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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도현 安度昡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리운 여우』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등이 있음. ahndh61@chol.com
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의 사생활에 대하여
불꽃 향기 나는 오래된 무덤의 입구인 별들에 대하여
푸르게 얼어 있는 강물의 짱짱한 하초(下焦)에 대하여
가창오리들이 떨어뜨린 그림자에 잠시 숨어들었던 기억에 대하여
나는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네
어두운 것들은 반성도 없이 어두운 것이어서
열몇살 때 그 집 뒤뜰에
내가 당신을 심어놓고 떠났다는 것 모르고 살았네
당신한테서 해마다 주렁주렁 물방울 아가들이 열렸다 했네
누군가 물방울에 동그랗게 새겼을 잇자국을 떠올리며
미어지는 것을 내려놓느라 한동안 아팠네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알에 세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맞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왔네
나 여기 있고, 당신 거기 있으므로
기차소리처럼 밀려오는 저녁 어스름 견뎌야 하네
연륜
도로공사 현장에서 오래된 목관(木棺)이 발견되었다 죽음을 담았지만 죽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텅 빈 관이었다 이 관을 어떤 종류의 나무로 짰는지 나는 알아내야 했다 부스러지기 직전의 나무 절편 하나를 떼어냈다 마치 나무가 손톱 하나를 깎아 내게 건네주는 것 같았다 나무의 손톱을 가져와 증류수로 깨끗이 씻은 다음, 비듬처럼 얇게 저몄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미경으로 나무의 조직을 관찰해서 나무의 종(種)이나 속(屬) 정도를 밝히는 임무만 다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사흘 만에 수종이 판명되었다 나이테의 경계가 촘촘하고 명확하며 나선무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 상록침엽교목인 주목과의 비자나무가 분명하였다 수령은 200년 가까이 되며 1천 3백년 전에 살았던 나무였다 이 연구의 과정과 결과를 정리해서 학계에 보고하면 이번 작업은 마무리될 것이었다 나는 확실한 성과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며칠 동안 수십차례 현미경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수액이 이동하는 통로인 물관부와 나뭇진구멍에서 참으로 이상한 징후를 발견하였다 비자나무는 따뜻한 남쪽 해안에서 자라는, 성장이 매우 더딘, 오래도록, 치밀하게 살다 가는 나무인데, 놀랍게도 지금까지 알려진 비자나무의 북방한계선 위쪽의 기후를 몸 안에 품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햇빛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된 것이다 게다가 이 비자나무의 생장 후반기에 적설량 50센티미터가 넘는 폭설이 여러번 지나가고, 태양의 전깃불이 두차례 까닭 없이 꺼지고, 포유류 영장목 긴꼬리원숭이과 동물의 울음소리가 나무에 아로새겨진 근거가 포착되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죽은 비자나무가 죽음 이전의 시간을 낱낱이 기록하고 저장해두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 자꾸 물으면서 이 목관 속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간 이의 작은 키와 검은 눈썹과 발자국소리가 지금의 나를 쏙 빼닮았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