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
독특한 식민지, 한국
식민화는 가장 늦게, 봉기는 가장 먼저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 및 동아시아 국제관계 전문가. 국내 번역 출간 저서로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대학과 제국』 『김정일 코드』 『미국 패권의 역사』 등이 있음.
* 이 글의 원제는 “Korea, A Unique Colony: Last to be Colonized and First to Revolt”이다. ⓒ Bruce Cumings 2019/한국어판 ⓒ 창비 2019
** 나는 2019년 3월 28~29일 서울에서 열린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포럼’에서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연설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3·1운동에 관해서 수년 전 확고한 결론에 도달했던 터라, 그때의 전반적인 진술들이 여전히 옳다고 생각하는지 자문했다. 답은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설의 대부분을 나의 저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한국어판 창비 2001)에서 끌어왔다. 논문을 요청받았더라면 새로운 내용으로 집필해야 했을 것이다.
한국의 제국 경험이 다른 식민지들과 구별되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세계시간대에서 그 경험은 ‘때늦은’ 것이었다. 1866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2세는 세계 전역에 가차없이 확장된 유럽식민주의에 주목하면서, “세계는 이미 거의 다 약탈되었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한국 합병은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 뒤에 이루어졌다. 그때쯤에는 반(反)식민주의 사상과 운동들이 특히 영국과 미국에 널리 퍼져 있었고,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이 민족자결을 요청하는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할 당시(1918년—옮긴이), 일본은 그들의 식민기획을 본격적으로 출범시키지도 못한 상태였다.
두번째 특징은 한국과 일본이 왜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같이 힘겹고 불편한 현대사를 공유하고 있는지 알려준다. 그것은 두 나라의 관계가 벨기에와 자이르, 혹은 뽀르뚜갈과 모잠비끄의 관계보다는 독일과 프랑스, 혹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와 훨씬 더 비슷하기 때문이다. 전지구적 식민주의는 흔히 이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곳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민족·인종·종교·부족의 경계들에 따라 이리저리 나누어진 수많은 지리적 단위들을 정리해서 새로운 국경선을 긋고 다양한 부족과 민족으로 결집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모두는 1910년 이전 수세기 동안 존재해왔다. 한국은 유럽 민족들보다 훨씬 이전에 민족적·언어적 통일성을 이루었고 오랫동안 공인된 국경선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중국에 상대적으로 인접한 까닭에, 한국인들은 늘 일본에 대해 잘하면 우월하고 못해도 동등하다고 느끼며 살았다.
그리하여 1910년 이후 일본인들은 새것을 만드는 대신 대체하는 데 주력했다. 한국의 양반 출신 선비-관리들을 일본인 지배 엘리트로 교체했으니, 그런 관리들은 대부분 흡수되거나 해체되었다. 이전의 중앙 중심 국가행정 대신에 식민지식 강압적 조정을 실시했으며, 유교 고전을 일본식 근대교육으로 바꾸었다. 또한 초보 단계의 한국자본과 전문기술 대신에 일본 자본과 기술을 구축하였으며, 한국의 인재를 일본의 인재로 대체했다. 종국에는 심지어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쓰게 했다.
한국인은 이러한 정책들에 대해 일본에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고, 일본이 새로운 것을 창출했다고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일본이 구체제, 한국의 주권과 독립, 초보적이지만 자생적인 근대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가적 자긍심을 송두리째 앗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일부 다른 식민지 민족들과 달리, 대다수 한국인들은 일본의 통치를 오로지 불법적이고 굴욕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나 공통된 중국문화권이라는 점에서, 더 중요하게는 19세기 후반까지의 발전수준 면에서 양국이 아주 가깝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본의 지배에 더더욱 치를 떨었고, 무엇보다 양국관계에 격렬한 감정이, 즉 한국인들에게 “역사의 우연들만 아니라면 우리가 잘나갈 텐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혐오/존중의 양가적 메커니즘이 생겨났다.
셋째, 한국 식민화가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는 점 외에도, 일본은 강대국, 특히 시어도어 로즈벨트(Theodore Roosevelt)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결정적인 지원을 받았다(1905년 로즈벨트와 일본이 태프트- 카쯔라 밀약을 체결하여 필리핀과 한국의 교환을 승인하고 식민지에서의 권리를 상호 인정한 것을 가리킨다—옮긴이). 일본은 영국과 미국이 일본 몫으로 주려고 한 제국을 얻었고, 1930년대 세계경제의 붕괴 이후에서야 다른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지역 권역(圈域)을 조직하고자 했다(그리고 심지어 그때조차도 일본의 시도는 미온적이었고, 그때조차도 그들의 발전계획은 “정통적으로 서구적인” 것이었다).1
일본 식민주의자들은 1905~1910년 사이에 이루어진 그들의 권력 장악에 대한 격렬한 저항 때문에 한국통치의 첫 십년간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밀어붙였다. 교사들까지 제복을 입고 긴 칼을 차고 다녔다. 총독부가 한국사회에 군림하면서 독단적이고 강제적인 통제권을 행사했다. 총독부와 관계를 맺은 세력은 오로지 잔존하는 상류계급과 식민지 벼락부자들뿐이었으며, 그 관계마저도 한국인들에게 국가기구의 중요한 역할을 맡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세력을 끌어들이거나 저지하기 위해 고안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중앙관료권력을 강화했고, 토지귀족들과의 오랜 균형과 긴장을 완전히 깨버렸다. 나아가 상명하복식 운영을 통해 최초로 군(郡) 단위 이하로 내려가 마을 안까지 효과적으로 파고들었는데, 어떤 면에서 해방 이후의 한국은 아직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이 여전히 지방자치권이 현저히 저조한 국가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앙행정관, 지방사무원, 지주 집안으로 이루어진 기존 군 차원의 축(軸)에 고도의 기동력을 갖춘 중앙통제형의 국가경찰력이 가세하였는데, 이들은 중앙의 지휘에 따르며 자체의 통신 및 수송 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다. 수십년간 검은 제복의 경찰이 치안을 담당했고, 논에서 시작해 중간상인, 창고, 수출항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쌀 생산라인의 방어벽에 병력을 배치하여 ‘수확물을 거둬들이는 일’을 도왔다.
1919년, 대중운동이 이집트와 아일랜드를 포함한 식민지·반(半)식민지 국가들을 휩쓸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이 특별한 것은 인도에서 간디의 전술을 앞질러 보여준 3·1운동의 비폭력정신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 약속에 고무되어 3월 1일 33인으로 구성된 지식인집단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고, 이에 촉발된 전국적인 대중시위가 수개월간 계속 이어졌다. 일본은 경찰과 헌병만으로 이 저항을 저지하지 못했고, 육군은 물론 해군까지 동원해야 했다. 3월에서 4월까지 최소한 50만명의 한국인들이 시위에 참가했고, 600군데 이상의 장소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가장 악명 높은 사건 중 하나는 일본 헌병들이 시위참가자들을 교회 안에 가두고 교회를 전소시킨 일이었다(일제가 1919년 4월 15일 3·1운동 참가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총살한 후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를 불태운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을 가리킨다—옮긴이). 나중에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의 희생자가 사망 553명, 체포·구금 1만 2천명 이상이라고 발표했지만, 한국의 민족주의 자료들은 사망자 총 7천5백명, 체포·구금된 사람 4만 5천명이라고 집계했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또다른 식민지인 대만과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 것도 흥미롭다. 관찰력이 예리한 어느 미국 여행자는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획기적인 5·4운동 이후에도 대만에는 일본 옷을 입은 사람들이 꽤 많지만, 한국에서는 “게타를 신고 키모노를 걸친 사람을 한명도 본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그는 한국에서 “독립문제”는 중차대한 사안인 반면, “대만에서 독립이란 설령 고려된다 하더라도 전혀 가망이 없고 심지어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2고 썼다. “대만에서는 장려하면 될 일이 한국에서는 강압해야만 이루어진다”3는 한 관리의 진술은 아마도 식민지 대만과 식민지 조선의 차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발언이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저항에 몰리고 윌슨과 레닌을 비롯한 대외적 비난에 맞닥뜨리자, 일본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엉뚱한 세기(世紀)에 식민지 개척에 나섰음을 문득 깨달았다. 오매불망 ‘근대적’이기를 바라던 그들은 자신들의 강압적인 지배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난받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19년 중반, 일제는 먼 장래에 있을 독립에 대비해 한국인들을 지도하겠다며 ‘문화통치’를 개시했다. 이 새 정책을 계기로 식민통치에 대한 ‘점진주의적’ 저항의 시기가 열렸고, 이 시기에 한국인들은 언론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규제가 완화된 것을 이용해 다양한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단체들을 일부는 공개적으로 일부는 비밀리에 조직했다. 이제 한국 신문들을 다시 사 볼 수 있게 되었고, 1920년대 초반에는 그외에도 다수의 한국어 출판물들이 간행되었다. 이광수(李光洙) 같은 작가는 자국어로 쓴 민족주의적 소설들로 유명해졌으며, 정인보(鄭寅普)와 최남선(崔南善) 같은 이들은 한국사 연구를 심화하여 단군신화와 한국의 역사적 ‘얼’을 탐구하였다.4
3·1운동에 대해서 미국 선교사들은 판단이 갈렸다. 그들은 모두 식민당국의 폭력에 질색하였으나, 급진주의자들과 선동가들이 그런 폭력을 도발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다. 대다수 선교사들은 1919년 이후 새로 시행된 ‘문화통치’에 갈채를 보냈고, 이 새 방침에 대한 일본 측 명분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1920년 5월, 허버트 웰치(Herbert Welch) 감리교 상주감독은 많은 한국인들이 여전히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고 있지만, “가장 지적이고 장기적 안목이 있는” 일부 한국인들은 “신속하게 독립할 가망은 없으며, 물리적 조건, 지식, 도덕성, 정부업무 처리능력 면에서 한국민을 성장시키기 위해 장기적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납득하고 있다”5고 기록했다.
이는 물론 일본총리 하라 케이(原敬)가 내세운 새 ‘문화통치’의 명분이었으니, 한국인들이 먼 훗날 독립할 수 있도록 “정당한 절차에 따라”(하라의 표현) 준비시킨다는 것이었다. 1919년, 식민지 행정관 니또베 이나조오(新渡戶稻造)는 그 주장의 근거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한국인들과 가장 가깝고 진실한 친구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 나는 그들이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수행하도록 훈련받을 수 있는 유능한 국민이며, 현재는 그에 대비해서 후견을 받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한국에서 하고 있는 일을 배우게 하자. 우리의 군국주의적 행정이 저지른 수많은 실수를 정당화하거나, 우리의 일부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아주 겸허하게, 그러나 일본이 극동의 융성이라는 원대한 책무를 떠맡은 간사(幹事)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생각하건대, 어린 한국은 아직 자치능력이 없다.6
기독교가 일본에 반대했다는 것은 사실인 동시에 신화이다. 1919년의 독립운동과 같은 폭압의 시대에 교회는 성역이었고, 많은 서양 선교사들은 사회적 약자와 평등주의적 충동을 북돋아주었다. 그러나 이승만(李承晩)을 비롯한 친미 정치가들이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이자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자라는 해방 이후의 이미지는 틀린 것이다.
이승만과 김규식(金奎植) 같은 이들이 배재학당 같은 기독교계 학교에 들어간 것은 기독교 신앙보다는 영어를 배워 정치적 입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영어를 중요시하지 않자 배재학당 등록인원은 감소했다. 1905년, 등록한 지 하루 이틀 만에 “학생 절반이 영어를 찾아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7
한국인들 가운데 진정으로 기독교 신앙에 끌린 이들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다. 세기의 전환기에 “서울의 버림받은 계층인 백정 3만명이 개종한 사건은 곧 ‘선교활동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색 중 하나’가 되었다.”8 한국사회의 위계적 계급구조로 인해 평민들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다는 평등주의적 이상에 이끌렸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분열이 한국을 1차대전 이후 세계사의 주류로 끌어들였으니, 그것은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분열, 윌슨과 레닌 사이의 분열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의 이상과 연계되는 장점이 있었던 반면,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는 데 관심이 없는 것이 불리한 점이었다. 게다가 한국 내에서 그들의 사회적 기반은 아주 보잘것없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볼셰비끼’ 사상을 옹호하는 자는 누구든 표적으로 삼고 감옥으로 보내버리는 일본 경찰의 활동이 불리한 점이었던 반면, 잠재적으로 거대한 대중적 기반과 조국을 위한 희생정신이 장점이었고, 그리하여 1920년대 말경에는 그들이 한국의 저항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국 공산주의에 관한 선구적인 학자인 서대숙(徐大肅)에 따르면, 좌익과 공산주의자들은
(…) 한국혁명의 주도권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빼앗아오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한국인들, 특히 학생, 청년단체, 노동자, 농민들 사이에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뿌리 깊이 심었다. 그들의 용기와, 때로는 뜻을 이뤄내겠다는 완강한 투지가 한국 지식인들과 작가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외세의 억압 앞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숨죽이며 지냈던 나이 든 한국인들에게 공산주의는 새로운 희망이자 마법의 손길 같았다. (…) 일반적인 한국인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은 어떨지 몰라도 공산주의자들의 희생은 민족주의자들이 이따금 행한 폭탄 투척보다 훨씬 강한 호소력이 있었다. 고문당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초췌한 모습, 모든 한국인들의 공동의 적을 향한 그들의 단호하고도 규율 잡힌 태도는 사람들에게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9
같은 이유로 1930년대는 이전 십년보다 훨씬 더 양극화되었다. 일본은 한국의 유명인사들에게 일본에 협력하도록 엄청난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한국인의 부일 협력의 비극은 3·1운동의 지도자 중 하나였으나 1938년 무렵 “야마또족(大和民族)”과 “〔일본〕 천황가의 영원한 만세일계(萬世一系, 일본 왕실의 혈통이 단 한번도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었다는 주장이다—옮긴이)”10를 찬양하는 연설 원 직위를 받은 윤치호(尹致昊), 그리고 발 빠르게 일본 대재벌에 자신들의 명운을 걸어 전쟁 특수를 챙긴 김성수(金性洙) 같은 실업계 지도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떳떳한 독립 한국의 자생적 지도자이자 중간계급 혁명의 선구자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부일협력(일본의 엄청난 압력이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그런 압력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때문에, 일본은 한국에서 근대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엘리트의 출현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3·1운동의 지속적인 영향 가운데 제대로 된 평가를 가장 못 받은 것이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일본의 지도자들은 기업체로 열려 있는 새 통로를 통해 온건한 한국 지도자들을 흡수하고 급진적인 지도자들을 고립시켜야겠다고 믿게 되었다. 새로 시행된 ‘문화통치’하에서 한국의 상업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 자료는 “한국인 기업가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다고 주장했지만, 1920년대 말까지도 한국인들은 아직 전체 납입자본의 약 3%만을 소유할 뿐이었다. 대다수 한국인 자본가들은 여전히 곡물이나 곡물 기반의 주류를 거래하는 상인, 도매상, 중개인이었고, 이들의 활동은 여러 신흥 항구에서 우후죽순처럼 퍼져나갔다.
문화통치가 한국의 산업에 가져온 가장 중요한 성과는 얼마 안 되어 한국 산업이 동북아시아 지역경제 전체에 대한 일본의 ‘행정지도(指導)’에서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한국은 식민의 중심부를 배후지 경제권들과 연결하는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오늘날까지 동북아시아에 영향을 미치는 일본 특유의 건축적 자본주의가 생긴 것은 바로 이 시점부터라 하겠다.11 스테판 타나까(Stefan Tanaka)는 일본이 토오요오시(東洋史, 일종의 자국민 중심주의로서의 동양사, 혹은 동아시아사) 담론을 통해 중국 본토에서 제국 정복에 나설 때, 한국과 만주는 종종 만선(滿鮮)으로 뭉뚱그려져서 일개 ‘지역들’에 불과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중일전쟁이 시작될 때까지는 이 개념이 주로 정치경제적 측면을 지녔다면, 이것은 곧 “초국적 거대 지역주의”로 탈바꿈한다. 가령 히라노 요시따로오(平野義太郎) 같은 학자들에게 토오요오(東洋)란 동아시아 국민국가들 너머로 확대될 수 있지만, “본국이 식민지와 맞서는 형국의” 제국주의와는 여전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2
일본은 식민지에 근대적 중공업을 건설한 극소수의 식민열강에 속한다. 한국과 만주에 제철, 화학, 수력발전 시설을 건설했고, 만주에는 한때 자동차공장도 세웠다. 새뮤얼 호(Samuel Ho)에 따르면, 식민지시대가 끝날 무렵 대만에는 “장차 산업화의 강력한 토대를 제공할 산업적 상부구조가 존재했고” 주요 산업으로는 수력발전, 금속(특히 알루미늄)공업, 화학공업, 그리고 발달된 수송체계 등이 있었다. 1941년경 대만에서 탄광을 포함한 공장의 고용인원은 18만 1천명에 달했다. 1930년대에 제조업은 연평균 약 8퍼센트씩 성장했다.13
한국에서 산업발전은 훨씬 규모가 컸는데, 그 이유는 대만에 비해 한국의 농업이 상대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더 확실한 것은 한국이 일본 및 중국 내륙지방 양쪽과 인접해 있기 때문이었다. 1940년에 이르면, 광부들을 제외하고 일본 본토와 만주의 공장과 탄광 노역을 위해 이주한 수십만의 한국인을 계산에 넣지 않고도 약 21만 3천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산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1929~41년 사이에 광업과 제조업의 순수가치(net value)는 266퍼센트 성장했다.14 1945년경 한국은 식민 중심부에 유리하도록 편향되긴 하지만 제3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에 속하는 산업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한국과 대만 양국은 준주변부의 특징들을 띠기 시작했다. 한국의 개발 주변부는 만주였는데, 한국은 그 지역으로 노동자·상인·군인을 보냈고, 일본인 권력자와 중국인 농민 사이의 중간 위치를 차지하는 관료도 파견했다. 한국산 쌀은 일본으로 실려 갔기 때문에, 고전적인 중심부-준주변부-주변부 관계에 따라서 한국 농민들의 식량을 대기 위해 만주에서 조(粟)가 수입되었다. 대만은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 및 남중국에 인접한 관계로 “이 지역들로부터 들여온 특정 원자재들을 가공해서 이곳들로 수출할 완제품을 생산하는 천혜의 장소”가 되었다.15
이 논리의 핵심은 1921년 총독부 산업위원회에서 드러나는데, 이 위원회는 막 태동한 한국 섬유산업에 대한 지원을 처음으로 요구하고, 한국기업에는 국내시장만 겨냥하지 말고 특히 한국 상품이 가격우위를 점하는 아시아대륙 수출용으로 생산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인들이 이 위원회의 일원이었고 한국 회사들에 대한 국가보조금과 온실 ‘보호’를 발 빠르게 요청한 것을 보면, 이 요구가 순전히 ‘상명하달’ 행위는 결코 아니었다. ‘점진주의’라는 일본의 새 정책이 조금이라도 의미를 가지려면 한국의 기업가 계급 부양이 필수적이었으니, 논쟁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위원회의 이 회의는 사실상 이 계급의 생일 축하파티였다(위원회가 열리기 사흘 전에 2개의 폭탄이 총독부 건물에 투척되었다).16 그러나 일본이 훨씬 더 큰 구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1921년의 회의 이전에 제출된 ‘일반 산업정책’을 위한 제언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한국〔조선〕은 제국영토의 일부이기 때문에 한국의 산업계획은 제국의 산업정책과 일치해야 한다. 그런 정책은 일본, 중국, 극동 러시아에 둘러싸인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의거하여 인접지역들의 경제적 조건들을 참작해야 한다.
한 일본대표는 한국의 산업이 토오꾜오에서 진행되는 전반적인 계획에 필수적으로 들어갈 것이며, “공존공영하는 단일한 한-일 통합체”17 내에서 한국이 자신의 적절한 위치를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한국산업은 일정한 보호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거의 묻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일본은 한국을 식민화해서 무엇을 얻었는가? 한세기 이상 지난 후 돌이켜볼 때, 그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는가? 110년이 지난 현재, 일본과 대한민국의 관계에는, 특히 ‘위안부’라 불리는 성노예들의 궁극적인 운명과 같은, 식민지시대가 남긴 문제들이 아직 산적해 있다. 하지만 식민지 투쟁을 지침으로 삼아서 1948년 반일국가로 형성된 한반도의 나머지 반쪽과는 일본이 2019년 현재까지도 아무런 공식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 나라가 지금 핵무기와 미사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일본의 어떤 식민주의자들이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바로 이렇게 식민주의는 전혀 예기치 못한 악몽을 낳는다.
분단되지 않은 자유국가인 일본에서 대다수 역사가들이 그들의 제국주의 역사를 정직하게 평가하기를 꺼린다는 사실은 제국주의 충동이 아직 죽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것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중국에서 일본이 벌인 행적에 관해서는 얼마간의 진지한 성찰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일본이 한국에서 저지른 행위들에 대한 성찰은 거의 전무하다. 20세기는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치고 전세계에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는 가운데 시작되었으며, 그 세기가 진행될수록 일본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재앙으로 이끌려갔다. 영국과 미국은 이십세기 전반부 태평양 지역의 강국이었고, 그들은 일본을 하나의 패권국이 아니라 하위 파트너로 받아들였다. 일본은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원만하게 살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남아 있는 우려를 아직 불식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우려가 일본의 가까운 이웃나라들에서보다 더 큰 곳은 없다. 일본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로스다.
번역: 강미숙(姜美淑)/인제대 교양학부 교수
—
- Akira Iriye, Power and Culture: The Japanese-American War, 1941-1945, Harvard University Press 1981, 3~4, 15, 20, 25~27면 참조. 이리에(Iriye)는 배타적인 동북아 지역패권을 장악하려는 일본의 계획이 193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 계획은 1939년에도 청사진이 없었고 1941년 중반까지도 체제 내의 핵심 강국들에 좌우되었다고 한다. ↩
- Harry A. Franck, Glimpses of Japan and Formosa, New York: Century 1924, 183~84면. ↩
- Ramon H. Myers and Mark R. Peattie, eds., The Japanese Colonial Empire, 1895-1945,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 42면. ↩
- 1919년 이후의 변화상에 대한 최상의 기록으로 Michael Robinson, Cultural Nationalism in Colonial Korea, 1920-25,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88 참조. ↩
- Alleyne Ireland, The New Korea, New York: E. P. Dutton 1926, 70면에서 재인용. ↩
- Stefan Tanaka, Japan’s Orient: Rendering Pasts into Histor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248면에서 재인용. ↩
- Gregory Henderson,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8, 207면. ↩
- 같은 곳. ↩
- Suh Dae-sook,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48,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7, 132면. ↩
- Carter J. Eckert, Offspring of Empire: The Koch’ang Kims and the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1, 231면. ↩
- Bruce Cumings,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the Northeast Asian Political Economy,” International Organization 38, 1984, 1~40면. ↩
- Stefan Tanaka, 앞의 책 247~57면. ↩
- Samuel P. Ho, The Economic Development of Taiwan, 1860-1970,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8, 70~90면; Lin Ching-yuan, Industrialization in Taiwan, 1946-7 : Trade and Import-Substitution Policies for Developing Countries, New York: Praeger 1973, 19~22면. ↩
- Edward S. Mason, The Economic and Social Moderniz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Harvard University East Asian Monographs 1981, 76, 78면. ↩
- Lin Ching-yuan, 앞의 책 19면. ↩
- Carter J. Eckert, 앞의 책 44, 82~84면. ↩
- Carter J. Eckert, 앞의 책 115, 128면에서 재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