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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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제19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한재범 韓在範

2000년 광주 출생.

just_blank00@naver.com

 

 

 

저수지의 목록

 

 

저수지에 개 하나 놓여 있다

트루먼이 연기하는 것이다

 

어두운 관객석 사람들 웅성거린다 너는 지루한 듯 턱을 괸다 우리는 지정석에 앉았고 집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개가 있고 이 모든 건 가까스로 완벽하다

 

 

흰 가루가 된 외할머니를 가로수 아래 묻었지 사대강 사업으로 거대하게 꾸며진 영산강 공원에서

공원인데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요

외삼촌이 맞담배를 피우자 했지 아직 미자인데 자꾸만 괜찮다고 다 그런 거라고 다 그런 게 뭘까 외삼촌의 불을 받으며 생각했다

가로수는 더 크게 자라겠지 한겨울의 바람이 불고 사라진 잎사귀 대신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외할머니가 죽을힘을 다해 우리를 비웃는 거야, 형이 말하고

돌아가는 장례 버스에서 외가 사람들은 잠깐 슬퍼해줬다 돈을 세던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는다 왜 슬픈 얼굴들은 다 배가 고파 보이는 걸까

자꾸 침이 고여 괜히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내일부턴 학교에 가야 해 형은 다시 군대에 가야 하고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할까 벌써 기대가 됐다

버스의 창문에 나란히 강이 비친다 저건 강이 아니라 저수지다, 아버지가 말하자 외가 사람들이 화를 내며 반박하고

 

긴 터널을 지나왔다

 

 

일년에 한번

극장에 갔었지

먼 친척의 부고가

해마다 한번은

들려오던 것처럼

정한 적 없는 약속

 

누군가의 생일이었고

형과 내 이름을 자주

헷갈려 하던 사람과 함께

연극이 끝나면 극장을 나와

옆에 있는 호수를 보며 걸었지

 

형은 강이라고 했고

나는 호수라고 했는데

둘 다 아니었지

깊고 어두웠지

지금 당신이 밟고

서 있는 그것처럼

 

그런다고 누가 알아줄 것 같아요?

죽어봤자 다 까먹는다고요

 

 

트루먼이 연기를 하다 말고 우리를 본다

연기가 아니라 분명 우리를 보고 있다

 

사람들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저수지를 바라보는 연기라고

너는 생각할 수 있겠지만

 

관객석의 어둠은 지나치게 깊다

이것을 저수지라고 말하기에는

 

개는 개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나는 가끔 네가 무서워, 집에 돌아와 네가 아무 말 없이 방문을 닫는 일을 나는 자주 앓는다

 

저 트루먼이라는 사람

어딘가 익숙하다,

너는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빛이 눈을 껌뻑인다

무서운 빛이다

 

트루먼은 알고 있겠지

트루먼만이 우리를 볼 수 있으니까

저수지를 바라보는 트루먼이

점차 우리를 바라보게 될 때

 

암전

총소리

개의 신음

 

무대 위에 트루먼

트루먼을 관통한 트루먼

사라진 어둠을 끌어안은 채

쓰러지는 것

 

 

아직 박수가 끝나지 않았는데

너는 등 뒤에 구겨둔 외투를 꺼내 입는다

 

너를 꼭 이곳에 데려오고 싶었는데 너는 알았다고 다음엔 더 좋은 곳을 가자고 말한다

 

극장을 빠져나와 우린

밝은 무대 위를 걷는다

 

 

 

수프와 숲

 

 

베란다에서 거실로 화분을 옮기던 여자를 나는 여름의 숲에서 잃어버렸다

 

남겨진 식탁 위에 매일 숲이 자랐다 머리맡에 나무를 옮겨 심는 꿈을 꿨다 숲을 향해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쫓다 잠에서 깨면 늘 혼자였다

 

몰래 훔쳐본 여자의 성경 속 메모를 떠올리면

두려움이 무성해지는 여름

 

“어떤 믿음은 너무나 울창해서 나를 찾을 수 없다”

 

죽은 나무들로 지어진 성당에 다녔지 도끼를 움켜쥐듯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배웠어 어린 내가 고목을 찍어내릴 상상을 할 때마다 여자는 수프를 끓였다

 

오래도록 휘저으며 바라본다

팔팔 끓는 수프 위를 떠다니는 표정과

말없이 그 표정을 흔드는 하얀 손

 

나는 매일 쓴 일기장을 찢었다

 

식탁 위에서 식어가는 수프 겁이 번진 얼굴을 지워주던 하얀 손 벽에 박힌 못들의 세례명은 손잡이였지 깊숙이 흐르는 마음을 움켜쥔 채 매달리는 것들

 

굳게 잠긴 울창함 속에서 구멍을 세는 아이

아이의 낡은 벽지 같은 등을 본다

이곳은 분명 숲이다 숲은 멀어지니까

맨발을 가졌으니까

 

멀어지던 아이가 구멍 속에 발을 담근 채 둥글게 몸을 말 때면 궁금해진다 방 안 가득 무너지는 것은 왜 혼자가 아닐까

 

숲에서 홀로 수프를 끓이다가

곰팡이처럼 떠다니는 표정들을 뒤섞는다

 

몸 안에 고인 빛을 쏟아내는 전등 아래

 

그림자와 그늘을 구별할 수 없어질 때까지 그것들이 뒤섞여 흉측하게 뭉쳐질 때까지 어디선가 종은 울리고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숲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대못

 

 

하굣길에는 갈대밭에 들러 혼자 울었지 아이들은 끈질기게 따라와 시체 장사하는 애비 자식이라고 놀렸다 나도 한명쯤은 자신이 있어서

주머니 속 대못을 움켜쥐었지 교복바지 속에서 그것은 점차 커지는 것 같았다

그해 여름은 홍수가 잦아서 매일 밤 아이 하나 정도는 쉽게 떠내려갔다 급히 거리를 떠도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꿈틀거렸고

마을의 하나뿐인 뒷산 위 골동품처럼 쌓여 있는 무덤들 사이 아버지는 매일 대못을 박는다고 했다

교회도 없는데 마을에는 한동안 종소리가 났지

아버진 내게 보여준 적 있다 미리 파놓은 누군가의 묫자리, 비가 고여 큰 못이 된 그것이 찰랑거리던 모습

장의사는 마을에 하나면 족하다고 그 일을 너도 맡게 될 거라고 언젠가 벽에 걸린 작업복을 보는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려는 것 같았는데

집에 돌아와서 나는 하루 종일 손가락이 아팠지

빈손을 자꾸만 쥐어서

밤마다 몰래 아버지의 삽을 들고 집을 뛰쳐나갔어 그날도 마찬가지였지 뒷산에 올라가 땅을 팠지 주변에는 내가 매일 파놓은 구멍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지

무딘 칼질 같은 장대비 소리

온 마을을 뒤흔들 것처럼 컸다

 

구멍들마다 물이 차올랐다 못처럼 박힌 구멍들이 징그러워졌지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삽을 버리고 도망쳤지 도망칠수록 더 길을 잃게 되는 산 속에서

더는 그곳과 멀어질 수 없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 뛰었다 숨이 찰수록 자꾸 무언가를 움켜쥐게 되었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다시 갈대밭이었다

 

젖은 주머니 속 무언가

서서히 나를 찌르고 있었다

 

 

 

 

 

친구는 수련회에 다녀온 후로 말수가 줄었다 뾰족한 것이 무서워졌다고 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튀어나온 게

 

운동장에 야구부 아이들이 줄줄이 엎드려 있다

뭉쳐진 그림자 위로 공이 튀어오르다

빈 유리병 같은 가을 속으로 가라앉고

 

빛이 부서지는 소리가 운동장을 메운다 더 잘하겠습니다, 기도문을 외우듯 아이들은 간절해진다 땅을 짚은 팔목들이 나란히 휘청거리는 저녁

 

창문 속 어둠을 가로지르는 불빛들 사이로

불에 타고 있는 집을 꿈꾸곤 했다

 

지난여름 우리의 캠프파이어

 

사각의 거대한 불 위로 튀어오른 불씨들 공중에서 흩날린다 흰 종이에 무엇을 적어서 냈냐고, 물어도 친구는 아무 말이 없고

 

불을 둘러싼 채 우리는 거대한 원을 그리며 춤을 췄다 밤하늘에 녹아내리는 불씨 같은 춤을, 한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며

 

거대한 불 속으로

서서히 멀어져가는 집

누군가의 이름이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저지르는 사람은 없지, 그것은 모두가 아는 마음 때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귀를 잠갔다 우리는 경쟁하듯 더 빠르게 원을 돌고

 

이 노래가 끝나고 난 후

벌어질 일을 알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실은

모두 같은 홈을 향하고 있다는 걸

그라운드 위의 아이들처럼

우리에게 집이란 건 멀리 있으니까

 

캠프파이어의 불이 꺼지고

우리는 재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방 안에 누워 있고 나는 작은 창문으로

 

베이스를 잃어버린 아이가

홀로 서 있는 것을 보곤 했다

꺼져가는 전광판의 불빛 아래

 

 

 

수목원

 

 

어린잎들이 말라가는 것 퉁퉁 부은 뿌리들이 썩은 열매처럼 떠다니는 것 수많은 오늘과 오늘의 날씨가 죽은 개미떼처럼 쌓여 있는 것

 

이것이 젊음이라고

늙은 선생이 소리친다

칠판 앞에 놓인 화분을 가리키며

 

우리를 보지 않은 채

우리를 이야기한다

 

손을 뻗으면 맞닿을 거리에 있는 식물, 징그러워서 손을 댈 수 없다 식물은 점차 거대해지고 있다 표정과 잎사귀들이 마구 자라나 한그루의 숲이 되어간다

 

그 속을 들여다볼수록

여름 안에 갇힌 듯 무덥다

해마다 줄어든 교복이 어깨를 조르고

 

검은 머리로 흰 머리를 감춘 채 교실 구석에 잠든 아이들 그중 하나가 무릎을 두드린다 낡은 철제 의자처럼 삐걱거리는 무릎을 교실은 어떻게 견디는 걸까

 

선생님이 화를 낸다

식탁 위에 놓인 유리잔처럼

몸을 가만두지 못한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이것은 끝을 모르고 거대해지기만 한다

 

우리처럼

 

책상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뿌리를 움켜쥔 채 우리는 교실의 숲을 바라본다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가끔씩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을 때면

 

습관처럼 두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