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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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삶을 선물하는 상냥한 이야기

 

 

정용준 鄭容俊

소설가.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장편소설 『바벨』 『프롬 토니오』 등이 있음.

sfcyjlove@naver.com

 

 

© 강민구

© 강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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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긴 수다로 시작해볼까? 내게 윤성희는 이런 사람이다.

자주 보는 사람이다. 한번 만나면 길게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자리 옮겨 또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는 사람이다. 침묵이 흐를까 걱정할 필요가 없고 침묵이 흐른다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재밌는 이야기는 더 재밌게 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조차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다. 그 말을 듣고 있으면 시간은 흐르고 흘러 오후가 밤이 되고 때론 밤이 새벽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주는 사람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요리를 맛있게 해주면서 “오늘은 네가 운이 없구나. 하필 먹을 게 없는 날 오다니”라는 이상한 농담을 하는 사람이다. 맛있게 만들어놓고 “오늘은 실패작이야”라고 툴툴대는 사람이다. 아끼는 사람들과의 좋았던 일을 들려주는 걸 좋아해서 이야기를 듣다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다가도 질투심이 생기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는 좋은 사람, 따뜻한 사람,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좋은 사람이 아닌 척, 따뜻하지 않은 척, 사랑이 메마른 사람인 척, 한다.

사람이 필요하다. 편하게 만나 어색함 없이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지인이 필요하고, 힘쓰고 애쓰는 일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동료도 필요하다. 어렵고 잘 안 되는 것에 대해 조언을 구할 선배가 필요하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해결법을 알고 있는 멘토도 필요하다. 힘들다, 관두고 싶다, 끝났다 끝났어,라고 징징거릴 수 있는 친구도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윤성희가 고맙다. 그는 내게 좋은 지인이고 친구고 동료고 선배고 멘토다.

“나는 윤성희랑 친해!” 이런 자랑질을 하려는 게 아니다. 사실 윤성희를 아는 이들에게 윤성희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는다면 나처럼 혹은 나보다 훨씬 많은 미담을 들려줄 것이다. 윤성희에게 수업을 들은 학생과 대화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선생에 대해 말할 때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표정 속엔 고마움과 흠모, 존경과 사랑이 뒤섞여 있었다. 지금 내 수업을 듣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막 하다니, 속으로 괘씸하고 약간은 서운한 생각도 들었지만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기에 미소를 띠며 그렇구나, 했다. 이쯤 되면 ‘우리 모두의 윤성희’ 아닐까.

그래서 이 지면을 맡아달라는 요청에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나는 직접 그를 만나기 전엔 소설가 윤성희의 충실한 독자였기에 이참에 실컷 팬심이나 쏟아놓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면전에서 “선배 소설 너무 잘 써요” “선배 이 소설, 저 소설, 아! 그때 그 소설 좋아요”라고 말하면 정색하거나 세상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치기에 더 말할 수 없었는데 얼마나 좋은 기회란 말인가.

공식 만남을 갖기 전 최근에 나온 소설을 중심으로 보름간 ‘윤성희 집중 탐구 대잔치’를 실시했다. 단편 「어느 밤」(『문학동네』 2018 겨울호)을 읽고 중편 『첫 문장』(현대문학 2018)을 읽었다.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장편 『상냥한 사람』(창비 2019)을 읽었다. 인상 깊은 장면에 체크를 하고 좋았던 문장엔 밑줄을 그었다. 검색창에 ‘윤성희’를 입력하고 인터뷰에서의 질문과 답을, 팟캐스트에서 한 이런저런 말들을, 그리고 지난 문예지들을 찾아 대담이나 특집 같은 것을 꼼꼼하게 읽어봤다. 그리고 마침내 『상냥한 사람』의 책장을 덮었을 때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감정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겠다. 단어나 표현을 찾기 어려운 게 아니라 정말로 감정의 정체가 낯선 종류의 것이라서 그렇다. 1학기 종강 기념으로 두부김치에 막걸리 마시면서 함께 수다 떨었던 것이 고작 한달 전이었는데 그때가 아주 오래전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윤성희에 관해 알면 알수록,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많이 알게 됐다. 느낌과 감정도 많아지고 깊어졌다. 그런데 이상하다. 선명해지거나 정확해지진 않는다. 윤성희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걸을수록 한발씩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좋은 사람, 착한 것, 평범한 것, 상냥한 사람, 진실, 사실, 진심. 이런 개념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인지와 감각의 세계에서 미묘하게 진동하면서 뒤틀리려 했다.

이야기를 나누기 직전 어색하고 부끄러운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는 윤성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상냥한 사람』의 한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규칙을 정한 것은 아닌데 마지막 문장은 늘 슬펐어,로 끝났다.(2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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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의 소설을 생각하면 페터 회의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한국어판 마음산책 2005)의 한 구절이 자동으로 연상된다.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뚱뚱한 남자애, 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71면)

 

예나 지금이나 어떤 소설가들은 패배자들과 약자들에 관심이 많다. 심지어 자신의 패배와 약함에도 관심이 많다.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소설의 주인공과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잘 먹고 잘 살고 원하는 대로 꿈을 이뤄 성공한 소위 잘나가는 인물은 손에 꼽힌다. 애써 찾아낸다 해도 내면이 무너져 있거나 자기도 모르게 뭔가를 잃어버린 인물일 것이다.) 역사는 성공하고 승리하는 이들의 기록이다. 끊임없이 사회는 성공한 자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들을 계몽하고 멘토링하려 한다. 하지만 문학적 판단은 윤리적 판단과 다르다. 인간을 인간답게 설명하는 논리와 표현도 사회가 말하는 가치와는 다르다. 어떤 소설가의 눈은 패배자를 향해 있다. 인간의 얼굴에서 실패의 표정과 절망의 빛을 발견해낸다. 감춰둔 마음과 하지 않은 말에 관심이 있고 무표정을 연기하는 미세한 표정의 언어를 감지해내는 감각을 갖고 있다. 그들의 일상을 관찰하고 혼자 걷는 길과 혼자 먹는 밥과 그의 웃음과 그의 울음과 혼잣말 같은 것들을 상상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사건의 전후사정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때 참고, 왜 이땐 참을 수 없었는지를, 헤아려보곤 한다. 그것에 관해 고민하고 생각하느라 마음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리고 천천히 한 문장씩 한 장면씩 글로 옮기고 더 정확한 표현과 단어를 찾기 위해 다음 문장 앞에서 서성이기도 한다. 윤성희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런 풍경이 떠오른다. 소설과 소설을 쓰는 작가의 마음도 함께 느껴진다. 내가 이런 마음을 말하고 그렇지 않냐고 묻는다면 분명 윤성희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몰라,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쓰는 거 아니야.”

어느 대담에서 윤성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판타지는 평범하게 태어나 죽을 때까지 아무 일도 겪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전 최선을 다해 그 평범함의 평범함을 밝히고 싶어요.”

『첫 문장』의 해설에서 황예인은 이렇게 말했다.

“겁쟁이라는 말. 이제야 나는 윤성희의 인물들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알맞은 말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48면)

평범한 사람과 겁쟁이, 패배자와 망가진 자, 그리고 상냥한 사람. 이런 자들을 계속 응시하는 윤성희의 눈동자. 그래서 고맙고, 그래서 귀하고, 그래서 어쩐지 미안하다.

 

내게 제일 중요한 감각은 주인공과 밀착되는 느낌이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눈과 내 눈이 일치되는 순간을 찾으려고 해. 첫 장을 썼더라도 다음 날 일어나 다음 장을 쓰려고 하면 안 써져. 예전에는 이어나가기 위해 주인공에게 무엇을 하게 했지만 지금은 밀착되는 순간과 느낌을 찾으려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봐.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그걸 그저 고맙다고만 해도 되는 걸까? 앞서 내 경험을 말했듯 “선배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친절하고 상냥하고 완전 최고인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나는 물었다. 『상냥한 사람』의 형민은 왜 상냥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기특한 말에 취해서 상냥한 사람이 된 거지. 스스로 상냥하다고 믿는 인물은 자기가 어떤 인물인지 모른 채 살다가 죽었을지도 몰라. 각성하는 순간이 없는 사람은 계속 상냥할 테니까. 하지만 그걸 깨닫게 되면 부끄러움을 느끼고 뛰쳐나가게 되는 거야.

 

상냥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약한 사람이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거든요.

 

진짜 상냥함이란 안이 단단해서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데 형민은 평생 애쓴 거야. 나중에 가서야 이 삶은 실패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지.

 

나는 속으로 말했다. 선배 소설 속 화자와 인물은 어쩐지 작가인 선배를 닮았어요. 화자의 쓸쓸한 독백과 인물들의 유머와 재치 모두 선배의 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선배도 상냥한 사람이고 형민도 상냥한 사람이에요. 물론 둘은 다르죠. 저는 작가와 화자를 동일시하는 순진한 독자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동안 나는 선배의 친절함과 쾌활한 웃음, 재미있는 말과 상냥함을 그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만 한 거 아닐까요?

 

『상냥한 사람』에 밑줄을 긋고 그 옆에 별 하나(☆ → 너무 좋은 부분에 하는 표시)를 그렸다.

 

처음에는 잠을 자는 줄 알았다고 관리인은 말했다. 책상 위에는 유서가 놓여 있었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형민은 유서를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시옷을 다른 자음보다 크게 썼는데, 그래서인지 사람이라는 글자가 튀어나와 보였다.(211~12면)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나는 독서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감정이 격해지고 마음이 요동쳐서 차분하게 글자에 시선을 두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쯤은 슬프고 반쯤은 화가 났던 것 같다. 왜 괜찮은 사람은 자기가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일생을 다른 사람보다 괜찮게 살아와놓고 왜 아직도 자기는 멀었다고 자기는 죄가 많고 잘못이 많다고 생각하는 걸까. 늘 미안해하고 반성하고 회개하다가 마침내 자신은 실패했다고 생각해버리는 걸까. 괜찮아져야 하는 안 괜찮은 사람은 저렇게 멀쩡하게, 함부로, 마구마구, 저따위로, 뻔뻔하게 잘 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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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머뭇거리게 됐다. ‘상냥함’이 자신을 낯설게 느끼게 만들고 때론 쓸쓸하게 만드는 애씀의 열매라면 그것을 계속 좋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윤성희는 말을 다 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진짜 말을 하지 않고 다른 말을 많이 했는지도 몰라. 형민처럼 마지막까지 자신을 몰랐을 수도 있지만, 모르기로 했을지도 모르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모르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내가 좋아하는 윤성희의 어떤 면의 이면에는 다른 게 있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는 책을 읽듯, 소설에서 인물을 발견하듯, 여러 기억 속에서의 윤성희를 읽어봤다. 캐릭터로 그를 생각해봤다. 그는 어떤 인물인가. 바보야, 멍청아, 소설이잖아. 너도 소설을 쓰면서 그걸 진짜로 여기면 어떡해? 그건 픽션일 뿐이지. 인물은 작가가 아니잖아. 맞다. 나도 안다. 그런데 내가 알아서 그것이 마냥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에둘러서 살짝 물어봤다. 선배는 힘들지 않냐고. 쓰는 것, 강의하는 것, 사는 것, 시간이 흐르는 것이 힘들지 않냐고. 윤성희는 음, 소리를 내고 잠깐 생각했다가 말했다.

 

크게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어. 이 힘듦이 진짜 힘듦인가 하면…… 그것도 잘 모르겠어.

 

그리고 잠깐 쉬는 시간. 나는 또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느낀 적 없을 뿐 힘들었던 때가 있었겠죠. 힘듦에 진짜 가짜가 어디 있어요. 힘들면 그냥 힘든 거지. 잘 모르겠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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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십이년 전 스물일곱의 어느날 도서관에서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를 읽었다. 그때의 난 이제 막 소설에 열정을 품고 도서관 한국소설 칸을 어슬렁거리며 닥치는 대로 읽어나가던 습작생이었다. 한국문학은 대체로 이런 느낌이고 외국문학은 저런 느낌이구나, 그러니까 문학적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은 이런 것이고 멋진 문체라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라고 나름의 독후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윤성희 소설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그동안 읽어왔던 한국소설과는 결부터 달랐다. 이상했다. 슬픈데 즐겁고 즐거운데 슬펐다. 진지한 건 무겁다, 무거운 건 밀도가 높다, 밀도가 높기 위해서는 비유와 수식이 많아야 한다, 약간 무표정할 것, 분위기는 잿빛, 눈물이 고일 순 있지만 흘러내려서는 안 돼, 밤의 시간이고 그 시간은 대체로 우울하지, 문체가 중요해. 이런 식의 편견에 빠져 그것이 곧 문학성이라고 믿었던 나를 제자리에 멈춰 세워 유턴할 수 있게 해준 소설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하지만 윤성희는 여전히 윤성희다. 그때 느낌은 그대로 있고 그때 없었던 느낌까지 가미되어 있다. 가령 근작 「어느 밤」의 할머니가 킥보드를 타고 달리는 장면과 마술한다는 청년을 만나 나누는 대화는 웃음과 울음, 슬픔과 기쁨이 반씩 섞여 있다. 가벼운데 하나도 가볍지 않고 어두운데 이상하게 환한 소설이었다. 그렇다면 윤성희는 어떻게, 왜 이런 인물들이 나오는 이런 소설을 계속 썼고, 쓸 수 있었던 걸까? 이제는 누가 봐도 딱 ‘윤성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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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영화 같은 일반적인 스토리텔링은 중심인물이 서사를 이끌잖아요. 그 인물은 중심답게 이야기의 주인이고 걸맞은 사건도 많이 발생하고요. 심지어 시장에서는 주연을 맡은 배우에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해요. 그런데 선배 소설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여요. 소설이 처음 시작할 땐 중심인물이 부각되죠. 캐릭터도 분명하고 소설적인 사연도 갖고 있어요. 가령 진구를 연기한 아역배우 형민처럼 말이죠. 그런데 서사가 전개되면 될수록 중심인물은 그저 평범한 인물로 변하고 말아요. 일반적인 스토리 문법과는 정반대의 방식을 취하고 있죠. 그뿐만 아니라 주변인물이 점점 중심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소설이 다 끝날 땐 중심인물은 평범해지고 중요하지 않았던 인물은 중요해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죠. 그래서 전 선배의 소설이 뿌리처럼 뻗어나가는 소설처럼 느껴집니다. 커다란 원뿌리가 아니라 작은 뿌리 하나하나 섬세하게 살아 있는 소설이죠. 그리고 뿌리 끝에 알감자 같은 인물들의 서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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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물었다. 선배가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나라는 인물이 내 고통을 소설 안에서 말하려면 징검다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현실에서는 그렇지는 않지. 고통은 직접적으로 오고 느껴지니까. 그러나 서사는 징검다리 혹은 부메랑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모양이 다른 돌들이 있고 그것들을 거쳐 강을 건너는 것. 다시 돌아오지만 공중을 한바퀴 돌아오는 것. 이쪽 강에서 저쪽 강으로 갈 때 어떤 징검다리를 놓을까, 생각해. 인물들이 다 징검다리야. 타인들의 삶과 이야기도. 그것이 소설과 무관하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삶이라는 큰 궤도에서는 전혀 무관한 건 아니지 않나? 나는 그것이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해. 나는 인물의 백스토리를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겨. 『첫 문장』과 『상냥한 사람』의 도입은 과거 이야기로 시작해. 작은 백스토리들이 현재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렇다면 뒷부분은 알아서 흘러가. 그리고 평범한 사람의 백스토리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누구나?

 

응. 누구나.

 

누군가 내게 한국소설에서 유머를 담당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세명을 말하겠다. 정영문, 이기호, 그리고 윤성희. 세 작가의 유머코드는 다 다르다. 결도 다르고 느낌이나 뉘앙스도 다르다. 윤성희식 유머만 놓고 말해보자면 우선 엉뚱하다. 이야기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흘러가거나 인물이 뜬금없는 행동을 취하기도 하고 느닷없는 말을 내뱉기도 한다. 예를 들어 『첫 문장』에는 자신의 마음과 의도와 다르게 오해받는 인물이 나온다. 작은 우연과 어긋남이 엉뚱한 사건을 만들고 그 사건 속에서 인물은 엉뚱한 결심을 하고 엉뚱한 말을 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론 예상치 못한 이런 변화는 중심서사의 방향을 크게 변화시키거나 인물에게 커다란 전환기나 각성의 기회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윤성희 소설에서는 중심서사의 변화라기보다 중심에서 비껴난 아기자기하고 시시콜콜한 엉뚱함이 있다. 엇, 하고 웃음이 터지거나 흐뭇하게 미소를 짓게 만들거나 읽을 땐 별 느낌이 없었다가도 다 읽고 나서 그 장면을 떠올릴 때에는 마음이 이상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지점은 재미있다,보다는 유머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가령 「어느 밤」에서도 주인공이 마술을 하는 청년을 만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그때 주인공은 이 말을 떠올린다. “마술에서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유머라고.”(172면) 나는 이런 장면과 문장을 읽을 때 윤성희식의 유머에 젖어들어 웃거나 울기 직전까지 가곤 한다. 작가에게 직접 물어봤다.

 

선배님 소설엔 유머가 있어요. 유머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물이 어떤(슬픈) 일을 겪었을 때 웃기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순간 자신의 상처에서 거리를 둘 수 있다는 말 아닐까? 시간이 흐른 뒤에 주인공이 슬픈 것에 대해 말할 때 캐릭터가 나온다고 생각해. 시간이 흐르면 객관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 가령 어머니가 돌아가신 자매가 있어. 둘은 엄마 김치로 끓인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지. “엄마가 요리는 정말 못했어.” 이런 말을 들으면 독자들은 이들이 엄마라는 상처와 어려움을 봉합하면서 잘 살아가겠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서사라는 것이 시간을 다루는 장르니까. 시간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 있어. 시간에 따라 유머의 강도는 달라질 테니까.

 

시간에 따라 유머의 강도가 달라진다는 말, 시간이 흐르면 슬픈 것조차 말할 수 있게 된다는 말, 거리를 둘 수 있고 유머를 가질 수 있다는 말. 그 말들이 너무 좋아 입으로 몇번이고 중얼거리다가 노트에 옮겨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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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나는 윤성희의 이야기가 좋다. 다른 여러 좋은 점 중에 이야기가 최고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야기 뒤에 더해지는, 환하고 희망적인 ‘윤성희식’ 이야기가 좋다. ‘환하고 희망적인’ 이 표현을 쓸까 말까 고민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환하지만 어둡고, 희망적이지만 절망적인 이야기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성희의 소설을 읽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내가 말한 그 환함과 희망이 무엇인지. 언뜻 보면 에필로그 같기도 하고 엔딩크레딧 이후에 등장하는 쿠키 영상 같은 이야기가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데, 그것이 너무 좋다. 그 이야기로 인해 중심서사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위로를 받는다. 평범하고 상냥한 겁쟁이 같은 인물들에게 작은 빛을 비춰주고 격려를 해준다. 심지어 그들에게 두번째 삶을 선물하기까지 한다. 내 책의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나는 소설의 힘을 믿는다. 그 힘이 변화를 이끌어내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고도 믿는다. 그러나 이야기로서 그런 시도를 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윤성희는 이야기로 그 지점까지 시도하고 제안하는 작가다. 그는 사람들 간의 연대를 믿느냐는 질문에 믿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나는 궁극적으로는 삶을 가장 가깝게 그리고 싶어.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생각해. 삶을 가깝게 그리지만 그 안에 나만의 상상력과 희망을 넣고 싶어.

 

선배님은 소설 속에서 인물을 내버려두지 않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고쳐준다고 해야 할까요? 감정의 애프터서비스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해. 이 인물이 어느 정도여야 견딜 수 있을까? 소설 안에서는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어려움을 주자. 스토리를 위해서 더 많은 상처를 주지 말자. 줬다면 그 인물이 이겨낼 수 있게 혹은 강해지도록 백스토리를 만들어주자. 더 행복했던 기억이라든지, 견디고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이런 생각.

 

세계도 이야기를 통해서 변화될 수 있을까? 변화될 수 있다,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꿈을 꿀 순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도 아닌 소설을 하릴없이 써대는 하염없는 새벽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단 하나의 기도 제목을 놓고 긴 시간 기도해온 사람처럼.

『상냥한 사람』은 슬픈 소설이다. 윤성희 소설은 항상 웃음과 슬픔이 반씩 섞여 있는데 이 책은 슬픔이 훨씬 많이 포함되어 있다. 상냥하다는 말을 더이상 상냥하게만 생각할 수 없게 됐다. 어쩌면 나는 상냥하다는 말에 쓸쓸함을 먼저 느끼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상냥한 사람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다 슬픈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충분히 착한데 더 착하려고 애쓰다가 망가지거나 혹은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 이를테면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아 미안하다는 소설 속 사회자 같은.

 

이런 문장에서 멈춰 섰어요. “진구가 되는 것은 싫었지만 진구가 잊히는 것은 무서웠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33면)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혔다. 그때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마치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어깨를 부딪는 사람처럼.”(104면) 어쩌면 상냥한 사람은 형민처럼 자신의 진짜 마음을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며 사는 사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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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라고 불리는 건 싫은데 형민에게서 떠나는 건 그림자가 떠나는 것처럼 너무 슬픈 거야. 그런 식으로 영원히 형민이 되는 것이 무서울 수도 있고. 어느 감정이 진짜인지 몰라 두려울 수도 있지. 이기적인 감정일 수도 있고.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고. 이런 사람은 너무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 같아. 성인이 되어서야 아는 거지. 그것도 어렴풋이. 그래서 징검다리가 필요해. 이런 사람들은 다른 일을 겪어야 그때의 마음과 그때의 의미를 알 수 있거든.

 

그렇다면 그걸 알게 된 사람, 바꿔 말하면 자신의 진짜 마음을 깨닫게 된 상냥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해요?

 

나는…… 받아들인다고 생각해. 받아들이고 살면 변할 수 있지 않을까? 변하려고 마음먹고 변하면 연극 같지. 흘려버리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나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용기가 있으면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변해야지,가 먼저면 안 돼. 그 개념이 먼저면 안 돼. 사는 것이 먼저고 나중에 변해야지. 변해서 살아야지,는 아니야.

 

선배님 소설에 망가지는 사람들이 종종 나오는데 이상하게 왜 그렇게 됐는지는 구체적으로 안 나오는 것 같아요. 그들은 왜 그렇게 망가진 걸까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어처구니없이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해. 의지와 상관없이 무너질 수 있어. 인물은 그 인물에 어울리는 사건을 만들게 되지. 양조장 사장처럼 그냥 한번 눈감으면서 죄책감 같은 거 묻어두고. 아무렇지 않게 사는 사람들도 있고. 이런 사소한 것이 궤도를 바꾸는 것 같아. 작은 충격이나 자극에 각도가 조금만 틀어져도 방향이 완전히 바뀌거든. 작은 사건 하나가 지구에 도착할 수 없게 되는 거야. 인간은 그것을 바꿀 수도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라. 그래서 중년 남자들이나 할머니들이 내 소설에 많이 나오는 것 같아.

 

상냥한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나는 이렇게 말하겠어요. 깨닫기 전에 덜 상냥해지라고.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어. 남은 두번째 삶도 잘 살면 된다, 말하고 싶고. 늦지 않았으니 잘 살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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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작가는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을 힘들다고 표현하지 않으려 했다. 나라면 슬럼프라고 표현했을 부분조차 슬럼프가 아니라고 했다. 소설이 좋다고 말하거나 이 부분 저 부분에 대한 좋은 감상을 말하면 손사래를 치거나 스스로 그 화제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애썼다. 나는 그가 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그 모습이 그의 최고의 장점이자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말했듯 아는 사람은 변할 수 있고 아는 사람에겐 두번째 삶이 있으니까. 그렇게 윤성희는 첫 문장과 그다음 문장을 썼고 첫 소설과 그다음 소설을 썼을 것이다.

 

내년에는 단편을 부지런하게 써야지. 청탁이 한군데도 없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써야지. 그런 질문 많이 받아. “어떻게 그렇게 쓸 수 있나?”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겠어. “나는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 곁가지가 많고 디테일이 많아 자칫하다보면 큰 줄기를 잃어버릴 수 있는 소설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미우나 고우나 이것 외에는 안 되는 것 같아. 나는 직진이 어려운 사람이야. 문장도 그렇고, 내면 묘사도 그렇고. 잘 못하겠어. 정면돌파가 어려워. 그래서 나는 우회하는 글을 쓰게 되는 것 같아. 나는 쓰는 사람이야. 가만히 책상에 앉아서 쓰고 싶은 이야기가 차오르길 기다리고 천천히 받아 적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왔어. 내 기질 안에서는 이것이, 이런 방법이 최선이지 않았나.

 

상냥한 소설가 윤성희에게 “수고했다, 남은 두번째 삶도 잘 살면 된다, 늦지 않았으니 잘 살면 된다”는 말을 돌려주고 싶다. 하지만 내가 어찌 감히 그렇게 말하겠는가. 나는 다만 팬심을 더 쏟아놓으며, 그날 선배와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자리 옮겨 또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길게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