게 지금 가장 중요하게 대두된 이슈가 최저임금인데, 작년에 많이 올린 효과가 올해부터 나타나는 거거든요. 작년은 뭐가 뭔지 모르게 지나간 셈이고요. 그런데 최저임금이 급등해서 자영업자들이 많이 엎어지게 될 거라고들 하지만, 원인을 자꾸 거기서만 찾다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럼 최저임금을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만 나와버리기 쉽거든요. 최저임금을 그대로 두면 자영업자들은 살 만할까요? 저는 양 측면을 다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영업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갖는 부담감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지 살피고 그에 따른 구조적 해결책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영세자영업자들에 대한 실효적 지원방책은 무엇인가도요. 어려움에 처한 자영업자의 요구, 그리고 또다른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의 생존권적 요구를 조화시키는 방향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전병유 한국경제가 작년처럼 상대적으로 좋을 때조차 자영업은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별 차이가 없다는 진단인가요?
인태연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나아지기 힘들죠. 기본적으로 가속화되는 대기업의 시장 독점화를 이겨낼 방법이 없으니까요. 사실 자영업이 일종의 사회안전망 역할을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IMF위기 때 일자리를 잃은 그 많은 노동자들이 자영업 시장에서 재기하지 못했다면 국가 자체가 완전히 휘청했을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97년부터 한 십년간은 괜찮았어요. 회사 다니던 사람이 해고당하거나 퇴직해도 치킨집 하나 차리면 살 만했거든요. 이게 바뀐 게 2006년 무렵부터인데 꼭 국제적 불황이나 과잉진입 때문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는 재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심각해졌습니다.
최저임금 인상과 자영업의 위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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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유 최저임금 문제를 거론해주셨습니다만, 보통 학계에서는 최저임금 인상이 경기가 좋을 때 해야 부정적 효과가 작게 나타나고 긍정적인 효과가 커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번 최저임금 인상이 최근 경기 부진의 원인은 아니라 하더라도 타이밍상으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이렇게 평가해도 될까요? 정대영 소장께서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라는 표현도 해주셨는데요.
인태연 자영업자 입장에서는 턱밑까지 물이 찰랑찰랑하게 차올라 있는 상황이어서 인상의 영향이 작은 수준이라 하더라도 금방 위기감이 생기게 되지요. 과거에는 영업부진을 그저 나 개인의 책임이라 생각했는데, 최저임금 이슈가 제기되니 이게 정책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고 절망과 분노가 생겨나는 것이죠.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근본적으로는 구조개혁을 통해서 목까지 차 있었던 수위를 확 낮출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합니다.
전병유 좋은 비유인 것 같습니다.
인태연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지…… 수영 잘하는 재벌 대기업은 괜찮은데, 그렇지 못한 영세자영업자들은 위태위태한 거죠.
주상영 일자리안정자금1은 효과가 별로 없나요?
인태연 어떤 지원책이든 필요 없지는 않지요. 그러나 한가지 지원책으로 영세자영업자들의 위기상황 그 자체를 타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일자리안정자금은 직접지원이라는 획기적 방책으로 저는 환영합니다. 단 자영업자들의 현재적 위기를 보호하고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안정시키려는 의도에 맞게 좀더 범위를 확대하고 액수도 늘려주길 바라는 것이지요. 또한 기타 간접지원 형태도 개발해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각종 방책을 찾아야 할 겁니다.
전병유 그런데 일자리안정자금 도입에 대해서는 이것이 혹시 자영업의 과당경쟁과 ‘좀비기업화’를 부추기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합니다.
인태연 왜 자영업으로 과잉진입하게 되는지 원인을 살펴야지, 과잉진입했으니까 나가라고만 하면 안 되죠. 그 많은 인력을 어디로 옮겨 갈 수 있게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구조적인 문제 탓이잖아요. 상당 비중이 대기업에서 넘어온 사람들이거든요. 사실 이 안에서도 나가고 싶은 사람이 절반은 된다고 봐요. 여러분이 거리를 지나가다가 멀쩡한 가게들 보면 그래도 저 사람들은 먹고살 만한가보다 생각하실지 모르는데, 알고 보면 많은 분들이 빚더미를 끌어안고 있거든요. 어떻게 해서든지 투자금이나 권리금이라도 받고 나가야지, 그냥 나갔다가는 빚이 고스란히 남아서 돌이킬 수 없어집니다. 이런 분들이 다른 살길을 찾을 수만 있다면 과당경쟁도 해소될 거예요.
전병유 우리가 실제 현실을 충실히 파악할 필요가 있는 만큼 인회장님의 말씀을 좀더 들어보았는데요, 다른 분들은 최저임금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2017년(16.4%, 7530원)에 이어 올해 역시 두자릿수 인상률(10.9%, 8350원)을 기록했습니다.
인상의 적정선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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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영 우리가 과연 얼마 정도 버는 것이 정상인지를 따져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집집마다 경제형편이 다르듯이 국가마다 경제력이 다르니까요. 우리 경제의 능력에서 보수를 얼마 정도 받아야 할지, 즉 많이 받는 사람은 얼마 정도 받고 적게 받는 사람은 얼마 정도 받는 것이 적정선일지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만 최저임금을 얼마까지 올릴지, 그리고 일자리를 어떻게 나누고 만들지 등등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아직 논의도 관심도 찾아보기 힘들어요. 못 받는 사람의 문제는 결국 뒤집어보면 누군가 너무 많이 가져가는 탓입니다. 그게 우선은 재벌과 임대사업자일 테고요. 그다음으로는 우리가 흔히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구직자들이 주로 희망하는 쪽입니다. 공무원, 공기업, 의사 같은 전문직, 대기업 정규직, 정규 교수…… 이런 직업군이 우리나라의 경제능력 이상으로, 즉 미국이나 유럽의 같은 집단보다 더 많이 받아요. 김낙년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한국은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8%, 상위 20%가 전체소득의 78%를 가져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것도 거의 과세되지 않는 주택임대소득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수치지요. 따라서 나머지 80~90%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적게 가져갈 수밖에 없는 소득분배구조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죽기살기 경쟁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사실 인회장님이 말씀하신 문제들은 어찌 보면 한국경제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원론적으로는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구조를 깨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죠. 또다른 문제는 이같은 직업 간 과도한 보상 격차를 뒷받침하는 고비용 구조입니다. 우리나라의 물가가 안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수준은 굉장히 높습니다. 집값은 더 말할 나위 없겠고, 대학등록금 등 교육비, 임대료, 식료품 가격, 통신비 등이 비싼 나라입니다. 이러다보니 평범한 근로소득자들이 살기 힘든 거죠. 이런 문제가 같이 해결되어야 한국경제에 장기적으로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전병유 최저임금을 높이는 정당성의 중요한 근거가 우리나라 저임금노동자 비중이 매우 높다는 거였는데요. 중위임금의 3분의 2 수준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저임금노동자라고 하는데, 이 비율이 23% 수준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1, 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동시장 판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작동했던 것과 더불어 그 배후에는 방금 말씀하신 문제, 용어화하자면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고려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대기업 정규직과 영세사업장 근로자 간의 격차가 너무 크다는 문제 말이지요. 또다른 하나는 이 문제를 건드리기 위해서 가능한 정책이 여러가지 있는데 사회안전망이 그중 하나입니다. 고비용 구조를 완화할 수 있는 길이죠. 이런 문제들에 대한 체계적인 고민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주상영 올해 초에 최저임금 논란이 본격화되면서 보수언론 중심으로 공격이 계속됐는데요, 최저임금의 적정선이 어느 정도인가 했을 때, 그 기준을 여러가지로 둘 수 있겠죠. 다만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풀타임으로 일했을 때 빈곤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 최소한의 기준으로 제기되곤 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은 이제 본인 혼자 살기에는 그 수준을 넘어섰어요. 저는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뿐 아니라 한명 정도 더 부양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지금 2인가구의 최저생계비를 통해서 역산하면 거기 해당하는 시간당 임금이 8000원대 중반 정도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적정 최저임금이 지금 시점에서 만원은 조금 높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8000원대 중후반 정도를 단기 목표로 두고, 그 이후부터는 우리 경제가 성장하는 속도, 명목성장률이 한 4~5% 된다면 그 정도로 가는 게 무난하지 않은가 싶어요. 소득주도성장이 정부의 주요 정책이긴 한데 최저임금만 너무 앞서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근로장려세제를 확대하긴 했지만, 실업보험만 해도 우리나라의 제도가 OECD 국가들과 비교하면 굉장히 인색합니다. 이런 것들도 비슷한 속도로 같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전병유 지난 대선 때 최저임금을 만원으로 올리겠다는 공약이 각 캠프에서 공통적으로 나왔지만, 이게 왜 만원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것 같아요. 지나치게 과잉정치화된 의제가 되어버려서 여러 사회적 이슈를 만들기도 했고요. 최저임금은 가격을 조정하는 정책이라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까. 언급된 바와 같이 고임금 그룹과 저임금 그룹이 있고, 대자본이 있는가 하면 중소기업, 영세자영업자가 있고…… 이 경제주체들 간에 이해관계가 상반되다보니 최저임금 인상에 따르는 부담과 책임을 서로 떠넘기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을 대 을의 문제로 흐르는 것이 잘못됐다, 갑과 을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인태연 2015년에 저희 단체가 민주노총과 정책협약을 하면서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지지선언을 했어요. 그 뒤로도 지속적으로 협력하고 대화했더니 노동단체에서 자영업자들에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이번 최저임금 인상 논의 과정에서도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중소 자영업자들을 위한 정책을 세우라고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했거든요. 저는 이게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그 전에는 노동자들이 자영업자들 욕하기 바빴거든요. 처지를 잘 모르다보니, 어쨌든 사람 고용하는 중산층인데 알바생이나 저임금 노동자들 수탈해가면서 그걸 안 올리려고 한다, 이런 선입견이 있었던 거죠. 자영업자들은 또 그들대로 노동계에 대해 저 사람들은 순 자기네 월급만 올리려 한다고 안 좋게 봤고요. 노동자와 자영업자들이 이렇게 싸움박질만 해가지고는 대한민국의 앞길이 너무 험난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액수는 아직 민감한 부분인데요, 저는 이 상황조차도 자영업자들, 노총, 청년 노동자들이 만나서 깊이있게 대화하고, 정부에서도 이들을 주체로 삼아 문제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파악하는 과정에서 더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전병유 오늘 오전에 고용노동부가 내년도 최저임금 고시를 했더라고요. 최저임금 인상은 자영업자 입장에서는 현금이 나가는 거잖아요. 반면에 임대료나 카드수수료 인하 같은 자영업자 지원정책은 언제 지급될지 모르는 어음인 셈이고요. 그러니 이런 부분에 대한 조정을 내년에 최저임금위원회에서 한다면 을들끼리 대화가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인태연 저는 고시가 됐다고 내년만 생각하기보다 올해부터 대화를 시작하자는 입장입니다. 꼭 최저임금위원회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테이블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부분에서 대화해보는 게 필요하다는 취지로 저희 연합회 차원에서 민주노총, 한국노총과 삼자토론을 기획해서 이달 말쯤 모여보자고 논의 중이에요. 사회적 합의 과정을 제대로 밟아보지 않은 우리 사회의 풍토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정대영 이번 최저임금 논란의 핵심은 인상 자체가 아니라 한번에 너무 많이 올랐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으로 계속 인상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습니다. 노동자 입장에서도 한두번 많이 오르고 다음에 안 오르는 것보다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오르는 것이 장기적으로 좋고, 기업주 입장에서도 충격이 적고 미리 대처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최저임금의 체계나 결정방식 등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지역별로 집값·집세와 생계비 등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요인이 다르기 때문에 분권화시대에 맞추어 최저임금 결정권한을 지자체로 넘기는 문제도 고민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병유 말씀들을 들어보니 최저임금같이 전국적인 수준에서 다양한 계층에 차별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은 그 수준과 결정 방식을 정함에 있어 전문가의 분석과 사회적 대화·타협 모두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장’의 실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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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유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보수언론의 공격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금의 분위기가 오히려 개혁 후퇴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가 최근에는 소득주도성장에서 포용적 성장이라는 말로 갈아탄 듯 보입니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6월 윤종원 신임 경제수석을 소개하면서 “소득주도성장·혁신성장·공정경제가 포용적 성장과 같은 개념이라는 소신을 가진 분”(중앙일보 2018.7.17)이라고 포괄적인 개념으로 정리한 바 있기도 합니다. 요즘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정부가 어딘가로 방향을 튼 건지, 아니면 기존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부분적으로 변경하는 건지. 주교수님이 좀 아실 것도 같은데요.
주상영 저도 정확히는 모르죠.(웃음)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것의 필요성은 대부분 인정하면서도 아무래도 생소한 개념이기도 하고 진보적 관점이 드러나다보니까 정부 출범 초기부터 이 시도를 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혁신성장이라는 말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보이고요. 너무 음모론적인 짐작인지도 모르지만 최근에 포용적 성장이라는 또다른 새 담론을 들고 와서 이제 소득주도성장론을 덮어보자는 의도도 살짝 엿보입니다. 아무튼 포용적 성장이라는 것이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매한 개념이거든요.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배제적 성장인데, 그런 걸 주장하는 사람은 없어요. 국제기구에서 저개발국을 상대로 ‘포용적인 성장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권고할 때 쓰는 개념으로 적합하달까, 우리 정도 되는 나라에서 포용적 성장 얘기하면 아무 내용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인상입니다. 저는 그래도 애초에 들고 나왔던 소득주도성장이 앞으로 적어도 몇년은 더 밀고 나갈 가치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성장정책을 다 소득주도 취지에 맞게 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임금정책, 고용정책 같은 핵심적인 몇가지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기치 아래 계속 추진하면서 중도적 관점에서의 성장 전략, 즉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높인다든지 혁신을 독려한다든지 하는 방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봐요.
정대영 기본적인 생각은 저도 주교수님하고 비슷한데, 성장론의 종류가 한국은 아주 많지요. 소득주도성장, 동반성장, 녹색성장, 혁신성장, 공정성장…… 그런데 앞에 뭘 붙이는 게 제가 볼 때는 성장에 자신이 없으니 이것저것 좋은 말을 갖다 쓰는 것 같아요. 그냥 성장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성장’이라는 게 경제학 교과서에 보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잘 나와 있고요. 공급, 수요, 산업, 이 세가지 측면에서 성장정책을 만들 수 있겠지요. 이렇게 원론에 충실하면 되는데 너무 멋있는 정치적 슬로건을 만들려다보니 문제가 꼬이는 듯합니다. 정부가 최근에 들고 나온 포용적 성장에 대해서는 OECD에서 나온 자료를 보니까 성장 외에도 불평등이나 환경이나 삶의 질 같은 문제에 더 관심을 갖자는 거더라고요. 너무 당연한 얘기지요. 현대의 제대로 된 정부는 다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포용적 성장을 왜 들고 나왔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경제학에서는 성장이라고 하면 결국 국민소득을 키우는 것을 말하거든요. 소득주도성장도 소득을 늘려서 성장을 한다는 거니 사실 맞는 말이죠. 문제는 핵심정책이 최저임금에만 매몰된 데 있습니다. 가계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길은 다양하거든요. 제가 볼 때 최저임금은 작은 부분입니다. 다른 길도 모색해야죠. 무엇보다 괜찮은 일자리의 창출이 중요합니다. 일자리가 늘면 당연히 소득이 늘게 되지요. 의사 등 전문직 정원의 확대, 신협과 새마을금고와 지방은행 등의 신규설립 허용, 탐정·독립금융상담사 등 한국에 없는 직업의 개발 등 찾아보면 많습니다. 그리고 법과 제도의 공정성·투명성을 높이는 일, 서민금융 활성화 등 금융접근성을 높이는 일, 집값·집세를 하향안정화하는 일 등도 직간접적으로 소득을 늘리는 정책입니다. 말하자면 현 정부가 스스로 소득주도성장의 범위를 좁혀온 게 문제인 상황이니 더는 우왕좌왕하지 말고 잘 발전시키고 넓혀나가는 길을 찾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병유 정부가 포용적 성장이라는 말을 들고 나온 데는 드라이브 요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기존의 소득주도성장론은 시장에서의 분배 개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이제는 여기에 재분배를 결합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거든요. 임금을 높이는 것뿐 아니라 복지를 확대하는 식으로요. 또 하나는, 우리 경제가 장기 침체 국면을 맞을 경우 어떤 수단으로 그것을 완화할 수 있는가 했을 때 새로운 산업정책이 필요하다든지, 규제를 풀어서 혁신이라는 걸 해야 한다든지 하는 방향이 고려된 것 같습니다. 주교수님께 질문드리고 싶었던 것이 실은 이런 상황에서 어디에 중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 여전히 분배 개선을 통한 소득 증대에 우선순위가 있는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상영 다시 말씀드리지만 소득분배 개선만 해야 된다는 입장은 아니라는 전제로, 지금 단계에서는 그게 반드시 포함되어야 건전한 구조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전병유 그럼 결국 포용적 성장하고 같은 거 아니에요? 포용적 성장 안에도 그렇게 이것저것 다 담긴 걸로 보이는데요.
주상영 소득주도성장에서 소득이라는 게 노동소득, 좀더 확장하면 가계소득을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가계소득주도성장으로 이해하면 더 명료할 것 같아요. 가계소득 말고 다른 소득은 실질적으로 기업소득이고요. 이윤 말이죠.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의 주요 선진국을 보면 GNI(국민총소득)에서 기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15% 내외, 가계소득이 70% 이상이거든요. 나머지는 정부소득이고요. 그런데 유독 한국과 일본은 기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25%쯤 돼요. 가계소득은 60% 초반이고. 한국과 일본은 경제발전단계는 다르지만, 기업소득 비중이 올라가고 가계소득 비중이 내려간 지난 20여년 동안 일본은 장기침체, 한국은 성장률의 급격한 하락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은 서로 적절한 비율을 유지해야 합니다. 기업소득의 비중이 너무 낮으면 기업의 활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가계소득 비중이 너무 낮아지면 경제 전체적으로 수요부족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생산한 물건을 사주는 데가 결국 가계 부문이잖아요. 일본의 생산력이 우수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사람들도 여전히 성실하게 일하죠. 그런데도 그렇게 오랫동안 침체에 빠졌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업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가계 부문이 지나치게 자기 몫을 양보한 탓입니다. 성장의 과실이 가계 부문에 충분히 돌아가야 경제가 선순환합니다. 가계에 소득이 있어야 소비가 있고 소비가 있어야 기업의 투자전망도 밝아지는 것 아닙니까? 이런 모습을 볼 때 우리도 이 구조를 어느 정도 교정하지 않고는 만성적인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전병유 그러니까 장기침체의 주된 요인이 수요 측면에 있다고 보시는군요?
주상영 그렇습니다.
전병유 공급 측면의 정책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는 거고요?
주상영 공급 측면에 대한 정책도 당연히 필요하죠. 다만 그쪽은 실은 국가가 나선다고 예전처럼 성장률을 높이는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재정지원할 때 그동안은 주로 기업에 주는 방식을 취해왔는데, 이제는 사람한테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자리안정자금 같은 것도 기업이나 자영업자한테 주는 것도 필요할 수 있지만, 결국 일하는 사람 본인에게 임금 보전을 직접 해주는 방식을 동반해야 실효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전병유 소득주도성장이든 포용적 성장이든 정책의 패키지를 어떻게 설계할 것이냐, 정책의 우선순위와 자원배분을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최저임금정책을 너무 외로운 원톱으로 가져간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씀도 해주셨고요. 이와 관련해서 공정경제의 문제로 넘어가보도록 하지요.
공정경제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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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유 앞서 인회장님이 그간 심화해온 재벌의 독점화 문제를 제기하신 바 있는데, 포용적 성장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요즘 정부 움직임을 보면서는 어떤 걸 느끼시는지 궁금합니다.
인태연 자영업자들이 요즘엔 굉장히 민감합니다. 포용적 성장이라는 말에 모호한 감이 있는데 실제로 정부 요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봤을 때 만일 재벌 중심의 행보를 보인다면 재벌을 포용하는 성장이 될 거라 우려하고, 반대로 다른 모습을 강조한다면 약자를 포용하는 성장이 될 것 같다고 느낀다는 겁니다. 최근에 문재인 대통령이 휴가 중인데도 중소상공인, 자영업자 등과 맥주 미팅을 가졌지 않습니까. 그리고 청와대 수석회의(7.23)에서는 “자영업을 기업과 노동으로만 분류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독자적인 산업정책 영역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재인정부가 출범할 때 가지고 있었던 소득주도성장이 품은 가치 속에 우리 자영업자들의 존재가 살아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길 바라기도 하고요.
전병유 지난 1년여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비롯해서 정부가 공정경제를 만들기 위해서 꽤 노력한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 현장에서 실감하는 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부가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아요. 당장 재벌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기보다는 일감 몰아주기나 갑질 같은 구체적인 문제를 개선하는 데 우선순위를 둔 것으로 보이는데요.
인태연 현장에서는 김상조 공정위원장의 노력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러나 많은 분들이 아직도 공정위의 역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한계도 있지요. 그런 상황에서 공정거래위원회 퇴직자들이 대기업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특혜를 준 혐의를 받고 있는 정재찬 전 위원장과 김학현 전 부위원장이 지난달 구속됐습니다. 과연 우리 영세상인들이 공정위에 기댈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드는 사건이죠. 결국 공정위가 인적청산 없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합니다.
주상영 우리나라에 갑을관계가 워낙에 만연하다보니 진짜 공정하게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들려면 공정위 같은 조직이 전국적으로 자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별로 분산해서요.
인태연 큰 문제, 가령 재벌 순환출자 같은 문제는 중앙에서 맡고, 갑을관계로 부딪치는 식의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는 지역에서 맡는 식으로 분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병유 공정위의 전속고발권 폐지와 지역 수준의 공정위를 만들자는 제안들은 이미 토론회를 비롯해서 여러 경로로 충분히 제시됐다고 봅니다. 다만 그걸 실천할 수 있느냐가 문제겠지요.
정대영 앞서 말씀드린 성장을 가능케 하는 세가지 측면, 즉 수요, 공급, 산업 중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장애요인이 뭐냐 따져본다면 저는 공급 측면 중에서 생산성의 제약이라고 생각합니다. 혁신성장이건 포용적 성장이건 뭐건 간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한국경제의 생산성을 제약하는 것으로 규제 문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법과 제도의 공정성·투명성 부족 문제가 심각합니다. 스위스 다보스의 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하는 ‘세계경쟁력보고서’를 보면, 정책의 불투명성, 편파적이고 비효율적인 관료, 사법제도의 신뢰성 저하 등이 한국경제의 경쟁력을 깎아먹는 주 요인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국민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뜨려 성장률이 낮아지는 겁니다. 한국경제는 경제규모도 커지고 거의 선진국 문턱에 와 있습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독일이나 프랑스 정도의 선진국이 되려면 자본과 노동을 늘리거나 기술을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얼마 전까지 성장해왔지만, 이제 생산가능인구는 줄어들 일만 남았고, 자본도 포화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 전반의 시스템이 얼마만큼 공정하고 투명하게 확립되는가가 지속성장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불평등 문제도 불공정한 제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정하고 투명한 법과 제도가 갖추어지면 사회적 신뢰 수준과 국민의 정직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경제 전체의 생산성과 효율성도 높아져 성장이 잘되고 분배 상태도 개선될 거라고 봐요. 기업부문도 마찬가지인 것이, 기업이 기본적으로 경영을 잘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게 이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정책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집행되는 거거든요. 경제 영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공정하지 못한 갑을관계의 폐해는 또 곳곳에 얼마나 많이 퍼져 있습니까. 이러한 여러가지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틀을 만드는 일이 지금 우리 경제가 넘어야 할 고비라고 생각합니다.
주상영 제가 소득주도성장의 필요성을 쭉 이야기해왔지만 그걸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이 좀 바뀐 것이, 저를 비롯한 지지론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이걸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또한 중요하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저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말이 좀 생소하기 때문에 일년 전만 해도 개념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기 위해서 이게 분배 개선을 포함하는 총수요 확대 정책이라는 식으로 설명했거든요. 돌이켜보니 듣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단기적인 경기 부양책 아니냐 이렇게 비판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원래 의도가 그게 아닌데도요. 그래서 이제는 분배 개선에 더해서 공정한 분배, 사람에 대한 투자…… 이런 식으로 소득주도성장의 취지를 더 풍부하게 살려서 설명하면 전문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남북경협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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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유 분배를 개선하면서 극심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향과는 또다른 과제로서 한국경제가 소위 ‘빅 프로젝트’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지금 우리나라 제조업에 장기적인 비전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최근에 미중 간의 무역분쟁도 가시화되고 있고 ‘뉴노멀’하에서는 세계무역이 더이상 크게 늘지 않을 거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또 제조업 ‘리쇼어링’(reshoring)이라고 해서 선진국들이 제조업 부문을 자국으로 다시 가져가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중국도 ‘제조2025’라고 해서 제조업의 첨단화를 국가전략으로 추진하는 것 같고요. 그간의 동아시아 분업체제 아래서 경쟁력을 가지던 재벌 대기업 중심의 제조업 패러다임이 시효를 다했다는 지적입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어떤 산업 비전, 산업정책 전략을 가질 수 있을지 의견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북경제협력이 새로운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라는 희망도 있습니다. 남북관계가 크게 진전되면서 경협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듯 보이지요. 우리 대화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이런 ‘큰’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정대영 박정희시대까지는 산업정책이 분명히 의미가 있었는데 그 뒤로는 점차 효과가 줄어들었습니다. 김대중정부 때 벤처기업을 많이 지원했지만 산업정책까지 갔다기보다는 당시 세계적인 IT 붐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경쟁력을 가진 산업이라 한다면 전자, 그리고 문화 영역의 한류 정도를 꼽을 수 있을 텐데요, 이게 정부의 산업정책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세계 12~13위 정도로 규모가 커진 대한민국 경제에서 어느 산업이 미래의 먹거리가 될 수 있을지를 정책 당국이, 공무원들이, 학자들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저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동차산업을 보면 주식시장에서 현대자동차 주가가 최고가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졌는데 이것은 자동차산업의 위험성이 반영된 결과겠지요. 이 산업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해관계자들에게 대응할 신호를 주는 것이라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구조조정을 포함해서 어느 산업에서 무언가 재편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민간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부도 사회안전망 확충 등 적절한 선에서 할 일은 해야죠. 그렇더라도 국가경영 차원에서 진짜 핵심 과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국가는 달리 할 일이 더 많아요. 제가 아까 강조했던 법과 제도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고치는 문제, 그것을 통한 지속성장과 분배개선. 이런 게 특히 중요하죠.
남북경협은 당연히 의미있는 일이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될 겁니다. 남북의 평화공존체제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면에서도 굉장히 중요하죠. 그러나 냉정하게 경제적으로만 따지면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월남 특수나 중동 특수, 중국 특수와 얼마나 다를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민족 화합과 평화라는 문제라면 값을 매길 수 없이 중요한 일이지만 순수하게 경제적 가치만 따졌을 때는 우리가 실제 얻을 수 있는 혜택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만의 장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중국, 미국도 들어올 거고, 일본, 러시아도 참여할 거예요. 그러니 저는 남북경협 또한 해당되는 부처에서 적절하게 맡으면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산업정책도 남북경협도 국민경제의 구조를 바꿔내는 차원으로서의 중요성은 떨어진다고 봅니다.
주상영 혁신성장과 관련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여태까지 그랬듯 특정 산업, 기업을 콕 집어 선별지원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어떤 시스템이나 네트워크에 투자하는 방식을 취해야 할 때예요. 예를 들면 중소기업에 지원한다 했을 때 중소기업 전용 연구개발센터를 만들어서 관련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식으로요.
전병유 말씀하신 대로 산업정책이 지금 인프라나 네트워크 생태계를 조성하는 쪽으로 가고 있기는 합니다. 다만 그 가운데서도 어떤 큰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남북경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상영 개성공단 사례를 보면 북한의 저임금노동력을 이용함으로써 결국 우리 이익만을 위하는 측면이 더 강했던 것 같아요. 다시 남북경협이 이루어진다면 이제는 우리한테도 좋고 북한에도 좋은 방향으로 가야 지속 가능하지 않겠어요? 아주 큰 그림하에서 질서있는 투자와 협력을 모색해야 합니다.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고요. 북한 입장에서 저개발국가로서 내수도 키워야겠지만 더 크게 도약하기 위해 수출주도성장이 필요하다고 본다면, 일차적으로는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을 공략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우리가 만일 남북경협에 산업정책적으로 임한다면 그런 점에 신경 써야 한다고 봅니다.
인태연 북한을 예전과 같은 시각으로 본다면 거기 들어가서 마냥 돈 벌 거라 생각할지 모르겠는데요, 앞으로는 다를 것 같아요. 북한 사람들이 그사이에 시장에 대해 많이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거기에다 이 사람들이 개성공단 때는 정치적인 이유로 양보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앞으로 남북경협이 경제적 가치 중심으로 짜인다면 쉽사리 물러나지는 않을 거예요. 그랬을 때 제 생각에는 자영업자들이 더 잘 협의하고 같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특정 대기업 중심으로 들어가서 독점하기보다는 수많은 자영업자들의 감각이 발휘될 여지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전병유 한국경제 입장에서 북한도 일종의 해외시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월남 특수, 중동 특수, 그리고 중국 특수 등으로 성장의 계기를 만들어낸 경험이 있습니다만 이제는 특히 중국과 베트남으로 대표되는 동북아와 동남아 생산네트워크의 변화에 북한이 어떻게 들어와야 할지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과거의 해외특수는 주로 재벌 중심 성장으로 이어지고 말았는데요, 남북경협뿐 아니라 북한을 포함한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에서의 한국경제의 혁신성장이 자영업의 소득 보장과 최저임금 인상의 순조로운 착륙 등 소득주도성장정책의 성공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한국경제의 현실과 전망에 대해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 과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주변환경은 여전히 불확실성이 높고 경기회복의 계기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더욱이 경제주체들의 이해 충돌 조정이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문재인정부가 대응해야 할 장단기 경제정책 과제들이 수없이 많을 겁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경제의 미래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리더십이 더욱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문재인정부가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면서 안전하고 순조로운 성장경로를 되찾아 ‘사람중심경제’를 실현하는 데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 폭염 한복판에도 걸음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18.8.3. 창비서교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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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소상공인, 영세중소기업의 부담을 완화하고 노동자의 고용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로,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월 보수액 190만원 미만 노동자를 고용한 사업주에게 노동자 1인당 월 최대 13만원의 정부보조금이 지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