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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기호 李起昊
1972년 강원 원주 출생.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김 박사는 누구인가?』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장편 『사과는 잘해요』 『차남들의 세계사』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등이 있음.
antigiho@hanmail.net
장편연재 1
싸이먼 그레이
1. 개요
싸이먼 그레이(Simon Gray, 1981.4.24~2017.12.23)는 아일랜드 골웨이 카운티 클리프덴 태생으로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대한민국 광주에 있는 광주외국어대학교 기초교양학부 소속 교수로 일했다. 2015년부터 한국어로 시와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으며, 2016년 6월 광주에서 발행하는 한 문예지에 짧은 산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2017년 10월 광주외국어대학교에서 직권면직 처분을 받았으며, 그해 12월 서해안고속도로 함평 나들목 부근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광주에 위치한 서안출판사에서 그의 유일한 한국어 저작인 『민물장어낚시』가 출간됐다.
2. 약력
· 1999년 아일랜드 클리프덴 커뮤니티 스쿨 졸업
· 2001년 아일랜드 골웨이 국립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 2007년 아일랜드 골웨이 국립대학교 영문학과 대학원 졸업(문학박사)1
· 2008년 아일랜드 골웨이 국립대학교 영문학과 강사2
· 2012년 대한민국 광주국제외국어학교3 전임교원
· 2014년 대한민국 광주외국어대학교 기초교양학부 조교수 4
· 2016년 광주 빛고을타임즈5 객원논설위원
3. 가족관계
· 할아버지 제임스 그레이(1931~90)/할머니 제럴딘 셰이스 그레이(1939~)6
· 아버지 패트릭 그레이(1962~)/어머니 에마 번(1961~)
4. 아일랜드에서의 삶
4-1. 출생
· 싸이먼 그레이의 부모인 패트릭 그레이(Patrick Gray)와 에마 번(Emma Byrne)에 대해선 별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그들이 같은 클리프덴7 출신이라는 것과 둘 다 스무살이 되기 이전 고향을 떠났다는 것, 그후 에마 번만 잠깐 다시 클리프덴으로 돌아와 살다가 8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모르게 더블린으로 떠났다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9 클리프덴에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패트릭 그레이의 친구 마이클 드바인(Michael Devine) 씨에 따르면 싸이먼 그레이의 아버지는 쾌활하고 농담을 좋아하며 정이 많은 소년이었다고 한다. 자신과 종종 쏠트호(Salt Lake)에 나가 홍치 낚시를 했으며, 관광객이 몰려오는 7월과 8월엔 인근 농장에서 빌려온 조랑말에 조잡한 마차를 연결해 스카이로드나 비치로드를 도는 아르바이트를 할 만큼 성실한 친구였다고 한다.10 하지만 마이클 드바인 씨 또한 열여덟살 이후 한번도 패트릭 그레이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11
· 에마 번은 친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클리프덴 사람 중 그 누구도 그녀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없는 상태. 코네마라 인근에 살던 에드워드 콜리 번(Edward Colley Byrne) 씨의 딸들 중 한명일 거라는 추측이 있지만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 여담이지만 에드워드 콜리 번 씨 집엔 딸이 여섯명 있었는데 하나같이 열여덟살이 되기 전에 가출했다고 전해진다.12
· 싸이먼 그레이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다소 냉소적인 평을 남기기도 했다.
—직물공장이나 작은 농장에서 염소를 돌보던 한 여자아이가 먼저 더블린으로 도망갔을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돈을 모아 런던이나 빈 혹은 빠리로 갈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열여덟살이었으니까, 세계는 이제 막 새로 산 운동화처럼 불편하고 딱딱하고 뒤꿈치가 아프지만 그래도 자꾸 뛰어보고 싶은, 낯설지만 가벼운 어떤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로 신은 운동화도 이틀이면 길이 드는 법. 더블린이라고 해서 클리프덴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13 어쩌면 더 오래된 신발처럼 느껴졌겠지. 아마도 그녀는 더블린 시티가 아닌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이스트월(East Wall)이나 아버힐(Arbour Hill)에 있는 빈민가 낡은 주택 다락방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난로는커녕 욕실도 없었을 것이고, 집시들과 공용 화장실을 함께 썼을지도 모른다. 바닥에선 계속 못이 헐거워지는 소리가 들리고 창틀에선 언제나 바람보다 먼저 공장 연기나 암모니아 냄새가 새어들었겠지. 더러운 매트리스와 다리가 짧은 나무의자 하나가 전부인 방. 그녀는 그곳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닥치는 대로 누군가의 가게를 청소해주거나 시간제로 어느 여자 교사의 갓난아이를 대신 돌봐주거나 그도 아니면 소매치기 조직 같은 곳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더러운 놈의 세상, 아마도 자주 혼잣말을 중얼거렸겠지. 클리프덴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더러운 놈의 세상, 그냥 퉤, 침을 한번 뱉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같은 또래들과 어울려 리피강(Liffey River) 주변에서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패트릭을 만났겠지.
“패트릭? 패트릭 그레이? 너 여기 왜 있는 거야? 낚시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그녀는 일부러 더 큰 목소리를 냈을 것이고,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그녀는 패트릭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았을 테니까, 패트릭 또한 자신의 처지를 금세 알아봤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테니까. 클리프덴에선 친하지도 않던 패트릭을 보고 그렇게 흥분할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녀는 그냥 부끄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나의 시작이었을 것이다.14
· 싸이먼 그레이의 할머니인 제럴딘 셰이스 그레이(Geraldine Shays Gray)는 자신의 손자에 대해서 ‘완벽한 아이’였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15
· 그해에 클리프덴에서 태어난 아이는 싸이먼 그레이 외에 아무도 없었다. 바로 전해인 1980년엔 두명이 태어났고, 1979년엔 세명이 출생신고를 마쳤다. 다섯명 모두 여자아이였다. 그 뒤 1982년부터 1984년 사이 클리프덴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싸이먼 그레이는 그것에 대해서 당시 아일랜드의 불안한 정국, 씬페인(Sinn Fein)당의 급부상과 그에 따른 잦은 테러, 영국과의 무역 불균형 심화와 실업률 증가, 지속적인 저성장 기조의 영향이라고 분석했지만, 하여간 꼭꼭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먹물 티를 내야 했니, 그보다는 그냥 그때 클리프덴에 젊은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 합당해 보인다. 참고로 1985년 클리프덴에선 두명의 아이가 한꺼번에 태어났는데, 바로 패트릭 그레이의 친구 마이클 드바인 씨가 그해 쌍둥이 아빠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드바인 씨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고 있다.
· 싸이먼 그레이의 할아버지인 제임스 그레이(James Gray)는 어린 시절 클리프덴 만 선착장에서 낚시를 하다가 바다에 뛰어든 적이 있다고 한다. 바다에 떨어진 낚싯대를 건질 마음으로 그랬는데, 그러다가 그만 선착장 콘크리트 중간에 삐죽 튀어나와 있던 철근에 왼쪽 발목을 찔리고 말았다. 바로 치료를 받았으면 나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클리프덴엔 변변한 병원도 의사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제임스 그레이 자신도 그의 부모도 그럴 의지가 없었다. 그의 나이 열한살 때의 일이다. 이후 그는 평생 왼쪽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절름발이 제임스’라고 불렀다.
·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로 인해 ‘절름발이 제임스’는 마을에서 제일 성실한 일꾼이 되었다고 한다. 멀쩡한 사람도 일자리가 없어서 그냥 집안의 골칫거리, 혹은 술꾼, 그도 아니면 자발적으로 미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처지였다.16 제임스 그레이는 어쩌다 한번 운 좋게 수산물 하역작업이나 염소농장 보수작업 일거리가 생기면 누구보다 일찍 나갔고, 가장 늦게까지 일터에 남아 있곤 했다. 남들 다 가는 펍(pub)에도 가지 않았고, 일이 없는 날엔 온종일 민물장어낚시에만 열중했다.17 그는 자신이 결혼해서 평범한 가정을 꾸린 것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이나 아일랜드나 그런 사람일수록 자식에게 더 꼰대 기질을 발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하늘의 이치인 듯. 그는 아들이나 손자에게나 가릴 것 없이 ‘내가 젊었을 땐 아침 식사라는 것은 구경도 못해봤다’ ‘사지도 멀쩡한 네가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니?’ 같은 말들을 버릇처럼 해댔다. ‘절름발이 제임스’는 싸이먼 그레이가 여섯살이 되던 해부터 민물장어낚시에 함께 데려가곤 했는데, 그에게 미끼로 쓸 미꾸라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그거라도 해서 밥벌이를 하라는 것이 제임스 그레이의 뜻이었다. 제임스 그레이는 평생 펍 근처엔 가지도 않았지만 1989년 가을 골웨이 국가건강검진센터에서 간암 진단을 받고 일년 남짓 투병생활을 하다가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참고로 싸이먼 그레이가 태어난 1981년은 바비 쌘즈18가 영국 마거릿 새처 내각에 저항하기 위해 교도소에서 66일간 단식투쟁 끝에 숨진 해이기도 하다. 마거릿 새처는 그가 죽은 후에도 눈 한번 깜빡 안 하고 ‘자살하는 건 그의 선택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사실이 싸이먼 그레이의 일생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그는 그 또래 아일랜드 친구들이 그렇듯 영국에 대해 별다른 악감정을 지니진 않았다. 그냥 옆 나라일 뿐. 다만 싸이먼 그레이는 후에 바비 쌘즈를 다룬 영화를 애인과 함께 보다가 ‘생의 의미’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봐, 네가 태어난 해에 어떤 사람은 스스로 굶어 죽었어.” 싸이먼 그레이는 바비 쌘즈보다 그 말을 하는 애인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88킬로그램이었다. 키는 174센티미터. 그는 처음엔 단순히 자신의 애인이 다이어트를 권한다고만 생각했다. 그 목소리에서 다른 의미를 찾기 시작한 것은 그후로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라고 한다.
4-2. 유년시절
· 클리프덴 성당의 라이언 존슨(Ryan Johnson) 신부에 따르면 어린 시절 싸이먼 그레이는 말이 늦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이였다고 한다. 여섯살 때까지 그가 할 수 있었던 말은 ‘미꾸라지’ ‘미끼’ ‘빵’ ‘아멘’ ‘하느님’ ‘예수님’ ‘성모마리아’ ‘할머니’ ‘할아버지’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것도 모두 게일어로.
· 싸이먼 그레이는 여섯살 때부터 클리프덴 공립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실질적으로 그에게 말과 글을 가르쳐준 사람은 라이언 존슨 신부라고, 라이언 존슨 신부는 주장한다. 라이언 존슨 신부는 일주일에 세번씩 성당에서 성경책을 펴놓고 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19
· 라이언 존슨 신부는 싸이먼 그레이의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도 했다.
—싸이먼은 어렸을 때부터 좀 이상한 아이였어요. 상상해보십시오. 이제 겨우 여섯살, 일곱살 된 아이가 하루 종일 민물장어낚시만 하고 있는 거예요. 민물장어하고 키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애가 말이죠. 어느날은 밤을 새우면서까지 낚싯대만 바라보고 있었다니까요. 제가 싸이먼의 할아버지인 ‘절름발이 제임스’에게 항의하기도 했어요. 그건 명백한 아동학대입니다! 싸이먼을 일주일에 세번씩 성당에 나오라고 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어요. 한데… 싸이먼이 영 제 뜻을 받아주지 않더군요. 그 아인 저와 두시간, 세시간씩 마주 앉아 있어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가만히 제 눈만 바라보고 있었죠. 무슨 낚싯대를 보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곤 겨우 한다는 소리가 ‘이제 낚시하러 가도 돼요?’ 뭐 그런 거였습니다. 제가 어린 싸이먼에게 묻기도 했죠. ‘너, 낚시가 그렇게 좋니? 그게 그렇게 재밌어?’ 그랬더니 싸이먼이 작은 목소리로 그러더군요. ‘민물장어는 낚싯대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대요.’ 제가 할 말이 없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 아이가 커서 무슨 위대한 낚시꾼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십시오? 문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다 여기 성당, 하느님의 집에서 저한테 처음 배운 영어 덕분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이 이미 다 예정해놓았던 것이죠.20
· 싸이먼 그레이가 살던 집엔 TV가 없었으며, 하다못해 라디오도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밤 9시만 되면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고, 새벽 4시에 일어났다고 한다. 싸이먼 그레이 또한 사춘기가 될 때까지 그러한 생활 패턴을 유지했다.
· 집의 구조는 전형적인 아일랜드 전통가옥과 비슷했는데, 벽은 회백색이었고, 삼각 모양의 지붕은 콘크리트 위에 벽돌을 붙인 형식이었다. 지붕 가운데 굴뚝이 하나 나 있었다. 집 안 구조는 좌우로 방이 하나씩 있었고, 중간에 거실과 부엌이 위치해 있었다. 거실과 부엌 중간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지하엔 말린 생선과 소금, 밀가루, 토탄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싸이먼 그레이는 세살 때까지 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잤으나, 이후 줄곧 혼자 방을 썼다. 쏠트호 쪽으로 난 창과 그 바로 아래 책상과 의자 하나, 옷장과 책장, 그리고 침대가 전부인 방이었다.
· 집을 나와 쏠트호를 등지고 100미터쯤 걸어가면 작은 추모비 하나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기근 추모비’(Famine Memorial). 1849년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클리프덴으로 식량을 구하러 왔다가 아무 소득 없이 발길을 돌린 인근 킹스타운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추모비라고 한다.21 추모비는 정사각형 모양의 대리석 위에 사람 머리 모양의 조각이 놓인 형상인데, 대리석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이웃이 수모를 겪고 있는데 스스로 영예롭게 느끼는 자 누구인가? 22
· 싸이먼 그레이는 걸음마를 뗐을 때부터 그 추모비 아래에서 놀았다고 한다. 그 추모비 아래 쌓여 있는 돌무더기 중 상당수는 자신이 주워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당연하게도 그가 최초로 외운 문장 역시 추모비에 적힌 바로 그 문장이었다.
· 싸이먼 그레이의 할머니는 바람 소리가 유리창을 넘어올 때마다 ‘봐라, 굶어 죽은 사람들이 우는 소리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게 여섯살 손자에게 할 소리인가? 그렇게 말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실제로 싸이먼 그레이는 어느 겨울밤 자신의 방 유리창을 통해 쏠트호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의 무리를 본 적이 있었다고 제니퍼23에게 보낸 이메일에 적은 바 있다. ‘환영인지 착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린 시절엔 늘 죽은 사람들 곁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고도 했다. 그것이 너무 무서워서 할머니에게 말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산 사람은 언젠가 죽고, 죽으면 죽은 사람들과 같이 지내는 법이란다. 무서워하지 마렴, 죽은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란다.’24 실제로 이런 할머니가 옆에 있다면 죽은 사람보다 훨씬 더 무서울 거 같다.
· 그런 할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싸이먼 그레이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함께 민물장어낚시를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장어는 겁이 많은 놈이야. 그래서 예민하지. 미끼도 한번에 물지 않고 톡톡 치면서 경계를 하다가 몇시간 만에 물어. 정신 차리고 똑바로 보고 있으렴. 장어낚시는 기다리는 게 전부야.’ 싸이먼 그레이는 자주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4-3. 학창시절
· 2015년 8월 3일부터 14일까지 아일랜드의 교육과정 중 전환학년제를 살피고 돌아온 전라남도 교육청 소속 연수단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한다.
—연수단이 찾은 아일랜드 서부 골웨이에 위치한 클리프덴 공립학교는 재학생이 모두 23명으로 교사는 교장까지 포함해 3명이 근무하는 소규모 학교이다. 이 학교는 우리의 중학교 3학년에 해당되는 시기에 전환학년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그 목표는 ‘활발한 신체적 발달을 위한 교육적 성숙, 경험을 통한 학습’이다. 일년 동안 학교에서의 일방적인 수업이 아닌 다양한 프로젝트 수행, 진로체험,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1993년부터 이 학교에 재직 중인 키어런 제퍼슨(Kieran Jefferson) 교사는 ‘학교의 특성상 별도의 코디네이터가 전환학년제를 관리하진 못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대신 교사들이 그 업무를 병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수단이 전환학년제 기간 동안 운영되는 진로체험에 대해 자세히 묻자 키어런 제퍼슨 교사는 ‘학생 스스로 한다’고 답변했다. 학생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준비하고, 경험한다는 것이다. 교사는 그런 학생을 지켜봐주고 기다려주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25
· 싸이먼 그레이가 다닌 클리프덴 공립학교는 지역 특성상 우리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이 모두 통합 운영되는 학교였다. 그래서 그는 입학한 이후 줄곧 같은 교사에게 영어를 배우고 역사를 배우고 지구과학을 배워야만 했다. 그러니까 선생 한명 잘못 만나면 그날로부터 학교생활 종치는 것이다. 다행히 싸이먼 그레이가 열두살 때부터 키어런 제퍼슨 선생이 클리프덴 공립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후 쭉 싸이먼 그레이의 말뚝 선생이었던 키어런 제퍼슨은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주일 미사에 제대로 나가지 않았고, 뉴질랜드 출신의 한 여자와 잠깐 동거를 하기도 했으며26 클리프덴에선 알아주는 음치였지만, 따르는 학생이 꽤 많았다.27
· 싸이먼 그레이는 같은 학년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해 위, 두해 위 학생들과 같은 수업을 들어야만 했고, 이는 그가 클리프덴 공립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28 그는 영어와 아일랜드어, 문학, 역사와 정치사회 과목에선 모두 A학점을 맞았지만 수학과 물리, 화학 과목은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29
· 1997년 클리프덴 공립학교의 영화 소모임에 참가하여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30
· 전환학기제 기간 동안엔 주로 쏠트호에 나가 민물장어낚시를 했고, 그런 그를 키어런 제퍼슨 선생님은 그저 가만히 ‘지켜봐주고 기다려주었다’고 한다. 가끔씩 낚시하는 그의 옆에 앉아 기네스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고도 전한다.
· 방과 후나 주말엔 민물장어낚시에 쓸 미끼를 준비하느라 나름대로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미끼로 주로 염장 고등어를 직접 만들어 썼는데, 그 과정이 복잡했다. 우선 싱싱한 고등어를 클리프덴 항구 앞 도매시장에서 구입한 후 적당한 크기로 토막 냈다. 토막 낸 고등어를 신문지 위에 올린 후 다시 소금을 수북이 덮는다. 그 위에 또다른 신문지 한장을 덮은 후 그대로 진흙 단지 안에 넣는다. 약 10일에서 15일 정도의 숙성 과정을 거친 후 기름기가 완전히 빠지면 그때서야 비로소 민물장어 미끼가 완성되는 것이다.31
· 그는 주로 초봄과 늦가을에 집중적으로 민물장어낚시를 나갔지만 하루에 한마리도 잡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한다. 운이 좋은 날엔 하룻밤에 세마리를 잡은 적도 있었고, 이틀 연속 1킬로그램 넘는 장어를 낚은 적도 있었지만, 두달 가까이 한마리도 잡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잡은 민물장어 중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간 것은 1998년 10월에 잡은 무게 1.7킬로그램짜리였다. 그는 잡은 민물장어를 수산물 도매업을 하는 머피 씨에게 팔았는데, 머피 씨는 그 장어를 다시 영국 런던의 빌링스게이트(Billingsgate) 수산시장 내 루크 씨에게 넘겼다. 싸이먼 그레이는 1.7킬로그램짜리 민물장어를 넘기고 머피 씨에게 200파운드를 받았다. 그 돈은 당시 그와 그의 할머니의 한달치 생활비와 거의 같았다고 한다.
· 싸이먼 그레이는 밤에 민물장어낚시를 하다가 지루해지면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자리에선 거의 대부분 멍 때리고 앉아 있었다고 실토했는데, 사실 낚시라는 게 거의 대부분 멍 때리고 앉아 있는 행위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낚시꾼도 멍, 물고기도 멍,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서로의 멍과 멍이 만나 깨어나는 것. 그러나 이런 의견은 물고기 비하, 낚시꾼 비하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공론화된 장소에선 거의 말해지지 않는다. 주로 윌리엄 트레버, 조너선 스위프트, 제임스 조이스, 그리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책이었다.
· 그는 특히 예이츠의 글을 많이 읽었는데, 그에 대해선 아래와 같이 길게 자신의 블로그32에 적어놓기도 했다.
—어린 시절엔 예이츠의 글을 많이 읽었다. 교과서에도 그의 시가 많이 실려 있으니까. 「행복한 목동의 노래」(The Song of the Happy Shepherd)나 「흰 새들」(The White Birds) 같은 시들. 하지만 처음엔 좀 유치했던 게 사실이었다. 키어런 선생님도 술만 마시면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사랑은 눈으로 든다/우리가 늙고 죽기 전에/알아야 할 진실은 이것뿐/나는 술잔을 입에 대고/그대를 바라보며 한숨 짓노라’ 같은 그의 시구절을 마치 무슨 화가의 그림 속 인물처럼 과장된 손짓을 하면서 웅얼거렸는데, 그 정도야 우리 동네 ‘스팀 펍’(Steam Pub)에 가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시였다. 특히 ‘리디(Lidi) 식료품점’에서 일하던 눌라 아주머니는 펍에서 노래를 부르다 말고 중간중간 아주 근사한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당신이 단단한 씨앗이라 할지라도/내 눈물이 당신의 싹을 틔우리/눈물은 눈물끼리/고랑은 고랑끼리/서로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우리/대지가 하늘을 원망하지 않듯/우리’. 눌라 아주머니가 예이츠에 비해 부족한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런데도 나는 예이츠의 글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었다. 키어런 선생님 집에는 그의 책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니까. 읽을 수 있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다. 「당신이 늙거든」(When You Are Old)이나 「몰래 데려간 아이」(The Stolen Child) 같은 시들은 역시나 그저 그랬지만, 「재림」(The Second Coming)이나 「검은 돼지 골짜기」(The Valley of the Black Pig) 같은 작품은 마음에 들었다. 시만 읽은 것은 아니었다. 키어런 선생님의 집에는 예이츠의 산문집이나 평론도 많았다. 나는 열여섯살 때부터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가 쓴 『갈대 사이에 부는 바람』(The Wind Among the Reeds)이나 『미수집 산문』(Uncollected Prose) 같은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것 말고 달리 할 것도 없었다. 민물장어가 좀더 자주 잡혔다면 사정이 달라졌을까? 사실 나는 지금도 그때 민물장어가 더 많이 잡혔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해볼 때가 많다. 하지만 그건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키어런 선생님 책인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밑줄까지 그으면서 예이츠의 책을 읽었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무드라는 것’ ‘사람의 마음에는 현재와 과거의 기억을 즉각적으로 연결해주는 대기억(Great Memory)이라는 게 존재한다’ 같은 문장들. 그런 문장과 단락들은 묘하게 내 마음을 흔들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죽은 것들, 영혼에 대한 것들. 그것들이 내 주위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매일 보는 클리프덴의 풍경과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 친구라곤 한명도 없었던 시간들, 그런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진 것이다. 역설적으로 내가 외로운 사람이었음을 처음 알게 해준 것 역시 예이츠였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반복해서 예이츠 책을 읽고 또 읽던 어느날, 키어런 선생님이 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야? 낚시꾼이 된다더니 문학을 하려는 거야?”
나는 선생님께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두 눈만 끔뻑거리면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제야 내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먼 곳까지 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33
· 싸이먼 그레이는 1998년 7월부터 1999년 3월까지 『클리프덴저널』(Clifden Journal)에 시와 에세이를 기고하기도 했다. 주로 클리프덴에 위치한 호수와 만, 그곳에서 잡히는 물고기, 그리고 자신의 할머니에 대해서 쓴 글이었다.34
· 할머니였던 제럴딘 셰이스 그레이와는 모자관계 이상으로 돈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더블린이 아닌 클리프덴과 가까운 골웨이 카운티에 위치한 대학으로 진학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다른 무엇보다 할머니와의 관계가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의 할머니에게 더블린이란 도시는 누구든 떠나면 되돌아오지 못하는 도시였을 테니까.
· 싸이먼 그레이는 자신의 할머니에 대한 글을 여러차례 쓰기도 했다.
—내가 살던 아일랜드 클리프덴에선 호수 주변 축축한 땅을 조금만 파 내려가도 검은 토탄(土炭)이 나오곤 했다. 진흙처럼 말랑말랑하고 찰기가 있지만, 사실 그것은 수천년 전부터 땅속에서 썩어들어간 나무뿌리와 동물 사체의 흔적이었다. 그걸 캐내 벽돌 모양으로 이겨 햇빛에 말리는 것이 어린 시절 내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겨울이 긴 클리프덴에서 토탄 없이 지낸다는 건 연인이 사라진 방에서 혼자 계절을 나는 것처럼 위험하고 살이 쓰린 일이었으니까. 나는 광주에 살고 있는 지금도 가끔씩 술을 마신 날이나 밤늦도록 비가 내리는 날, 내 몸 어느 구석엔가 배어 있는 토탄 냄새를 맡을 때가 많은데, 그러면 좀 쓸쓸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낡은 나무궤짝 같은 곳에 오랫동안 담겨 있던 흙냄새 같기도 하고, 생솔가지를 그대로 태운 것처럼 매캐한 냄새가 나기도 하는 토탄 타는 냄새. 그 냄새가 계속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할머니는 그 토탄 불길 위에 석쇠를 올리고 빵을 구웠다. 통밀과 호밀을 섞고 이스트는 넣지 않은 빵. 할머니의 빵은 거칠고 텁텁해서 오랫동안 씹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한참 동안 오물거리다보면 입안에 토탄 특유의 향이 퍼지곤 했다. 할머니는 그 빵들을 대부분 리디 식료품점에 돈을 받고 넘겼다. 관광객이 몰려오는 여름엔 스카이로드 전망대에 직접 좌판을 깔고 팔기도 했다. 관광객들은 할머니의 빵을 한번 맛보고 나면 다신 사먹지 않았지만, 클리프덴 사람들에겐 인기가 좋았다. 술을 마신 다음 날 할머니의 빵을 사먹어야 그나마 정신이 돌아온다는 어른들이 많았다(키어런 선생님도 그중 한명이었다). 할머니는 빵을 구울 땐 난로 앞 의자에 앉아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난로 불길이 일렁일 때마다 할머니의 등이 커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 옆에 앉아 종종 말을 걸기도 했다.
“어제 스팀 펍 앞에서 존슨 신부님을 만났어요.”
“신부님이 또 취했던?”
“네. 저를 또 계속 안고 놓아주지 않았어요. 볼에 키스도 했고요.”
“놔둬라. 그도 이제 예순이야.”
“머피 아저씨는 존슨 신부님이 저러다가 큰 사고 한번 칠 거 같다고, 불안불안하대요.”
“불안해할 것 없어. 여긴 클리프덴이잖니. 사고 쳐봤자 기껏해야 혼자 살고 혼자 죽는 일뿐이야.”
“키어런 선생님이 대학 입학 추천서를 써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건 정말 기도가 필요한 일이구나. 나도 기도하마.”
“더블린 쪽은 좀 어렵고 골웨이에 있는 대학을 알아보기로 했어요. 잘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아서요…”
“키어런 선생님이 알아서 잘해주시겠지.”
“서운하지 않으세요?”
“뭐가 말이니?”
“대학을 가면 아무래도 할머니하고 떨어져서 지내야 하는데…”
“바보 같은 소리 마렴. 우린 지금까지 각자 살아온 거잖니? 사정상 한집에서 같이 지냈을 뿐이야. 네가 이룬 건 다 네가 혼자 해낸 거잖니?”
“머피 아저씨는 자기랑 같이 일하자고 했어요. 대학에 가느니 여기서 일하는 게 훨씬 더 나을 거라구요. 몇년 일하고 나서 자기 가게 인수하라는 말도 했어요. 책 읽고 글 쓰는 걸 왜 굳이 대학 가서 해야 하냐고…”
“머피가 너를 많이 아끼나보구나.”
“아무래도 서로 오랫동안 봐왔으니까요.”
“싸이먼.”
“네, 할머니.”
“공부하는 건 어떠니? 키어런 선생님이 널 많이 아껴서 하고 있는 거니?”
“아니요. 그건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래, 그럼. 널 아끼는 사람 옆에 있지 마렴.”
나는 말없이 할머니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보면 사랑받는 게 뭔지 수치스러운 게 뭔지 영영 알 수 없게 된단다.”
할머니는 계속 석쇠 위 빵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나는 그때 할머니가 나로 인해 수치스러운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고, 처음 생각해보게 되었다.35
· 1999년 싸이먼 그레이는 골웨이 국립대학교 예술사회과학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장학금은 못 받게 됐다.
4-4. 대학 시절
· 대학 입학 첫 학기 싸이먼 그레이는 전공과목으로 ‘문학과 사회 I’과 ‘문학개론 I’ ‘창조적 글쓰기 I’을 수강했다. 강의는 모두 열다섯명 안팎의 소그룹 모듈로 구성되었으며, 앤더슨 강의 극장 내 ‘AC002’ 강의실에서 진행되었다.
· 거처는 학교 정문에서 도보로 십오분 정도 걸리는 코리브 빌리지(Corrib Village)였다. 그곳은 골웨이 국립대학교가 직접 운영하는 외부 기숙사이기도 했는데, 싸이먼 그레이는 영문과 입학 동기이자 리머릭 출신인 대니얼 놀란(Daniel Nolan)과 같은 방을 썼다.
· 대니얼 놀란36이 기억하는 대학 시절 싸이먼 그레이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대학 첫 학기 ‘문학과 사회’ 시간이었을 거예요. 로버트 에이크먼(Robert Aickman) 교수가 맡아서 진행했는데, 그분이 참… 대단한 엘리트주의자였거든요. 옥스퍼드 출신에다가 줄리언 반스하고도 나름 친분이 있고, ‘아이리시 북 어워드’(Irish Book Awards) 운영위원이기도 했으니까, 뭐 그럴 만도 했죠. 늘 자신이 골웨이 같은 시골에 처박혀 있는 것을 분개하고 스스로를 경멸했어요. 계속 런던에 있는 대학으로 이력서를 넣고… 아시죠? 그런 분일수록 과제가 어마어마하다는 거? 권위를 세우는 이상한 방식이죠. 자연스럽게 학생들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더 예민하게 부각하는 거예요. 왜 그런 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좀 있잖아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에이크먼 교수가 우리 모듈에 준 첫 과제가 ‘버지니아 울프’와 ‘캐서린 맨스필드’의 소설 속에 나오는 ‘파티’의 의미를 분석해오라는 거였어요. 그것도 이주 만에. 그냥 단순히 ‘파티’의 상징성에 대해서만 공부해오라는 게 아니고, 버지니아 울프와 캐서린 맨스필드 사이의 관계, 편지나 일기, 비평문 같은 걸 다 읽고 두 작가의 작품세계를 비교 고찰해오라는 거였죠. 왜 그 두 사람 관계가 좀 그랬잖아요? 그걸 대학교 신입생들에게 과제라고 내준 건데… 말이 안 되는 거죠. 저도 그때까지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밖에 못 읽어본 상태였고, 캐서린 맨스필드는 그냥 그런 작가가 있었다는 것만 아는 상태였거든요. 다 옛날 작가들이고, 다른 거 읽을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은데…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고요. 한데, 웃겼던 게 뭐냐면, 그걸 또 해갔다는 거예요. 같은 모듈 친구들이, 이건 뭐 마치 3부 리그에서 이제 막 2부 리그로 올라간 축구선수들처럼 의욕에 넘쳐서 몇명은 도서관에서 논문자료 다 복사해오고, 또 몇명은 야후 사이트 뒤져서 최신 자료 뽑아내고, 그렇게 분업하고 사흘 밤인가 새워서 패널 토론하고 주 발표자 시나리오까지 다 만들었는데… 문제는 싸이먼이었어요… 싸이먼은 처음부터 그 준비과정에 아예 참여를 못했거든요. 그는 매일 일을 했어요. 일주일에 사흘은 페어힐로드(Fairhill Road)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야간 데스크와 청소 일을 했고, 또 저쪽 웨스트사이드 스포츠 단지 앞에 있는 주유소였던가, 거기에서도 오전 시간 내내 일하곤 했어요. 코리브 빌리지에서 지내는 내내 그랬어요. 늘 밤늦게 들어왔고, 제가 깨어나보면 자리에 없었죠. 사정을 들어보니까 장학금 문제가 좀 있었더라구요. 그걸 믿고 있었는데, 시작부터 어긋나는 바람에 빚도 졌고 생활비나 기숙사비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그러더라구요. 잘은 모르지만 입학 동기 중에 그 정도 수준으로 곤란했던 건 아마 싸이먼 한명뿐이었을 거예요. 골웨이 시내에서 부모님과 같이 사는 친구들이 많았고, 또 저처럼 다른 지방에서 온 친구들은 대부분 부모님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거든요. 학기 초에 마음이 들떠서 동기들과 애그린톤 운하 근처로 피크닉도 가고 맥주도 마시고, 부모님이 여행 간 집을 찾아다니며 파티도 하고 정신없이 어울렸는데… 싸이먼만 거기에 제대로 끼지 못한 거죠. 그렇다고 일부러 싸이먼을 따돌리고 무시하고 그런 건 없었어요. 오히려 더 챙겨주려고 애썼죠. 에이크먼 교수 과제만 하더라도 제가 자료 복사한 거나 요약본 만든 거나 다 싸이먼 책상에 올려놓아주었거든요. 우리 때까지만 하더라도 친구들끼리 분명 그런 게 있었죠. 한데… 싸이먼이… 그 친구가 참 웃긴 게 뭐냐면… 그런 걸 일절 안 봤어요. 뭐랄까, 정말 자기 공부를 하는 사람 같았어요. 싸이먼도 버지니아 울프나 캐서린 맨스필드의 책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 같았는데, 그러면 당장 눈앞에 떨어진 돌부터 치워야 하잖아요? 하지만 그 친구는 그러지 않았어요. 도서관에서 버지니아 울프 일기부터 빌려와서 읽기 시작하더라구요. 그게 제가 지금도 기억하는데 분량이 꽤 되거든요. 몇십년 동안 쓴 일기니까요. 내용도 뭐, 사실 쓸데없는 것도 많았어요. 나, 우울증이다, 그래도 나는 쓴다, 쓸 때만 살아 있는 느낌이다, 대충 그런 내용인데… 그런 건 당장 우리에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캐서린 맨스필드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만 읽어도 되는데, 싸이먼은 그런 게 없었어요. 그냥 처음부터, 그것도 아주 느린 속도로 읽어나가기 시작한 거죠. 시간도 가장 없는 친구가… 당연히 다 못 읽었죠. 그냥 그 상태로 강의에 들어간 거예요. 그리고 에이크먼 교수의 질문에도 사실대로, 이제 막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를 읽고 있다고 말했다가… 에이크먼 교수에게 한 소리 듣고 만 거죠.
“자네 같은 학생과 지금 이 강의실에 있는 내가 한심하군, 내가 한심해.”37
· 후에 싸이먼 그레이는 빛고을타임즈에 쓴 칼럼을 통해 버지니아 울프와 캐서린 맨스필드에 대해서 짧게 자신의 생각을 언급한 바 있다.
—버지니아 울프와 캐서린 맨스필드, 위대한 두 작가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대학 신입생 때 그 문제 때문에 오랜 시간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 버지니아 울프는 캐서린 맨스필드가 「천상의 행복」(Bliss)을 발표했을 때 ‘그녀도 이젠 끝났군!’ 하면서 악담을 퍼부은 바 있다. ‘피상적 재치만’ 보이고 ‘정신이 불완전한 증거’라는 말까지 했다.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를 읽다가 바로 그 대목에서 멈춰 섰는데, 도무지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캐서린 맨스필드는 다른 무엇보다 「천상의 행복」을 쓴 작가였다. 그 이유 때문에 나는 다시 버지니아 울프와 캐서린 맨스필드의 책을 하나하나 찾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또 더딘 작업이었다. 예이츠를 다루지 않는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속으론 그런 목소리도 계속 들려왔다. 내가 두 작가의 책을 다 읽어낸 건 학기가 모두 끝나고 짧은 방학이 돌아왔을 때였다. 그리고 결론은?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 작가 사이의 태생이나 계급, 욕망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저 도식을 위한 도식일 뿐. 내가 느낀 건, 그건 ‘그때’의 버지니아 울프의 감각이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한 학기의 거의 모든 시간을 그 두 작가를 위해 바쳤다. 그리고 그 댓가로 겨우 낙제를 면할 수준의 성적을 받고 말았다. 허무했냐고? 물론이다. 하지만 그게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번에 대학에 입학한 한국의 신입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민물장어는 낚싯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학문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38
· 로버트 에이크먼 교수는 현재까지도 골웨이 국립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39
· 제니퍼 매클라렌(Jennifer McLaren)은 싸이먼 그레이의 한 학년 위 선배로서 ‘창조적 글쓰기 I’ 강의를 함께 들은 사이이다. 그녀는 본래 더블린에서 태어났으나 회계법인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빠리와 바르셀로나에서 보냈고, 대학은 자신의 의지대로 아일랜드에 위치한 학교로 진학했다. 그녀는 아버지와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고 했는데, 그 자세한 내막은 싸이먼 그레이 또한 듣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 등록금은 아버지에게 정식 차용증을 쓰고 빌린 상태이지만 나머지 생활비는 모두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처지라고 했다. 그녀는 골웨이 국립대학교 공공정책 대학 학장부속실에서 행정보조로 일했으며, 주말엔 제임스 미첼 지질박물관 매표창구에서 일했다.
· 제니퍼 매클라렌과 싸이먼 그레이가 서로 깊어진 가까워진 친해진 돈독해진 알게 된 계기는 ‘창조적 글쓰기 I’ 시간에 싸이먼 그레이가 발표한 시 때문이었다. ‘창조적 글쓰기 I’의 담당 교수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40였는데, 그는 평론가이자 『아이리시문학매거진』(Irish Literature Magazine) 편집위원이기도 했다. 또한 후에 설립되는 ‘존 맥가헌 스쿨’의 책임 소장직을 맡게 되는 사람이다. 그는 ‘창조적 글쓰기 I’ 강의의 첫 과제로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글’을 써오라고 했다. 싸이먼 그레이는 예전에 『클리프덴저널』에 발표했던 시를 제출했다.41
· 싸이먼 그레이의 시에 대해선 전반적으로 혹평이 이어졌으나42 제니퍼 매클라렌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43
· 싸이먼 그레이가 제니퍼 매클라렌에게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그해 11월부터였다.44 룸메이트였던 대니얼 놀란은 싸이먼 그레이와 제니퍼 매클라렌의 관계에 대해서 묻자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싸이먼과 제니퍼요? 에이, 어디요? 둘이 아예 차원이 다른데…”
· 싸이먼 그레이의 사후 그의 노트북을 비롯한 얼마 되지 않은 유품을 정리했던 소설가 이기호45에 따르면 1999년 11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싸이먼 그레이가 제니퍼 매클라렌에게 보낸 이메일은 총 283통에 이른다고 한다.46 그에 반해 제니퍼 매클라렌의 답장은 꼴랑 4통이 전부였다고 한다.
· 제니퍼 매클라렌이 보낸 마지막 이메일은 다음과 같이 짧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싸이먼, 네 이메일 잘 읽었어. 한데, 난 같이 낚시하러 가진 못할 거 같아. 민물장어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친다. 어떻게 그걸 잡고 먹을 수 있지. 그것도 일종의 뱀 아닌가? 하지만 그게 너에게 도움이 된다면 행운을 빌어줄게. 많이 잡기를! 47
· 싸이먼 그레이는 방학이나 연휴가 이어지면 클리프덴에 내려가곤 했는데, 길면 나흘, 보통의 경우 사흘 정도 머물다가 다시 골웨이로 돌아왔다. 그는 머피 씨도 만나고48 키어런 선생님도 만났지만, 그중 하루는 꼭 쏠트호에 나가 민물장어낚시를 했다고 한다.
· 그의 할머니는 싸이먼이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늘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클리프덴에만 오면 나는 잠이 쏟아졌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이고 또 한편 마치 치매 환자처럼 서사적 자아를 내려놓는 일이기도 했다. 토탄 냄새 때문일까?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 벽난로 앞에 할머니와 함께 앉아 있기도 했다.
“싸이먼, 힘들진 않니?”
“괜찮아요. 사람들도 다 잘해주고요.”
“그래.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도 된단다.”
“네, 알고 있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란다.”
“네.”
“네 방과 네 낚싯대는 언제나 여기 있단다.”
“네…”
“네 할머니도.”49
· 싸이먼 그레이는 2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윌리엄 캐리 교수의 호출을 받게 된다. 싸이먼 그레이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윌리엄 캐리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윌리엄 캐리 교수는 그때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싸이먼 그레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책상 서랍에서 지난 학기 기말 에세이로 제출한 원고를 꺼내 들었다고 한다. 그는 계속 수화기를 든 채 입 모양만으로 싸이먼 그레이에게 말했다고 한다.
“뭐지?”
싸이먼 그레이는 멀거니 윌리엄 캐리 교수와 자신의 원고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원고에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윌리엄 캐리 교수는 계속 통화를 하다가 한 손으로 수화기를 막고 또 한번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고 한다.
“왜 갑자기 산문 실력이 이렇게 는 거야?”
윌리엄 캐리 교수는 싸이먼 그레이의 원고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들기면서 말했다고 한다. 그 앞에서 싸이먼 그레이는 예전 키어런 선생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두 눈을 끔벅거리면서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고 한다.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50
· 싸이먼 그레이는 대학 생활 내내 비니를 쓰고 다녔다고 한다. 계절에 따라 비니의 색깔만 회색에서 감청색으로 바뀌었을 뿐, 늘 한결같았다고 한다. 얼굴이 좀 작았으면 어울렸을 법도 한데, 그건 또 아니었다고 한다. 대니얼 놀란에 따르면 싸이먼 그레이는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먼 곳에서 보면 그냥 달걀 하나가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멀리.
· 싸이먼 그레이는 3학년 2학기가 시작될 무렵, 최종적으로 대학원 ‘작문’ 석사과정에 진학할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 그의 박사논문 제목은 ‘존 맥가헌 소설에 나타난 상징성 연구’(Simon Gray, “A Study on the Symbolism in John McGahern’s fiction,” Galway: NUI Galway Press 2007)이다. 그는 자신의 한국행에 영향을 준 것 중 하나가 존 맥가헌의 소설 「코리아」(Korea)라고 밝힌 바 있다.
원래 먹물들은 한국이나 아일랜드나 말버릇처럼 그런 이유를 댄다. 하지만 싸이먼 그레이 자신이 수차례 밝혔듯 한국까지 오게 된 데에는 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에 대해선 ‘싸이먼 그레이/아일랜드에서의 삶’ ‘싸이먼 그레이/관련인물’ 문서 참조. ↩ - 그가 골웨이 국립대학교에서 강의했던 과목은 ‘창조적 글쓰기’(Creative Writing), ‘20세기 아일랜드 소설 연구’(Study of Twentieth-Century Irish Fiction) 등이었다. ↩
- 광주에 거주하는 외국인 자녀와 국외에서 일정 기간의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한 한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2010년에 설립한 각종학교. 개교 당시부터 교육부에서 정식 학력인정 학교로 허가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학교 졸업생들이 한국 대학에 진학하려면 따로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2012년 이 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인 에드워드 킴(한국명 김봉규)은 14명의 학부모로부터 고소를 당하는데, 입학 당시 학교 설명회에서 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데에 따른 정신적·물적 손해를 보상하라는 이유였다. 학부모들의 주장에 따르면 에드워드 킴은 학생들의 졸업 이전에 송도나 제주의 국제학교처럼 ‘국어/국사’ 교과목을 개설하여 학력인정 허가를 받겠다고
교육부 관리들을 이미 다 구워삶아놓았다고호언장담했지만, 첫 입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에드워드 킴의 말만 믿고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1회 졸업생 42명은 졸지에 전원 중졸이 되었다. 에드워드 킴은 법정에서 ‘학력인정 허가 확정이 아닌 노력’하겠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진술, 1심에서 사기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법정구속되었다. 그 뒤 2대 이사장이 된 에드워드 킴의 아들 루크 킴(한국명 김철기) 역시 한국 학부모들로부터 자식들의 외국 국적 취득을 도와준다는 취지로 진행비 1억 2천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경찰 조사 중 도피, 현재 수배 상태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 외국 국적을 취득한 8살, 9살 아이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도미니까공화국 국적을 갖게 되었는데, 그래서 느닷없이 ‘호세 레예스’ ‘론 모엘리스’ ‘브라옐린 마르띠네스’ 등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광주국제외국어학교는 2019년 현재도 운영 중인데 전체 재학생 수는 총 9명이다. ↩ - 광주외국어대학교에서 그가 강의했던 과목은 ‘영어회화 I’ ‘영어회화 II’ ‘실용영어’ 등이며, 후에 광주외국어대학교 부설 언어교육원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ESL과 TOEIC Speaking 강의도 담당했다. ↩
- 2015년부터 광주 전남권을 대상으로 발행된 타블로이드판 주간지. 이름만 ‘타임즈’이지 그냥 생활정보지. 총 56면 규모로 발행되었는데, 1면부터 4면까지는 광주 전남권 뉴스와 부동산 동향, 기자수첩, 객원칼럼 등이 실렸고, 나머지는 모두 부동산 줄광고와 구인구직란, 중고차 매매, 택지분양 광고였다. 광주 전남 지역 생활정보지의
흑마왕선두 사랑방신문의 아성에 도전했으나, 경영진의 잦은 분쟁과 그에 따른 소송, 광고 감소 등의 여파로 2018년 2월 최종 부도처리되었다. 부도 당시 구성원은 대표이사 1명, 경영이사 1명, 제작이사 1명, 편집이사 1명, 총무이사 1명, 홍보이사 1명, 편집국장 1명, 광고국장 1명, 기자 1명, 경리 1명 등이었으며, 광고국에 계약직 텔레마케터 사원 7명이 있었다고 한다. 2017년 제작이사 한모씨가 배포도 되지 않은 신문 2천부를 곧바로 폐지업체에 넘기다가 대표이사에게 발각, 횡령혐의로 고발당했다. 광고국장 배모씨는 오피스텔 분양 대행업체에게 뒷돈을 받은 일로 경영이사 김모씨와 주먹다짐, 쌍방폭행 혐의로 입건되었다. 경리를 맡았던 송모씨에 따르면 ‘이사놈들이 하도 사고를 많이 쳐서 나중엔 그거 보는 재미로 출근했다’고 전해진다. 후에 싸이먼 그레이의 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린 것이 바로 이 신문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에 대해선 ‘싸이먼 그레이/사건’ 문서 참조. 싸이먼 그레이는 매달 한번씩 원고지 15매 분량의 칼럼을 쓰고 5만원을 받았다. 정확히는 세금 떼고 47,800원. ↩ - 싸이먼 그레이의 실질적인 양육자. 본래 코크 카운티가 고향이나 1947년 부친이 친구를 따라 조랑말 농장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클리프덴으로 이주, 제임스 그레이와 함께 산 이래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딸들과는 연락이 끊겼다. 평생 학교 근처를 가지 않았으며 영어가 아닌 게일어를 사용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싸이먼 그레이/아일랜드에서의 삶’ 문서 참조. ↩
- 클리프덴(Clifden)은 행정구역 단위상 대한민국의 ‘면’이나 ‘리’에 가깝다. 한때 거주 인구가 800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인근 농장과 농가까지 다 포함하여 3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젊은
애새끼친구들이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인근 골웨이나 더블린, 런던으로 가출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 클리프덴 시내를 다 돌아보는 데는 십오분도 걸리지 않는다. 물론 걸어서. ↩ - 이때 에마 번이 싸이먼 그레이를 출산했다고 전해진다. 에마 번의 나이는 열아홉살, 아버지인 패트릭 그레이의 나이는 열여덟살이었다. 에마 번은 채 한살이 되지 않은 싸이먼 그레이를 할머니인 제럴딘 셰이스 그레이에게 떠넘기듯 맡기고 다시 더블린행 첫 버스를 탔다고 한다. 싸이먼 그레이의 할머니는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벽난로 위에 남겨진 에마 번의 편지를 발견했는데, 거기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아이 아빠 잡으러 잠깐 더블린에 다녀올게요!’ 그 잠깐이 영영 마지막이 되었다고 한다. ↩
- 이에 대해선 광주외국어대학교 영문과 최영근 교수 개인 블로그(blog.naver.com/hamletchoi) 참조. 최영근은 2018년 7월부터 8월까지 아일랜드 골웨이 카운티와 클리프덴, 더블린을 방문하고 돌아와 자신의 블로그에 ‘싸이먼 그레이/어느 이방인의 죽음’을 2018년 11월부터 수기와 인터뷰 형식으로 연재하기 시작했다. ↩
- 하지만 마이클 드바인 씨는 아일랜드 위스키가 몇잔 들어가자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패트릭하고 열네살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우리 집 창고에서 훔쳐온 술을 쏠트호에 가지고 나가 마시곤 했지. 패트릭은 평소엔 과묵했는데 술만 마시면 말이 많아졌어요. 농담도 많이 했고요. 그가 했던 말 중에 아직도 기억하는 게 있어요. 패트릭이 그랬죠. ‘너 아일랜드 남자들이 왜 한심한지 아니? 그건 바로 아일랜드 엄마를 두었기 때문이야. 아일랜드 엄마들은 자기 아들이 다 예수라고 믿고 있거든.’ 아, 그리고 이건… 우리 동네에서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패트릭이 그때 더블린으로 가출한 건 사고를 쳤기 때문이었어요. 벨파스트에서 온 부부 관광객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 카메라를 패트릭이… 그걸 배낭에 넣고 날 찾아왔더라구요. 급하게 떠난다고, 자기 대신 조랑말을 맥마흔 씨 농장으로 돌려보내달라고… 그 친구가 그렇게 정이 많았어요.”(최영근, 앞의 블로그 참조) ↩
- 마이클 드바인 씨와는 다르게 싸이먼 그레이는 1994년 가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패트릭 그레이를 클리프덴에서 만났다고 한다. “한번은 학교가 끝나고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낚시를 갔는데, 거기에 웬 낯선 남자가 자리를 잡고 앉아 홍치를 낚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와 커다란 가문비나무 한그루를 사이에 둔 채 나란히 앉았다. 그곳이 내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자주 눈이 마주쳤는데, 그제야 나는 그가 패트릭 그레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그와 매일 만났으니까. 내가 사는 집 작은 거실 한쪽 벽면은 온통 그의 사진액자가 붙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를 모르는 척했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게 뭐란 말인가? 그는 나에게 모르는 사람이 맞았다. (…) 삼십분쯤 지났을까? 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꼬마야, 너 혹시 이 동네에 사는 패디 할머니라고 알고 있니?’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작게 끄덕거렸다. 동네 사람들은 곧잘 할머니의 별명을 부르곤 했다. 그는 재킷 속주머니에서 힙 플라스크를 꺼내 한모금 마시더니 다시 말했다. ‘그 할머니 조심하렴. 그 할머닌 사내아이들은 다 예수라고 믿고 있단다. 아주 환장할 노릇이지.’ 나는 그 말에도 아무 대꾸 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평소보다 일찍 낚시를 접었는데 그때까지도 사내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쏠트호를 걸어 나오면서 나는 그 사내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 사내를 예수처럼 가문비나무에 매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지 못할 게 또 뭐란 말인가? 그는 끝끝내 쏠트호를 빠져나가는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싸이먼 그레이 『민물장어낚시』, 서안출판사 2018, 32면). ↩
- “에드워드 콜리 번은 술만 마시면 아무한테나 토탄 캐는 삽을 휘둘러댔다는 것이다. 술이 깬 아침이나 주일 오전에는 그렇게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인데, 신부님에게도 순종하고 달걀을 낳은 닭한테도 그렇게 자애로운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다는 데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에드워드 콜리 번은 1980년대 초반 카디프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삽을 휘두르다가 체포되었다고 한다. 경찰에 체포된 직후에도 술에 취해 자신이 아일랜드공화국군 임시파 요원이라고 우겨 일을 키웠다고 한다. 이후 메이즈 교도소로 이감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최영근, 앞의 블로그 참조) ↩
- 싸이먼 그레이는 한국어 문장을 쓸 때 ‘~뭐란 말인가?’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다툴 게 뭐란 말인가?’ ‘욕할 게 뭐란 말인가?’ ‘그렇게 뭐라고 말할 게 또 뭐란 말인가?’ 등등. 이는 싸이먼 그레이에게 한국어 문장을 가르쳐준 한 소설가의 영향 때문인데
이래서 뭐든 선생이 중요한 법인데이에 대해선 ‘싸이먼 그레이/한국에서의 삶’ 문서 참조. 그렇게 가르쳐줄 게 뭐란 말인가? ↩ - 싸이먼 그레이, 앞의 책 16면. ↩
- “처음부터 난 알아봤어요. 붉은 머리칼과 튼튼한 발목, 크고 파란 눈동자. 완벽한 아이였지. 그거 알아요? 세상 아이들은 모두 다 완벽하게 태어난다오. 완벽하지 못한 부모들을 만날 따름이지. 우리 예수님이 그 증거이지 않소? 완벽하게 태어났고, 완벽한 부모를 만난 분이니까.”(최영근, 앞의 블로그 참조) ↩
-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일랜드 젊은이들의 숫자는 정확한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다. 대부분 개인적으로 뉴욕으로 건너간 후 그곳에서 바로 입대했기 때문이다. 미군에 입대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하면 월급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250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전사하면 1만 달러. 전사자의 시신은 성조기가 덮인 관에 실려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아일랜드에서 한국전쟁 60주년 참전용사 초청 만찬」, 『유로저널』 2010.6. 30 참조. ↩
- 민물장어가 가장 큰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
- 바비 쌘즈(Robert Gerard “Bobby” Sands)는 아일랜드공화국군 임시파(PIRA) 요원으로 아일랜드 공화주의자 수감자들이 정치범 대우를 요구하며 벌인 1981년 ‘아일랜드 단식투쟁’의 지도자였다. ↩
- 1993년 라이언 존슨 신부는 일년 동안 더블린에 위치한 한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는 그에 대한 투서가 골웨이 교구에 접수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당 내 은밀한 장소에서 10세 이하의 아이들을 성추행했다는 내용의 투서였다. 골웨이 교구는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 대신 함구와 은폐를 택했는데, 이는 사건을 대하는 당시 가톨릭 교계의 전형적인 패턴이기도 했다. ‘투서 접수→자리 이동→고해성사→복귀’ 참고로 2009년 아일랜드 정부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1975년부터 삼십년 동안 사제에 의한 아동 성범죄가 1만 5천건 이상 일어났다고 한다. ↩
- ‘라이언 존슨 신부와의 인터뷰’.(최영근, 앞의 블로그 참조) ↩
- 그해 300명 가까운 킹스타운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쏠트호 주변에서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
- 후에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 싸이먼 그레이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은 추모비에 적혀 있던 바로 그 문장이라고 한다. ↩
- 제니퍼 매클라렌에 대해서는 ‘싸이먼 그레이/대학 시절’ 문서 참조. ↩
- 다들 예상했겠지만, 썸을 탈 무렵 이메일이다.
이런 이메일을 보내는 남자를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누가 문학청년 아니랄까봐…↩ - 「자유학년제의 모범 사례를 찾아서」, 『교육선진국에서 전남교육의 미래 찾기』, 전라남도교육청 2015. ↩
- 키어런 제퍼슨은 1994년 7월, 우연히 클리프덴에 놀러 온 뉴질랜드 오클랜드 출신의 루시 롤리스와 사랑에 빠져 급기야 한달 가까이 동거를 하기도 했다. 한달 후 키어런 제퍼슨은 클리프덴 공립학교에 사표를 제출하고 루시 롤리스를 따라 뉴질랜드 오클랜드로 떠났는데, 어쩐 일인지 다시 석달 후 혼자 쓸쓸히 클리프덴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키어런 제퍼슨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했던 클리프덴 공립학교는 그의 복직을 너그러이 허락해주었다. 그는 클리프덴으로 돌아온 이후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는데, 단 양고기만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오클랜드에서 양과 관련해서 어떤 좋지 않은 기억을 쌓은 게 분명했지만 그에 대해선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셰이머스 히니의 시집을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싸이먼이 읽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집은 모두 키어런 제퍼슨이 빌려준 것이었다. ↩
- 싸이먼 그레이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키어런 제퍼슨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그가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도 이메일로 그 사실을 알렸다. “한국? 거긴 양 안 키우지? 그럼 한번 가보는 것도 괜찮지!” ↩
- 그가 최고 학년이 되었을 땐 세살 아래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
- 싸이먼 그레이는 고등학교 졸업자격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해 골웨이 국립대학교에 입학했다. 아일랜드의 고등학교 졸업자격시험은 학생의 문자해독능력과 수리력을 테스트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두가지 유형으로 구분, 실시되는데, 하나는 학생 개인의 프로젝트 보고서(20%)이고, 나머지 하나는 필기시험(80%)이다. 싸이먼 그레이의 프로젝트 보고서 제목은 「클리프덴 인근 민물장어의 유통 현황과 그 문제점」이었다. ↩
- 영화 소모임은 싸이먼 그레이보다 바로 한 학년 위인 스테파니 로체와 케이티 맥케이브가 각각 회장과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학교 시청각실에 모여 영화를 감상하고 토론하는 것이 주 활동이었는데, 한주는 「델마와 루이스」, 다음 한주는 「흐르는 강물처럼」, 그다음 주는 「가을의 전설」. 그그다음 주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하는 식으로 영화가 선정되었다. 그 영화들의 공통점은 모두 브래드 피트가 나온다는 것이다. 싸이먼 그레이는 「세븐」까지만 보고 더이상 소모임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
- 그가 할아버지인 제임스 그레이에게 배운 민물장어 미끼는 사실 미꾸라지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주로 ‘눈 꿰기’ 방법으로 미꾸라지를 바늘에 매달았는데, 그건 바늘을 미꾸라지의 한쪽 눈으로 넣어서 다시 반대편 눈으로 빼내는 방식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바늘이 미꾸라지의 뇌를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여러번 주의를 들었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면 미꾸라지가 그냥 죽어버리잖아. 눈만 꿴 채 물속에서 살아 있어야지! 할아버지는 자주 그렇게 말하곤 했다. ↩
- 지금은 비공개로 되어 있는 싸이먼 그레이의 블로그 주소는 ‘siren2011.egloos.com’이다. 후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그의 블로그 주소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
- 싸이먼은 한국에 와서 깜짝 놀랐던 일 중 하나가 광주 충장로 도심을 걷다가 ‘이니스프리’ 간판을 보았을 때라고 말한 바 있다. 이니스프리라니, 예이츠의 시에 나오는 바로 그 이니스프리?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 싸이먼은 그후로도 종종 그 화장품 가게의 간판을 보게 되었고, 실제로 그곳에 들어가 바디워시 하나를 직접 구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 이런 게 바로 예이츠가 말한 현재와 과거를 즉각적으로 연결해주는 대기억이란 것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하여간 바디워시 하나 사면서도 별 시답지 않은 의미를 다 갖다 붙인 것이다.↩ - 싸이먼 그레이는 이때 쓴 자신의 글들에서 대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티푸스 수준이라고 말한 바 있다. 『클리프덴저널』 인터넷판에선 아직도 그의 글을 찾아볼 수 있는데, 번역해보면 대충 이런 수준이다. “자아, 떠나자, 소년아/요정의 옷자락을 붙잡고 호수의 한가운데로/호수 제일 깊은 곳/네가 모르는 기쁨이 가득한 곳/그곳에 숨겨둔 버찌를 찾으면/시간도/세상도//굶어 죽은 황새 한마리”(Simon Gray, “Winter, Salt Lake”, Clifden Journal 1998.12). 장티푸스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약간 조류 인플루엔자 느낌은 난다. ↩
- 싸이먼 그레이, 앞의 블로그 참조. ↩
- 대니얼 놀란은 골웨이 국립대학교에서 ‘작문’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더블린에 위치한 그리피스 대학(Griffith College)에서 ‘극작가 워크숍’과 ‘아일랜드 드라마 창작실기’를 강의하고 있다. 또한 RTE 방송국에서 객원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
- ‘대니얼 놀란 교수와의 인터뷰’.(최영근, 앞의 블로그 참조) ↩
- 싸이먼 그레이 「새내기들에게 하고픈 말」, 빛고을타임즈 2017. 3.2. 여담이지만 싸이먼 그레이의 이 글이 발표되고 난 후, 빛고을타임즈 경영진 쪽에선 객원논설위원을 교체하는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내부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교체찬성 쪽 이사들은 ‘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는다’는 이유를 들었고, 교체반대 쪽은 ‘그래도 외국인이 칼럼을 쓰니 얼마나 품격 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경리를 맡았던 송모씨에 따르면 ‘우리가 무슨 뉴욕타임즈냐? 뭔 품격을 따지냐?’ ‘우리가 품격 빼면 뭐가 있느냐?’ ‘네가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누군지나 알고 떠드는 거냐?’ ‘너, 그거 사람 이름이지 담배 이름 아니다’ 같은 말들이 계속 오가다가 ‘원고료가 싸니까 몇번 더 두고 보자’는 대표이사 말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
- 그는 최영근 교수와의 인터뷰를 거절했다고 한다. ↩
- 후에 그는 싸이먼 그레이의 박사 지도교수가 된다. ↩
- 조류 인플루엔자 느낌이 나는 바로 그 시다. ↩
- ‘1940년대 느낌이 난다’ ‘우리 시대에 아직도 시를 쓰고 있는 학생이 있다는 게 놀랍다’ ‘여기 나오는 요정이나 버찌는 게임에서 나오는 아이템을 말하는 건가? 게임 좀 하나?’ 같은 의견이었다. ↩
- ‘저는 나쁘지 않은데요. 복고적이어서 오히려 새로운 느낌도 나고, 유행 타지 않는 거 같기도 하고… 왠지 예이츠 느낌도 나잖아요?’ ↩
- 골웨이 국립대학교는 매년 10월부터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
- 소설가 이기호에 대해선 ‘싸이먼 그레이/한국에서 삶’ 문서 참조. ↩
- 이메일을 해킹한 것은 아니고, 자동 로그인이 되는 바람에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해킹이다, 이 자식아.참고로 싸이먼 그레이에게 한국어 문장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소설가 이기호이다. 광주광역시 봉선동에 위치한 싸이먼 그레이의 자취방 바로 옆방에 이기호의 작업실이 있었다. 소설가 이기호는 후에 「싸이먼 그레이」라는 동명의 소설을 쓰게 된다. ↩ - 제니퍼 매클라렌은 현재 그의 아버지가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B&S 회계법인 더블린 지사에서 홍보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
- 싸이먼의 대학 등록금을 빌려준 것은 머피 씨였다. ↩
- 싸이먼 그레이, 같은 책 46면. ↩
- 이래서 산문은 훈련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다. 싸이먼은 그때 이미 200통 가까운 이메일을, 그것도 장문의 이메일을, 매일매일 제니퍼 매클라렌에게 보낸 처지였다. 문장이 안 좋아지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