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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기호 李起昊
1972년 강원 원주 출생.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김 박사는 누구인가?』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장편 『사과는 잘해요』 『차남들의 세계사』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등이 있음.
antigiho@hanmail.net
장편연재 2
싸이먼 그레이
4-5. 대학원 시절
· 싸이먼 그레이가 대학원에 입학한 2001년엔 뉴욕에서 ‘9·11 테러’가 발생했다. 10월엔 ‘벨파스트 협정’에 의거 IRA가 1차 무장해제를 시작했지만 그게 뭔 상관이냐는 듯 북아일랜드 곳곳에서는 연일 신교도와 구교도가 충돌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그해에만 경찰관 11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기도 했다.1 아일랜드 출신 그룹 U2의 「Beautiful Day」가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한 것도 이해의 일이었다.
· 아일랜드 경제가 사상 유례없이 꿀을 빤 성장을 한 것도 2001년의 일이었다. 당시 아일랜드 1인당 국민소득은 EU 평균의 115%에 달했다.2
· 경제만 성장한 게 아니고 집값이나 물가 또한 덩달아 성장하여, 2000년부터 2008년 사이 아일랜드 집값은 두배로 뛰어올랐다. 2001년 아일랜드 물가상승률은 4.9%로 유럽 평균의 두배에 달했고, 2002년 역시 4.6%로 압도적인 선두를 유지했다. 여담이지만 이래서 만국의 집 없는 서민들은 서로서로 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집값도 오르고 월세도 오르고, 맨날 듣는 소리라곤 ‘연봉을 한푼도 안 쓰고 14년간 고스란히 모으면 더블린에 작은 집 한채를 살 수 있다’ 이딴 말들뿐이니, ‘어라, 너흰 14년이니? 우리 서울은 18년이야. 반갑다, 친구야. 우리도 나중에 집주인 되면 서로 에어비앤비 해볼래?’ 저절로 이런 마음이 되는 것이다.
· 2001년 10월 싸이먼 그레이는 골웨이 국립대학교 자체 장학제도 중 하나인 ‘하디만(Hardiman) 장학금’의 수혜자로 선정되었다. 대학원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면제해주는 이 장학 프로그램으로 덕에 싸이먼 그레이는 주중에 하던 게스트하우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주말에만 주유소 일을 하게 되었다. 이후 박사과정에 진학했을 땐 아일랜드 연구위원회(Irish Research Council)의 장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 모든 절차를 알아봐주고 추천서를 써준 사람이 윌리엄 캐리 교수였다고 한다.
· 싸이먼 그레이와 함께 석사과정에 입학한 학생은 모두 열네명이었는데, 대니얼 놀란처럼 골웨이 국립대학교 출신이 여섯명이었고, 더블린과 코크, 리머릭에서 온 학생이 다섯명이었다. 다른 세명은 각각 불가리아와 스위스, 스페인에서 온 유학생들이었다. 아일랜드는 그해부터 본격적으로 유로화를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 석사과정 한학기 등록금은 3천2백 유로였다고 한다. 자국 학생은 2천 유로.3
· 골웨이 국립대학교 ‘작문’ 석사과정은 1년 풀타임 과정으로 대부분의 강의는 창작 워크숍과 세미나로 진행되었다. ‘작가연구 세미나’는 필수 교과목이었고, ‘시창작 워크숍’ ‘소설창작 워크숍’ ‘극작 워크숍’ 등은 선택 교과목이었다. 8월에 제출하는 최종 창작 포트폴리오를 통해 졸업 여부가 가려졌다.
· 싸이먼 그레이는 ‘소설창작 워크숍’ 시간에 생애 처음 소설을 써서 제출했다고 한다.4
· 소설 제목은 ‘부고 이메일’(Obituary Email).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늦은 밤, 캐런은 한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대학 때 같은 강의를 들었던 브라이언에게서 온 것이었다. 브라이언? 브라이언 오 마틴? 캐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얘가 무슨 일이지? 캐런은 브라이언의 얼굴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이름도 기억나고, 그와 함께 펍에서 술을 마신 기억도 선명했지만, 얼굴은 마치 불투명한 창 너머에 서 있는 사람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물론 대학을 졸업한 지 벌써 십삼년이나 지났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다. 친하게 지냈다고는 하지만 그때뿐,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 없는 사이였다. 하긴, 그건 브라이언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녀 주변에 남아 있는 대학 동기라곤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누군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캐런은 그 모든 것을 그저 그날 자신의 컨디션 탓으로 돌렸다. 캐런은 그런 사람이었다.
캐런은 삼년 전부터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한 기획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영화 개봉 이벤트와 신차 출시 기자간담회, 블루크랩 축제, 보트 회사들의 컨퍼런스와 수산물 박람회 등 온갖 이벤트와 축제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총괄 운영하는 회사였다. 하지만 직원은 인턴인 로버트를 포함해서 여섯명에 불과했다. 부부이자 회사의 공동 대표인 터너와 레이첼은 주로 계약 성사에만 목을 맸고, 나머지 일, 그러니까 세금 관련 문제나 행사 프로그램을 짜는 일, 출연자 섭외와 홍보는 거의 다 캐런이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선박 회사 관계자들에게 박람회 부스 홍보 팸플릿을 나눠주고 돌아와선 곧장 미식축구 홍보팀 직원과 함께 마스코트가 쓸 헬멧의 치수와 갈까마귀 위치를 확인해야만 했다. 캐런이 사람을 더 뽑아야 한다고, 웹사이트 같은 문제는 자신도 잘 모르는 분야라고 말하면 터너와 레이첼은 항상 같은 말을 했다. ‘캐런, 그런 건 외주를 주면 되잖아? 우린 그냥 플랫폼 같은 회사라고. 플랫폼에 사람 많이 세워둘 필요 있어? 기둥만 많이 세우면 되는 거야.’
그날도 캐런은 이틀 앞으로 다가온 파티 준비를 하느라 밤 11시가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터너와 레이첼이 주최하는 그 파티는, 이름만 파티일 뿐 사실 비즈니스 미팅이나 다름없었다. 메릴랜드 주지사 부부와 볼티모어 시의원들, 항만노조위원장과 지역문화예술인들을 초대한 그 파티에서 터너와 레이첼은 내년 메릴랜드에서 열리는 비어 페스티벌의 운영권에 대해서 처음 운을 뗄 생각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주지사 부부의 호감을 사는 것이 중요했다. 주지사가 뽀르뚜갈 와인에 문어요리를 좋아한다는 것과 주지사 부인이 선호하는 색깔이 코발트블루라는 것, 백장미로 정원을 꾸며놓았다는 것과 까나뻬를 즐겨 먹고 듀크 엘링턴의 재즈를 자주 듣는다는 것, 그 밖의 다른 사소한 것들. 캐런의 노트에는 그런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고, 그에 따라 파티가 열릴 이너하버 옆 컨벤션센터 스카이라운지를 세팅했다. ‘캐런, 우리도 하루 종일 전화만 붙잡고 있었다고. 빌어먹을 노조위원장이 자기 아이들까지 다 데려가면 안 되냐고 졸라대는 통에 임시 보모까지 따로 알아보고 있다고. 그러니 어떡해? 캐런이 애써줘야지. 파티가 그럴싸해 보여야지 주지사도 비어 페스티벌이든 채식주의자 페스티벌이든 맡길 마음이 들 거 아니야.’ 캐런은 그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캐런에게 그다음 일들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지금 해치워야 할 일들과 지금 손에 느껴지는 감각들, 당장의 문제들. 캐런에겐 오직 그런 것들만이 중요했다. 캐런에겐 터너와 레이첼 또한 지금의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런 캐런에게 과거의 한 사람이 마치 코너를 돌자 느닷없이 나타난 호수처럼 등장한 것이었다. 브라이언은 이메일에서 간단한 안부를 건넨 후 콜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췌장암 진단을 받은 후 채 육개월도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고 했다. 장례식은 이틀 후, 더블린 교외에 위치한 한 성당에서 열린다는 안내도 함께였다.
‘너한텐 그래도 알려야 할 거 같아서 이메일을 보내. 참석하든 그렇지 않든, 그건 너의 선택이겠지만, 그래도 알고 오지 않는 것과 모르고 오지 않는 것의 차이는 있을 테니까. 콜린도 이런 내 마음을 원망하진 않을 거야. 콜린은… 마지막까지도 네 생각을 많이 했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야.’
캐런은 이메일을 다 읽고 난 후 기분이 상했는데, 그건 브라이언의 문장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무언가 섣불리 단정 짓고, 또 어떤 비난까지 서둘러 내린 듯한 태도들이, 그 여백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캐런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것이 바로 그때, 그녀가 느낀 감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감각이 캐런에겐 도움이 되었다. 캐런은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 그대로 컴퓨터를 끄고, 와인을 한잔 마시고, 양치질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계속 브라이언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노력했다. 잠시도 그 생각을 놓으면 안 된다는 듯, 캐런은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그녀는 잠깐,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콜린의 부고로부터 멀리 달아나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그 생각으로부터도 멀리 달아나고자 침대 옆 탁자에 놓아두었던 수첩을 펼쳐 들었다. 나는 내일 아침 8시 30분에 화원에 가야 해, 주문한 백장미와 화병을 확인해야 하니까. 그러고 나선 곧바로 로버트와 함께 컨벤션센터 지배인과 미팅을 해야 해. 테이블 배치도도 확정해야 하고… 그녀는 펜을 든 채 내일 만나야 할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브라이언에게 내가 뭘 잘못한 것일까? 내가 뭘, 어쨌다고…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 생각을 했고, 그러자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캐런은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하늘색 계통의 블라우스를 차려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메릴랜드 주지사 부부도 예정대로 참석했고, 시의원들도 늦지 않은 시간에 도착했다. 터너와 레이첼 부부는 작년에 은퇴한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투수 부부와 함께 파티에 참석했는데, 그게 마치 무슨 히든카드처럼 주지사 부부의 눈길을 빼앗았다. 주지사는 명예의 전당에까지 오른 그 투수 곁을 한시도 떠나려 하지 않았고, 터너와 레이첼 부부도 그 곁을 맴돌았다. 로버트가 뉴욕에서 공들여 불러온 흑인 재즈 연주자의 피아노곡도 나무랄 데 없었다. 캐런은 파티가 시작된 후에도 출판사 관계자들, 선박회사 임원들 사이에서 예의를 갖추면서, 또 웃을 때 웃어주면서, 그러면서도 계속 곁눈질로 주지사 부부를 살폈다. 파티는 별다른 문제 없이 터너와 레이첼 부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주지사 부인은 앉은자리에서 연어와 리꼬따치즈 까나뻬를 열개도 넘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캐런은 볼티모어 지역유권자연맹 사람들 근처로 다가가다가 저도 모르게 한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창가 기둥 앞이었다. 멀리 창밖으로 이너하버에 정박한 배들과 가로등, 그리고 화력발전소 굴뚝의 점멸등이 내려다보였다. 그 사이를 흐르는 검은 대서양의 물결들… 그 물결들 속에서 무언가 자꾸 튀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캐런은 창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피아노 연주는 계속 경쾌하게 들려왔고, 누군가 과장되게 웃는 소리, 의미없는 말들이 서로 엇갈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구둣발 소리, 와인잔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어떤 커다란 담요처럼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 담요 안에서 캐런은 계속 쪼그려 앉아 있었고, 그러다가 이내 울기 시작했다. 자신의 우는 얼굴이 고스란히 유리창에 비쳤지만, 그녀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콜린의 이메일이 멈춘 것은 육개월 전의 일이었다. 오년 내내 이어지던 이메일이 어느 한순간 그렇게 그친 것이었다. 읽어보지도 않고 삭제한 그 이메일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걸 쓰던 콜린의 시간은 이제 어떻게 잴 수 있을까…? 캐런은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캐런을 보면서 웅성거렸고, 로버트가 황급히 달려와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캐런의 울음소리는 더 커져갔다. 물기 가득한 그녀의 두 눈엔 어두운 물결 속에서 무언가 계속 튀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빛이었고, 누군가의 숨이었으며, 또한 종을 알 수 없는 물고기였다.
· 싸이먼의 소설은 윌리엄 캐리 교수로부터 ‘문장은 괜찮으나 구성과 캐릭터, 핍진성의 차원에선 문제가 많다’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아울러 같은 석사과정 동기들에게도 ‘감상적이고 단순하며, 독창적이지도 않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5
· 하지만 그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후 싸이먼 그레이는 박사과정 2년 차 때까지 모두 38편의 소설을 새로 썼다고 한다. 채 삼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쓴 소설이 그렇다고 한다. 가장 긴 것은 5만 2천자를 넘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소설은 글자 수 2만자 미만의 단편소설들이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윌리엄 캐리 교수는 몹시 환장했는데 힘들어했는데, 거의 매주 한편씩 싸이먼의 소설을 읽어주느라 많은 시간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6
· 싸이먼 그레이는 주로 학교 도서관과 기숙사에서 소설을 썼다고 한다. 기숙사에선 주로 노트에 초고를 썼고, 도서관에선 그것을 다시 컴퓨터로 옮겨 적는 방식으로 한편 한편 완성했다고 한다. 그는 주로 새벽 시간에 글을 많이 썼는데, 꼭 헤드랜턴을 착용한 채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도 싸이먼 그레이와 같은 방을 썼던 대니얼 놀란은 그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 싸이먼을 부르면 항상 빛이 먼저 응답했다고 한다. ‘이건 뭐, 마치 꼭 하느님과 같은 기숙사 방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고도 한다. 이후로도 싸이먼은 글을 쓸 땐 항상 헤드랜턴부터 머리에 착용했다고 한다. 불이 들어오든 그렇지 않든. 심지어는 도서관에서도 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게 어떤 모습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냉장고에서 달걀 한알을 꺼내 삼분의 일 되는 지점에 사인펜으로 굵은 줄 하나를 그어보면 된다.
· 당시 싸이먼 그레이가 썼던 소설 제목들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민물장어낚시’ ‘민물장어의 눈’ ‘죽은 민물장어 두마리’ 이건 무슨 수산물 삼부작도 아니고… ‘네 이웃의 수모’ ‘죽은 자의 목소리’ ‘가을, 쏠트호’ ‘스팀 펍의 오후’ ‘빌링스게이트의 민물장어’ 사부작… ‘돌아온 교사 해리 아터’ ‘클리프덴 35번가’ ‘지질박물관 앞 사거리엔 별이 뜨지 않는다’ ‘민물장어는 말이 없다’ 우리도 더이상 할 말이 없다… ‘부러진 자전거 페달’ ‘코리브강의 침묵’ 등등.
· 소설 쓰기에 한창 몰입했던 시기, 싸이먼은 방학 때도 클리프덴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크리스마스이브 때나 잠깐 들렀다가 그다음 날 서둘러 올라갔다고 한다. 싸이먼의 할머니인 제럴딘 셰이스 그레이는 그런 그를 위해 오랜 시간 기도해주었다고 한다. 매번 직접 만든 빵을 싸주기도 했다고 한다. 모교의 키어런 제퍼슨 선생님과는 계속 이메일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자신이 쓴 소설 몇편을 직접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키어런 제퍼슨은 그 소설을 모교의 후배들에게 육성으로 읽어주었는데, 그때마다 ‘곧 작가가 될 너희들의 선배가 쓴 소설’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 그 당시 싸이먼은 단 한번도 민물장어낚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 대니얼 놀란에 의하면 싸이먼은 소설을 쓰지 않은 채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도 꽤 많았다고 한다. 자신이 ‘잘 안 돼?’라고 물으면 싸이먼은 늘 같은 대답을 했다고 한다. ‘낚싯대 주인은 밑에서 뭐가 올라올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그때마다 대니얼 놀란은 벙찐 표정으로 그냥 아무 말 없이 싸이먼 그레이를 바라보기만 했다고 한다.
· 2002년 10월부터 싸이먼 그레이는 자신의 소설을 아일랜드의 몇몇 출판사에 집중 투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만족스러운 대답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중 한곳인 디덜러스 출판사(Dedalus Press)에서 보내온 이메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싸이먼 그레이 씨,
우리는 당신이 투고해온 소설을 진지하고 엄정하게, 또 흥미롭게 읽어보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클리프덴의 풍경 묘사도 정교했으며, 낚시에 대한 철저한 세부사항과 정보 또한 우리로 하여금 소설 속 주인공인 ‘제임스’에 대한 신뢰를 갖게 만드는 데 충분한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구성과 스토리에 있어서는 여러 검토위원들이 의문을 나타낸 게 사실이다. 낚시에 대한 분량이 지나치게 많아서 그로 인한 미묘한 상징성 또한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또한 십년 만에 갑작스럽게 호수에 나타난 아버지의 존재와 그런 아버지를 낚싯줄로 목 졸라 나무에 매단다는 설정은 아무래도 우연적이고 감상적이며 작위적이지 않은가, 하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결말을 다르게 배치하고, 캐릭터의 내면을 다층적으로 보완한다면 미학적으로 더욱 완성도 높은 소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엔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유감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 소설의 가능성을 믿고 있다. 새로운 작품으로 당신과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겠다. 당신의 앞날을 응원하며.
디덜러스 출판사 문학 담당 편집장 존 윌리엄 올드리지7
· 그러거나 말거나 싸이먼 그레이는 소설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그의 이메일 발송내역엔 같은 과 로버트 에이크먼 교수에게도 여러편의 소설을 보낸 기록이 남아 있다. 로버트 에이크먼 교수는 단 한번도 답장해주지 않았다.
· 키어런 제퍼슨 선생님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싸이먼은 ‘막막하고 어렵고 고통스러운데, 또 막상 소설을 쓸 땐 재밌고 아무 생각도 안 나요’라고 말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피곤한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고 ‘소설을 한편 한편 완성할 때마다 어떤 흥분 같은 게 느껴진다’라는 문장도 적었다. 그때마다 키어런 제퍼슨 선생님은 답장을 보내왔는데 ‘어, 그거 나도 뭔지 알 거 같아. 나도 연애할 때 꼭 그랬거든’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 2002년 11월엔 싸이먼의 대학원 동기인 에밀리 쏘넷(Emily A. Sonnet)의 첫 시집 『그럼, 다시』(Then Again)가 영국 블루도어 출판사(Blue Door Publishers)에서 출간되었다. 그녀의 첫 시집은 여러 언론과 평론가로부터 ‘독창적이고 실험적이며, 뛰어난 감성적 통찰을 품고 있다’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로 인해 그녀는 일약 아일랜드의 촉망받는 젊은 시인으로 급부상했다.8 이후 에밀리 쏘넷은 2004년 디덜러스 출판사에서 두번째 시집인 『스톤 걸』(Stone Girl)을 펴냈으며, 이 시집으로 패트릭 카바나 문학상(Patrick Kavanagh Award)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9년엔 다시 블루도어 출판사에서 장편소설 『딸들의 집』(The House of Daughters)을 펴내기도 했다. 그녀는 현재는 블루도어 출판사의 기획편집위원으로 일하며 작품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 에밀리 쏘넷은 첫 시집이 나온 직후 한 문예지와 나눈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사실 아일랜드 문학판이라는 곳이 너무 웃기지 않나요? 왜 이 나라 작가들의 목록엔 조이스와 예이츠와 와일드밖에 없는 거죠? 왜 베케트와 스위프트와 히니와 맥가헌과 도일밖에 안 보이느냐 이거예요. 아니, 그렇게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제 주변만 해도 마찬가지죠. 제가 지금 다니고 있는 골웨이 국립대학교 영문과만 하더라도 교수진이 모두 열세명이에요. 강사 네명까지 포함한 숫자가 그렇죠. 한데 그중 여성 교수가 몇명인 줄 아세요? 한명이에요, 한명, 단 한명. 학부나 대학원이나 여성 학생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왜 교수들은 다 남성이 차지하고 있는 거죠? 이건 말하자면 어떤 구조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죠. 그런 지랄 같은 구조 때문에 이 땅의 문학판 자체가 오직 남성들만 말하고, 남성들만 읽고, 남성들만 쓰는, 그들만 주체로 각인되는 리그가 되어버린 거죠. 그런 환경 속에서 문학을 배우고 글을 쓰는 친구들의 작품이 어떻겠어요? 뻔한 거죠. 여성은 늘 눈물을 흘리는 존재인 거고, 극복의 대상이 되는 거죠. 은연중에 차별과 혐오가 문장 속에 각인되고,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대상으로만 그려지는 거예요. 아니,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남자 때문에 주인공인 여성이 갑자기 오열한다는 게, 그런 서사가 말이 되나요? (…) 물론이죠. 저도 그게 어떤 의도성을 지녔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그게 어떤 의도성을 지녔든 아니든, 그거와 상관없이 모든 차별과 혐오는 다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의도성 여부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나요? 의도성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것도 저는 죄악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비판적 사유가 결핍되었다는 증거니까요. 글을 쓰는 자가 ‘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얼 생각한다는 거죠?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왜?’라는 생각을 접을 때, 그때 비로소 악마가 깃든다는 것. 그게 이번 제 시집의 핵심이기도 하죠.9
· 싸이먼 그레이는 한국으로 건너올 때 딱 세권의 책만 들고 왔는데, 그중 한권이 에밀리 쏘넷의 첫 시집 『그럼, 다시』였다. 시집의 간지에는 ‘싸이먼 그레이에게, 모든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며’라고 쓴 에밀리 쏘넷의 친필 서명이 적혀 있었다. 시집 맨 마지막 페이지엔 싸이먼이 쓴 게 분명한 ‘천재적인!’이란 단어가 휘갈겨 적혀 있기도 했다.
· 에밀리 쏘넷은 2003년 3월 박사과정을 중도에 그만두었고, 그후 다시 골웨이 국립대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 그 무렵 싸이먼 그레이는 그의 38번째 소설인 「볼품없는 손짓」을 완성했다고 한다. 글자 수 1만 3천자 분량의 이 짧은 소설은 ‘한 젊은 화가가 그림을 접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하루’를 그린 이야기였다. 노트북에 저장된 「볼품없는 손짓」의 파일 정보를 살펴보면 최초 시작한 날짜는 2003년 1월 13일이고, 마지막 수정한 날짜는 그해 4월 24일 오전 4시 20분으로 되어 있다. 「볼품없는 손짓」은 싸이먼이 쓴 소설 중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작품이기도 하다.
· 2003년 5월, 싸이먼 그레이는 난생처음 더블린에 가게 되었다. 그해 더블린 시내 전역에서 개최된 ‘더블린 국제 문학 축제’(International Literature Festival Dublin)에 행사진행 보조요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 행사에서 싸이먼은 처음으로 소설가 존 맥가헌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그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고도 한다. 당시 강연의 사회자는 윌리엄 캐리 교수였다. 그 강연에서 존 맥가헌은 ‘소설의 운명, 소설가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군인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학대와 암으로 죽은 어머니, 그 이후 교사로서의 경험과 농장에서의 노동이 어떻게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는지,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운명이었다는 말 또한 덧붙였다고 한다.
· 축제 기간 중 싸이먼의 숙소는 내셔널 콘서트홀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였다. 그곳에 머무는 나흘 내내 싸이먼은 밤마다 혼자 리피강 근처를 배회했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이스트월과 아버힐을 둘러보고 돌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싸이먼이 본 것은 어두운 리피강 둔덕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일군의 젊은이들이었다고 한다. 모닥불을 피운 채 추위에 떨고 있던.
· 싸이먼 그레이가 다시 민물장어낚시를 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6월부터라고 한다. 그는 더블린에서 돌아온 직후 거의 보름 가까이 기숙사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소설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10
· 그는 당시 불가리아에서 유학 온 또도르 보두로프(Todor Bodurov)와 같은 기숙사 방을 썼는데, 그해 6월부터 거의 매일 저녁 함께 코리브강으로 낚시를 나갔다고 한다.
· 또도르는 불가리아 소피아 출신으로 소피아 국립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골웨이 국립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으며, 이후 싸이먼보다 사년 늦게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타이어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은 그가 일곱살이 되기 전 이혼했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손에서 자란 또도르는 대학교를 졸업한 뒤 잠깐 타이어 공장에서 일하다가 어머니의 지원을 받아 아일랜드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11 그는 영어를 읽고 쓰는 덴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듣기와 말하기엔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 현재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인12 또도르 보두로프는 최영근 교수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싸이먼 그레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문: 당신과 싸이먼 그레이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답: 함께 낚시하는 사이였습니다.
문: 당시 싸이먼 그레이에게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답: 헤드랜턴을 한 채 낚시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문: 당신과 싸이먼 그레이는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나요?
답: 우리는 낚시할 때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문: 당신과 싸이먼 그레이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해준다면?
답: 낚시를 하던 중에 싸이먼이 혼자 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문: 그게 전부입니까?
답: 그게 전부입니다.
· 2003년 8월, 두달 넘게 코리브강에서 민물장어낚시만 했던 싸이먼 그레이는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 두달 동안 싸이먼 그레이는 단 한마리의 민물장어도 낚지 못했다고 한다.
· 그는 당시의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소설이라는 것이 놀라운 게,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의 삶을 썼는데, 거기에는 나도 모르는 내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논리도 가능해진다. 내가 못났으면 소설은 자연 엉망일 수밖에 없다는 것. 소설을 서른편을 쓰든 오십편을 쓰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클리프덴 촌동네 출신으로, 이전까지 나는 알게 모르게 내가 꽤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나는 누군가를 버리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외면한 적도 없었으니까. 더러운 게스트하우스 침대보를 빨고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후회나 원망 같은 감상에 빠진 적도 없었다. 그것이 내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혐오에서 온 자부심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미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안 깊숙이 뿌리박힌 혐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게 맞는 걸까? 내가 소설을 쓴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소설을 쓸 만한 상태인가? 그 상태는 꽤 오랫동안, 내가 대학원을 다니고 학위를 받고 다시 모교에서 강사생활을 하는 내내 이어졌다. 어쩌면 내가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건 읽는 일뿐이겠구나, 그게 전부이겠구나… 소설에 전력투구한 후 나는 겨우 그 생각에 다다르고 말았다.13
· 하지만 그에 대해선 다른 의견도 있는데, 소설가 이기호는 ‘아니, 그러면 뭐 소설 쓰는 사람들은 다 괜찮은 친구들이게? 뭐 다 잘났어?’라고 말한 후 ‘그건 그냥 지친 상태일 뿐’이라는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 아울러 ‘원래 자신의 부끄러운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소설의 첫 시작인데, 싸이먼은 그 시작에서 머뭇거리다가 끝났다’는 평가도 내놓았다고 한다. ‘그게 다 싸이먼의 감상적이고 서정적인 태도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14 하여간 소설 쓰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말이 정말 많다. 그게 부끄러워서 소설을 쓰는 모양이다.
· 싸이먼 그레이의 몸무게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고 한다. 싸이먼은 학부 시절 내내 174센티미터에 68킬로그램을 유지했지만, 2004년 3월엔 76킬로그램을 무난히 돌파했다고 한다. 그는 주말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것 외에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기숙사 침대와 낚시의자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대부분 식료품 구입에 썼는데15 스콘과 햄, 소시지 등을 일주일에 한번씩 대량 구매했고, 기숙사에서 직접 버섯파이와 아이리시스튜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특히 독일 리스토란테사에서 나온 냉동피자를 거의 일일 일판씩 먹어치웠다고 한다.16 다행히 불가리아 출신의 또도르가 매일 직접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요거트를 건네줘 싸이먼의 장 건강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 2004년 6월부터 싸이먼 그레이는 소설 대신 윌리엄 캐리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논문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해부터 윌리엄 캐리 교수는 골웨이 국립대학교 내 따로 ‘존 맥가헌 스쿨’을 개설하기 위해 단과대학장과 대학원장, 골웨이 카운티 공무원들과 여러차례 미팅을 갖기 시작했는데,17 그에 따른 실무적인 업무를 싸이먼 그레이에게 맡겼다고 한다.18 자연스럽게 그의 박사논문 주제도 ‘존 맥가헌’ 소설 연구로 정해졌다고 한다. 논문의 제목도, 방향도, 목차도 대부분 윌리엄 캐리 교수의 뜻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윌리엄 캐리 교수가 논문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싸이먼 그레이는 그 옛날 라이언 존슨 신부에게서 영어를 배울 때처럼 멍하니, 마치 낚싯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고 한다.
· 당시 상황에 대해서 윌리엄 캐리 교수는 이렇게 진술했다.
—싸이먼이 받은 아일랜드 연구위원회 장학금은 박사학위를 취득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준 거거든요. 그게 단순히 등록금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고, 기숙사비, 교재비, 연구보조비 등도 다 포함된 거라서… 실적이 필요했어요. 그걸 싸이먼도 잘 알고 있었구요… 네, 그럼요. 그래도 제가 그 누구보다 싸이먼의 소설을 제일 많이 읽은 사람인데… 그걸 어떻게 모르겠어요. 저도 나름대로 알고 지내던 편집위원들에게 부탁도 해보고, 추천도 하고, 여러 노력을 해봤죠. 한데, 그게 단순히 그런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새로운 부분이 좀 있어야 하는데… 싸이먼 소설엔 결정적으로 그게 부족했거든요. 그건 어쩌면 노력의 여부와 상관없는 건데… 그걸 빨리 알아채고 정직하게 말해주는 것도 교수의 역할 중 하나죠. 저도 지금은 평론을 하고 연구를 하고 있지만, 연구자 중 처음부터 논문을 쓰고 평론을 썼던 사람이 몇명이나 있겠어요? 대부분 시작은 창작이었죠. 그래서 그가 더 애틋하고 마음이 쓰였던 거 같아요. 제가 싸이먼을 따로 불러서 얘기하기도 했어요. 문학이라는 게 꼭 자기 이름 내걸고 하는 것만 의미있는 건 아니다. 문학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엔 조용히 뒤따르던 이름 모를 수많은 사도들이 있어왔고, 그 사도들의 헌신 덕분에 비로소 학문의 위치까지 올라선 거다. 나는 그 헌신이 어쩌면 더 문학의 본질과 가깝다고 생각한다… 뭐 대충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걸로 기억해요. 싸이먼도 제가 무슨 뜻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는 눈치였구요.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알겠습니다’ 딱 그 말만 하고 나가더라구요. 이후부턴 제가 쭉 챙겨주었습니다. 논문에 필요한 책도 챙겨주었고, 방향성도 정해주었지요. 싸이먼은 제가 권하는 책들은 바로바로 읽어왔지만, 그걸 문장으로 만들어내는 덴 좀 어려움을 겪었어요. 아무래도 소설의 문장과 논문의 문장은 결 자체가 다르니까요. 그걸 계속 기다려주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19
· 2007년 6월, 싸이먼 그레이는 삼년 만에 박사논문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몸무게는 이미 82킬로그램에 도달했다고 한다.
· 싸이먼 그레이의 박사학위 논문을 요약하자면 존 맥가헌의 장편소설 『여인들 사이에서』(Amongst Women)를 중심으로 각 인물들, 그러니까 아버지인 모런과 두번째 부인인 로즈 브레디, 첫째 아들 루크와 둘째 아들 마이클, 첫째 딸 메기와 둘째 딸 모나, 셋째 딸 쉴라에 대한 각각의 성격분석과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인 거대 목초지(Great Meadow)가 지닌 상징성, 그것이 다시 아일랜드 민족주의와 어떤 연관관계를 맺는지 분석한 글이었다. 특히 논문의 가장 많은 부분을 모런의 두번째 부인인 로즈 브레디 분석에 할애했는데,20 기존 연구와는 달리 그녀가 어떻게 새로운 포용적 민족주의를 상징하는지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의 ‘성적 차이’ 논의까지 접목시켜21 길게 설명하기도 했다.22
· 2007년 8월, 최종 박사학위 논문 심사가 끝난 후, 싸이언 그레이는 윌리엄 캐리 교수로부터 학부 강사 자리를 제안받았다고 한다. 1학년 전공 필수 교과목이었던 ‘창조적 글쓰기’와 2학년 선택 교과목이었던 ‘20세기 아일랜드 소설 연구’가 그것이었다. 싸이먼은 8월 중순부터 강의계획안을 짜고, 참고도서 목록을 정리하고, 필요한 논문을 복사하면서 모처럼 예전 소설 쓰기에 몰입했을 때처럼 바쁘게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해 모교의 강단에 서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학기 개강을 두주 앞둔 9월 중순, 클리프덴에서 홀로 지내던 그의 할머니가 스카이로드 근처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키어런 선생님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싸이먼은 그길로 곧장 클리프덴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가 지나도록 다시 골웨이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4-6. 강사 시절
· 2008년 2월부터 싸이먼 그레이는 골웨이에 있는 GLS어학원에서 중급(intermediate) 레벨 담당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주당 근무시간은 30시간이었고, 한달에 2천2백 유로를 받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 싸이먼이 모교 대신 어학원에서 먼저 강사생활을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23 싸이먼의 할머니인 제럴딘 셰이스 그레이는 허혈성 뇌졸중이었다. 다행히 쓰러진 지 두시간 반 만에 병원으로 옮겨졌고, 곧장 카테터 시술을 받아서 예후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이개월 가까이 입원생활은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싸이먼은 그 이개월 동안 단 하루도 할머니 곁을 떠난 적 없었고, 퇴원 후에도 줄곧 클리프덴에 머물렀다고 한다.24 싸이먼은 할머니 대신 집안일을 했고, 할머니의 식사를 도왔으며, 할머니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함께 갔다고 한다. 그외 남는 시간엔 예전에 읽었던 예이츠의 시집과 산문집을 읽었다고 한다. 따로 글을 쓰진 않았다고 한다.
· 모아둔 돈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싸이먼은 또다시 머피 씨에게 병원비를 빌려야만 했다고 한다.25
· 당시 싸이먼의 내면은 이후 빛고을타임즈에 쓴 「성탄전야」 칼럼을 통해 대강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이제 곧 성탄절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성탄절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슬픔은 성탄절 때문에 더 슬퍼질 것이고, 또 어떤 아픔은 성탄절로 인해 더 깊어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성탄절이란 평상시 우리가 우리의 감정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고 지내는지 잘 드러나는 하루일 것이다. (…) 그때 할머니가 누워 있는 방엔 늘 희미한 스탠드가 켜져 있었다. 나는 내 방에 앉아 책을 보다가 가끔씩 거실로 나와 벽난로 앞에 앉아 있곤 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 방문 아래로 새어 나오는 스탠드 불빛을 우두커니 바라보곤 했다. 그 빛은 따뜻하고 순해 보였지만, 또 어느땐 금방 꺼질 것처럼 생기 없어 보였고, 늙어 보이기까지도 했다. 그렇게 보일 건 또 뭐란 말인가? 마음속에서 계속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럼에도 자꾸 그 불빛으로 눈길이 갔다. 만약 불빛에도 목소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이 나에겐 슬픔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마도 성탄절을 이틀인가 사흘쯤 앞둔 저녁이었을 것이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벽난로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지팡이를 짚은 채 힘겹게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할머니에게 다가갔지만, 할머니는 내 손을 거부했다.
“싸이먼, 날 좀 내버려두렴.”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날이 서 있었고, 그런 만큼 단호했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지 못한 채, 그렇다고 할머니 곁에서 완전히 떨어지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함께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는 벽난로 앞 의자에 앉더니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그 숨은 마치 어떤 전염병처럼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는데,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계속 숨을 참고 있어야만 했다. 할머니는 그런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벽난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곤 말했다.
“싸이먼, 기분 상하더라도 내 말을 잘 들으렴.”
할머니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네가 나한테 이러는 게 싫어. 너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엔 당연한 거라는 건 없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마음들만 있을 뿐이지.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괜찮아졌어. 이렇게 너와 다시 말도 할 수 있게 됐고, 느리지만 나 혼자 걸을 수도 있어. 그거면 다 된 거야.”
“하지만 할머니…”
“싸이먼,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
“싸이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어. 그건 아마 내가 죽은 뒤에도 마찬가지일 거야… 하지만 싸이먼, 나는 너를, 너로 사랑하는 거야.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사랑하는 게 아니란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계속 그렇게 너를 사랑하고 싶어. 그게 내 소망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니?”
“네, 할머니…”
“그래, 그럼 이제 네 마음에 대해서 얘기해보렴. 뭐가 그렇게 너를 불편하게 만드는지…”
나는 그제야 내 마음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자꾸 책을 보다가 거실로 나왔는지, 왜 자꾸 할머니 방문 아래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반복해서 바라보았는지, 그러면 슬픔이 더 차오르는데도, 그런데도 왜 자꾸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는지에 대해서…26
· 싸이먼이 일하게 된 GLS어학원은 쏠트힐(Salthill) 해안도로에 위치한 가구상가 건물의 이층과 삼층을 임대해 쓰고 있었는데, 이층엔 원장실과 안내데스크, 작은 학습실 겸 멀티미디어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삼층엔 여섯개의 소규모 강의실이 있었다고 한다. 강사는 싸이먼을 포함해서 모두 일곱명이 있었다고 한다. 초급(elementary) 레벨에 두명, 중급 레벨에 두명, 고급(advanced) 레벨에 두명, 그리고 따로 아이엘츠(IELTS) 과정 담담 강사가 한명 더 있었다고 한다.
· 싸이먼에게 어학원을 소개해주고, 이력서 내는 것을 도와준 사람은 대학원 룸메이트였던 불가리아 출신 또도르였다.27 어학원 원장은 토빈 히스(Tobin Heath)로, 그녀는 더블린 소재 GLS어학원에서 강사로 육년 동안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한다.
· 싸이먼은 취직하자마자 어학원 홈페이지에 대표 강사로 메인 화면을 장식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어학원 내에서 유일한 박사 출신 강사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진 위로 ‘교육은 들통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밝히는 것이다’(Education is not the filling of a pail, but the lighting of a fire)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고도 한다. 사진 속 싸이먼의 얼굴은 퉁퉁한 볼살과 짧은 머리카락을 뒤로 모두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 때문에 약간 촛불처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 어학원엔 대략 칠십명 정도의 수강생이 다니고 있었는데, 압도적으로 브라질 출신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학원 원장인 토빈 히스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와 상파울루에 있는 다수의 유학원들과 협업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유학원에서 보내주는 학생 수에 따라 커미션의 금액 차이가 발생했다고 한다. 다섯명을 보내주면 등록금의 10%, 열명 이상이면 등록금의 15%를 다시 브라질 유학원으로 송금해주었다고 한다. 싸이먼이 맡은 반도 총 여덟명 중 여섯명이 브라질 출신이었고, 나머지 한명은 프랑스, 또다른 한명은 독일 출신이었다고 한다.
· 싸이먼은 더이상 대학원 기숙사에서 지낼 수 없는 입장이어서 따로 방을 얻어야만 했다고 한다. 코리브 빌리지에서 도보로 오분 거리의 스튜디오를 빌렸는데28 월 임대료는 6백 유로였다.29 그 스튜디오로 매일 밤 또도르가 낚싯대를 들고 찾아왔다고 한다. 싸이먼은 이후 아일랜드를 떠날 때까지 계속 그 스튜디오에 머물렀다고 한다.
· 어학원에선 교재에 맞춰 읽기, 말하기, 쓰기와 문법을 강의했고, 금요일마다 퀵 테스트를 보고 상담까지 진행해야 했다고 한다.
· 싸이먼은 수강생들에게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모양인데, 그들이 어학원 홈페이지에 남긴 후기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아니, 싸이먼 선생님, 말하기 시간에 말을 안 하면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어학원의 시설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안내데스크에선 계좌 신청 서류까지 친절하게 대행해준다. 수강생들끼리의 관계도 끝내준다. 푸드 익스체인지 파티도 정기적으로 열린다. 가격 대비 훌륭한 어학원이다. 단, 싸이먼을 조심해라.
—나는 싸이먼 선생님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정확하고 품위있는 영어를 구사한다. 우리가 그것을 못 알아들을 뿐이다. 나는 그와 개인 상담을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내가 말하기 전엔 절대 먼저 말하지 않았다. 다른 선생님들에게선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침묵이었다. 정말 품위있었다.
—싸이먼, 개새끼! 나는 이 개새끼 때문에 그나마 알고 있던 영어도 잊어버리고, 심지어 모국어까지도 잊어버렸다! 어학연수까지 왔는데 알고 있는 언어를 모두 잊어버리다니, 이게 무슨 황당한 경우냐! 30
· 어학원 원장인 토빈 히스는 아일랜드 남부 워터퍼드(Waterford) 출신으로 더블린 소재 하이버니아 컬리지(Hibernia College)를 졸업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후 유치원 보조교사와 유아복 판매매장 점원, 놀이방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다가 처음 더블린 소재 어학원에서 강사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31 그녀는 어학원 강사생활 육년 만에 부원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후 부원장으로 사년을 더 근무하다가 2001년 골웨이 GLS어학원을 인수했다고 한다.
· 토빈 히스는 수강생들에겐 친절했지만, 강사들에겐 깐깐하고 냉정한 원장이었다고 한다. 삼층 강의실 복도를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 다니면서 강사들의 강의 태도를 몰래 수시로 점검했고, 출퇴근 시간도 엄격하게 체크했다고 한다. 이개월 단위로 수강생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해 연말에 있는 강사들의 재계약 심사에 반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밖에도 복장이나 상담일지 작성, 수강생들의 아이엘츠 성적 등을 두고도 강사들에게 잔소리가 심했다고 한다. 싸이먼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연말에 있었던 재계약 심사는 늘 통과시켜주었다고 한다. 물론 연봉은 오르지 않은 상태 그대로.
· 마이클 맥거번(Michael McGovern)은 싸이먼과 같은 시기에 어학원 초급 레벨 담당강사로 일했던 사람으로 지금은 브라질 싼따까따리나주에서 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최영근 교수와의 스카이프 인터뷰를 통해 당시 싸이먼을 이렇게 기억했다.
—싸이먼에 대해서 말하라는 거죠? 싸이먼, 싸이먼이라… 와우, 이게 참…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딱 떠오르는 이미지는, 거 왜, 무슨 식물 있지 않습니까? 잎 넓고 뚱뚱한 식물… 여기에는 그런 식물이 좀 많은데… 거기에 진액 같은 게 좀 흐르고 있는… 뭐 그런 게 생각나기도 하네요… 음, 제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원래 어학원 강사라는 게 약간 연극배우 같은 직업이거든요. 제가 지금 유학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영어요? 그걸 어떻게 육개월, 일년 안에 마스터합니까? 그거 다 말장난이거든요. 어학연수 일년 간다고 해서 변하는 건 거의 없어요. 다만 그런 기분이 들게 해주는 거죠. 자기가 이제 네이티브 스피커가 된 거 같은 느낌. 그걸 누가 해주겠습니까? 바로 어학원 강사들이 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어제 있었던 일들을 더듬더듬 말하는 수강생들에게 ‘와우, 표현이 많이 늘었다’ ‘발음이 정말 좋아진 거 같다’ ‘너 지금 굉장히 고급 영어를 구사한 거 알고 있냐?’ 온갖 제스처를 다 해가며, 웃긴 말까지 해가며 포장해주는 거죠. 수강생들한테 말할 땐 일부러 천천히, 또박또박 대사를 치고… 그러니까 이건 교육이 아니고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이에요. 약간 놀이동산 느낌도 있고요… 한데, 싸이먼은 그게 잘 안 된 거예요. 할 말만 하고, 리액션도 없고, 유머도 구사할 줄 몰랐죠. 괜히 말 걸면, 말 건 사람만 무안해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저도 싸이먼한테 한두번 그랬다가, 그 뒤부턴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죠. 같은 강사인 저도 그랬는데… 수강생들이야 뭐… 한데 좀 웃겼던 건, 우리 업무 중의 하나가 매주 수강생들이 제출한 에세이를 봐주는 거였거든요. 말하자면 피드백을 해주는 거죠. 보통 다른 강사들은 그것도 거의 고치질 않았어요. 철자 틀린 거나 몇개 고쳐주고, 그냥 마지막에 ‘엑설런트!’ ‘베리 굿!’ 뭐 기계적으로 그렇게 써주었죠. 한데, 싸이먼은, 평상시엔 말도 잘 안 하는 친구가 그 에세이들엔 유별나게 엄격하게 군 거예요. 문장마다 다 밑줄 긋고 이게 잘못됐다, 이런 문제가 있다, 이렇게 쓰면 안 된다, 하나하나 지적을 했죠. 그러니 그걸 받아본 수강생들 기분이 어떻겠어요? 한두번이면 그래도 자기 실력 탓하면서 받아들이지만, 그게 계속 반복되면 어떤 감정 같은 게 쌓이거든요. 말도 마세요. 그런 수강생들을 다른 강사들이 얼마나 달래고 어르고 했는데요… 브라질 친구들이 원래 좀 감정이 쉽게 격해져서… 우리도 참 그때 미스터리였던 게… 그때 같이 일했던 강사들끼린 꽤 친하게 지냈거든요. 일 끝나면 같이 맥주도 마시고, 클럽도 가면서 어울렸는데, 물론 싸이먼은 끼질 않았죠. 그래서 싸이먼 얘기도 자주 했는데… 왜 원장이 싸이먼을 자르지 않는가? 다른 사람이면 벌써 잘려도 여러번 잘렸을 텐데, 왜 그런가? 뭐 말들이 많았죠. 토빈 히스가 싸이먼을 남자로서 좋아하는 거다, 아니다, 싸이먼의 지도교수와 토빈 히스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그게 아니고 싸이먼 주급이 거의 최저임금 수준이라서, 그래서 싼 맛에 쓰는 거라더라. 뭐 말들만 많았죠… 한데, 제가 여기서 이렇게 유학원을 운영하다보니까, 그건 그냥 당연한 거더라구요. 싸이먼은 어쨌든 박사학위가 있고, 또 그때 당시 현직 국립대학교 영문과 강사이기도 했으니까요. 그건 뭐 어학원 홍보 차원으로 보면 그냥 끝인 거거든요. 싸이먼이 그때 조금만 더 정신을 차렸으면 몸값도 많이 올렸을 텐데… 그걸 못하니… 그건 그렇고 정말 싸이먼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아니 그 친구가 한국은 도대체 왜 간 거랍니까? 거, 한국 사람들이랑 어울리긴 좀 어려울 텐데…32
· 싸이먼은 그 어학원에서 한국으로 떠나오기 직전인 2011년까지 근무했다고 한다.
· 싸이먼은 그해 10월부터 골웨이 국립대학교의 강사로도 일을 시작했는데, 거기에서 또한 학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싸이먼의 대학원 일년 선배이자, 같은 시기 함께 강사로 근무했던 믹 매카시(Mick McCarthy)33에 따르면 ‘강의만 하고 바로 학교에서 사라지는 존재’가 싸이먼이라고 했다. 당시 영문과 강사실은 네명의 강사가 함께 쓰는 구조였는데, 싸이먼의 책상만 언제나 비어 있었다고 한다. 몇몇 학생들이 싸이먼을 찾아 강사실에 들렀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믹 매카시는 그런 학생들에게 ‘싸이먼을 만나려거든 이따 밤에 코리브강으로 나가보는 편이 더 빠를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싸이먼에게선 특유의 비린내’가 났다는 말도 했고, 또 ‘자전거 짐칸에 따로 무릎까지 오는 파란 방수 장화를 싣고 다녔다’는 말도 전했다. ‘같은 강사들과도 거의 교류가 없었고, 교수들도 싸이먼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싸이먼은 2010년 10월부터 골웨이 국립대학교 영문과에서 강의 배정을 받지 못했는데, 주된 사유는 ‘수강인원 미달’이었다고 한다.
· 2011년 1월 23일, 싸이먼 그레이는 GLS어학원에서 진행하는 액티비티(Activity)34의 일환으로 골웨이 시티 박물관(Galway City Museum)을 방문했다. 초급 레벨과 중급 레벨 수강생 열네명이 참여했고, 인솔 강사로는 싸이먼과 마이클 맥거번이 함께했다. 골웨이 시티 박물관은 지상 삼층, 지하 일층 규모로 되어 있는데, 일층에는 안내데스크와 골웨이의 현재와 특산품 등을 소개하는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이 있었고, 이층에는 역사관, 삼층에는 골웨이 홍보영상을 상영하는 멀티미디어실이 있었다. 박물관 자원봉사자의 안내로 전시관을 둘러보던 수강생들은 마이클 맥거번과 함께 모두 멀티미디어실로 올라갔고, 싸이먼만 혼자 일층 출입문 옆 파드릭 오 코네어(Pádraic Ó Conaire)35의 작은 동상 근처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 서서 박물관 밖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통유리로 되어 있는 출입문 밖으론 계속 옅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고 한다. 영하 12도에 초속 15미터의 바람, 그것이 그날의 날씨였다고 한다. 박물관에서 직선거리로 채 5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엔 마치 오래된 성벽처럼 거무튀튀한 화강암으로 쌓아 올린 스페인다리(Spanish Arch)가 있었는데, 그 다리 옆엔 보수공사를 위해 임시로 세워둔 여러개의 철제 펜스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철제 펜스 옆에 한 여자가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한다. 감청색 파카 안에 회색 후드티를 입고,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동양 여자. 어깨엔 작은 백팩을 메고 있었다고 한다. 싸이먼은 바람이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고 가는 것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함께 액티비티를 나온 어학원 수강생 중 한명은 분명한 거 같은데,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싸이먼은 그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면서 자꾸 자신의 운동화 바로 앞에 침을 뱉고 있었다고 한다. 골웨이의 악명 높은 겨울바람을 맞으며 계속 쪼그려 앉은 채… 그녀가 바로 김주희였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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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충돌은 2011년까지 계속되었다. ↩
- 당시 아일랜드 총리는 버티 아헌(Bertie Ahern)이었다. 병원 회계원 출신의 이 문제적 정치인은 1997년부터 2008년까지 아일랜드 총리로 재직하면서 과감한 규제 철폐와 금융 자유화, 부유층 감세 정책을 펴나갔다. 규제와 세금 보기를 무슨 방사능 라듐이나 아황산가스처럼 여기는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투어 아일랜드로 몰려든 것은 당연한 일. 그 결과 2000년 아일랜드의 1인당 국외 투자 유치금액은 3만 8천 달러를 넘어섰다. 아예 유럽 본사를 아일랜드로 통째로 옮겨온 애플의 경우, 10년 동안 130억 유로 규모의 세금 감면 혜택을 받기도 했다. 언론에선 연일 ‘아일랜드의 기적’이라고 부르며 버티 아헌의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그러한 호황도 2008년부터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2009년엔-7.6%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더니, 급기야 2010년엔 IMF로부터 85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은행의 민영화와 저금리를 기조로 한 인위적인 건설경기 부양,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국제 투기자본의 급격한 유출 등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버티 아헌은 재직 시절 자신의 연봉을 31만 유로로 대폭 인상했는데, 이는 유럽 넘버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는 아일랜드 총리에서 물러나자마자 가장 먼저 대한민국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해 서울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 행사에 첫 연설자로 나서기 위해서였는데, 그때 아헌은 자신의 규제 철폐와 감세 정책으로 인해 아일랜드가 여전히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말을 해서 행사장의 분위기를 일순 냉동고기 궤짝으로 만들어버렸다. 버티 아헌은 채 30분도 되지 않는 그 연설을 하고 난 뒤 한국 돈으로 4천 5백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던 버티 아헌의 연설을 듣고 그러나 남몰래 감동한 사람이 딱 한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이다. 버티 아헌은 이명박의 초대로 청와대까지 들어가 오랜 시간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 두 사람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심화되는 이때야말로 더 과감한 금융 민영화 정책을 펼칠 때’라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늘어놓았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버티 아헌의 딸이 바로 소설가 쎄실리아 아헌(Cecelia Ahern)이다. 2008년에 개봉한 영화 「P. S. 아이 러브 유」의 원작자이기도 한 그녀는 2009년 장편소설 『내일의 책』(The Book of Tomorrow)를 펴내기도 했다.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더블린에 사는 열여섯살 소녀 타마라가 죽은 부자 아빠를 되살리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는 이야기이다. ↩
- 2019년 현재 골웨이 국립대학교 석사과정 한학기 등록금은 6천 유로이다. 수수료를 뺀 금액이 그렇다. ↩
- 최영근 교수는 윌리엄 캐리 교수로부터 건네받은 싸이먼 그레이의 첫 소설을 번역해서 자신의 블로그(blog. naver.com/hamletchoi)에 게재해놓았다. ↩
- “싸이먼의 대학원 동기 중에 에밀리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혹시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에밀리 쏘넷이라고, 몇년 전에 『스톤 걸』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한데… 그 친구가 작품 보는 눈이 뛰어나고, 날카로웠어요. 자기감정을 포장하는 법도 없었구요. 같은 강의를 듣는 동기들에게도 예외가 없었죠. 그때도, 제가 지금 이 소설을 보니까 생각이 나는데, 에밀리는 용서가 없었어요. 여기 나오는 이 여성 주인공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하고 쓴 거냐, 마지막에 이 여성이 눈물을 흘리는 게 정말 가능한 서사라고 생각하느냐? 이거 다 남성 판타지 아니냐? 자기 사랑은 순수하고, 고결하며, 변하지 않는 원석 같은 것이고, 그걸 몰라주던 한 여성이 후에 그걸 깨닫고 눈물을 흘린다는 거 말고 뭐가 있느냐? 이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보기에 여기 나오는 이 남성은 그냥 스토커에 불과하다. 나머지 세부사항들도 전부 다 그냥 이 여성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아니, 이 여성의 존재 자체가 눈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캐릭터를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도구적 이성도 나쁘고, 도구적 윤리도 나쁜데, 그중 가장 최악이 예술을 도구적으로 쓰는 인간들이다. 그렇게 만든 예술작품들이 왜 단순하다는 소리를 듣는 줄 아느냐? 자기 자신은 그걸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이성적이고, 자기는 윤리적이고, 자기는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보기엔 그건 그냥 또다른 폭력일 뿐이다… 에밀리가 아주 박살을 냈죠. 뭐 저도… 말은 좀 다르게 했지만 에밀리와 거의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단지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죠. 어쨌든 그건 싸이먼의 첫 소설이었으니까요.” ‘윌리엄 캐리 교수와의 인터뷰’(최영근, 앞의 블로그 참조) ↩
- “생각해보세요. 거의 매주 싸이먼이 새 소설을 들고 찾아오는 거예요. 교수가 학생이 써온 소설을 안 읽어줄 수도 없고… 이런저런 평가를 해주려면 한두번 읽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저도 제 할 일이 있는데 마냥 싸이먼에게만 매달릴 수도 없어서… 어느땐 교수실 문을 잠그고 자리에 없는 척 책상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기도 했어요. 그러면 싸이먼은 몇번이고 문을 두드리다가 휙, 문 아래 틈으로 소설을 집어넣고 돌아가곤 했죠. 석사 졸업 포트폴리오도 싸이먼은 그냥 통과였어요. 남들은 겨우 세편씩 소설을 제출했는데, 싸이먼은 무려 열한편을 써냈으니까요. 열심히 한 거로만 따지자면 제가 만나본 학생 중 싸이먼이 최고였습니다. 그건 부인할 수 없죠. 열심히 한 거로만 따지자면 말이에요. 그게 제 마음을 좀 아프게 만들기도 했구요.” ‘윌리엄 캐리 교수와의 인터뷰’(최영근, 앞의 블로그 참조) ↩
- 디덜러스 출판사 편집장인 존 윌리엄 올드리지(John William Aldridge)는 이후 총 여섯통의 이메일을 싸이먼 그레이에게 보냈는데, 그 분량은 갈수록 짧아졌다. 하지만 몇몇 표현은 이메일마다 다 똑같았다.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유감이다’ ‘당신 소설의 가능성을 믿고 있다’ ‘당신과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겠다’ 등등. 하여간 이런 멘트들은 세계 여러 출판사들이 따로 모여서 무슨 협약을 맺은 것처럼,
짠 것처럼,‘Ctrl+C’ ‘Ctrl+V’한 것처럼, 판박이다. 하지만 그 ‘Ctrl+C’ ‘Ctrl+V’ 때문에 작가 지망생들만 죽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당신의 가능성을 믿고 있다는데, 곧 다시 만나자는데… 차마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싸이먼 또한 그 말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 - 이런 경우, 함께 강의 듣고, 함께 글을 쓰고, 함께 공부한 친구들은 와와 박수쳐주고 축하의 인사를 건넬 거 같지만… 물론 그런 친구들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친구들은 깊은 절망에 빠져버린다. 평상시 잘 마시지도 않던 술을 억병으로 퍼마시거나 홀로 막 이상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런 다음 다시 돌아와 미친 듯이 글을 쓰는데… 그렇게 쓰는 글들은 십중팔구 엉망진창이거나 주인공이 인사불성일 가능성이 크다. 이건 비단 문학뿐이 아니라 미술이나 음악, 영화 같은 동종업계도 마찬가지다.
동료 감독이 깐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다고 홧김에 영화 만들면 제작자도, 투자자도, 배우들도 모두 단체로 알코올중독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 “Remarkable Collection of Poems, Poets,” Dublin Literature Magazine 2003.2. ↩
- 그 시기는 또한 싸이먼이 디덜러스 출판사로부터 여섯번째 이메일을 받았던 때와 겹친다. ↩
- 또도르 보두로프의 아버지 게오르기 보두로프(Georgi Bodurov)는 평생에 걸쳐 모두 네번 결혼했고, 슬하에 8남 5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인 크리스틴 릴리(Kristine Lilly)는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출신으로 우연히 터키로 여행을 갔다가 때마침 이스탄불에 타이어를 납품하기 위해 트럭을 몰고 나왔던 게오르기 보두로프를 만났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와 팔년의 결혼생활을 끝낸 그의 어머니는 이후 펜실베이니아로 돌아갔고, 현재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다시는 결혼 따위는 하지 않았으며, 혹시 몰라 여행 또한 일절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
- 그는 동시에 소피아 외곽 지역에서 타이어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고도 한다. 소피아 국립대학교 월급이 6백 유로에 지나지 않아서 대부분의 교수가 투잡을 뛰고 있다고 한다. ↩
- 싸이먼 그레이, 『민물장어낚시』, 서안출판사 2018, 52면. ↩
- ‘소설가 이기호와의 대화’(최영근, 앞의 블로그 참조) ↩
- 아일랜드는 집세나 교통비, 서비스 요금 등은 비싸지만, 식료품 가격만큼은 놀랄 만큼 싸다. ↩
- 다른 무엇보다 그 제품이 저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스토란테 모짜렐라 냉동피자 한판은 당시 1.5유로였다고 한다. 싸이먼은 전자레인지에 돌린 그 피자를 일단 반으로 접고, 그걸 또다시 반으로 접은 후, 휘핑크림을 찍어 먹었다고 한다. 그런 걸 보면 싸이먼은 뭘 좀 제대로 먹을 줄 아는 친구였던 것이다. ↩
- 윌리엄 캐리 교수는 그때까지도 ‘테뉴어’를 받지 못한 처지였는데, 아무래도 이런 실적들이 이년 후 열렸던 그의 정년보장심사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건 사실이다. 참고로 당시 골웨이 국립대학교 예술사회과학대학장이었던 존 이건(John Egan)은 존 맥가헌의 고향 후배이기도 했다. 윌리엄 캐리 교수에게 처음 ‘존 맥가헌 스쿨’에 대한 제안을 한 것도 존 이건 학장이라고 한다. ↩
- 말하자면 영수증 처리를 맡겼다는 뜻이다. 그를 위해 따로 ‘책임연구원’이라는 직함도 만들었다고 한다. ↩
- ‘윌리엄 캐리 교수와의 인터뷰’(최영근, 앞의 블로그 참조) ↩
- 존 맥가헌의 장편소설 『여인들 사이에서』는 발표 직후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한 바 있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로즈 브레디에 대한 노골적인 ‘모성적 포용력’ 묘사와 모런에게서 드러나는 권위주의와 가부장적인 태도가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
- 싸이먼 그레이는 논문에서 뤼스 이리가레의 ‘성적 차이’의 개념을 남성과 여성의 비교나 대조가 아닌, 근원적 차이로 설명했으며, 그것이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수단이라는 입장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그 논의 위에서 로즈 브레디가 종래의 민족주의가 아닌,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의 상징이라고 분석했다. ↩
- 하지만 이런 싸이먼의 박사논문은 후에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뤼스 이리가레의 이론을 오독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들에 따르면 뤼스 이리가레가 말하는 ‘성적 차이’란 독자적인 주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성적 차이의 윤리성’에 그 방점이 찍혀 있다는 주장이다. 연구자들은 싸이먼의 논문이 뤼스 이리가레 이론의 전후 맥락을 모두 무시한 채 의도적이고 무리하게 ‘민족주의’와 ‘성적 차이’를 연결시켰다고 비판했다. ↩
- 모교인 골웨이 국립대학교에선 그해 10월부터 강사생활을 시작했다. 싸이먼의 사정을 알게 된 윌리엄 캐리 교수가 그때까지 자신이 직접
땜빵강의를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 싸이먼의 할머니는 쓰러진 이후 왼쪽 안면과 왼쪽 팔, 왼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는데, 이후 재활을 거쳐 왼쪽 다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일상적인 활동이 대부분 가능할 정도로 좋아졌다고 한다. ↩
- 참고로 아일랜드는 지금까지도 공영형 의료보험 체계를 갖추지 못한 국가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시민은 사설 의료보험에 가입해 있고 그에 따라 비싼 보험료를 납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험료가 비쌀수록 의료보장내역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예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시민 또한 적지 않다고 한다. 감기 때문에 병원 한번 가면 대개 대한민국 돈으로 7만원에서 12만원 정도의 의료비가 청구된다고 한다. 싸이먼은 할머니의 병원비로만 1만 5천 유로를 지불했다고 한다. ↩
- 싸이먼 그레이 「성탄전야」, 빛고을타임즈 2016.12.22. 싸이먼 그레이의 이 칼럼이 게재되고 난 후, 또다시 빛고을타임즈 경영진들 사이에선 한동안 설왕설래가 이어졌는데 ‘크리스마스 때 왜 이런 우울한 이야기를 우리가 읽고 있어야 하느냐’ ‘이 친구 할머니가 무슨 전염병에 걸린 거 아니냐?’ ‘그래도 벽난로가 나오니까 크리스마스 기분이 나지 않더냐?’ 같은 말이 오가다가 ‘그런데 산타클로스는 원래 아일랜드 사람 아니냐?’라고 누군가 묻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원래 핀란드 사람이다’라고 또다른 누군가 통박을 주었고 ‘거 자일리톨 껌 씹는 소리 작작해라, 거기서 핀란드가 왜 나오냐? 산타클로스는 원래 러시아 사람이다. 눈썰매 타고 다니는 거 보면 모르냐?’라고 또다른 이사가 끼어들자 ‘러시아는 무슨 러시아냐? 러시아 사람 이름이 어디 그러냐? 산타크루스키나 산타크루세끼면 몰라도’라고 맨 처음 산타클로스 얘기를 꺼낸 이사가 성질을 냈다. 그러자 경리를 맡고 있던 송모씨가 큰소리로 ‘다들 쓸데없는 말 하려거든 추운데 얼른 집에들 들어가서 전화로 하라’고 짜증을 내자 그제야 다들 잠잠해졌다고 한다. ↩
- 또도르는 대학원 입학 전 따로 GLS어학원 아이엘츠 과정을 이수했다고 한다. ↩
- 대한민국의 원룸과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방 하나에 거실과 부엌까지 겸한 구조이다. 화장실도 따로 하나 있다. ↩
- 처음 그는 월 임대료 4백 유로짜리 셰어하우스를 보러 다녔다고 한다. 대개 세명이 한집에서 살면서 거실과 주방, 욕실을 함께 쓰는 구조였는데, 싸이먼이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스튜디오였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싸이먼은 역시 경제관념은 떨어지는 친구인 건 분명하다. 학교를 오래 다닌 사람이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의 안 좋은 특징을 두루 다 갖춘 것이다.참고로 말하자면 그는 그때 한달에 8백 유로씩 빚을 갚아나가고 있었다. ↩ - 이런 후기들이 홈페이지에 올라올 때마다 누군가 삭제해버렸다고 한다. ↩
- 그녀는 마치 다섯살 아이들과 대화하듯 브라질 유학생들을 다루었다고 한다. ↩
- ‘마이클 맥거번과의 인터뷰’(최영근, 앞의 블로그 참조) ↩
- 그는 현재 골웨이 국립대학교 영문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
- 일종의 문화 체험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된다. 강사와 수강생들이 함께 박물관이나 전시회, 지역 명소를 방문하고 토론하면서 영어권 문화의 이해를 넓힌다는 취지의 행사인데, 그냥 사진 찍고 찍히는 의미가 더 크다고 보면 된다. 당시 GLS어학원에선 수강생 레벨에 상관없이 한달에 두차례씩 액티비티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강사들도 두명씩 의무적으로 돌아가면서 액티비티 지도활동을 나가야만 했다. ↩
- 파드릭 오 코네어(Pádraic Ó Conaire)는 1900년대 초반 골웨이에 거주했던 아일랜드 작가이다. 아일랜드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여러 소설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