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완성되지 못한 ‘우리’의 애도
용산참사 10주년에 부쳐
김일란 金逸蘭
영화감독, 연분홍치마 활동가. 다큐멘터리 「두개의 문」 「공동정범」 공동연출. lemonson@naver.com
십년 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군가는 ‘끝까지 함께하겠다’던 소란스러운 약속과 ‘열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던 굳센 다짐이 사라진 뒤에 찾아온 적막한 순간이 가장 외로웠다고 기억했다. 다른 누군가는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것을 맥없이 지켜보아야 했을 때는 차라리 제 손으로 심장을 찢어버리고 싶었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더위가 한풀 꺾인 밤에 찾아온 쓸쓸함이 가장 괴로웠다고 했다. 친구의 가벼운 안부전화 한통에 땀과 피와 눈물이 섞인 서러운 울음을 토해버린 날을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떠올리는 이도 있었고, 얕은 강을 건너는 배처럼 덜컹거리는 선잠을 잘 때면, 그날이 다가왔음을 알아챘다는 이도 있었다. 지난 1월 20일, 용산참사 10주년 추모제에 모인 용산참사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저마다의 감정을 쏟아냈다. 하지만 모두 같은 말을 했다. 2009년 1월 20일, ‘그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떨까.1
용산참사, 그후
2009년 1월 20일 아침, 누군가에게는 여느 날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날’이었다. 그날, 나는 여느 날처럼 부스스 일어났다. 곧 마무리해야 할 다큐멘터리 영화의 편집 때문에 전날 밤을 새운 탓이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 문화운동 단체로서, 인권침해 현장을 기록하거나 그곳에서 발견한 소재를 작품으로 만드는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당시에는 한국 최초로 레즈비언으로서 커밍아웃하며 18대 총선에 출마한 최현숙씨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 중이었다. 마감 일정이 촉박했던지라 나와 동료들은 밤샘 작업을 이어갔다. 그날 아침 우리는 한껏 구겨진 몸을 기지개 켜느라 긴 하품 소리를 내면서 겨우 일어났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불나서 사람이 죽었다고 문자가 왔어. 텔레비전 좀 틀어봐!” 우리는 일제히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쳐다보았다. 지상파 3사 모두 속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단다. 뉴스를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재개발정책의 모순을 알리고자 점거농성을 시작했던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망루 안에서 불에 타 사망했다. 2009년 1월 20일 아침, 우리가 ‘용산참사’라 부르는 국가폭력이 벌어졌다. 농성을 시작한 지 25시간 만의 일이었다.
“너무나 참혹하다. 이 정권은 끝이겠구나.” 우리, 그러니까 나와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은 이렇게 말했지만, 곧장 용산참사 현장으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긴 토론 끝에 다시 작업하던 영화의 편집을 시작했다. 토론의 내용이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우리는 저항하는 철거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무자비한 국가에 대해 국민적 저항과 분노가 들끓어오르리라 확신했고, 영향력이 큰 사회운동단체들이 집결하리라 예상했던 것 같다. 운동사회 전체가 용산참사에 집중하고 이명박정권은 붕괴될 것이 분명했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가 연장되리라 믿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일’, 그러니까 다큐멘터리 영화의 편집을 잘 마무리하자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불과 이틀 사이에 참사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용산참사는 무리하고 성급한 경찰의 진압작전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이었다. MBC ‘PD수첩’은 사설 경비업체인 용역들이 진압작전에 참가하였고, 그 지휘를 경찰이 했다는 여러 증거를 제시했다.2 참사 직후 검찰은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여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하였지만 결과는 화재 원인을 특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PD수첩’ 같은 보도들이 밝혀낸 사실들로 파문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검찰은 예정되었던 수사발표를 이틀 연기했다. 이틀 후에 발표된 검찰수사 결과는 화재의 원인을 철거민들의 화염병이라고 확정했고, 경찰은 책임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검찰의 수사 발표 이후로 사회적 분위기는 급격하게 냉각되었다. 국가를 향했던 뜨거운 분노는 철거민을 향한 차가운 비난이 되어 돌아왔다. 용산참사로 인해서 국가의 정당성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줄 알았는데, 정치인들은 오히려 철거민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라며 비난했다.3 보수 정치인들은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고 사회적 소수자의 삶에 무관심한 채 ‘테러리스트’ 발언을 일삼았다. 국가와 자본에 의해 자행된 폭력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상징하던 불타는 망루의 이미지는 정치적·사회적인 의미가 제거된 채, 그저 화재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망루 끝에 내몰린 철거민들은 타인의 재산을 침해하고 불법점거농성을 벌인 범죄자로 낙인찍혔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한 국가폭력은 정당한 공무집행으로 규정되었다.4 “이미지는 그 이미지가 사용되는 방식에 따라서, 예를 들자면 어디에서 얼마나 자주 보여지는가에 따라서, 원래 지니고 있던 힘을 서서히 잃어가기도 한다.”5 참사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타는 망루는 단지 이미지로서 소비되었고, 순간적인 관심과 연민은 증발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은 용산참사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죽음의 고통에 연대하다
그러다가 2009년 5월 23일, 우리는 또다른 죽음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용산참사가 있은 지 4개월 만의 일이었다. 대한문 앞에 분향소가 차려졌고 수많은 이들이 ‘바보 노무현’을 그리워했다. 그의 죽음에 비통함을 참지 못하고 긴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권력의 정점까지 올랐던 대통령마저 죽음으로 몰고 갔던 세력에 대한 분노 혹은 ‘인간사 새옹지마’류의 허무함은 비극을 더욱 극대화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오히려 비참하고 초라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애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추모의 물결은 거대했다. 평소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 꽤나 비판적이었던 사람들도 인간 노무현에 대해서는 깊은 연민과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국민장이 치러지던 날,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6 앞을 지났다. 초여름의 뜨거운 태양만이 이글대는 남일당 분향소 앞은 적막했다. 분향소에는 불타는 망루에서 돌아가신 철거민 다섯분의 영정이 놓여 있었다. 그 영정사진을 보며 누구나 맞이할 수 있는 죽음에 관한 질문이 떠올랐다. 죽음에 관한 애도 또한 삶의 값어치처럼 차별적이고 선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다섯 철거민의 죽음에서 나는 그런 것을 보았다. 또한 다섯 철거민의 죽음과 한 경찰관의 죽음 중 어느 것에 감응할지와 같은 질문은 결국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어디인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철거민과 경찰관을 함께 애도할 수 있는 정치란 무엇인지 상상하는 것은 연대와 공생의 정치를 실현하는 제도의 실천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나의 삶이 용산참사의 시간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것은.
뒤늦게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를 통해 연대를 하게 되었다.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연대’의 의미는 동일한 가치와 공동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분명한 ‘사회적 적’에 맞서서 좀더 나은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적 행위일 것이다. 물론 연대의 개념은 특정한 시대나 집단에 따라 확장되거나 변화되거나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매우 다른 개념으로 사용될 것이다. 당시 연분홍치마의 경우에는 명백한 국가폭력과 자본주의의 횡포 속에 희생된 피해자들의 보편적인 인권을 지켜야 한다는 거창한 의미보다는, 피해자들의 곁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잘 들릴 수 있도록 영상으로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용산참사에 연대를 결정했을 때 우려되는 점이 없지는 않았다. 부당한 사회적 죽음을 매개로 형성되는 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해 용산참사 피해자들, 특히 유가족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얼마큼 일상생활을 공유해야 하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우려와 달리, 막상 우리 같은 미디어활동가들은 용산참사 유가족이나 피해자들과 소통할 일이 거의 없었다. 언론과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철거용역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기에, 우선 우리가 해야 할 활동은 철거가 진행되는 동안 용역들의 폭력을 감시하고 영상으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유가족이나 피해자들과의 소통은 범국민대책위원회의 몇몇 활동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유가족이나 피해자들의 심리적 상황이나 경황없는 생활을 고려하면,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같은 미디어활동가들’의 위치는 유가족이나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동심원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척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그들의 고통을 직면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고통을 나누어 가질 자격도 없으니 거리를 두고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 예의를 갖춘 태도라고 믿었다.
그러나 비슷비슷한 날들이 계속되면서 나를 비롯한 미디어활동가들은 조금씩 지쳐갔다. 여름에 접어들자 용산참사 투쟁은 더욱 고립되어 출구를 찾기 어려워졌다. 그런 상황에서 인터넷 생중계팀의 활약이나 인터넷 언론의 정보 전달력이 워낙 강력하였기에 미디어활동가들은 구체적인 대안을 찾기가 어려워 더욱 무력해져갔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경찰특공대, 적개심을 명령받다
그러던 어느날, 검찰의 수사기록 3천쪽 비공개로 파행을 거듭하던 용산참사 재판이 재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재판의 쟁점은 두가지였다. 2009년 1월 20일 왜 경찰특공대가 그렇게 서둘러서 진압을 했는지, 그리고 화재의 원인은 무엇인지.
검찰은 재판부에 신속한 진행을 요구했고, 일주일에 두번씩 집중적으로 재판이 열렸다. 빠르게 진행되는 재판을 매번 참관하면서 증언을 녹음하고 녹취를 풀어서 재판의 쟁점을 정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미디어활동가들에게 그 역할이 주어졌다. 남일당 현장에서 벗어나는 것도 환기가 되었고, 현장에 투입된 경찰특공대원들이 증인이자 목격자이며 참고인으로 재판에 출석한다는 소식에 나는 호기심으로 묘하게 흥분되었다. 살고 싶어서 망루에 올랐던 농성 철거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던 그 악마 같은 인간은 과연 어떤 생김새와 목소리를 지녔을지 궁금했다. 경찰관 제복 뒤에 숨어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그는 어떤 사람일지, 여섯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철거민들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 또 어떤 거짓말을 할지도 궁금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컨테이너를 타고 망루로 진입한 뒤 끝까지 저항하던 철거민들과 대치했던 경찰특공대원 A가 첫 증인으로 출석했다. 나는 그가 들어오는 입구를 노려보았다. 그가 걸어 들어오자 방청석에서는 야유가 쏟아졌다. 아마도 모두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거다. 목을 길게 빼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그의 생김새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증인선서가 이어졌다. 너무 평범해서 시시한 목소리였다. ‘어차피 거짓말할 거면서 뭣하러 선서를 하는 거지.’ 나는 그의 선거를 들으면서 혀를 찼다.
경찰특공대원 A는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저항하는 철거민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게다가 마지막 화재가 나기 직전에도 철거민들과 대치 중이었다. 상관의 명령에 충실했을 뿐인데 사회적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한 분노와 죽은 동료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동료가 아니라 자신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표현했다. 그는 경찰관의 죽음은 ‘개죽음’이라고 했다. 뒷모습이었지만 ‘개죽음’이라는 단어의 발음이 너무 격해서 그의 상기된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철거민 측 변호사가 물었다. 경찰관의 사망 원인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변호사의 질문에 재판장은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경찰특공대원 A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방청객들은 그의 뒤통수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침묵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입을 열었다. “농성자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용했던 장내는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는 이미 답을 예상했다는 듯이 욕설을 퍼부었고, 누군가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게 무엇 때문이었는지 경찰특공대원 A의 재판녹취를 풀면서 알게 되었다.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그의 감정을 따라가보았다.
경찰특공대원 A는 분명히 망설였다. 그 망설임은 말을 더 내뱉을지, 삼킬지 갈등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결국 그는 말을 삼켰다. 하지만 생략된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더 큰 책임은 진압명령을 내린 경찰 지휘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경찰특공대원 A의 망설임이 반가웠고 안도감이 들기까지 했다.
두번째 공판일. 증인으로 출석한 경찰특공대원 B에 대한 심문 역시 남일당 건물의 구조는 알고 있었는지, 철거민들이 왜 농성을 하는지, 철거민 중에 약자나 병자는 없는지, 망루 안에는 어떤 위험이 있는지 등의 사전정보를 알고 있었는지가 쟁점이 되었다. 경찰특공대원 B는 사전정보가 전혀 없었다고 답했다. 철거민 측 변호사는 기가 차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작전 전에 도대체 무슨 교육을 받았습니까?” 경찰특공대원 B는 기억을 더듬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잠시 후에 그는 답했다. “대장님이 전국철거민연합이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경찰특공대원 B의 답변으로 재판장에 탄식이 쏟아졌다. 경찰 지휘부는 현장에 투입되는 경찰관들에게 단지 철거민들을 향한 적개심과 혐오만을 명령했을 뿐이었다. 근대 국가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 필수적인 경찰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아니 지난 한국의 현대사에서 경찰이 사회운동을 억압하고 감시하고 통제하며 권력을 지탱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경찰이 시민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순진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 기대했던 것일까. 경찰특공대원 B의 답변은 무척 절망스러웠다.
두개의 문
경찰특공대원 C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는 진압현장에 거의 나가본 적 없는 순경이었다. 농성자들을 진압하러 현장에 가는 것이 긴장되었다고 했다. 철거민 측 변호사는 언제 처음 망루진압 명령을 받았는지, 망루 안에 있던 위험요소를 알고 있었는지,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은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변호사의 질문에 매우 방어적이면서도 긴장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재판의 쟁점이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옥상에는 문이 두개가 있었어요. 그건 알고 있었나요?” 변호사가 물었다. 경찰특공대원 C는 몰랐다고 답했다. 몰랐기 때문에 한참을 헤맸고, 그래서 더 많은 피해가 있었다고 답했다. ‘무슨 문? 어디 문이 두개라는 거지?’ 그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고 내 주위에 앉아 있던 방청객들도 수군거렸다.
나중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용산참사가 있었던 남일당 건물은 두개의 건물을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연결해 사용하였기 때문에, 옥상도 두개로 분리되어 있었다. 진압하던 경찰의 컨테이너가 안착했던 앞쪽 옥상에서 망루가 있던 뒤쪽 옥상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건물 사이의 분리대를 통과해야만 했는데, 이 분리대에는 두개의 문이 있었다. 하나는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문이고 다른 하나는 창고로 들어가는 문이었다고 한다. 재판과정에서 경찰특공대원들이 남일당 건물 옥상구조에 대해, 즉 앞쪽 옥상에 안착해 망루 쪽 옥상으로 건너가려면 어떤 문으로 진입해야 하는지 몰랐음이 드러났다. 농성 중인 철거민과 진압작전 중인 경찰, 모두의 안전을 위해 건물의 구조를 파악할 시간조차 없었단 말인가. 도대체 왜 그렇게 서둘러서 무리하고 성급한 진압을 했어야만 했는지 의문은 증폭되었다. 그럴수록 용산참사는 단지 재개발의 모순에 저항하는 철거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 우리를 그토록 강한 공포에 몰아넣은 국가 공권력이 이토록 허술하고 무계획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솟는 것이 아니라 서글플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지금 내가 용산참사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재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주변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를 만류했다.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계획을 말리던 누군가의 근거는 이러했다. 용산참사 직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이충렬 연출, 2008)의 이례적인 흥행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대중적 공감이 보여주듯이, 상실에 대한 슬픔이 극장과 광장을 가득 채우는 시대지만, 우리들의 모순된 욕망과 부끄러운 민낯을 들춰내는 용산참사와 같은 정치적으로 날카로운 죽음은 외면당하는 시대라는 것이었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외면당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취약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위험에 노출되었으나 자신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었는지조차 모른 채 진압에 투입됐던 경찰처럼, 국가는 진압의 대상인 철거민이나 진압의 도구인 경찰 모두를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용산참사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재판은 용산참사의 그 어떤 진실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채, 철거민의 유죄로 끝이 났다. 이 재판과정을 참관하면서, 나의 연대는 위치가 달라졌다. “피해의 진원지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일수록 피해의 진실에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하려 노력하고, 피해의 진원지에 가까운 이들일수록 용기를 내어 가혹한 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7 나는 피해의 동심원 저 끝에서 진원지에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었다. 이전과는 다른 연대가 시작되었다. 용산참사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만히 응시하던 연대에서 스스로 질문을 만드는 연대로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과 우리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연대의 형식과 방향을 찾은 듯했다.
2011년 가을, 재판과정의 질문과 경험을 담은 다큐멘터리 「두개의 문」을 제작하였다. 처음에 이 다큐멘터리를 본 유가족과 피해자들은 적잖이 당황하였다. 응당 철거민의 입장에서 용산참사가 재구성될 것이라 짐작했었을 것이다.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은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입장에 따라서 다큐멘터리 상영활동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므로 무척 긴장되었다. 그러나 이후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그들은 경찰의 행위로 재구성한 다큐멘터리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공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서 경찰조직의 문제와 경찰 개인의 피해에 대한 문제의식에 대해서도 공감해주었다.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연분홍치마의 다큐멘터리 제작활동에 연대해준 덕분에, 「두개의 문」은 세상과 만날 수 있었다. 함께 「두개의 문」 상영활동을 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세심해졌다. 세심한 상호작용이 필요해진 이유는 우리의 연대방식과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대는 더이상 용산참사의 ‘피해 당사자-비당사자(연대 활동가)’ 혹은 ‘동심원-주변’이라는 이분법에 기반한 관계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관계로 진입했기 때문이다.8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십년이 흘렀다. 십년이 지난 지금도 용산참사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다. 용산참사 10주년에 대한 국민적 추모와 성찰이 이어지고 있지만, 당시 경찰청장 내정자이자 진압책임자였던 김석기는 지난 1월 21일, 국회 기자회견을 자청해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용산참사를 ‘용산 화재사고’라고 거듭 지칭한 것이다. “현 정권이 정당하게 법을 집행한 경찰을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있다”면서, “같은 상황이라면, 같은 결정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십년이 흘렀지만, 반성은커녕 오히려 정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망언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지난 십년 동안 반복되었던 기이한 정치적 죽음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2009년 용산참사 이후로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였다. 2009년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 2010년 겨울에 있었던 국가인권위 농성 직후 폐렴으로 숨진 장애활동가 우동민. 2012년 1월 밀양 송전탑 건설반대를 외치며 분신한 이치우. 같은해 12월 박근혜 당선 직후 좌절과 절망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렸던 한진중공업 최강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 이운남. 연이어서 2013년 1월 차별과 해고로 인한 고통으로 스스로 삶을 거둔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윤주형. 2013년 10월 아이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기에 죽음으로써 부조리한 현실을 알리겠다던 삼성전자 서비스 노동자 최종범. 2014년 4월 장애등급제의 모순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던 송국현. 무능력한 국가와 이윤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비극인 세월호참사로 인해 바닷속에 수장당한 304명의 생명들. 2015년 경찰이 쏜 물대포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던 백남기. 2016년 현대차와 유성기업의 노조파괴에 저항했던 한광호. 그외에도 누군가는 기억하지만 누군가는 망각해버린 숱한 죽음들이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 모든 정치적인 죽음에 매번 감응하지도, 깊게 애도하지도 못한다. 정치적 죽음이 평범해진 시대에,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다. 애도는 타인의 죽음을 향한 상실감이 일상이 되는 과정과 더불어 우리 생의 조건이 달라지는 과정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죽음은 그들과 우리의 경계를 넘나들고, 우리 모두의 관계는 중심-주변을 흩뜨리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형되고 열린 채로 진행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게 된다. 용산참사 유가족과 희생자들이 보낸 십년은 어떤 의미일까. 그들과 ‘우리’가 보낸 십년은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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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들’의 고통을 직면하려면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동일성을 기반으로 하는 집단인 ‘우리’를 함부로 설정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라는 개념이 여전히 유용하다고 여겼다. 적어도 ‘우리’라는 개념이 고정되지 않고 유연할 때, 그리고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지 않을 때 새로이 발견되는 ‘연대’의 가능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 MBC ‘PD수첩’은 「용산참사,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을까?」(2009.2.3), 「폴리시아 의혹: 누가 방패를 들었는가」(2009.2.10) 등 2회에 걸쳐 경찰의 진압작전이 용역들과의 협조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혀냈다.↩
- 2009년 당시 철거민들의 농성에 대해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은 “도심 테러적인 성격이 있었다”,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은 “이 불법 농성을 생존권 투쟁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 고의적 방화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화염병 투척자가 죽었는지 살아났는지도 핵심적으로 확인해야 할 사안”, 한나라당 이은재 의원은 “떼만 쓰면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심리가 깔려 있다. (…) 어떻게 이렇게 폭력시위를 할 수 있는지, 국민으로서 반성을 해야 한다. (…) 불법 과격 시위문화가 이번 사건의 원흉”이라고 말하며 화재의 원인을 철거민 탓으로 돌리고 진압작전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바빴다.(「폭력은 그들의 근엄한 입에서 시작된다」, 오마이뉴스 2009.1.23 참고)↩
- 2018년 9월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용산참사는 경찰지휘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안전조치가 미비한 상황에서 강제 진압이 이뤄진 것이 원인으로, 경찰이 사건 직후 공권력 행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이버수사요원 900여명을 동원해 이른바 댓글공작 등 조직적으로 온라인 여론전을 벌였고, 해당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 특별수사본부 관계자와 접촉하는 등 수사에 영향을 미치려 한 정황도 드러났다. 진상조사위는 공소시효가 지나 경찰청에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사망한 경찰특공대원과 철거민들에게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157면.↩
- 용산 철거민들이 망루를 세웠던 건물 1층에는 ‘남일당’이라는 금은방이 있었다. 참사 이후 남일당은 단지 가게 이름이 아니라 현장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예를 들어 건물 1층에 마련된 철거민 다섯명의 분향소는 ‘남일당 분향소’, 주민들이 연대자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곳은 ‘남일당 식당’이라 불렸다.↩
- 서경식 『시의 힘』, 서은혜 옮김, 현암사 2015, 230면.↩
- 나는 이 모든 재판과정을 연분홍치마 활동가들과 함께 다큐멘터리 영화 「두개의 문」으로 만들었다. 「두개의 문」은 용산참사 당일 경찰들의 행위를 중심으로 참사를 재구성하는 한편, 재판에서의 쟁점들을 마치 법정공방이 실제로 열리는 것처럼 구성하였고 관객-시민들을 방청객으로 앉혔다. 2012년 개봉해 관객수 73,807명을 기록,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흥행을 하였다. 더불어 2018년에는 감옥에서 출소한 철거민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을 이혁상 감독과 공동 연출하였다. 「공동정범」에는 당사자-비당사자 이분법이나 연대의 방식과 그 의미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