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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안
1977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오빠생각』이 있음. franza@nate.com
미제레레
내 모든 삶이 만약이라면,
이 세계가,
매일 내가 먹어야 하는 알약의 개수를 헤아리는 이 저녁의 세계가
집 앞 놀이터 시소가 밤마다 저 혼자 움직이는 것처럼
반딧불이인 양 외진 골목마다 피어나는 담뱃불,
한껏 나빠지고 싶던 시절 담뱃불을 손목 위에 지지며 다짐하던 헛된 약속들처럼
만약이라면
어떤 혐의로부터도 패악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허물어진 얼굴을 양손에 받쳐들고 서서
오, 아무 인생이 없는 기쁨이여
세상의 모든 중심을 향해 흩어졌던 나의 신들이 결국 길을 잃었구나
애도할 수 있을까
오늘 밤은 머리 위로 펼쳐진 속죄의 목록이 무척이나 아름답구나
존재하지 않는 짐승과
사라져버린 사물과
죽은 영웅의 세계가 창백하게 얼어붙어 있구나
똑, 똑,
손가락을 분질러 밤의 입술을 칠해주면
옛날의 전쟁들이 다시 시작될까
옛날의 죄가 다시 반복될까
밤에 휘파람을 불면 머리맡에 뱀이 똬리를 틀다 나를 물어가고
밤에 손톱을 깎아 창밖으로 내던지면 나를 닮은 짐승이 내 대신 눕고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저 눈을 가리고서 밤을 헤매는
선량하고 헛된 낮의 내면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누구의 내면이 나의 입으로 당신에게 고백할까
여보, 고백하는 입마다 빛나는 알약이 쏟아져요
이 알약을 당신의 입술로 받아주세요
빛나는 어둠이 몰려와 이 작은 창을 가리는구나
그런데 밤새도록 내 고백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오늘밤엔 속죄의 시간이 부족하구나
창밖에
저렇게 빛나는 약들을 헤치며
피로와 계절과 어제 죽인 벌레와 화초들이 떠가는구나
우리의 물이 가까스로 투명에 가까워졌을 때,
우리는 여전히 사람일까.
투명은 물의 나이.
여기 돌보다 단단한 바람이 물의 투명을 새겨놓고 우리를 물 밖으로 떠밀 때,
우리가 되돌아갈 철교들은 그대로 서 있을까.
왜 아름다웠던 계절들은 도망쳤을까.
사람이었어야만 했나, 투명은.
투명해지기 위해
마지막까지 불렀던 그 노래는,
밤새 외던 그 강령들의 첫 소절은 이제 어느 타국에서 외워지고 있을까.
부끄러운 햇살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좌판 위 물고기의 눈알 같던
그 투명의 무늬들은 이제 어디로 흘러갔을까.
모든 비명들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의 물이 투명에 가까워진다면
고백의 속살이 드러날까.
우리의 물 위를 걸어가는
풀잎과 달과 검은 기차, 그리고 벌레들만큼 솔직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