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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책 2018

숲은 기호로 시끄럽다

 

 

남종영 南鍾永

한겨레 애니멀피플팀장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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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밴쿠버 아쿠아리움은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작은 실외풀장 울타리 위로 고개를 빼든 바다사자의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마침 나는 그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나는 말을 걸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바다사자에게 ‘푸우’ 하고 내뱉었다. 그러자 바다사자도 눈을 맞추며 ‘푸우’ 하고 숨을 내뱉었다. 푸우, 푸우, 푸우, 푸우……

진실이 현현하는 듯한 에피파니가 엄습했다. 나와 바다사자를 빼고는 지구는 조용해졌고, 소란을 벗어나 만물이 갑자기 조화를 이룬 듯했다. 바다사자의 끈적끈적한 침방울을 얼굴에 맞으며, 문득 이 동물과 내가 긴밀한 끈으로 연결된 존재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호모 사피엔스 종이 나타나 살아온 20만년 중 ‘인류세(人類世)’라고 불리는 최근 100~200년은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관계에서도 매우 특징적인 시대다. 인간의 일상에서 다른 종은 소거되었고, 인간은 같은 종인 인간만을 만나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동물은 동물원에 갇혀 사는 ‘살아 있는 박제’로나 볼 수 있고,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동물의 대표자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동물과 이야기하는 법도 잊어버렸다. 동물훈련사나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라는 사람들이 돈을 받고 개, 고양이의 통역사를 자처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이런 식으로 동물을 대했을까? 아니다. 인간과 동물은 서로의 몸짓언어를 이해했고,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내려 애썼고, 그러한 생각의 결과물이 양쪽의 행동으로 반영되어 세계를 구성했다. 나와 바다사자가 주고받은 일분은 종간(種間) 공유지대가 찰나로 열린 순간이었다. 물론 어떤 구체적인 메시지를 주고받은 건 아니었지만, 그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였다.

캐나다 출신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의 책 『숲은 생각한다: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How Forests Think, 차은정 옮김)는 인류세 이전의 인간과 비인간들의 상호작용을 민속지학으로 기록하며 사유한 책이다. 우리가 잊은 ‘오래된 미래’를 그는 에꽈도르의 아마존강 상류 마을 아빌라에서 찾았다. 이곳에 사는 루나족은 많은 것을 현대문명에서 소비하지만, 식량만은 사냥해서 조달한다. 사냥을 하면서 루나족은 다종의 비인간을 만나고, 저자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재규어가 딸을 낚아채 가고, 사람들이 개의 꿈을 해몽하고, 야자나무 쓰러지는 소리가 중요한 마을.

사실 이 책은 근대적 이분법을 탈주하는 포스트휴먼 철학의 대지 위에 서 있다. 에코페미니스트에서 시작해 점차 활동영역을 넓힌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네트워크로 세계를 파악하는 철학자 브뤼노 라뚜르(Bruno Latour)의 이론을 응용하는 과학지식사회학(STS) 작업들, 그리고 야생과 도시, 공장식 농장 등 근대적 공간을 탐구하는 동물지리학은 인간과 동물, 문화와 자연, 지배와 피지배 등의 세계를 바라보는 이분법적 도식을 허물고 있다. 이들의 전제는 지구에서 인간만이 유일한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 특히 동물은 지배받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연결망을 타고 인간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는 것이다.

동물은 행위주체로서 정치에 참여하며, 다른 존재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를 구성한다. 이를테면 내가 겪은 바다사자와의 사건은 찰나의 마주침으로 끝났지만, 어떤 경우에는 동물의 측은한 눈빛이 인간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동물감옥’으로서의 동물원의 잔혹한 정체성을 폭로하기도 한다. 환경사학자인 니겔 로스펠스(Nigel Rothfels)가 『동물원의 탄생』(지호 2003)에서 독일 하겐베크 동물원의 전시기법 변화를 분석하면서 설파했듯, 생태동물원은 동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덜 불편하게 보이기 위해서 탄생했다는 것도 그러한 동물의 잠재적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동물은 인간을 움직이고 때로는 직접적으로 세계에 참여한다.

저자가 아빌라 마을에서 수행한 민속지 작업도 기본적으로 이런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NT)의 철학을 전제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동물은 물론 물, 번개, 실험기구 심지어 물질적 형상이 없는 담론, 기술 등 비인간 행위주체(nonhuman agency)가 인간처럼 서로 정동을 일으키며(to affect or to be affected)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나 콘은 그동안의 행위주체에 기반한 연구가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달성하는 기이한 방식”(45면)이라고 지적한다. 행위주체가 네트워크를 이루어내는 효과만을 결과론적으로만 제시하면서, 정작 각각의 주체가 어떤 의도를 갖고 어떻게 미시적으로 상호작용하는지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바로 여기, 사후적인 ‘묘수 풀이’에 그쳤던 포스트휴먼 연구가 다다른 막다른 길에서 기호학을 불러와 돌파한다는 점에 있다. 그는 선언한다. 인간뿐이랴? 동물도 기호를 사용하고 해석한다.

이 논의를 펼치기 위해 저자는 선배 학자들이 즐겨 써온 쏘쉬르(F. Saussure)의 기호학을 버리고 찰스 쌘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기호학을 가져온다. 퍼스는 기호를 ‘아이콘’과 ‘인덱스’ 그리고 ‘상징’으로 나눈다. 짧게 설명하자면, 아이콘은 화장실의 남자·여자 그림처럼 표상하는 사물과 유사성을 공유하는 것이고, 인덱스는 온도를 나타내는 온도계처럼 직접적 유사성은 없지만 상관관계가 있는 표상이다. 반면 상징은 사물과의 상관관계 없이 임의적인 약속에 의해 성립되는 표상(주로 언어)을 말한다. ‘빵’이라는 단어가 이를 표상하는 사물과 어떤 속성도 공유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간 우리는 표상을 언어와 동일시하면서, 동물은 표상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저자는 아마존의 숲에서 아이콘과 인덱스를 사용하는 다양한 비인간동물들을 발견한다.

그럼, 동물은 어떻게 기호를 사용하는가? 한번은 숲으로 사냥을 따라갔다가 엎드려 자는 저자에게 원주민이 말한다.

“반듯이 누워 자! 그래야 재규어가 왔을 때 그 녀석을 마주 볼 수 있어. (…) 엎드려 자면 재규어는 너를 아이차(먹잇감)로 여기고 공격한다고.”(11면)

여기서 ‘엎드린 물체’는 재규어에게 ‘고기’라는 기호(아이콘)이다. 이 기호는 재규어에게 잡아먹는 행동을 격발한다. 원주민은 기호를 교환하는 숲의 세계를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숲에서는 엎드려 자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재규어와 인간이 모종의 기호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자나무 쓰러지는 소리는 또 어떤가? 양털원숭이에게 이 소리는 위험이 다가오니 뛰쳐나가라는 기호(인덱스)다. 양털원숭이의 머리로 생각하는 루나족은 이를 역으로 이용한다. 야자나무를 쓰러뜨려 양털원숭이를 찾아낸다.

원주민들은 둘러앉아 개의 꿈을 해몽한다거나 개의 소리를 해석한다. 수풀 너머에서 사냥개들 짖는 소리가 들리자, 원주민들은 귀를 쫑긋 세운다. 이번에는 사냥감을 쫓을 때 흥분해 짖는 소리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극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짖는 소리다. 개의 소리를 미세하게 구분할 줄 아는 루나족은 개가 사슴인 줄 알고 쫓아갔다가 퓨마에게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거라고 말한다. 더불어 이러한 개의 ‘오판’은 역설적으로 개도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인간을 포함한) 숲의 동물들도 사고를 하고 세상을 표상하며 그들만의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4년 동안의 현장연구를 통해 결론 내린다. 생명들은 기호를 주고받으며 진화해왔고, 숲은 기호의 해석과 반응으로 시끄럽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지구는 인간에게 펼쳐진 평면적인 경작지가 아니고, 그 안의 생명들도 유순한 작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구는 오히려 인간과 비인간이 얽혀 있는 시끄럽고도 입체적인 구조물에 가까운데, 얼마 전부터 인간은 그 사실을 잊은 채 무시무시한 칼을 들고 휘두르고 있다. 새로운 인식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기를 요구한다. 이 책은 인류학계에서 인간중심적 사유의 방향을 점검할 것을 요구하는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를 이끄는 대표작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습관적으로 집착하지 말고, 숲은 우리(인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질문하라는 것. 그것이 인류세를 헤쳐나가는 철학적 근육을 만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