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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우리가 함께 무한을 꿈꿀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朴濬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등이 있음. 신동엽문학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수상.

 

박혜진 朴惠眞

문학평론가. 공저 『읽을 것들은 이렇게 쌓여가고』 등이 있음. maple30@naver.com

 

 

183호_p403

 

 

1월 15일 오후 12시 기준 서울시의 초미세먼지(PM2.5) 농도는 101, ‘매우 나쁨’ 수준이었다. 그 시각 나는 강변북로 위에 있었다. 왼쪽으로 펼쳐진 한강과 강 건너 빌딩들이 짙은 먼지에 가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전부 다 삼켜버린 희뿌연 풍경은 재난영화의 한 장면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떤 공포심도 엄살만은 아니었던 그날, 나는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문학과지성사 2018)를 출간한 박준 시인을 만나기 위해 먼지 속을 뚫고 도로 위를 달렸다. 상상 속에서 그려보던 재난의 이미지가 가까워진 만큼이나 가까이 있던 ‘장마’라는 단어가 아득해졌다. 아틀란티스나 노스탤지어 같은 말처럼 ‘장마’도 만질 수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래서였을까. 길 위에서 나는 사라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 중대한 임무라도 부여받은 사람처럼 비장한 마음마저 들었다. 박준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 사라져가는 공기를 되찾으러 가는 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가 만나러 가는 사람이 시인이 아니라 자연의 수호신쯤 되는 것처럼.

 

기대에는 이유가 있다. 2017년 여름, 박준 시인을 비롯한 몇몇 작가들과 강원도 정선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우리는 박준 시인이 이끄는 대로 여기저기를 다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운동장이 있는 초등학교라거나 여울물 소리가 잘 들리는 나무 그늘이라거나. 여행은 자연스레 ‘박준과 함께하는 정선 문학캠프’가 되어갔는데, 놀랍게도 나는 처음 가본 장소에서 내가 잊고 있던 감정들을 만났다.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던 그런 감정들 말이다. 그리고 그 만남은 어딘가 익숙했다. 박준 시인이 시로 쓰는 것들이야말로 세상이 변화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들이 아니었나. 말하자면 남아 있는 것들. 봄, 가을, 하늘, 공기라 해도 좋고 슬픔, 기쁨, 그리움, 다정함이라 해도 좋을 그것은 한국인 화자로서 공유할 수 있는 고유한 서정과 언어를 관통하며 박준의 시를 특징 짓는다. 환경이 오염되고 속도가 빨라지며 삶의 가치관이 변하는 동안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들. 만나자마자 날씨 이야기를 꺼낸 건 관습적인 인사말이 아니었다. 미세먼지에 대한 걱정과 기후변화에 대한 그날의 염려는 박준의 시쓰기에 대한 진지하고도 본격적인 내 첫 질문이었다. 그 순간 나는, 세상의 변화와 함께 박준의 시어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몇해 전 강원도 정선에 간 적이 있었잖아요. 저는 남들 앞에서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데 어찌하다가 그날 노래를 했고요. 기억 안 나시지요? 기억이 안 나셔야 할 텐데.(웃음) 어쨌든 그때 부른 것이 「찔레꽃」이라는 노래였어요. 박태준 곡에 이원수의 동시를 바탕으로 이연실이 개사해 부른 버전이에요. 가사의 1절은 이렇습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오래전부터 이 노래를 좋아했어요. 배가 고프든 안 고프든 찔레꽃을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데, 슬프고 슬퍼요. 이상하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만도 아니에요. 어려서 부모님이 생업으로 늦을 때면 주로 컵라면을 먹었거든요. 찔레꽃과 컵라면만 두고 보면 세상이 변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혼자 남은 아이가 부모를 그리워하는 것, 급하게 허기를 채울 때 드는 슬픔 같은 것을 두고 보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마 빠르게 변하면 변할수록 변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쓸 것 같아요.

 

 

남아 있는 나날

 

남아 있는 것을 쓸 것 같다는 시인의 말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문장이 있었다. ‘남아 있는 나날’. 영화 제목이자 원작인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이 표현은 원제(The Remains of the Day)를 잘못 번역했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남아 있는 나날’이란 여생을 뜻하며 미래의 시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흔적들, 그러니까 시인의 말처럼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을 뜻하기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과거의 시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번역의 타당성은 차치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지시할 수 있는 이 문장이 박준의 시를 표현하기에 맞춤하단 생각이 들었다. 박준 시의 현재는 과거를 향해 열려 있다. 단절된 시간에 다리를 놓고 현재를 과거로 잇는다. 과거는 현재를 통해 계속 진행되며 미래를 장악한다. 기억을 모티프로 한 예술의 한 축이 불완전한 기억을 통해 인간 의식의 허위성과 허구성을 드러낸다면 박준의 기억은 현재와 과거라는 시제의 구분을 무화시켜 단절되고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연장한다. 그 연장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시간에 대한 초월적 경험이다. 「종암동」을 처음 읽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삼대에 걸친 시간이 차례로 집 안에 들어서며 제한된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house)이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집(home)으로 비약하던 순간, 집은 독립된 하나의 실체가 되었다.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종암동」 전문

 

무엇을 기억하려는 현재와 그 과정을 통해 기억되는 과거가 섞이는 것은 시간의 일이지만 동시에 공간의 일로도 느껴져요. 「종암동」만 하더라도 삼대의 시간이 은유적으로 스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공간에 세 들어 살 듯, 종암동이라는 장소성 위에서 맞닥뜨리게 하고 싶었어요. 기억과 시간을 쓰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습니다. 다만 너무 강렬한 기억은 시로 쓰기 어려워요. 대상과의 거리 유지나 파토스의 과잉 같은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의 강렬함이 다른 가능성들을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선적인 의미의 시가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물리적 시간이든 정서적 시간이든 흐르고 흘러서 그 강렬함이 지워질 때 겨우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또 지나치게 흘러 때를 놓치면 바스라지고 무뎌져서 쓸 수 없고요.

 

약간 동화적인 장면이지만 마음 어딘가에 긴 빨랫줄 같은 것을 매달아두고 거기에 당장 쓸 수 없는 기억들을 널어놓는다고 생각해요. 빛이나 바람 대신 시간과 기억이 지나는. 그러니 자연스레 회상을 자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얼마만큼 말랐나 빨래를 만져보는 것처럼. 특정한 기억이라 해도 시각 이미지로 남는 것은 생각보다 허약해요. 옷감이 잘 상한다고 할까요. 그러니 다양한 감각으로 기억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시에 장소성이나 음식이나 절기 같은 것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쓰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하는 대부분의 상상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것이에요. 앙상한 겨울나무를 보면서 잎이 돋고 꽃이 필 새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잎이 돋고 꽃이 피었던 지난봄을 떠올리는 것이지요. 자랑이 되지 않는 저의 기질 같아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기억은 인간의 일이다. 내일은 뭘 하지. 누굴 만나 무얼 먹지. 어떤 일을 어떻게 정리해야 다음 일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일상의 방향은 미래다. 미래를 생각하는 일에는 내 일신의 안위가 있고 예상 가능한 흐름이 있고 무엇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가 있다. 반면 시인의 방향은 과거다. 그때 뭘 했지. 누굴 만나 무얼 먹었지. 어떤 일을 어떻게 정리했거나 하지 못했지. 과거를 생각하는 일에는 후회와 그리움과 반성이 있다. 못다 한 말과 보내지 말았어야 할 눈빛이 있다. 그런데 무용해 보이는 과거 지향이야말로 박준 시에 독특한 운동성을 구축하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며 만드는 연장된 시간을 가시화한다.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남겨진 흔적으로서의 시간대는 마치 연안에서 밀물과 썰물이 만들어낸 무늬와 같다. 시간은 밀려왔다 쓸려나가는 가운데 경계선을 이동시킨다. 움직이는 시간이 가능해진다. 이른바 연안의 운동성. 시간의 변화가 공간을 통해 드러나는 이러한 움직임은 겹겹이 쌓이는 시간의 축적을 통해 종내에는 현재를 소멸시킨다. 「종암동」의 세계관이 좀더 심화된 시가 「바위」이다.

 

비와 눈이 많았던 몇 해가 더 지나자 아이들은 바위 앞에 겁을 벗어두고 시내로 떠났습니다 빛에 바랜 부처의 상반신이 먼저 지워졌고 무당들도 바위로 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바위에 그려진 부처 그림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이 넓어지려 넓어진 것이 아니고 물이 흐르려 흐르는 것이 아니듯 흐릿해지는 일에도 별다른 뜻이 있을까마는
 
다만 어떤 예의라도 되듯 바위 밑 여전히 진한 녹빛을 내는 소가 쉴 새 없이 몸을 뒤집고 있었습니다

—「바위」 부분

 

「바위」에는 쌓이고 쌓이는 동안 무한대로 커지면서 결국 인간 경험을 넘어 소멸의 개념에 가까워지는 역설적 시간이 등장한다. “자랑이 되지 않는” 시인의 기질, 그러니까 과거 지향이 뒤섞어놓은 무한한 시간대가 시간의 단절 개념을 삭제했다. 시인은 「바위」를 쓰고 나서 가장 기뻤다고 말했다. 바위를 비롯한 다양한 존재들의 시간이 보여주는 중첩을 통해 유구를 넘어 무시간성까지 닿고 싶었다는 시인은 아름다움이 다만 지속되는 과정에서 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지속성의 방법론이 바로 기억일 것이다. 기억은 인간의 일이니까.

 

 

뱉어진 말들

 

지난해 12월, 박준의 두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변화는 적지 않았다. 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납득할 만한 것이어서 애초에 박준의 것이었던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라면 구어체 사용의 증가라 하겠다. 「겨울의 말」 「가을의 말」 「마음이 기우는 곳」 「목소리」 같은 시들이 특히 그렇다. 「가을의 말」에서처럼 이문재 시인의 취중 말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일상생활에서 듣고 흘려버리게 되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이때 구어(口語)는 다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 속엣말과 구분되는 음성으로서의 구어가 아니다. 박준의 구어는 차라리 구어(久語)이거나 구어(救語)라고 해야 맞겠다. 프루스트(M. Proust)의 마들렌처럼 오래된 감정을 불러내거나 참지 못하고 터져버린 누군가의 울음처럼 말하지 않고도 전달되는 구원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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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쓰기라는 것은 정서나 사유의 산물인 것이잖아요. 정서와 사유가 먼저 일고 그다음에 쓰기가 따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순서가 역전될 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쓰기에 적합한 것들만을 시인 스스로 정서라고 느끼고 사유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특히 쓰기에 대한 강박이 생길수록 이 역전은 더욱 빈번해지는 것 같고요. 이 과정에서 시의 경직이 온다고 생각해요. 언어와 의미 모두 갇히기 십상입니다. 시의 언어는 시인의 정서와 사유를 충실하게 대변해야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처음 발생된 그것들로부터 한껏 도망쳐서 자유로운 의미를 새로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도망치거나 환기할 수 있는 열린 문이 저마다의 시인들에게 있는 것 같아요. 그 열림의 다름을 살펴보는 것도 시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 같고요. 저의 경우에는 구어가 종종 그 문을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시에 들이려 하는 구어는 취한 말이거나 잠꼬대거나 울면서 하는 말이거나 울지 않으려 하는 말 같은 것인데요, 뱉은 말이 아니라 뱉어진 말에 가까운, 짧지만 서사나 이미지를 단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생경하지만 그 말이 아니면 어떤 말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이러한 구어는 일부러 찾는다고 반드시 찾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어요.

 

“일부러 찾는다고 반드시 찾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것들. 사실은 언제나 찾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익숙함에서 생경함을 찾아내고 생경함에서 익숙함을 발견해내는 일에 다름 아닐 테니까. 그렇게 해서 찾아낸 형식은 구어 말고도 더 있다. 편지다.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고 쓴 사람의 손을 영영 떠나지 못할 수도 있는 편지는 불완전한 매체다. 누구나 서랍 속에 부치지 못한 편지를 넣어두었던 시간이 있다. 발신과 수신 사이의 불완전함에 비해 편지는 방법과 목적, 즉 형식이 가장 명확한 글쓰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진심의 매체. 편지는 확실과 불확실, 안정과 불안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화자와 청자라는 관계 설정에 기반해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글쓰기 형식이다. 두번째 시집에 편지 형식의 시가 늘어났다는 것은 그의 화자들이 부쩍 타자를 향해 발화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기고백적 성격이 강했던 첫 시집과 비교해 가장 큰 변화는 이쯤에 놓여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번 시집에 편지 형식의 시가 여러편 수록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 형식으로 시를 쓰는 일은 스스로 자제하고 경계를 하는 편입니다. 쓰고자 하는 어떤 정서나 이미지가 지나치게 수월하게 풀려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언어적 고민을 덜하게 되니까, 다른 의미의 쉽게 ‘쓰여진 시’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럼에도 편지 형식을 좋아해요. 편지는 일상적 발화와 시적 발화 그 한가운데 놓인 방식 같습니다. 일상적 발화는 직접적이고 시적 발화는 비유적이라고 할 때 편지는 직접 발화이되,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다른 숱한 말들과 뒤섞어서 의미 전달의 시간을 유예하고 정서의 진폭을 크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래전 배운 편지 쓰는 법 같은 것만 떠올려보아도 그렇잖아요. 가장 먼저 계절 인사나 상대의 안부를 묻고 적당하게 최근 관심사나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하다가 마음먹었던 본론 격의 말을 적은 다음 다시 어떤 기약이나 희망을 덧붙이고 그러다 끝인사를 하는. 그러고도 추신이라고 하며 조금 더 감상적인 글귀를 덧붙이지요. 대부분의 편지는 의미가 겉으로 드러나 있을 테니 한번에 읽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한번만 읽지는 않지요. 몇번이고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상대의 의도나 정서가 더 잘 느껴지니까요.

편지 형식의 또다른 매력은 수신자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신자가 실재하는가의 차원이 아니라 발화의 방식이 타자를 지향하는가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하는 데에 이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한편 앞선 시편들과 전혀 다른 시가 바로 「숲」이다. 「숲」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은 지고 없는 찔레에 대해 쓰는 것보다 멀리 있는 그 숲에 대해 쓰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일상적인 시어, 소박한 감성, 산문적인 전개 등 삶의 구체적인 장면을 쓰는 여느 시들과 달리 추상적인 이미지와 관념적인 개념에 대해 쓰겠다고 못 박아두는 시작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차이는 ‘숲’이라는 환상적인 공간을 통해 전경화된다. ‘숲’은 지금 과거의 말들이 도착하느라 한창 소란스럽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숲」 부분

 

숲은 과거가 도착하는 미래의 시간이다. 미래에 도착하는 과거라니. 시간은 연결되어 있을 뿐 그 안에 순서도 구분도 없다. 기억의 활성화만이 시간에 순서를 부여할 수 있다. 「숲」은 시간에 대한 감각을 지렛대 삼아 하나의 존재론으로 확장된다. “여전히 그 숲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문장을 거듭 읽어본다. 아무도 없다는 부정 진술이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긍정 진술로 옮겨질 때, 이 문장은 완전한 소멸의 상태를 지향한다. 앞선 시들에서 시간의 적층이 끝내 시간의 소멸을 향했던 것과도 같다. 박준의 시에서 사라짐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완성된 형태다. 그의 산문집에서도 사라짐의 존재론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시는 충분한 애도와 슬픔을 통해 숱한 사라짐들을 완전히 잊기 위함이다. 한 존재가 온전히 존재하려면 온전히 소멸해야 한다. 우리가 존재했다는 것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할 때 ‘영원’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발음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과 유서」 부분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난다 2017)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

 

당대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작품들, 그리고 후대에 계속해서 읽히는 작품들은 그 시대의 인간을 재현한다. 체호프(A. Chekhov)의 소심한 인간들, 고골(N. Gogol)의 경직된 인간들은 모두 인간의 근원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시대의 왜곡되고 굴절된 사회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회적·정치적 독해를 가능하게 한다. 박준 시의 화자들은 조심스러워하고 확신하지 않는다. 그의 시에는 배려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다정하고 친절하고 유예하는 목소리는 현대인들의 이상과 결핍을 동시에 드러낸다. 나는 시적 화자의 이러한 목소리가 얼마만큼이나 의도적으로 배치된 것인지 궁금했다. 서정시로 읽히는 가운데 쉽게 누락되거나 간과되곤 하는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어떤 것도 확신하지 않고 끊임없이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물론 저의 성격에서 오는 것일 테지만, 조금 넓혀 생각하면 서른몇해 동안 한국사회를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터득한 자세일 수도 있을 듯합니다. 선과 악, 정치사회적 이슈, 개인과 내면 등등이 이전 시대와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명료하게 파악하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 되었잖아요. 여전히 구별은 명확하지만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지요. 게다가 그나마 명확하다고 믿었던 것들마저 한순간 무너지는 상황을 종종 보았으니까.

혜안이나 직관의 힘으로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생각이 많아지고 주저하거나 머뭇거리게 되고 그 끝에 나온 목소리도 당연히 작은 것이 되겠지요. 저부터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인물들에게 눈길이 가는 것이고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은 다른 작은 목소리를 비교적 잘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박준 시에 자주 등장하는 미인(美人)은 “물에서든 뭍에서든/마음을 웅크리고 있”(「호수 민박」)는 사람일 것이다. “먼 시간을 헤아리고 생각해보는”(「메밀국수」) 사람일 것이다. 첫배에 새끼 여섯을 낳은 두살 된 단비와 “멀리 방죽까지 나가/함께 울고 돌아”(「단비」)온 아버지 같은 사람일 것이다. 작은 목소리를 가진 덕분에 작은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은 주저하는 속도로 살아가지만 그 주저함이 숱한 상실된 마음에 발을 맞춘다. 그런가 하면 시 밖에도 많은 목소리가 있다. 첫번째 시집이 출간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던 데에는 허수경 시인의 목소리가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또 많은 목소리들. 박준의 시를 좋아하는 십만이 넘는 독자의 목소리다. 문득 이 목소리들이 시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궁금해졌다. 첫번째 시집과 두번째 시집의 퇴고 과정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시인에게 독자들의 목소리는 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2012년 12월 출간된 첫번째 시집은 사실 더 일찍 나올 수도 있었어요. 퇴고를 끝낸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고 2011년 하반기로 출간을 예정하고 그에 따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제 시집의 발문을 쓰던 고 허수경 선배께서 갑자기 연락을 해오셨어요. 절반 정도 글을 완성했고 제목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며 시인은 시를 쓰네’라 붙이기로 했다고요. 그러더니 한참 침묵을 이어나가다 제게 조심스럽게 물으시더라고요. ‘발문을 쓰는 일 말고 내가 이 시집에 조금 더 관여를 해도 될까?’ 하고. 그러더니 허수경 선배는 저에게 앞으로 일년 동안 시를 더 쓰고 더 퇴고하라 하셨어요. 아니 더 쓰고 더 퇴고해야 한다고. 말투는 다정했지만 내용은 단호했습니다. 만약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다른 필자에게 평론이나 발문을 받으라고도 하셨고요. 당연히 그때는 선배의 말이 야속하고 서운했어요. 하루라도 빨리 시집을 세상에 내놓고 싶은 조급함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선배의 말을 듣기로 했어요. 저는 그때까지 허수경 선배를 한번도 뵌 적이 없었어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선배에게 저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후배 시인이잖아요.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주는 데에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겠지, 하는 생각에…… 다음 날 선배는 아래와 같은 메일을 한통 보내오셨어요. 저의 마음들을 모두 알고 있기라도 하듯.

 

제가 박준 시인에게 마음이 상하는 말을 했지 않았나, 어제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선배랍시고 이런저런 말을 하는 거, 후배가 다 듣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저는 박준 시인의 시집이 이 세상에 던져질 때 조금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기를 원했고 그 아름다움에는 시인의 시에 대한 진심이 담겨 있기를 바랐을 뿐이어서 혹, 결례가 되었다면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기를 바랍니다. 다만, 조금 시간을 가지고 담담히 시들을 읽어보세요.

 

시를 쓰면서 살아가기로 작정한 한 인간의 마음에는 얼마간의 비장함이 들어 있어서 그런 비장함을 마음에 품고 아름다움을 구현해나가는 길 앞에서 시인은 언제나 떨리지요. 모쪼록 저의 뜻을 알아주시고 더 정진하시기를 바랍니다.

—허수경 시인의 이메일(2011. 11. 17)에서

 

허수경 선배가 말한 것처럼 정확히 일년을 더 보냈습니다. 시를 새로 쓰고 시어를 고치고 시의 형태를 재구성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 시간 동안 가장 많이 한 일은 저와 제가 쓴 시들의 관계와 거리를 생각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시로 무엇을 하겠다는 욕망을 덜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말없이 시 자체를 채우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에서야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만약 그 유예의 시간이 없었다면 시인으로서 저는 지금보다 더 못난 모습일 거예요.

이번 시집을 퇴고하는 과정에서 허수경 선배에게 혹은 첫 시집을 준비하던 시간 동안 배운 것들을 줄곧 떠올렸어요. 첫 시집의 대중적 성공이라는 것이 제가 새로 쓰는 시의 무게를 더하거나 덜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고 또 불안이나 불필요한 욕망 같은 것이 생겨도 그럴수록 시의 자리는 다른 것들이 아닌 시로서만 채우기 위해 노력했어요. 두번째 시집에 들어 있는 대부분의 시편들을 완성한 것은 이년 정도 전의 일이지만 이 과정을 거치며 천천히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첫번째 시집이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을 숨죽여 듣는 동안 나는 이것이 다만 허수경 시인과 박준 시인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란 무엇일까. 그리고 시를 쓰면서 살아가기로 작정한 인간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그때 떠오르는 한편의 시가 있었다. 박준 시인의 말이 뜻하는 바가 여기 담겼다고, 나는 혼자 짐작해보았다.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양 떼를 지키는 사람」 부분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김한민 옮김, 민음사 2018)

 

세번째 시집에 대한 고민이 깊겠다는 말로 대화를 갈무리하려 하자 시인은 다시 한번 허수경 시인의 문장을 상기했다. 그 순간 시인은 과거의 말이 도착하고 있는 숲이 된 것만 같았다.

 

첫 시집의 발문에서 허수경 선배가 몇가지 덧붙이는 글을 적어주셨어요. 그중에 “얼마나 길은 멀까, 다음 시집이 나올 때까지는”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번째 시집이라, 얼마나 길이 멀까요. 다만 그 사이사이에 다른 시인들의 좋은 시들이 어떤 좌표가 되어줄 것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낡고 바랜 말, 진심을 찾기 위해 시인은 시를 다 쓰고도 이년 동안 시집을 보고 또 봤을 것이다. 진심은 넘어서려는 마음이다. 시간을, 공간을, 그리고 타인과 자신을. 너머의 진심이 이제 독자들의 손으로 넘겨졌다. 그의 시가 일상의 언어에 깃들지 못한 집 없는 감정들을 불러줄 때 박준의 시 또한 어떤 좌표가 될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기나긴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날은 거짓말처럼 개어 있었다. 먼지는 대체로 사라졌고 사라졌던 빌딩들은 형체를 드러냈다. 강물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햇빛 위로 파란 하늘이 청명했다. 조금 전까지 우리를 휩싸고 있던 회색빛이 간밤의 악몽처럼 사라지자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외면하고 있던 상실감이 반가움을 밀어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0190115, PM2.5, 101.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아두려고 전에 없이 기억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그러자 그 숱한 과거 지향과 기억의 조각들이 다름 아닌 상실의 자리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시인의 진심으로 내 좌표 또한 이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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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박준 박혜진

왼쪽부터 박준 박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