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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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희 黃聖喜

1972년 경북 안동 출생. 200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앨리스네 집』이 있음. hsh7213@hanmail.net

 

 

 

사과의 추리

 

 

잠에서 깬다. 무서운 일. 새하얀 일. 조약돌 같고 스피커 같은 일. 연필깎이 같고 상다리 같은 일. 쌀자루 같고 자물쇠 같은 일. 이불 밖으로 드러난 손등. 달력처럼 드러난 손등. 엉덩이처럼 생생하게. 숟가락처럼 생생하게. 어금니처럼 생생하게. 책상처럼 덩그렇게. 피아노처럼 덩그렇게. 선풍기처럼 덩그렇게. 눈동자 뱅글뱅글 돌아가는 얼굴은. 창문처럼 진짜다. 냄비처럼 진짜다. 귤처럼 진짜다. 양말처럼 진짜다. 어떤 나무는 그 얼굴보다 먼저 죽고. 어떤 구름은 그 얼굴과 함께 흐르고. 어떤 바람은 그 얼굴보다 늦게 태어나도. 열개의 손가락처럼 당연하게. 비누거품처럼 당연하게. 매운 고추처럼 당연하게. 사건은 벌어지고. 결말은 찾아오고. 사과가 사과의 붉은 빛을 파헤치는 것처럼. 어리석게.

 

 

 

사적 연설의 기초

 

 

처음 그것은 평범한 소란에 불과했다. 김은 지각했고 연설은 진행중이었다. 스피커는 광장을 둘러쌌고 남는 의자는 없었다. 펄럭이는 만국기 아래, 김은 빈자리를 찾아 기웃거린다. 뒷자리의 검은 양복들이 김의 파자마를 노려본다. 김은 화단을 가로질러 광장을 빠져나간다. 잠시 뒤 김은 머리 위로 의자를 쳐들고 나타난다. 연설자는 미소로 김을 가리킨다. 그때 한 검은 양복이 김을 왼쪽으로 잡아끈다. 그때 한 검은 양복이 김을 오른쪽으로 잡아끈다. 파자마 속 곰의 얼굴이 지그재그 늘어난다. 김은 왼쪽과 오른쪽 사이 의자를 내려놓는다. 왼쪽에서 돌멩이가 날아온다. 오른쪽에서 구두 한짝이 날아온다. 박수와 고성이 맞서고 한탄이 새나온다. 왼쪽과 오른쪽이 김을 향해 뒤엉긴다. 연설자는 경호원에게 손짓한다. 순식간에 중앙이 된 김은 경호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자 위로 올라선다. “나만 매점 의자다.” 김은 팔짝팔짝 소리친다. 한순간 정적이 흐른다. 연설자가 웃음을 터뜨린다. 스피커가 들썩인다. 검은 양복들도 웃기 시작한다. 연설자는 중단했던 연설을 계속한다. 왼쪽과 오른쪽은 본래의 자리를 찾아 정렬한다. 김은 조금씩 주변이 된다. 하지만 어떤 검은 양복들은 매점 의자 곁에 머무른다. 눈알 대신 단추를 매단 파자마 속 곰을 감상한다. 김은 호주머니 속 영수증을 꺼내든다. 몇명의 검은 양복들이 대열을 이탈해 김에게 합류한다. 김은 계란 한판부터 읽어가기 시작한다. 아니, 연설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