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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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姜鍊鎬

1962년 대전 출생. 199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비단길』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기억의 못갖춘마디』가 있음. yhkang@wku.ac.kr

 

 

 

냉장고

 

 

냉장고에는 방이 많다

냉동실과 냉장실 사이

위 칸과 아래 칸 사이

김치특선실과 신선야채실과 과일참맛실 사이

각얼음실과 해동실과 멀티수납실 사이

어디쯤의 층간 소음으로 막연하게

서로 눈 흘기는 아파트 같다

방이 많은 집은 춥다

밥 먹을 때만 각자 문을 열고 나와

수저는 입으로

눈은 TV

묵묵 식사가 끝나면 다시 각자의 방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문은 언제나 쾅 닫히는데

다들 냉골에 떤다

냉장고는 방이 많아도 가난하다

가난이란 마음만 아궁이 앞이라는 말이다

냉장고는 잠도 없다

온종일 끙끙 앓거나 웅웅 수런거린다

송곳니를 세운 얼음조각들이 달그락거린다

냉장고는 아무나 열지 못한다

코끼리가 가끔 드나들었다는 전설이

공룡 발자국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아주 늙은 냉장고만 들판에 큰대자로 드러누워

비로소 활짝 문을 열어젖히고

방이란 방은 죄다 트고

세상 모르고 잔다

 

 

 

접촉사고

 

 

출근길 접촉사고가 났다

충돌도 아니고 추돌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접촉이라는 사고

접촉이라는 말이 에로틱해서 나는 잠시 웃었다

사고라는 말뜻까지 다시 들려서 또 웃었다

 

길에서 만난 개미 두마리

머뭇머뭇 더듬이로 서로의 몸을 더듬다가

아예 한몸으로 엉겨붙다가

겨우 반씩 비켜줘 각기 제 갈 길을 가듯

나는 그저 출근이나 하고 싶었는데

 

상대편 운전자는 잔뜩 인상을 쓰더니

대뜸 웃통부터 벗었다

아니 다짜고짜 길에서 이러면 날더러

얼굴이 홧홧 달아올라

나도 예의상 단추라도 풀어야지 싶었다

 

하지만 대낮에 사거리 한복판이고

사방에 눈이 많았다

때를 놓치면 너무 멀리까지 함께 가야 한다

우선 나부터 식혀놓고 봐야 한다

접촉은 사고가 아니잖아

 

서로의 몸을 더듬다가

머뭇머뭇 제 갈 길을 갔던

그 개미들은 언제 다시 접촉했을까

결국 사고 치고 잘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