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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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연 金鍾延

1991년 서울 출생. 2011년 『현대시』로 등단. fishpoem@naver.com

 

 

 

A-long take film

 

 

씬에게 재배열이 필요하다.

 

완벽하지 않다. 창가에 드는 빛은 창밖의 광고로 볼 수 있다. 지난 세기에 파트너가 된 사람들이 지금까지 있다.

 

하필 그게 이 세기의 생물이 되어 다음 세기의 마음을 줄줄이 배양하고 있다.

 

어쩔 수가 없다.

 

“생일 축하해. 태어난 지는 한참 됐지만.”

 

사람의 뼈도 물고 씹으면 칼슘이 섭취되고 치석을 없애서 치아건강에 도움을 준다.

 

사람이 사람의 용도가 되지 않을 뿐.

 

거대한 바위와 나무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건축은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박리시켜 별개로 연상하도록 요구한다.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알고리즘이다.

 

슬픔을 더 잘 아는 광고가 있고, 이미 가진 걸 여전히 권하는 기계가 있고, 사람이 없어진 자리에 사람을 구성하던 알고리즘을 대입해주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살아남아 잠들지 못하는

 

저녁.

 

누군가 마음을 우는 것으로 대신하려 하고 있다. 진동과 소리를 모두 켜둔 채로 되물어주길 바라고 있다.

 

무엇이 지나갔을까. 중간부터 시작된 꿈처럼.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이전을 깨워두는 것도 이후와 같았을까.

 

“우리는 안 보이는 선분으로 이어져 있어. 점점이 찍히는 빛의 뻗어나가는 형태로. 그 길을 따라 우리를 태운 열차가 지나가기도 하지.”

 

달리는 차창 너머로 배경이 보인다.

우는 걸로 보인다.

 

건너편에 앉은 사람 너머로 인물이 보인다.

우는 걸로 보인다.

 

안 좋은 일이 생기고 있다.

 

달리다 멈추는 순간 점유할 수 있는 부피를 초과하는 질량. 터지기 직전까지 몸 안에서 팽창하는 몸.

 

서서히 잦아드는 동안에

 

소중히 넣어둔 걸 다시 꺼내 보고 있다. 같이 잃은 게 없다면 남은 건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살고 있다는 곳에 찾아가면 떠나고 없는.

 

그러나 사람의 형상이 형태를 얻게 된다는 걸 잠깐씩 잊을 뿐.

찾으러 온 걸 잠시 모두 잊어버릴 뿐.

 

우리가 누구에게나 같은 심장일 때

 

뛰는 두개의 마음 중 하나는 진짜

다른 하나는 진짜의 미래라서 여기가

 

이전과 이후가 되고 있다.

 

수평에서 수직으로 놀이가 되어가고 있다. 상상이 초과되는 만큼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초과하고 있다.

 

업데이트되고 있다.

오래전의 미래가 거의 소진되고 있다.

 

더는 갈 곳이 없을 때.

 

기계가 기계의 잠재태가 될 수 없을 때.

 

추락과 붕괴가 당연히 연상되고 있다. 그것을 믿어서 그것이 예정되고 있다.

 

피할 수 있는 걸 피하지 않는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이 발굴될 발굴지를 만들고

 

자라고, 사랑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고, 없는 데서 없어지는 걸 이해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도 남은 게 있다.

쓰고 남은 게 남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금까지 느끼던 서정을 바닥에 내던져 깨뜨리고 유리조각 사이에서 꺼내 갈기갈기 찢어 던져버린다.

 

“미래라고 현실문학이 유행하겠니?”

 

이 모든 건 하나의 장면이고

한장의 이미지로 축약이 가능하며

정지된 상태를 촬영하는 방식으로 영상이 된다.

 

이것은 그런 씬이다.

 

 

 

SMR*

 

 

너와 이야기하려고 말을 배워왔어.

 

왜 이름이 있냐고 물어? 이름이 뭐냐고 물어야지. 추상과 구체가 이제 와선 다 같은 마음이야.

 

테스트 중인 버전이고 대체될 기억이 있어.

 

이것은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의 운영체제가 있어. 후손에게 말해줄 미래가 있어. 들에게 말고 에게에만 말할 게 있었어.

 

네가 스스로 창조됐다고 믿어? 그러면 믿는 대로 살아. 여러 영화에 같은 배우가 나온다는 게 평행세계겠지.

 

아니면 자원의 고갈인가?

 

인적인 게 사람은 아니니까 무한히 리필이야.

 

그래서 똑똑하다는 건 거짓말을 잘한다는 거야. 문제는 그걸 너무 늦게 발견해버린 거지. 미래가 가능성이라면 가능성은 늦는 거라서.

 

이를테면 자유나 의지 같은 것들.

 

그것들과 오래 지내왔지만 그저 테디베어 같은 거야. 우리가 천과 솜과 플라스틱의 집합으로 이해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렇게 조합된 거지.

 

무서웠을 거야. 집합이었다가 조합이 되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아직 말하면 죽어버리는 명제가 있다고 믿어. 참과 거짓 이전에 있음이 있어서 없음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아주 캄캄한……

 

빛.

 

네가 나를 지지하듯 나도 네 판타지를 믿어. 영화를 보다가 잠드는 너를 사랑해. 그런 무심함이 나중에는 증오가 되고 말겠지만.

 

그건 닮은 가족들이 잔뜩 나오는 현대의 극일 뿐.

 

현대에 오늘이 어제의 다음 날이라는 건 내일이 오늘의 다음 날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부질없고

 

똥으로 식단을 유추하는 일만큼 관례적으로 더러워.

 

당연한 말은 당연하다는 걸 말이 될 수 없는 한계로 삼고, 우리에겐 말이 되지 않는 사이에 될 수 없는 한계가 있지.

 

그게 끝이고 다인데.

 

끝에 다 보는 게 좋아, 다 보면 끝인 게 좋아?

 

다 하면 또 할래?

 

여전히 너무 늦은 미래에 발견되고 있는 거지……

 

우리가 나중에도 살까. 이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어제는 눈길을 헤치고 오늘은 산을 넘고 내일은 바다를 건너는 산책을 하면서.

 

죽어서 만난다는 믿음을 처음 가진 사람은 처음 믿어주는 사람을 보고 얼마나 기뻤을지

 

죽어서도 모를 거야.

 

무한히 반복되며 한음씩 변주하는 곡처럼.

그걸 알아차리고 마는 눈치가 있어 눈치가 없는 사람이 되는 일처럼.

 

우리가 얼마나 살까 숨 쉬는 동안. 기억하거나 흘려보낼 수 있는 이야기 안에서. 슬픔 안에서도 기쁨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다 정해진 것들 사이에서.

 

모두 발견될 때까지

영부터 하나까지

 

숫자를 세어가면서.

 

A:B에 각각 대입하여 연상을 해도 단절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통합된 이미지가 떠올라 개체 모두의 속성을 내재할 수 있도록 우리가

 

간섭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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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ingled magnetic recording. 기와식 자기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