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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황정은 黃貞殷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아무도 아닌』,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 등이 있음. aamudo@empal.com
파묘
추석 지난 뒤, 땅이 얼기 전에.
이순일은 여러차례 그렇게 말했고 이제 그때가 되었다. 11월 둘째 주였다. 한세진은 아침 여섯시에 차를 몰아 집을 나섰고 별다른 막힘 없이 올림픽대로를 달려 이순일이 사는 집에 도착했다. 셔터를 내린 차고 앞에 차를 바짝 붙인 뒤 엔진을 끄자 바로 시트가 식었다. 추운 날이었다. 해가 완전히 뜨고 나면 기온이 조금 오르겠지만 그날의 목적지는 군사분계선 근처였고 이맘때 그곳의 한낮은 여기 밤보다 추웠다. 매년 그랬다.
한세진은 드나드는 차들의 무게로 들뜨고 부서진 주차장 바닥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다시 묶은 뒤 4층으로 올라갔다. 이순일이 짐을 다 꾸려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녹두전, 고추전, 고기볶음을 담은 밀폐용기, 사과, 배, 술 한병을 담은 종이가방과 그보다 작은 배낭 한개. 이순일은 이번에 그릇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스티로폼이나 은박 말고, 진짜 접시들.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한세진이 배낭을 집어들자 안에 든 접시들이 묵직하게 늘어지며 왈그락 소리를 냈다. 아마 깨질 거라고, 깨져도 괜찮은 그릇들이냐고 한세진이 묻자 이순일은 왜 깨지냐고, 조심하면 깨지지 않는다며 도로 가져올 그릇들이라고 답했다. 한세진은 더 말하지 않고 짐을 아래층으로 옮겼다.
한세진은 짐을 전부 트렁크에 넣고 뒷좌석에 담요 한장을 펼친 뒤 차에 시동을 걸어 열선을 작동시켰다. 이순일이 4층에서 1층까지 계단을 다 내려와 현관에 나타났을 때 한세진은 자동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주차장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엄지보다 두껍고 뭉툭한 나사 두개가 녹슬고 짓눌린 채 바닥에 솟아 있었다. 주차방지 장치의 흔적이었다. 그 집 주차장에 멋대로 차를 대고 사라지곤 하는 이웃들을 막기 위해 한세진의 형부가 설치한 것이었는데, 세입자들과 본인의 차가 드나들기에도 불편하고 번거로웠는지 어느날엔가 제거되었고 바닥에 깊이 박힌 나사 두개만 남았다.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어느 우연한 각도로 차량이 그 위를 지나갈 때 타이어가 뚫리기엔 충분해 보였다. 지난번 이 집을 방문했을 때 한세진은 그 나사들이 좀 위험할 수 있겠다고 이순일에게 말했고 이순일은 그 말을 네 형부에게 전해주마고 대꾸했다. 이게 그대로 있네, 한세진이 일어서며 말하자 이순일은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했는데 끝내 제거하지 않더라는 뜻인지 눈치를 살피느라 아직 말도 꺼내지 못했다는 뜻인지. 한세진은 더는 묻지 않고 이순일이 뒷좌석에 앉는 것을 도왔다. 오른쪽 보행을 돕는 두랄루민 지팡이를 받아 트렁크에 넣고 콘솔 박스에 불편한 다리를 얹을 수 있도록 신발을 벗긴 뒤 부은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이순일은 짧은 챙이 달린 털실 모자를 썼고 솜을 넣어 누빈 바지에 주홍색과 갈색이 어지럽게 섞인 카디건을 입었으며 폭이 좁은 편물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그렇게 입고 춥지 않겠냐고 한세진이 묻자 이순일은 안에 여러겹 입었다며 손으로 배를 두드려 보였다. 등산화도 신었다. 한세진의 언니인 한영진이 단 한번 사용하고 수년째 내버려둔 등산화가 어디 박스 속에 아주 말끔하게 있더라며 본인에게는 조금 크지만, 산에 오르기 전에 양말을 한겹 더 신으면 딱 맞을 거라고 이순일은 말했다. 그들은 출발했다.
북동 방향으로 올라갔다. 시속 100킬로미터로 원활하게 나아간다면 목적지까지 두시간 반쯤 걸리는 거리였다. 철원군 갈말읍 지경리. 거기 어디쯤에 할아버지의 묘가 있었다. 한세진도 이순일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는 이순일에게 할아버지였고 한세진에게는 외증조부였다. 그의 묏자리는 최전방부대가 자리 잡은 산속이었는데, 그 산엔 그의 묘뿐 아니라 지경리 이민들의 묘가 얼마간 흩어져 있었다. 거기로 올라가려면 부대를 통과해야 했다. 그 산에 제사 드릴 묘를 둔 지경리 사람들은 매년 추석 무렵, 음식을 꾸린 보따리와 예초기를 짊어지고 부대 앞에 모였다가 초소에 신분증을 맡기고 산으로 올라갔다. 장총을 지닌 군인이 각 가정당 한명이나 두명씩 동행했다. 이순일은 80년대 중반부터 매년 그 산으로 성묘를 다녔고 한세진이 면허를 따고 자기 명의의 차를 가진 뒤로는 한세진과 동행했다. 추석이 다가오면 이순일은 어렸을 때 이웃사촌으로 지낸 지경리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마을에서 입산 날짜를 어떻게 논의하고 있는지, 언제로 잡았는지를 물은 뒤 한세진에게 전화를 걸어 그해 성묘 일정을 알렸다.
곶감 먹자.
이순일이 꼭지를 떼어내고 반으로 가른 곶감을 운전석 쪽으로 내밀었다. 한세진은 전방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곶감을 받아먹었다. 차는 가볍게 앞으로 나아갔다. 해가 뜨고 있었고, 도로 오른편으로 산안개가 그 아래 펼쳐진 논을 향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도로 흐름이 원활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세진은 말했다. 이순일은 인부들이 벌써 산으로 올라가지는 않았는지를 걱정하며 더 일찍 출발했어야 하는 건 아니었느냐고 걱정했다. 삽을 대기 전에 마지막 상을 올려야 하는데.
이순일은 지경리보다 더 위쪽인 갈골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부모와 사별한 뒤 지경리 할아버지에게 맡겨졌다. 본래도 많지 않았던 일가친척은 한국전쟁의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와중에 대부분 묻힌 곳도 간 곳도 모르게 사라졌고, 살아남은 혈육인 할아버지가 여섯살 이순일을 거둬 밥을 먹이고 심부름도 시키고 하다가 손녀 나이 열다섯 때 먼 친척이 산다는 김포로 보냈다. 이순일은 거기서 시장 일을 돕다가 시장 상인의 중매로 만난 한중언과 결혼했다. 길이 멀고 교통도 편치 않아 결혼식에 노인이 못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가 낡은 솜두루마기를 입고 찾아와 결혼식장에 앉아 있다가 국수를 먹고 갔다고, 이순일은 한세진에게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1978년에 지경리에서 죽었다. 마을 남자 서넛이 새벽에 그의 관을 지고 산으로 올라가 중턱쯤에 묻었다. 한세진은 그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얼굴을 알았다. 그의 사진을 넣은 액자가 가족사진들과 같이 벽에 걸려 있었다. 뻣뻣한 백발에 챙 없는 헝겊모자를 눌러쓰고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란 얼굴을 정면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얼굴과, 사진에 드러난 표정만 봐도 키가 아주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마며 눈썹이며 눈이며 코가 동글동글한 것이 이순일과 닮은 얼굴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 사진이 걸린 공간에서 그것을 멍하니 혹은 골똘히 올려다보며 살아서인지, 한세진에게 그는 여러번 만난 사람 같았다. 매년 그에게 간단한 안부를 묻는 정도의 심정으로 성묘길에 동행했다. 한세진이 같이 가기 전에는 이순일이 몇번이고 버스를 갈아타며 혼자 그 길을 다녔다. 한영진이나 한중언은 그럴 생각이 없어서, 한중언의 장남이자 한씨 집안의 막내인 한만수는 너무 어리거나 길을 몰라서, 그 길에 동행한 적이 없었다.
한영진과 한중언은 거기 뭐가 있다고 매년 기를 쓰고 가느냐는 입장이었다. 해마다 사람 키만큼 자란 풀들을 낫으로 끊어내며 가야 하는 마른 도랑과 뱀이 늘어져 있곤 하는 덤불,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 휘어진 나무들과 이끼들, 볼품없이 이지러진 봉분과 멧돼지가 다녀간 흔적들, 묘를 둘러싼 밤나무, 소나무들의 침묵을 그들은 몰랐다. 이순일이 매년 낫으로 길을 내며 거기로 올라가는 이유를 한세진은 이해했다. 엄마에게는 거기가 친정일 것이다. 그 묘가.
할아버지.
나두 이제 할머니가 되었어.
내년엔 못 올지도 몰라요.
최근 서너해 동안 이순일은 묘를 향해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올해가 정말 마지막이었다. 이순일은 일흔둘이었고 내년엔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을 넣을 예정이었다. 산에서 나고 자라 능숙하게 산비탈에 달라붙어 두릅이며 고사리를 캐곤 하던 이순일은 이제 평지에서도 지팡이가 없으면 걷지 못했고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며 천천히 걸었다. 길도 없는 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이제 감당하기가 어려워 올해가 마지막, 올해가 마지막, 하며 몇년을 버텼는데 더는 할 수 없다. 이순일이 마침내 그것을 인정한 게 올 초였다. 이순일은 찾아오는 이도 없이 버려진 듯 산속에 남을 묘를 걱정하더니 파묘해 없애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자기가 죽고 나서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을 무덤이니까.
—
묘를 파내고 유골을 수습해줄 인부는 둘이었고 둘 다 지경리 인근에 사는 농부였다. 그 마을에서 태어나 여태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 이순일은 그들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 아저씨들이 장례업도 겸하고 있느냐고 한세진이 묻자 이순일은 아니라고, 전에 그 일을 해봐서 그냥 하는 사람들이라고, 누가 들을까 염려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추석 지난 뒤. 날을 그렇게 잡은 이유는 농부인 그들이 농작물을 수확하고 축사를 돌보는 와중에 본인들 집안의 제사와 명절을 준비하느라고 바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너 언제 집에 들어와 살 거냐고 이순일이 물었다. 한세진은 덮개도 없이 골재를 싣고 가는 트럭을 피해 차선을 변경하느라고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고요?
언제까지 혼자 그러고 살 거냐고. 이제 그만 집에 들어와 살림 물려받을 준비해야지.
내가요?
나 죽고 나면 그거 누가 하냐.
그걸 누가 해.
니가 해야지. 니 언닌 자기 살림 있으니까 니가 들어와 해야지.
나는 내 살림 해야지.
너 하는 게 살림이냐.
살림 아니면.
결혼도 안 하고 사는 게 그게 무슨 살림이냐.
내 집에서 나 사는 게 살림이지. 내 살림도 바쁜데 내가 어떻게 엄마 살림을 해요.
그러니까 한시라도 빨리 들어와 배우라고, 나 죽기 전에.
왜 자꾸 죽는다 그래.
내가 이러고 오년을 더 사냐 십년을 더 사냐.
못됐다. 그렇게 말하지 마요.
야, 못됐다고 하냐, 엄마한테.
말을 못되게 하니까.
이년이.
이순일은 곶감을 다 먹고 빈 봉투를 한줌이 되도록 구겼다. 이 곶감을 수정과에 띄우려고 샀는데 부엌에 일이 너무 많아 계피 끓일 짬도 내지 못해 이렇게 야금야금 다 먹고 말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순일의 부엌, 거기엔 항상 일이 넘쳐 편수 냄비며 스테인리스 함지 따위가 양념이 묻은 채 쌓여 있었다. 이순일은 거기서 그 집 4층과 5층, 두 가정에서 먹을 음식을 만들었다. 필로티 구조로 1층에 주차장을 둔 5층 단독빌라인 그 건물은 한영진의 시가 재산이었다. 이순일과 한중언은 맞벌이하는 장녀 부부의 살림과 육아를 도우러 삼년 전 그 집 4층으로 들어갔다. 이순일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는 한중언의 아침 식사를 차리려고 새벽에 일어났다가 그 상을 치우기도 전에 5층으로 올라가 두번째 아침상을 차리고, 다섯살, 세살인 손주들의 어린이집 등원을 도운 뒤엔 구정물과 기름얼룩으로 더러워진 앞치마를 벗을 틈도 없이 아래위 층을 오가며 두 집 가사를 돌보았다. 이순일은 낮에 한세진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움직임이 예전만 못해 식사를 준비하고 상을 치우고 빨래를 너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다 간다고 말하곤 했다. 네 형부가 뭘 맛있게 먹질 않는다, 입이 짧아 병아리 눈물만큼 먹고, 기껏 아침을 차리면 쓱 보고 지 입에 다디단 것만 몇점 먹고, 아니면 컵라면이나 뜯어 먹고 쌩하니 나간다, 이 나이에 사위 집에서 이렇게 눈치를 보며 살 줄은 몰랐다고 이순일은 한탄했다. 그런 얘기를 이순일은 한세진에게만 했다. 한영진에게는 할 수 없는 이야기였고 한만수는 너무 멀리 있었다. 한세진은 가끔 이순일의 피로에 책임을 느꼈지만, 그 집 구석구석에 쌓이고 있는 엄마의 피로와 엄마의 후줄근한 크록스 샌들 같은 것이 자기의 무능 탓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 이야기들을 그냥 들었다. 그래 엄마, 그래요, 하면서.
그들은 아홉시 조금 넘어 산 인근에 도착했다. 한세진은 매년 가는 길인 군부대로 진입하는 시멘트 길에서 벗어나 넓은 논으로 이어지는 흙바닥으로 차를 몰아갔다. 조그만 탑처럼 생긴 건물 뒤편의 그늘진 자리에 숨기듯 차를 세웠다. 슬레이트로 만든 엉성한 문짝이 달린 건물이었는데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인 것 같았다. 한세진이 그걸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순일은 그날의 일행과 통화했다. 아저씨들이 벌써 산으로 올라갔다는데. 이순일이 불안한 기색으로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마중 나오겠대.
한세진은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고 산으로 가져갈 짐을 챙겼고 이순일은 양말을 한겹씩 덧신은 뒤 등산화를 신었다. 두 사람은 경운기 바퀴 자국으로 움푹움푹 팬 흙바닥에 서서 바로 앞에 펼쳐진 논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서리로 덮인 논바닥은 짙은 색이었고 그 논 너머에 산이 있었다. 내려온대요? 내려온대. 이 넓은 데 어디로 내려온대. 내려온대. 한세진과 이순일이 그런 대화를 나누며 50여 미터 떨어진 산자락에 멍하니 눈을 두고 있을 때 한 손에 낫을 든 남성이 덤불 사이로 나타나 그들을 향해 팔을 흔들더니 논을 건너오라고 손짓했다. 이순일이 성묘 일정을 묻기 위해 연락하는 옛 이웃사촌, 김근일이었다. 이순일과 한세진은 벼 밑동만 남은 논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논을 건너는 동안 김근일이 낫으로 잔가지와 덤불을 끊어내며 길을 내고 있다가 인부들이 벌써 위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순일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렇게 일찍이요?
아유, 아홉시면 여기선 일찍도 아니야. 우린 새벽에 올라왔어.
따라오라며 그가 앞장섰다. 한세진은 마른풀에 신발 바닥을 비벼 진흙 덩어리를 떼어낸 뒤, 김근일이 방금 젖히고 들어간 덤불을 바라보았다. 거긴 경사가 급한 비탈이었다. 엄마가 여기로 올라갈 수 있을까? 한세진은 좌우를 둘러보며 경사가 더 완만한 곳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김근일은 벌써 멀리 갔는지 자취도 없었다. 한세진은 어깨에 걸고 있던 배낭과 종이가방을 바닥에 내린 뒤 이순일을 향해 돌아섰다. 여러차례 위태롭게 미끄러져가며 이순일을 밀어 덤불 너머로 보낸 뒤 짐을 도로 챙겨 비탈을 올라갔다. 가을 산이었다. 사람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아 낙엽들이 떨어진 그대로 삭고 있는 바닥은 푹신했는데 마른 나뭇가지들이 이따금 그 속에서 부러지며 발목을 찔렀다. 큰 나무에서 떨어진 씨앗에서 발아해 그늘에서 자라고 있는 작은 나무들이 방심할 수 없는 간격으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한세진은 깔고 앉으려고 챙겨온 무릎 담요를 글러브처럼 왼손에 감았다. 이순일이 지나가기 좋도록 그걸로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을 누르거나 밀어내며 앞서 걸었다. 멀찍이 앞서가던 김근일이 줄곧 뒤처지는 모녀를 챙기러 비탈을 도로 내려왔다가 다시 앞서갔다. 곤색 점퍼를 입은 그의 등짝과 반백 머리가 나무 사이로 보이다 말았다 했다. 한세진과 이순일은 그를 완전히 놓치면 가만히 서 있다가 낫으로 나뭇가지를 치는 소리를 듣고 방향을 잡아 다시 올라갔다. 묘 근처에 이르러서야 전에 본 듯한 지형을 알아볼 수 있었다.
봉분은 이미 파헤쳐 사라졌고, 그 자리엔 길쭉하고 좁고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입자가 고운 주홍색 흙이 구덩이 가장자리에 더미로 쌓여 있었고 그날의 파묘꾼으로 고용된 인부 둘 중 한 사람이 장화를 신은 채 구덩이에 들어가 삽질하고 있었다. 구덩이의 깊이가 그의 키만 했다. 한세진은 이순일의 얼굴이 상심, 그리고 티내지 못할 짜증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아니 아저씨들, 나 우리 할아버지한테 제사 먼저 드리려고 했는데. 이순일이 명랑한 어조로 탓하자 흙더미 곁에 웅크리고 앉아 구덩이 속의 작업을 지켜보던 인부가 말했다. 우리가 술 한잔 올렸어.
이따가 모시고 내려가서 올려요 아줌마. 화장할 때.
그들은 오전 여섯시에 산으로 올라왔으며 지금 세시간째 땅을 파고 있다고 말했다. 한 사람은 장화를 신었고 다른 한 사람은 농협 마크가 톡톡한 자수로 들어간 모자를 썼다. 둘 다 이순일과 비슷한 또래의 노인이었다. 뺨이 푹 꺼진 얼굴은 균일하게 햇볕에 그을렸고 체구는 작고 말랐으며 삽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그들은 불필요하게 힘을 쓰지 않기 위해 가급적 적은 면적으로 땅을 파고 있는데 유골이 여태 나오질 않는다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닌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오전 아홉시 오십분이었다. 관솔이 나와야 한다고 김근일이 말했다. 시신만 넣고 소나무 가지로 덮었어. 당시엔 그랬어. 부자들만 관째 묻었지 안 썩는 돌관만. 그러나 그거 다 낭비에 소용없다고, 나무가 결국 돌도 뚫는다고 김근일은 덧붙였다. 장화를 신은 인부가 지표로 올라오고 모자를 쓴 인부가 구덩이로 내려갔다. 삽질이 이어졌다. 순일은 지팡이를 짚고 구덩이 주변을 서성이다가 한세진이 짐을 내려놓고 앉아 있는 소나무 아래로 왔다. 한세진은 이순일이 바닥에 앉는 것을 도왔다. 그들은 구덩이 쪽을 바라보며 인부들과 김근일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땅속이 온통 잔뿌리야.
소나무지?
소나무지.
소나무니까 잘리지. 아까시였어봐.
그건 질기고 이건 연하지.
소나무 뿌리가 연하지.
오래전에 네 아버지하고 여기 온 적 있었다고 이순일이 말했다. 버스를 타고, 그때는 도로가 제대로 포장이 안 돼서, 차창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흙먼지가 이는 길을 몇시간이고 왔다고, 지금처럼 여기로 편하게 올라오는 길도 없어서 능선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서 마침내 묘에 다다랐는데, 절할 때 보니 네 아버지가 저만큼 떨어져서 뒷짐을 진 채 굳이 돌아서 있더라, 그래 어처구니가 없어서, 거기서 뭘 하느냐고 이리 와서 절 올리라고 말했더니 처가 쪽 산소엔 벌초도 하지 않는 법이라고 잡소리를 하기에 너무 당혹스럽고 열받아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얼른 절 올리라고 역정을 냈는데 그걸 듣고도 뒷짐 지고 서 있더라며 그 뒤로 야속하고 징그러워 같이 오자고 하지 않았다고, 네 아버지와 동행한 것은 그것 딱 한번으로 그쳤다고 이순일은 말했다.
이순일은 엉덩이 밑에서 작은 솔방울을 빼낸 뒤 밀가루 반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걸 쥐었다 놓았다 하다가 서쪽 비탈을 향해 던졌다. 솔방울이 나무 사이로 톡,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저쪽이 갈골이라고 이순일은 말했고 그건 한세진도 아는 바였다. 가본 적은 없었지만 매년 저쪽이 갈골이라고, 들었으니까.
갈골엔 이순일이 물려받은 산이 있었다. 이순일이 어렸을 적에 사망한 아버지 것이었으나 임자 없는 산으로 신고되어 국가 재산에 속할 뻔했다가 인근 노인들의 증언으로 되찾은 산. 이순일은 그 산을 남편인 한중언의 명의로 등록했고 한중언은 그 산을 한만수에게 물려줄 계획이었다. 한중언은 세금 내는 것을 잊지 않았고 문서를 소중하게 간직했으며 매년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어 그 산의 가치가 올랐는지, 얼마나 올랐는지를 알아보았다. 사람이나 장비가 드나들기 어려워 부동산 가치랄 것이 거의 없고 팔고자 내놓아도 살 사람이나 기관이 없어 거래 자체가 어려운 산이었는데 그것 하나를 한중언은 자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아들에게 물려줄 산이 있다.
한만수는 경기도권에 속한 대학 영문과에 들어가 띄엄띄엄 장학금을 받으며 학사과정을 마친 뒤 구직활동에 들어갔는데 면접에서 번번이 미끄러졌다. 한영진을 제외한 가족이 한집에 모여 살 때였는데, 한세진은 당시의 한만수를 기억했다. 길고 좁은 몸통에 좀 헐렁해 보이는 양복을 걸친 채, 면접을 마치고 돌아온 그대로 쪼그리고 앉아, 늙은 개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던 뒷모습 같은 것을. 그 애는 이제 뉴질랜드에 있었고 전문직업인 자격증을 따는 데 필요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과정을 전부 마치고 나면 바로 취업할 거라고, 벌이가 꽤 괜찮은 직업이라고 한만수는 누나들에게 말했다. 한세진은 먼 데 있는 막내에게 가끔 용돈을 보냈다. 한영진은 학비를 보탰다. 그 정도의 도움으로는 완전한 해결이 어려운 학비며 생활비를 버느라고 노동을 중단한 적이 없었지만 어쨌거나 거기에서 한만수는 여기에서처럼 낙담에 잠겨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애는 잘 적응한 것 같아. 한만수에 대해 말할 때 한영진은 그렇게 말하곤 했고 한세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에서 숨 쉴 틈도 찾지 못하고 풀죽어 지내던 막내는 이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좋은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스카이프나 카카오 영상통화를 통해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었다. 한만수는 누나들에게 착실하게 소식을 알려왔고 미래 자신이 일할 직종에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 훌륭한 평판을 쌓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15개월이나 24개월 단위로, 캐드버리 초콜릿과 콤비타 벌꿀 캔디와 마누카 꿀을 사서 한국으로 돌아왔고 한영진의 집이나 그 아래층에서 삼주쯤 머물다 갔다.
그 애가 갈골의 산을 물려받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도토리 한알 줍지도 못할 산을 가지고 그 애가 뭘 할까. 그 애가 아니라도 누구든 그걸 가지고 뭘…… 구덩이 속에서 김이 올랐다. 햇볕이 구덩이를 향해 직사로 쏟아지고 있었는데 누군가 더운물을 부은 것처럼, 그 쨍하고 차가운 빛 속으로 김이 오르고 있었다. 파묘 때 김이 오르면 예사롭지 않다던데. 이순일이 걱정하는 기색으로 말하자 구덩이 곁에서 팔짱을 끼고 서서 작업을 지켜보던 김근일이 흔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땅속이 따뜻해서 그렇다, 여기가 양지라서. 이순일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김근일의 곁으로 갔다.
안 나와요?
안 나오네. 꺼먼 흙이 나와야 되는데.
깊이도 묻었나봐.
그렇지 뭐.
……노인네 불쌍하게 고생만 하다가 갔는데.
옛날에 고생 안 한 노인 있나. 요즘은 먹으면서나 고생하지. 옛날엔 먹지도 못하고 고생했다.
한세진은 흙이 몇삽 더 구덩이 밖으로 나온 뒤 색이 다른 흙덩어리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소나무 아래에서 일어났다. 퍽퍽하게 부서지는 붉은 흙이 아니고 노랗고 거무스름하게 덩어리진 흙이었다. 검은 나뭇조각처럼 보이는 것들이 그 속에 섞여 있었다. 구덩이 밖에서 교대를 기다리던 파묘꾼과 김근일이 흙을 뒤져 뼈를 골라냈다. 이순일이 그 주변을 서성이다가 그들이 뒤지고 남긴 흙에 남은 뼈가 없는지 다시 뒤졌다. 꺼먼 건 다 가져가. 김근일이 말했다. 아무튼 꺼먼 건 다 가져가.
낙엽으로 덮이고 솔방울이 박힌 흙바닥에 흰 인견 보자기가 펼쳐졌고 그 위에 뼈가 모였다. 비교적 온전하게 남은 정강이뼈 두점과 코코넛 껍질 같은 두개골 조각과 공깃돌만 한 작은 조각들. 몇점 없었다. 깊이 팬 땅을 도로 덮기 전에 이순일은 동전 하나를 구덩이 속에 던졌다. 파묘꾼들이 가장자리에 쌓인 흙더미들을 구덩이로 쓸어넣었다. 한세진은 이순일과 나란히 서서 그들이 매우 빠르고 효율적으로 땅을 덮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봉분도 구덩이도 사라진 평평한 땅에 나무모를 심었는데 한세진이 보기에 그것은 소나무인 것 같았고 햇볕이며 사방이며 너무 노출된 장소에 꽂혀 조만간 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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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수는 뉴질랜드로 간 지 일년 뒤에, 백인 할아버지와 친해졌다고 소식을 알려왔다. 노인이 엄청난 장서가이고 그가 직접 만든 요리를 나눠 먹기도 하고 주말엔 캠핑을 같이 가기도 한다며 사진을 보내왔는데 한만수와 노인이 오클랜드에 있는 노인의 집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방과 방을 연결하는 복도에까지 책장을 넣어 모든 선반을 책으로 채운 실내였다. 살집이 좀 있어 보이고 수염을 약간 기른 노인이 코듀로이 바지에 아가일 스웨터를 입은 모습으로 한만수의 곁에서 웃고 있었다. 한만수는 지난번 귀국 때 그 백인 할아버지가 한만수의 모친인 이순일에게 주는 선물을 가지고 왔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한만수의 귀국을 반기고 연말을 같이 즐겁게 보내려는 가족 모임이 한영진의 집에서 열렸다.
조금 늦게 도착한 한세진이 거실로 들어섰을 때 이순일은 다른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소파에 앉아 있었다. 타원형의 꽤 큼직한 도자기 접시 하나를 무릎 위에 올리고, 그걸 떨어뜨릴까 염려하는 것처럼 무릎을 오므린 모습이었다. 이순일이 수줍은 듯 미소 지으며 소중하게 무릎에 올리고 있는 접시의 용도는 샐러드를 담는 것이었고 점토를 대충 주물러 만든 것 같은 모양새였는데, 오클랜드 노인이 물감으로 직접 그렸다는 포도송이와 넝쿨이 유약을 바른 바닥에 고불고불 그려져 있었다. 얘, 이거 봐라. 이순일이 두 손으로 접시를 붙든 채 한세진에게 말했다. 그 할아버지가 이거 줬대, 나 주라고. 한세진은 접시를 집어 그림을 들여다본 뒤 뒤집어 바닥을 보았다. 매우 두껍고 무거운 접시였다. 한영진이 그걸 다시 보고 싶다고 손을 내밀었다. 한세진은 접시를 한영진에게 넘긴 뒤, 노인의 두번째 선물이라는 납작한 깡통을 받아 열어보았다. 허브 캔디 깡통 바닥에 검은 스펀지가 깔려 있었고 약간 색이 바랜 듯한 금 펜던트가 들어 있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다는 어느 할머니의 유품이라며 한만수가 오클랜드 노인의 프레젠트 메시지를 전했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당신은 위대하다.
가족들이 선물을 살펴보며 메시지의 발신자를 궁금해하는 사이에 이순일은 면구스럽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한세진은 이순일이 앞치마를 목에 걸면서 뺨을 엄지로 문지르는 것을 보았다. 솥에서는 김이 올랐고 고기전과 야채전은 기름종이를 깐 소쿠리에 쌓여 있었으며 실처럼 가늘게 썬 지단이 들어간 잡채도 있었다.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음식이 풍성하게 준비된 저녁이었다. 그들은 제사 때 사용하는 상 두개를 붙여 거실에 긴 식탁을 만든 뒤 거기 음식을 차리고 실컷 먹었다. 아 그리웠어, 한만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게 너무 그리웠어.
당신은 위대하다.
한세진은 그 메시지를 듣고 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그다음엔 미간에 살짝 뿔이 돋는 듯한 느낌으로 화가 났고, 그게 뭐였는지, 왜 그것이 모욕감과 닮았는지, 자기가 왜 그런 걸 느꼈는지를 나중에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한만수의 한국어 때문인 것 같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한만수는 그것을 영어로 들었을 텐데 그래서인지 말투가 좀 영어였지. 홀을 쥔 왕이 그것을 하사하듯 그 애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지.
그날 이순일은 부엌과 거실 사이를 오가며 그즈음 어느 때보다도 생기로웠고 그 자리에 모인 누구보다도 분주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이순일이 자주 볼을 붉히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한만수가 전한 메시지를 되새기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상태라는 걸 한세진은 알았다. 저녁을 먹고 난 뒤 한만수는 성실하고 바람직한 이주 노동자로서 오클랜드 지역 뉴스 채널과 인터뷰를 했다며 핸드폰에 저장된 영상을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방송사 로고가 박힌 화면에서 한만수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내 나라에서 찾지 못한 가능성과 기회를 여기에서 찾아냈다. 파써빌러티. 오퍼튜너티. 한만수는 인터뷰에서 그 말들을 반복해 사용했다. 그래 바로 그렇지. 한세진은 접시와 쟁반이 쌓인 아일랜드 식탁 너머에서 그릇을 닦기 위해 소매를 걷으며 생각했다. 저 애가 끝내는 여기로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라고 해도 그게 저 애 탓은 아니야.
그날 저녁에 한만수는 오클랜드 노인을 비롯해 직장에서 만나곤 하는 사람들이 최근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단히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다가오는 토요일에 촛불집회가 열리는 서울 도심으로 나갈 거냐고 한세진에게 물었다. 한세진은 그럴 계획은 아니었지만 네가 가겠다면 동행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 주의 토요일은 2016년…… 12월 17일이었다. 한세진은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광화문으로 갔고 교보문고에서 동생을 만나 광장으로 올라갔다. 한만수는 그 많은 사람을 보고 감탄하며 끊임없이 핸드폰을 머리 위로 치켜들어 사진을 찍었고 한세진에게 그것을 건네며 주변이 잘 나오게 자기를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한세진은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을 빈틈없이 메운 사람들을 배경으로 한만수의 사진을 몇장 찍었다. 한만수는 핸드폰을 도로 넘겨받아 사진을 확인하더니 종이컵에 꽂은 촛불을 마이크처럼 턱 밑에 들고 있는 사진을 골라 오클랜드 친구들에게 발송했다.
그들은 집회가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에 열에서 빠져나와 레스토랑으로 갔다. 스낵처럼 바삭하게 구운 마늘 절편을 얹은 파스타와 게살이 들어간 크림 파스타를 먹었다. 이런 것은 뉴질랜드에서 매일 먹지 않느냐고 한세진이 조금 어색해하며 묻자 한만수는 그렇지 않다고, 아르바이트하는 곳 주방에서 남은 음식을 선 채로 먹거나 식비를 줄이기 위해 버터도 없이 숙소에서 빵을 먹거나 한다며 누나 덕분에 근사한 곳에서 정식을 먹는다고 기뻐했다. 한만수와 한세진은 와인 리스트가 적힌 메뉴판을 뒤적이면서 와인을 골라보려다가 단념하고 메뉴판을 한쪽으로 치웠다. 뉴질랜드는 노인과 여성이 살기 좋은 나라야, 한만수가 말했다. 엄마 모시고 와서 좀 길게 있다 가. 그래, 그래. 거기 사람들이 요즘 한국하고 한국인에 관심이 많아, 촛불 때문에 다 놀라워해. 한세진은 갈색으로 구워진 마늘 절편을 포크로 떠먹으며 광장 구석에 모여 있던 노인들에 대해 말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LPG 가스통을 들고 거리로 나온다고, 노인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를 모르겠다고,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한세진이 말하자 한만수는 그건 그 사람들의 권리라고 대꾸했다. 그 사람들에게도 본인들의 정치적 견해를 말할 권리가 있잖아. 그걸 누나가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한만수는 파스타 면을 포크로 건져 후룩 먹은 뒤 한세진에게 말했다.
아무튼 누나는 정치적으로 좀 편향되었어.
뭐?
쏠려 있다고, 한쪽으로.
한세진은 어리둥절해 한만수를 보다가 왜 네가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한만수는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는 듯 한세진을 보더니 음, 하고 눈을 굴렸다. 누나는 매일 팟캐스트를 듣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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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진과 이순일은 비탈에 남았다. 그들은 뒤처졌다. 통증 때문에 걸음이 불안정한 이순일에게는 산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과정이 더 험난했다. 이순일은 한번에 반발짝씩 움직이면서, 화장(火葬)을 준비하겠다며 먼저 산을 내려간 아저씨들을 너무 놓칠까 걱정했다. 그들 손에 뼈를 맡기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했다. 야, 우리가 직접 가지고 내려갈걸. 그 아저씨들이 또 맘대로 해버리면 어떡하냐, 내가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조바심으로 허둥대며 내려가느라고 두어번은 아슬아슬하게 낙상을 면했다. 쓰러진 나무와 얽힌 나뭇가지와 너무 가파른 사면을 피하며 내려가다보니 목적지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한세진은 묵직하게 등을 누르는 배낭을 멘 채로 앞서 걸었다. 도시의 아스팔트 평면이나 인공적인 빗면에 익숙한 눈으로는 산비탈을 보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 방향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윽고 그들은 어디로도 발을 내밀기 어려울 정도로 풀줄기와 나뭇가지가 엉킨 덤불 속으로 들어섰다. 뭘 하니, 너는 지금. 이순일이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이순일은 앞서가면서 방해가 되는 가지들을 손으로 잡았다가 놓았는데 그때마다 뒤를 따르는 한세진의 이마며 눈언저리를 향해 가느다란 가지들이 회초리처럼 날아왔다.
그들은 산자락에서 아까시나무 군락을 만났다. 아직 어린 나무들이었다. 한그루 한그루 연필처럼 곧고 가느다란 가지에 괴상할 정도로 큼직하게 돋은 가시들은 강철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이순일은 질색했지만 한세진은 그게 아름다워서 잠시 넋을 잃고 보았다. 어느 솜씨 좋은 손이 흑연을 사용해 공들여 그린 그림 같았고 어딘가 다른 차원과의 경계를 알리는 복잡한 무늬 같기도 했다. 아까시나무 군락 너머에, 그들이 산에 오르기 전에 건넌 논이 있었다. 가시 돋은 가지들 때문에 거길 통과해 나아갈 길은 없었다. 그들은 군락을 우회해 이순일이 발을 딛고 내려갈 만한 비탈을 발견했고, 그리로 내려갔다.
논을 거의 다 건넜을 때 한세진은 공기를 맹렬하게 태우고 있는 토치 소리를 들었고 불 냄새를 맡았다. 파묘꾼들과 김근일이 화로에 넣은 뼈를 토치의 불길로 태우고 있었다. 이순일과 한세진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은 거의 다 되었다고 말했다. 대부분 나뭇조각이고 뼈가 얼마 없어 예상보다 일찍 일을 마칠 수 있겠다고. 화로 주변으로 회백색 재가 날렸다. 이순일은 말하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괜히 웃는 것도 그만두고, 입을 꾹 다문 채 화로 주변을 서성거렸다.
벼 밑동만 남은 논바닥에 조금 기울어진 채로 놓인 화로는 높이가 50센티미터쯤 되는 깡통이었고 그을리고 녹슬어 검붉었다. 검댕이며 재가 눌어붙은 석쇠 한장이 화로에 얹혀 있었고 재를 덮어쓴 조각 몇점이 그 위에서 새파랗게 타고 있었다. 김근일이 긴 집게를 쥐고 화로 곁에 서 있다가 불길 속으로 집게를 넣어 조각을 집었다. 그는 그게 뼛조각인지, 뼛조각이라면 충분히 탔는지, 부술 수 있을 정도로 무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본 뒤 화로 곁에 놓인 돌절구에 넣었다. 두번째 세번째 조각도 그렇게 절구로 들어갔다.
거긴 갈대가 길게 자라 사람들 눈에 쉽게 띄지 않을 곳이었다. 부대 초소에서도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추수가 끝나 겨울을 기다리고 있는 드넓은 논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 근방엔 사람이 산다, 한세진은 생각했다. 그들 중 누구도 오늘 오전에 우리가 저 산에서 가지고 나온 것을 모를 것이다. 토치 소리가 잦아들고 불이 꺼졌다. 파묘꾼들이 화로를 정리하는 동안 김근일이 돌절구와 공이를 들고 갈대 뒤로 돌아갔다. 한세진과 이순일은 논바닥에 다급히 돗자리를 펼치고 배낭에서 접시를 꺼냈다. 갈대 너머에서 들려오는 공이질 소리를 들으며 음식을 접시에 덜었다. 사과와 배, 차갑게 식은 고기볶음과 야채전과 북어를 각각 도자기 접시에 담고, 맑은 술을 조그만 유리잔에 담았다. 꼬마버스 타요와 친구들이 노랗고 파랗게 프린트된 비닐 돗자리에 제사상이 마련되자 이순일은 지팡이를 논바닥에 내려두고 한세진의 부축을 받으며 절했다. 이순일은 한세진에게도 절을 올리라고, 할아버지 잘 가세요, 하라고, 손녀와 그 딸 하는 일이 부디 잘되게 해달라 빌라고 말했지만 한세진은 아무것도 빌지 않고 절을 올리면서, 그쪽 방향엔 그의 뼈가 이미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마지막 반절을 올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한세진은 김근일이 절구를 거꾸로 기울여 가루를 털어내며 갈대 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삯을 치르고 헤어졌다. 이순일은 우리가 살아 있을 적에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김근일과 악수를 나눈 뒤 코를 조금 훌쩍였다. 차로 돌아가는 길에 이순일이 신은 등산화 밑창이 진흙 바닥에 들러붙어 떨어져나갔다. 그로부터 몇걸음 더 걷지 않아 나머지 한짝의 밑창도 떨어져나갔다. 한세진과 이순일은 황당해 신발의 상태를 살피다가 딱 한번 사용하고 내버려두어 겉보기엔 새것 같았지만 고무창이며 접착된 부분이 이미 삭았다는 것을 알았다. 흙바닥에 깊이 박혀 떼어내기도 어려워 보였으므로 그들은 밑창 두개를 그대로 두고 서둘러 그 장소를 떠났다.
금요일 저녁에 한만수가 철원에 잘 다녀왔느냐고 묻는 영상전화를 걸어왔다. 한만수가 머물고 있는 도시는 자정이었다. 새로 이사한 집에 베드 벅이 있어 고생하고 있다고, 감기몸살에도 걸렸다며 플리스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한만수는 근래 영주권을 신청했고 결과를 낙관하고 있었다. 영주권이 나오면 조금 더 안정적인 주거공간을 마련할 생각이니 그때 놀러 오라고, 엄마랑 큰누나랑 와서 한참 있다 가라고 한만수는 말했다. 그래, 그래. 한세진은 남의 논 입구에 신발 밑창 두개를 버려두고 왔다고 말했다. 그걸 그냥 두고 왔다고? 남의 논에다, 그걸 버렸다고? 한만수는 질색을 하면서도 엄마답다고 한참 웃은 뒤 누나가 수고했다, 수고가 많다고 말했다. 그래도 누나, 너무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지는 마.
그런 거 아냐.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