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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오끼나와 문학’이라는 물음

 

 

심정명 沈正明

일본학 박사, 도오시샤대학 객원 연구원. 공저 『탈 전후 일본의 사상과 감정』, 역서 『유착의 사상』 등이 있음.

yorito@gmail.com

 

 

긴 연휴가 시작되기 전부터 일본사회는 온통 들썩거렸다. 어느날부터 일제히 길거리에 나부끼기 시작한 일장기의 행렬을 보며 어리둥절하던 것도 잠시, ‘헤이세이(平成)’가 끝나고 ‘레이와(令和)’가 시작된다는 축제 분위기를 여기저기서 엿볼 수 있다. ‘새로운 시대’. 하기야 인간은 오래된 시간과 새로운 시간을 구분하고, 매해나 매 십년, 짧게는 한계절이나 한달이 끝날 때마다 지난 시간을 과거로 만들며 미래의 계기를 발견하곤 하니, 이 떠들썩함도 영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설혹 옛 시대와 새 시대가 교차하는 이 열흘간의 연휴가 끝나고 나면, 다시 예전과 똑같은 생활이 시작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헤노꼬(邊野古) 연안의 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카누를 타고 직접 바다에 나가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메도루마 슌(目取眞俊)은 지금이 마치 시대가 변화하는 순간인 것처럼 흥청거리는 일본과 오끼나와의 매스컴을 비판하면서, 딱 잘라 이렇게 말한다. “오늘부터 레이와이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바보 아닌가. (…) 연휴가 끝나면 헤노꼬에서는 새 기지 건설 공사가 재개되고, 미야꼬(宮古), 야에야마(八重山)에서는 자위대 기지 건설이 강행된다. 중국과 대치하는 최전선으로서 오끼나와의 군사 요새화가 착착 진행된다. 미일의 군사 식민지로 변한 오끼나와의 상황, 야마또(大和)의 구조적 차별은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다. 뭐가 새로운 시대인가.”1 주지하다시피, 헤노꼬 새 기지 건설과 관련해 오끼나와현이 작년 7월 말에 매립 승인을 철회할 것을 표명하고 해당 절차에 돌입한 데 대해 일본 방위성은 행정 불복 심사를 청구했고, 지난 4월 5일 국토교통장관이 오끼나와현의 매립 승인 철회 처분에는 이유가 없다며 이를 취소하는 결의를 내린 바 있다. 그렇다면 메도루마의 말처럼, 오끼나와에는 전쟁 ‘이후’로서의 전후가 없었듯 기지와 철조망이 있는 전과 같은 시대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꾸따가와(芥川)상을 수상한 소설가이지만 작품을 집필할 여유도 없이 매일같이 기지 반대활동에 나서는 메도루마의 존재 자체가 여실히 보여주는 것처럼, 오끼나와의 문학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오끼나와를 둘러싼 이같은 상황,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초래한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말 일본의 군사적 팽창과 함께 류우뀨우(琉球)왕국이던 곳이 1872년 류우뀨우현이 되었다가 1879년 오끼나와현으로서 일본에 병합(이른바 ‘류우뀨우 처분’)되면서 오끼나와의 근대는 시작된다. 오끼나와를 병합한 일본은 동화정책을 내세우며 오끼나와어가 아닌 ‘표준어’를 사용할 것을 장려하고 ‘생활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오끼나와의 ‘뒤처진’ 생활방식을 ‘개량’하겠다고 나서지만, 그와 동시에 토지제도 등에서는 구관온존(舊慣溫存) 정책을 쓰며 오끼나와를 영토적·경제적 식민지로 만들어왔다. 2차대전 말에는 일본정부가 본토 결전을 지연시키기 위해 오끼나와를 희생시키는 이른바 ‘사석(捨て石)’ 작전을 씀에 따라 오끼나와 전투가 일어나는데, 그 결과 주민의 약 4분의 1이 미군이나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패전 후 연합군의 점령 통치를 받던 일본은 1951년 쌘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와 함께 주권을 회복하지만, 일본의 잔존 주권(residual sovereignty)과 미국의 시정권(施政權)을 규정한 이 조약에 따라 오끼나와는 계속해서 미군정의 통치 아래 놓이며 ‘태평양의 요석’으로 요새화된다. 오끼나와 문학 역시 이같은 오끼나와 근대의 역사와 함께 출발하며, 따라서 그것은 오끼나와를 둘러싼 역사적·정치적 조건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일본에 동화되기 이전의 오끼나와어나 오끼나와적인 것, 혹은 토착적인 오끼나와와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오끼나와 아이덴티티를 모색한다는 특징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다.

오까모또 케이또꾸(岡本恵徳)는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부터 1972년 시정권 반환(이른바 ‘복귀’)까지 오끼나와 문학의 특질을 크게 두가지로 설명한다.2 즉 이 시기의 오끼나와 문학은 정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거나 오끼나와라는 지역의 독자적인 성격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전자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까모또 자신도 동인으로 참여했던 류우뀨우대학 문예부의 기관지 『류다이분가꾸(琉大文學)』(1953년 창간)일 것이다. 한편 오끼나와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문학적 시도는 오끼나와의 전통적인 풍속이나 언어 등을 전근대적인 것으로서 부정하려고 했던 과거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오까모또나 오오시로 사다또시(大城貞俊) 등이 오끼나와의 현대문학을 ‘복귀’ 이전과 이후로 나누듯, 시정권 반환과 함께 찾아온 ‘아메리카 세상(アメリカ世)’에서 ‘야마또 세상(大和世)’으로의 변화는 물론 오끼나와 문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가령 오까모또는 일본화가 가속됨에 따라 오끼나와의 독자적인 문화가 붕괴하는 데 대한 위기감이 쌓이면서 이 시기의 오끼나와 문학에서 민속적이거나 토착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한층 더 커졌다는 점, 또 미군 병사와 오끼나와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단순히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보는 방식에서 벗어나 이전의 문학에 대한 상대화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는 점 등을 거론하였다.3 본토 일본문학계가 오끼나와 문학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와 겹치는데, 오오시로 타쯔히로(大城立裕)가 「칵테일파티(カクテル·パ—ティ—)」로 아꾸따가와상을 수상한 것이 ‘복귀’를 앞둔 1967년, 히가시 미네오(東峰夫)가 「오끼나와 소년(オキナワの少年)」으로 이 상을 수상한 것이 1971년이다.

물론 문학이 항상 정치적인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동하는 것은 아니며, 오끼나와 문학 역시 1945년, 1972년, 그리고 오오따 마사히데(大田昌秀) 당시 지사가 기지에 사용되는 토지를 강제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대리 서명을 거부했고, 또 오끼나와 주둔 중인 해병대원과 해군 세명이 12살 어린이를 폭행하고 살해함으로써 오끼나와현에서 대대적인 저항운동을 촉발시킨 1995년과 같은 달력상의 날짜에 따라 정확히 나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나까호도 마사노리(仲程昌徳)가 오끼나와 문학의 백년을 돌아보며 미군기지와 관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것과 오끼나와의 습속이나 전통을 기반으로 쓰인 것이라는 두개의 커다란 계보를 그려냈듯,4 그 방향성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더라도 오끼나와 문학을 일단 전쟁과 미군기지, 일본과의 관계라는 문제와 언어를 포함한 오끼나와적인 것에 대한 탐구라는 자장 속에 놓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칵테일파티」와 오끼나와 문학의 정치성

 

아직 미군정의 통치 아래에 있던 1950년대 오끼나와를 배경으로 한 「칵테일파티」는 오끼나와 문학이 지닌 정치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전장(前章)과 후장(後章) 두 부분으로 나뉘는 이 소설의 전반부는 ‘나’가 미스터 밀러의 집에서 열린 칵테일파티에 초대받아 가깝게 지내던 미국인 미스터 밀러, 중국인 쑨 씨, 일본인 오가와 씨와 나누는 ‘친선교류’ 토크를 그린다. 파티 중간에 손님 중 하나인 미스터 모건의 아들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만, 불안한 분위기도 잠시, 실은 오끼나와인 메이드가 휴가를 맞아 고향집에 가면서 아이를 데려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파티는 한층 더 무르익는다. 주인공이 가진 약간의 불안과 침묵, 주저를 암시하면서도 겉으로는 사교적인 파티의 모습을 그리는 전반부와는 달리, 소설의 후반부는 주인공을 ‘너’로 호칭하면서 파티가 벌어지는 동안 ‘너’의 집에서 방을 빌려 쓰고 있던 미국인 병사가 딸을 강간했음을 알려준다. 더구나 딸이 저항하려다 밀치는 바람에 부상을 입은 이 미군 병사가 딸을 고소해 연행되기까지 한다. ‘너’는 미군 병사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파티에서 환담을 나누던 미스터 밀러와 쑨 씨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미스터 밀러는 이를 거절한다. 그리고 ‘너’는 쑨 씨의 아내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병사에게 강간을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결국 미군 병사에 대한 고소를 단념하려던 ‘너’는 미스터 모건이 메이드를 고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 역시 미군 병사를 고소하기로 마음먹는다.

이 작품의 정치성은 아꾸따가와상을 수상할 때 심사위원이던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가 모든 문제를 ‘정치 퍼즐’ 속에 녹였다고 혹평한 데서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미국인, 일본인, 오끼나와인, 중국인으로 이루어진 ‘칵테일파티’의 친선모임이 그대로 각각의 인물이 속한 네개의 국가-국민을 대표하는 듯한 구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주인공의 딸이 강간당함으로써 점령기 오끼나와에서 ‘칵테일파티’로 표현되는 미군과 오끼나와인의 친선이 실은 얼마나 모순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일본-오끼나와의 가해자성 또한 중국인 쑨 씨의 아내가 겪은 강간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에서, 몇몇 평자들은 전쟁을 딸과 아내, 즉 가부장제 내의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으로 비유하는 관점의 문제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오오시로의 의도와 무관하게 ‘류우뀨우인’과 미국인의 우호관계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이 오끼나와의 본토 ‘복귀’를 앞둔 시점에서 일본 문단에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자체에서도 오끼나와와 일본을 둘러싼 작품 바깥의 정치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5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오끼나와 문학 혹은 오끼나와의 독특한 문화에 대한 물음은 표면적인 친선교류에 감추어진 어긋남이나 긴장관계를 드러내는 것 이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오키나와에는” 쑨 씨가 나에게 물었다. “고유의 문학이라는 것이 있나요?”

“고유의,라고 하는 의미는? 내용적으로? 아니면 형식적으로?”

“글쎄요, 그렇게 되물으시니 오히려 제가 잘 모르겠네요.” 쑨 씨가 간만에 크게 웃어 보였다. “요컨대 일반적인 일본문학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해두죠.”6

 

“마담, 마담은 어떻게 생각해요? 오키나와의 독특한 문화에 대해.” 오가와 씨는 미세스 밀러를 붙들고 물었다.

“오오. 원더풀.” 미세스 밀러는 바로 대답했다.

“반가타(紅型, 형지를 이용한 류큐 전통 무늬 염색), 쓰보야(壺屋, 오키나와 나하시 쓰보야에서 생산되는 도기), 무용, 샤미센(三味線, 삼현으로 된 일본 고유의 현악기), 모두 모두 원더풀이에요.”

“일본문화와 하나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기본적으로는 같은 것이겠죠. 하지만 개성이 있어요. ……아니, 다른가? 기본적으로는 독자적인 것인데 일본에 상당히 가까운.”7

 

오끼나와에 ‘고유한’ 문학이 있다면 그것은 내용이나 형식으로 구별되는지, ‘일반적인 일본문학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를 물은 다음 오끼나와의 ‘독특’한 지방색에 대한 짧은 토의가 이어진다. 그리고 미세스 밀러는 일본문화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국적인 문화에 감탄하면서(원더풀!) 오끼나와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일본과 가깝지만 ‘개성’이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렇게 오끼나와적인 독자성을 찾을 때마다 빠지기 쉬운 함정은 그것이 일본이라는 곳 자체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로서 통합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뒤처진 것으로서 ‘개량’되어야 했던 오끼나와적인 풍속이나 오끼나와어가 토속적인 것, 때로는 일본 자체의 오래된 과거〔古層〕를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려질 때, 오끼나와어의 표현이 단정한 일본어로 쓰인 소설 속에 그저 부분적으로 첨가될 때, 그것은 일본문화나 일본문학을 더욱 세계적이고 풍요롭게 만드는 장치가 될 위험을 띠고 있지 않은가? 무언가를 오끼나와적인 것으로 호명함으로써 기호로서의 독자적인 오끼나와가 만들어질 뿐 아니라 오끼나와인 자신들에게까지 그러한 정체성을 각인시킬지도 모른다. 이는 지금까지도 오끼나와와 관계 맺는 많은 사람들을 고민하게 하는 문제이다.

또한 “1945년 3월 20일에 당신들은 어디서 뭘 했습니까?”(186면)라는 쑨 씨의 질문은 오끼나와뿐 아니라 조선 역시 그 일부였던 일본제국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1945년 3월 20일은 쑨 씨의 아내가 일본군 병사에게 강간당한 날이지만, 그 특정한 숫자와는 다른 1945년의 모든 날들에, 아니 나아가서는 2019년의 모든 날들에, ‘그날 당신들은 어디서 뭘 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바꿔 물어도 무방할 만한 폭력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오가와 씨처럼 편리하게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구분할 수 없는 폭력의 연쇄는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쑨 씨의 질문에는 오끼나와 역시 아시아에 대해서는 가해자이지 않았느냐는 고발을 넘어서는 함축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서 소위 배운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우정을 만드는 동안, 소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폭력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차이는 바로 이같은 현실의 낙차를 분명히 보여준다.

반면 소설에서 미국인은 언제 폭력에 노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는 무관한 존재로 그려진다. 파티에 가기 위해 기지 내부를 걸으면서 십년 전에 기지 안에서 헤맸던 경험을 떠올린 주인공은 외국인 아이들은 오끼나와 사람들이 사는 거리를 맨손으로 거닐 때 공포를 느낀 적이 없을지, 자신의 집에서 방 한칸을 빌린 미군 병사가 오끼나와 사람들만이 사는 마을에서 공포감을 느낀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을지를 자문한다. 이는 미스터 모건의 아이가 행방불명된 이후 쑨 씨가 한 ‘유괴’라는 말을 듣고 주인공이 “모건 2세를 유괴한 사람이 오키나와 사람이라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점령자의 아이를 유괴한 오키나와의 남성, 아니면 여성은 어떤 심경일까?”(160면, 강조는 원문)라고 던진 물음과도 대응하는데, 결국 메이드가 아이를 데려갔을 뿐임을 알게 되면서 오끼나와 측의 폭력에 대한 희미한 두려움은 해소된다. 주인공이 아이가 없어졌다는 데서 유괴의 가능성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던 것처럼, ‘오끼나와인이 미국인 아이를 유괴’하는 것은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칵테일파티」에는 그같은 불안이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돼지의 보복」과 오끼나와적인 것

 

1995년이라는 역사적 시기를 거치면서 오끼나와 문학은 다시금 본토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96년 마따요시 에이끼(又吉榮喜)의 「돼지의 보복(豚の報い)」(『돼지의 보복』, 한국어판 창비2019)이, 바로 이듬해인 1997년 메도루마 슌의 「물방울(水滴)」(『물방울』, 한국어판 문학동네2012)이 각각 아꾸따가와상을 수상한 것이 그 계기였는데, 당시 약 팔만 오천명이 모인 현민 총궐기 대회가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을 뿐 아니라 아무로 나미에, SPEED 등의 활동과 함께 오끼나와는 대중문화적인 기호로서도 소비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문학계에서 높이 평가받은 「돼지의 보복」은 우따끼(御嶽), 풍장(風葬), 우간(御願), 유따(ユタ) 같은 오끼나와의 민속신앙을 다루고 있고, 그런 점에서 오끼나와의 전통을 기반으로 쓰인 작품의 계열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겠다. 쇼오끼찌와 스낵바 ‘달빛 해변’에서 일하는 세 여성이 돼지가 가게에 난입한 후 마지야섬으로 갔다가 결국 고뇌에서 해방된다는 이야기 구조가 “오끼나와인들의 돼지 관련 민간전승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쉽게 해명되지 않는다”(236면)는 옮긴이 곽형덕의 해설도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달빛 해변’에 난입한 돼지가 올라타려고 하는 바람에 놀라서 넋을 떨어뜨리고 만 와까꼬는 손님인 대학생 쇼오끼찌에게 넋을 다시 넣어달라고 부탁한다. 마침 풍장돼 있던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여 문중묘에 넣기 위해 ‘신의 섬’이라 불리는 자신의 고향 마지야섬에 가야 했던 쇼오끼찌는, 여자들에게 낯선 돼지가 집에 들어온 액운을 떨치기 위해 성소인 우따끼에 우간(참배)을 하러 가자고 제안한다. 소설은 이렇게 해서 섬을 찾은 여자들이 돼지고기를 먹다 설사병에 걸리고, 그들을 돌보던 쇼오끼찌가 아버지의 유골이 있는 곳을 새롭게 우따끼로 만드는 과정을 그린다. 즉 오까모또가 해설하듯, 이 소설에는 죽은 아버지의 유골과 쇼오끼찌의 관계와 우따끼를 찾은 여성들의 참회와 재생이라는 두가지 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8 성소인 우따끼를 자신이 만든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다른 우따끼들 역시 처음에는 누군가가 만들었을 뿐이라며 아버지의 유골을 새로운 신으로 모시려고 하는 쇼오끼찌는 오끼나와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혁신’하는 ‘반전통적인 사고’를 보여주는데(「작품해설」237면 참조), 이는 이 작품이 오끼나와의 토속과 그것을 벗어나는 보편적인 주제 사이에서 일본문학계의 공감을 얻었던 것과도 관련있다.

“오끼나와라고 하면 곧장 전쟁의 상흔이나 기지 문제, 정치적 상황 아래의 오끼나와현민 등 자칫 정치적인 면이나 반대로 토속적인 부분만이 부각되어 작자나 독자가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 하지만 마따요시 씨의 붓은 이런 것들을 뛰어넘어 오끼나와라는 고유의 풍토에서 살아가는 서민의 숨결이나 생명력을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굵직하게 그려낸다”(미야모또 테루〔宮本輝〕), “오끼나와 사람이 오끼나와를 다룬 작품에는 오끼나와이기 때문에 이해를 강요당하는 기분이 들 때가 많지만, 「돼지의 보복」에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오끼나와 문학의 한 선을 훌륭하게 돌파해냈다”(코오노 타에꼬〔河野多恵子〕, 강조는 원문), “일본에서 오끼나와라는 풍토의 매력과 가치와 의미는 그 비획일성에 있다. 그것은 과거의 전쟁이나 현존하는 외국 군대의 기지와 같은 정치적 요인을 초월한, 진정으로 또 순수하게 문화적인 것으로서 (…) 마따요시 에이끼의 작품은 오끼나와의 정치성을 떠나 문화로서의 오끼나와의 원점에 입각해 작아도 확고한 오끼나와라는 하나의 우주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이시하라 신따로오〔石原愼太郎〕)9와 같은 심사평들은 적어도 일부 심사위원들에게 이 작품의 어떤 면이 평가받았는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것은 오끼나와 문학이 갖는 토속성이나 오끼나와적인 면을 ‘돌파’하는 문학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오끼나와 하면 흔히 떠올리는 정치적인 면들, 즉 전쟁이나 기지의 문제를 ‘초월’하는 작품으로서 일본문학에 자리매김되었던 것이다.

이는 주인공인 쇼오끼찌가 기이할 정도로 생명력이 넘치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뜻하지 않게도 오끼나와적인 토속성을 바라보는 본토 지식인들의 시선과도 겹쳐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스낵바의 마담인 미요와 그곳에서 일하는 요오꼬, 와까꼬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쇼오끼찌에 대해 육체적 욕망뿐 아니라 정신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쇼오끼찌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든 우따끼를 기꺼이 참배하려고 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쇼오끼찌의 눈과 귀를 통해 분명히 전해지는 것은 하얀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묻은 미요의 립스틱 자국이나 입술을 오므리고 게를 쪽쪽 빨아먹는 와까꼬의 입술, 붉게 찢어진 것처럼 보이는 미요의 입, 희묽은 기름이 불쾌하게 떠 있는 식은 국물을 흘려 넣듯이 마시는 여자들의 모습, 루주 색깔이 지워진 대신 착 달라붙은 기름이 번들번들 희미하게 빛나는 입술, 배 속의 생선국이 식도로 치밀어오를 것처럼 만드는 여자들의 진한 향수 냄새 같은 것들이다. 무엇보다 창문에서 떨어진 민박집 주인을 병원에 데려다준 답례로 그 남편이 가지고 온 돼지고기를 쇼오끼찌는 거의 먹지 않는 반면, 입술이 기름으로 번들거릴 만큼 탐욕스럽게 먹은 여자들은 모두 설사병에 걸리며 미요는 설사한 뒤처리까지 쇼오끼찌에게 맡기게 된다.

이렇게 돼지고기를 먹고 그것을 배출해내는 과정은 여자들이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고 구원으로 나아가는 결말과도 정확히 겹쳐지면서 구원과 재생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하지만 그러한 여자들의 혹은 오끼나와적인 생명력과는 한발 거리를 둔 쇼오끼찌만이 아버지의 유골과 홀로 대면하고 우따끼의 전통을 바꾸어나가는 깨달음을 별다른 과정 없이 얻는 것이다. 평범한 대학생 손님일 뿐일 쇼오끼찌에게 세 여자가 하나같이 욕망을 느끼는 이유에 대한 의문은 접어두더라도, 이같은 이야기의 두 축은 오끼나와의 전통에 대한 이 소설의 접근이 어떠한 점에서 또다른 정치적인 읽기를 가능하게 하는지를 드러낸다.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쇼오끼찌의 결정은 충분히 주체적인 것이었지만, 일본문학계가 이 소설을 단순히 토착적이라기보다 자기 혁신적인 새로운 오끼나와 문학이라고 평가할 때, 그들이 당연한 것으로 상정하고 이야기하는 토착이 무엇이며 오끼나와 문학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된다. 따라서 기지나 군대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이 소설 역시 오끼나와 문학이 갖는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성을 부각한다.

 

 

오끼나와 문학이라는 가능성

 

한편 메도루마 슌은 미야모또 테루나 이시하라 신따로오 같은 평자가 어쩐지 다소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말하는 오끼나와의 정치적인 면을 천착하면서도 그러한 문학이 오끼나와 바깥의 독자들에게 어떠한 계기로서 읽힐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작가다. 최근작인 「신 뱀장어(神ウナギ)」10에서는 오오사까로 일을 하러 간 오끼나와인 주인공이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해 미군에 투항한 오끼나와 주민을 살해한 옛 일본군 장교와 우연히 다시 만난다. 하지만 그저 한마디 사과를 받으려고 장교에게 접근했다가 언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주인공은 가끔 드나들던 오끼나와 요릿집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할 뿐 아니라 장교의 딸에게 되레 전쟁 중에 오끼나와를 위해 진력한 아버지가 왜 이상한 트집을 잡혀야 하느냐는 원망을 듣는다. 소설에서 ‘신 뱀장어’는 마을 사람들이 모시는 애지중지한 존재이지만 그들의 신앙을 비웃으며 뱀장어를 죽이는 것 또한 당시 마을에 들어와 있던 일본군이다. 반론도 하지 못한 채 오끼나와로 돌아온 주인공은 마을의 샘에서 대를 이어 줄곧 살아오던 신 뱀장어를 만나고, 신 뱀장어를 죽이려던 일본군에 홀로 저항하던 아버지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신 뱀장어나 그것이 사는 신성한 샘물이 보여주는 오끼나와의 전통적인 신앙은 오끼나와 전투와 그 기억이라는 역사적·정치적 문제뿐 아니라 폭력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과도 이어진다.

단편인 「희망(希望)」과 장편인 『무지개 새(虹の鳥)』에서 한때 오오시로가 언급했던 미국인 유아를 유괴해서 죽이는 오끼나와인을 직접 그려내기도 한 메도루마는, 『기억의 숲(目の奧の森)』(한국어판 글누림2018)에서 오끼나와 전투의 기억이 어떻게 다른 역사, 다른 폭력과 중층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였다. 크게 열 부분으로 나뉘는 이 소설은 네명의 미군에게 폭행을 당한 사요꼬와 그 복수를 하기 위해 작살로 미군을 공격한 세이지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이들을 둘러싼 마을 공동체나 아버지를 비롯한 남성들의 폭력, 오끼나와 전투 체험자의 증언을 통한 ‘평화교육’이 이루어지는 교실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오끼나와 여자아이의 이야기, 오끼나와 전투와 베트남전쟁 그리고 9·11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적으로 확장되거나 좁혀지는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 세이지가 미군에게 찔러넣은 작살촉은 시간이 흘러 한 오끼나와 출신 소설가에게 돌아오는데, 한순간 빌딩으로 돌진하는 비행기의 이미지와도 겹쳐지는 이 작살촉은 시초에 있었던 개별적인 사건이 더 크고 광범위한 폭력의 역사적 연쇄 속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동시에 소설은 1995년 오끼나와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소녀 폭행사건을 과거의 사요꼬(들)와 겹쳐지게 하면서 이것이 오십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오끼나와라는 고유한 공간의 문제임을 짚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폭력의 외부란 존재하지 않으며 평화로운 일상에 이미 그같은 폭력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워주는 메도루마의 문학은 오끼나와 문학이 제기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소유격으로 에워싸인 ‘오끼나와의’ 것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다.

그렇다면 오끼나와 문학은 결국 무엇을 가리킬까? 오끼나와 출신 시인 야마노꾸찌 바꾸(山之口貘)는 「회화(會話)」라는 작품에서 “고향은?”이라는 여자의 물음에 오끼나와나 류우뀨우라고 대답하지 않고 문신, 자비센(蛇皮線, 오끼나와의 현악기), 일본 열도의 남단, 돼지, 맨발, 용설란이나 파파야와 같은 식물, 아열대, 추장, 토인, 아와모리(泡盛)처럼 ‘오끼나와적’인 풍습과 지리, 혹은 오끼나와에 대한 편견 등을 대는 남자를 그린 바 있다. 이 시는 오끼나와가 이 모든 것들이 모이는 곳인 동시에 그러한 것들로서 단순히 기호화될 수 없는 장소임을 상기시킨다. 일반적으로 양해되는 오끼나와 문학의 특징을 정리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기는 했지만, 이 글은 거꾸로 일본문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오끼나와 문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자리 잡은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오끼나와 문학이란 어떠한 것인지를 다시금 질문하고자 했다. 가령, 현재 오끼나와 현립 도서관에서 대여하려면 거의 삼년을 대기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는 신오도 준조오(眞藤順丈)의 장편소설 『보물섬(寶島)』은 오끼나와어 표현을 적절히 활용하며 2차대전 이후부터 ‘복귀’에 이르기까지 오끼나와의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기지를 털던 소녀와 소년들의 성장과 청춘을 그려냈다. 메도루마 슌, 오오시로 타쯔히로, 마따요시 에이끼의 작품을 읽으며 ‘오끼나와’를 점점 더 의식하게 된 저자가 우따끼나 기지의 철조망과 마주하면서 오끼나와를 그려낸 이 소설은 어떨까? 2019년 나오끼(直木)상을 수상했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랭킹에서 5위에 오르기도 한 이 엔터테인먼트 소설이 오끼나와 문학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예컨대 교사가 된 등장인물이 새로운 직업에 적응하기 시작하여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면서 “현재 상황을 호전시킨 영어회화 능력을 어떻게 향상시켰는지, 자신들이 매일을 보내고 있는 것이 ‘기지의 섬’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사이, 1959년에 실제로 있었던 미야모리 소학교 미군기 추락사고와 같이 미군기가 교사(校舍)로 날아 들어오는 섬뜩한 순간이 존재한다. “모든 것을 바꿔버리는 운명의 배합은 늘 아무런 전조도 없이, 사람들의 영위 같은 건 아랑곳 않고 덮쳐온다. 소중한 사람들이 눈앞에서 사라지던 모든 순간이 다 그랬지 않아, 야마꼬?”11라는 물음은 한편으로는 모든 독자들에게 해당하면서도 역시 전투를 겪은 기지의 섬인 오끼나와의 이야기인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 두가지 사이를, 손쉬운 이입과 보편화를 용납하지 않는 동시에 결코 지리적 경계나 부동의 기호로 회수될 수 없는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오가게 만드는 것이 오끼나와 문학이 가진 힘일 것이다.

 

 

  1. 目取眞俊 「猫もあきれるマスコミの天皇翼賛報道」 2019.5.1(https://blog.goo.ne.jp/awamori777/e/fb8dcb2af7947ff512441665382ac5ec).
  2. 岡本恵徳 『現代沖縄の文學と思想』, 沖縄タイムス社 1981, 91면.
  3. 岡本恵徳 『現代文學に見る沖縄の自畵像』, 高文研 1996, 22~26면.
  4. 仲程昌徳 『沖縄文學の100年』, ボ—ダ—インク 2018, 220면.
  5. 요네야마 리사(米山リサ)가 지적하듯, 이 소설은 주인공이 오가와 씨와 연대하기 위해 일본의 오끼나와에 대한 가해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했음을 보여줌으로써 오끼나와의 ‘조국’은 일본이라고 하는 내셔널리즘적 동일화를 비판하고 있다. 쑨 씨가 한 이야기에 대해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 구분하지 않으면”이라고 반응하는 오가와 씨의 말을 들으며 주인공은 소설에 나오는 ‘적군의 폭음을 들은 어머니가 울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일’이 오끼나와에도 있었으며 그것은 일본군이 한 일이라는 말을 군대와 관련있을지도 모르는 오가와 씨 앞에서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것이다. 米山リサ 「沖縄という言語道斷もしくは語りの不可能性: アメリカ研究と冷戰下の米國地域研究における共犯的忘却」, 冨山一郎·森宣雄 編 『現代沖縄の歴史経験: 希望, あるいは未決性について』, 青弓社 2010.
  6. 오시로 다쓰히로 「칵테일파티」, 김재용·손지연 엮음 『오키나와 문학의 이해』, 손지연 옮김, 역락 2017, 147~48면.
  7. 같은 글 149면.
  8. 岡本恵徳 『現代文學に見る沖縄の自画像』 298면.
  9. 仲程昌徳, 앞의 책 211~14면에서 재인용.
  10. 메도루마 슌 「신(神) 뱀장어」, 김재용 엮음 『현대 오끼나와 문학의 이해』, 심정명 옮김, 역락 2018.
  11. 眞藤順丈 『寶島』, 講談社 2018, 2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