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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비평의 원점

황현산 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

 

 

김인환 金仁煥

문학평론가, 고려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 『언어학과 문학』 『비평의 원리』 『한국고대시가론』 『동학의 이해』 등이 있음. inhwan65@korea.ac.kr

 

 

2031황현산(黃鉉産)은 주도하고 면밀하고 가차없이 질문하는 비평가다. 그에 의하면 “시를 안다는 것이 시에 대한 설명의 코드에 익숙하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잘 표현된 불행』, 문예중앙 2012, 9면) 그는 시가 본래 지닌 힘에 의해서 이 설명의 코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시인은 직접 주어져 있는 사물을 예상할 수 없는 사물로 변형한다. 이미 알고 있던 사물이 시에 들어오면 친숙하지 않은 사물로 변모된다. 비평가는 시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이러한 낯설음의 효과를 독자에게 전달하려 한다. 황현산은 설명의 코드를 희생시키고 그것보다 더 밑에 있는 시의 힘을 살려내려 한다.

언어에는 정식계약과 이면계약이 있는데, 문학이란 정식계약의 불충분한 성질을 파지(把持)하고 이면계약으로 정식계약을 보충하려는 실험이므로 정식계약에 대한 이의제기가 들어 있지 않은 글은 문학이 아니라는 것이 황현산의 믿음이다. 언어의 논리로는 속속들이 표현할 수 없는 희망이 문학을 문학으로 규정하는 힘이며 이 희망은 세계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항상 시인의 이의제기에 동참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 그는 자신을 시인과 함께 지배담론을 흔드는 소설가로 여기는 듯하다. 느닷없이 시인에게 말을 걸고 내밀한 비밀을 독자에게 터놓는 그의 비평은 미완의 성장소설처럼 읽힌다. 일반개념의 나열을 싫어하고 문학적 과장을 역겨워하는 그는 사실과 자료에서 시작하지만 기존의 경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엄격하게 훈련받은 실증주의자다. 그는 작품을 사전과 문법으로 텍스트에 밀착하여 읽고, 텍스트에 비평가의 생각을 집어넣는 확대해석을 극도로 경계한다. 어떤 의미를 가지고 텍스트로 들어가려 하지 말고 모든 의미를 텍스트에서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황현산의 비평은 시인을 자신의 개인적 코드에 통합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데서 시작한다. 나는 단어의 의미와 문장의 구조를 복원하는 데 그보다 더 능숙한 주석가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주석을 문학적 코드 안으로 제한하려 하지 않고 언어경험의 여러 국면을 포함할 수 있도록 주석을 확장하려 한다. 이질적이고 비문학적인 자료들에서도 실증적 사실을 끌어내어 포섭한다는 점에서 그의 비평은 교양소설의 풍격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신념을 내세우려고 하지 않으나 도덕적 분노를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의 비평에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느끼는 윤리와, 비평이란 필연적으로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공존한다.

황현산에게 시는 기지(旣知)와 미지(未知)의 사이에 놓인 다리다. 시는 미래의 말, 미래를 촉발시키는 말, 미래에 그 진실이 밝혀질 말이다. 비평가는 현재의 말 속에 잠복해 있는 미래적 쓰임의 가능성을 읽어내야 한다. “시의 모든 전위에는 주체가 타자를, 타자가 주체를 아우르는 현재가 있으며 아직은 형태도 색깔도 없는 미래, 어떤 주체의 망상도 아직 침범하지 못한 미래, 곧 타자의 미래가 있다. 타자를 영접하는 주체만이 오직 그 미래에 들어간다.”(134면) 그는 본연파(나뛰리슴)에 반대하고 미래파(퓌뛰리슴)에 찬성하는 비평가이다. 그에게 본연은 필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미래신앙, 진보신앙에 대한 저주가 현대시의 가장 중요한 기원”(396면)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보들레르가 꿈꾼 미래는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원죄의 감소였다.

그는 시에서 특별한 어느 한 사람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에게 시는 그 사회의 여러 음성들이 상호작용을 수행하는 장소다. 그의 비평은 시를 이질성의 연극으로 만들어 시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고 시인의 편에 서서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시를 쓸 용기를 갖게 한다. 독자는 그의 비평에서 시인에게만 통하는 무수한 무대지시들을 넘겨받는다. 시인과 독자와 비평가가 서로 타인의 필연적인 보완물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 것은 이 비평집이 거둔 최대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비평의 목적은 애초부터 지평 융합이었다. 비평은 나를 변화시킨 만남의 기록이다. 최악의 비평은 시인을 비평가의 주물 속에 집어넣어 짓부수는 비평, 즉 토론하기를 거부하는 비평이다. 황현산은 항상 시인에게 그리고 다른 비평가에게 논쟁을 건다. 둘이 하나로 혼합된다는 것은 환상이다. 진정한 사랑은 타인을 타인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작품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작품에게 말하며 작품과 함께 말한다. 그는 토론을 벌이는 비평가고 반박을 허용하는 비평가다. 시에 대해 즐겁게 말하는 비평을 읽는 것은 나에게 아주 희귀한 경험이었다. 이 비평집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고귀한 정신과 한동안 교제했다는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