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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우리 문학은 지금 무엇과 싸우는가

 

불평등 서사의 정치적 효능감, 그리고 ‘돌봄 민주주의’를 향하여

김유담, 강화길, 장류진 소설에 주목하여

 

 

신샛별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지방-여성 서사의 문학사적 반격: 강화길론」 등이 있음.

venus860510@naver.com

 

 

1. 정치적 효능감과 한국문학

 

감염의 두려움이 계속되는 와중에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의 투표율이 66퍼센트를 넘겼다. 총선만 따지면 지난 20년 중 가장 높은 수치다. 그 원인이야 여러 관점에서 달리 해석될 수 있겠지만, 교과서적인 분석 중 하나는 투표율이 ‘정치적 효능감’(political efficacy)과 연동된다는 것이다. 정치적 효능감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정치참여를 통해 개발되는 개인적 자질이고, 그렇게 개발된 정치적 효능감은 다시 적극적 정치참여를 유발함으로써 순환적으로 발전한다.1 그렇다면 이번 총선에서 확인된 정치적 효능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2017년 촛불혁명으로 성취한 대통령 탄핵이라는 가시적 결과가 일단은 그 기원으로 보이지만, 실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진행 중인 생생한 정치참여의 흐름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촛불정부의 출범과 함께 일신된 정치적 지형에서 시민들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생활밀착형 법안들의 개정 및 제정을 요구해왔고, ‘갑질’ 반대운동, ‘혜화역 시위’, ‘조국사태’의 국면에서 보여주었듯 정치적 의견의 발언 창구로 광장과 거리를 기습적으로 이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게 됐다. 이 역동성과 응집력의 기저에 4·16의 참뜻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와 다짐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세월호 이후 한국문학은 참담하게 퇴행해버린 시대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이 세계에서 다치고 죽어가는 인간에 대한 애도와 위로의 시간을 거쳐,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에서 분출된 문학의 정치적 효능감을 보유하고 발전시키는 데 힘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이 해낸 일의 의미를 규명한 뒤에, 나는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정치적 소재를 다루는 소설은 많지만 마침내 정치를 해내는 소설은 드물다. (…) 광장의 정치를 위해 모였던 촛불의 열기는 많이 식었지만, 『82년생 김지영』의 독자들이 여성의 삶을 바꾸는 정치를 꿈꾸며 밝히기 시작한 촛불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다.”2 상징적 분기점이 된 『82년생 김지영』 이후 최근 한국문학은 냉철한 현실인식과 삶에 대한 참신한 발상을 두루 갖추면서 독자들의 ‘참여적’ 호응을 얻으며 그들과 함께 ‘정치를 하는’ 쪽으로 확실히 이행해가고 있는 듯하다. 다수의 비평이 작품이 선보인 페미니즘적 통찰의 시의성을 해명하고 소수자의 목소리를 증폭하고자 애쓰고 있는 것은 그 변화의 방증일 것이다. 정치적 효능감을 중심으로 정치와 개인, 그리고 삶의 관계가 재편돼온 형편과 나란하게, 한국문학을 매개로 하는 작가와 독자, 그리고 현실의 상호작용의 핵심에는 정치적 효능감이 놓이게 됐다. 두 정치적 효능감이 서로를 북돋우면서 같은 방향으로 수렴해간다는 것, 그것이 이전과는 다른 단계에 접어든 오늘날의 ‘문학과 정치’론의 긍정적 맥락이다.

『82년생 김지영』을 계기로 촉발된 낯선 형태의 문학적 상호작용을 분석하면서 “문학장을 향해 직접 자신을 발화하고 욕망을 주장하기 원하는 새로운 독자”3의 출현에 주목한 김미정은 새로운 문학의 존재방식을 묻는 또다른 글에서 “지금 문학장 안팎은, 이미 주어진 공통성이 아니라 함께 공유하고 만들어갈 공통성들에 대해 고투 중”4이라고 진단했고, 이 진단에 동의하면서 최진석은 이제 비평의 과제는 ‘사건의 규범화’를 경계하며 “사건이 중단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표제화하는 데, 즉 새로운 의제를 공급하는 데 있다”5고 강조했다. 이 논의들을 이어나가면서, 또 한국문학이 촛불혁명기를 살아내고 있다는 입장6에 동조하여 그렇다면 “혁명의 ‘완성’을 향한 긴 여정”7에 동반돼야 할 ‘촛불정신’이란 무엇인지를 몇몇 작품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여기에 소개되는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불평등을 직시하며, 그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를 인용하며 불평등을 “사회의 정신 자체의 위기”8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 황정아의 논평에 기대어 말해본다면, 이 작품들은 한계에 봉착한 ‘사회정신’을 대체할 ‘촛불정신’의 요체를 탐문하고 있다.

 

 

2. 세습사회 능력주의자의 산화: 김유담의 경우

 

작년 여름 시작된 일련의 ‘조국사태’를 지나오면서 ‘촛불’은 특정 대학 소속 청년 주도의 ‘공정’에 대한 요구로 묘사되곤 했다.9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연재기사는 그 후기에서 청년담론에 내재된 편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한국의 청년은 ‘인서울 4년제 대학생’을 말한다. 주류는 ‘스카이’(SKY) 대학생이다. 이들이 한 말은 ‘요즘 청년들’의 견해가 된다. (…) 한국에서 깎고 다듬어진 ‘청년’이라는 상징은 누군가를 과잉대표하거나 과소대표하는 낱말일 뿐이다.”10 이런 맥락에서 나는 ‘지방-청년’이라는 정체성에 ‘여성’으로서의 시각을 겸비한 소설에 각별한 주목을 요청한 바 있는데,11 최근 출간된 김유담의 첫 소설집 『탬버린』(창비 2020)이 지방-청년-여성이 경험하는 입사와 그 실패의 곡절을 섬세하게 풀어 들려주었을 때의 반가움은 큰 것이었다.

김유담의 소설에서 지방-청년-여성의 입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뿐더러 다양한 갈등을 만나고 반복적 위기를 겪으며 언제나 실패 직전에 처해 있다. 예컨대 「핀 캐리」의 화자 ‘나’는 서울의 학교 앞 오피스텔에 살면서 “이 집에서 행복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되뇌”(19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인물인데, 그녀는 자신의 삶이 오빠의 죽음(으로 내몰린 삶)에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트럭운전을 하다 졸음운전 사고로 사망한 오빠가 남겨준 보험금으로 거처를 마련했다는 데서 기인한 미안함이 그 일차적 이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가 장래에 살고자 하는 삶이 오빠가 일찍이 포기한 삶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녀가 고향에서 오빠의 “가난하게 자라, 가난하게 살다가”(18면) 끝나버린 삶을 복기하는 과정을 통해, 시도조차 되지 못한 그의 다른 인생을 상상해보고 그 가능성을 끝내 버리지 못했던 오빠의 미련까지 헤아리는 여정을 좇는다.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 아버지가 반듯한 가장이었다면, 엄마가 좀더 야무지게 우리 남매를 건사할 줄 알았더라면, 오빠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14~15면) “아무리 최선을 다해 힘껏 굴려도 (…)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오빠의 삶이 이제야 묵직하게 다가왔다.”(42면)

그런데 죽은 오빠에 대한 애도가 진행될수록 부모를 포함한 고향 사람들에게 그녀가 느끼는 울분은 커져만 가고, 오빠를 향한 것인 줄로만 알았던 연민은 그녀 자신을 향하게도 된다. 따지고 보면 남매는 하나의 인생이 균형 있게 가져야 할 ‘책임’과 ‘소원’을 각각 나눠 산 셈이었다.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를 내쫓고 열일곱살부터 가장의 역할을 자임해오면서 “자신의 꿈은 나와 엄마의 소원을 이뤄주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오빠 덕분에 화자는 가계의 곤궁함을 잊고 “학교 앞에 원룸이라도 하나 얻고, 돈 걱정 없이 대학을 다니는”(18면) 소원만 좇을 수 있었다. 오빠가 죽고 생전 그가 전담했던 책임까지 짊어지게 될 상황을 맞닥뜨리자 화자는 “자기가 다 책임진다고”(30면) 큰소리쳐온 오빠가 원망스러운 한편, 장례를 마치기도 전에 부모에 대한 “살아남은 내 책임을 강조”(15면)하는 동네 사람들의 은근한 압박이 못마땅하고, 타협의 여지 없이 소원을 철회할 수밖에 없게 된 자신의 처지가 착잡하기도 하다. 게다가 오빠가 사라진 자리에는 건강을 잃은 아버지가 돌아와 간병을 요구할 권리 운운하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갈 따름이다.

이 소설의 남매는 과도한 ‘책임’을 부여받은 반면 ‘소원’은 박탈당한 청년들이다. 이 불균형이 그들을 절망하게 한다. 소설의 정념이 “무언가 던지고 부숴버리고 싶다”(39면) 쪽으로 수렴해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삶이 이제는 희망고문도 아닌, 말 그대로의 고문처럼 느껴질 때 발생하는 리셋의 정념.12 김유담의 소설에 배음으로 깔려 있는 것은 세계에 대한 증오와 원한, 그리고 강력한 파괴의 욕망이다. 물론 그것은 모든 불행의 원흉처럼 여겨지는 아버지의 형상, 즉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난폭하고 이기적인 데다 무능하며 자신의 무능을 외면하는 탓에 더 나쁜 선택을 반복하는 고집불통의 점령군 앞에서만 돌출할 뿐, 평소에는 제법 잘 관리·통제된다. 「핀 캐리」가 유난한 것은 화자가 오빠의 유품인 볼링일지를 경유해 그 관리·통제를 가능하게 만든 신념의 체계, 즉 능력주의의 폐해까지를 들추는 집요함을 갖춘 덕분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오빠”(32면)는 피곤을 물리치기 위해 “‘젊은 날의 선택’이라는 광고로 유명한 자양강장제”(12면)에 의존해 일상적으로 과로와 무리를 했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철저히 단속해 동료들에게 근면성실하다는 평판을 들었으며, 퇴근 후엔 수입을 늘리려고 볼링 시합에 열중했다. 오빠는 아마추어 선수로 소문이 날 만큼 연전연승했는데, 그를 견제하고 볼링을 도박으로 즐기고자 하는 이들이 핀을 적게 쓰러뜨리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새 룰을 만든다. 그런데 오빠는 “실력보다는 운이 더 중요한 투전판이나 마찬가지”(37면)인 ‘뉴 게임’에도 전과 같이 “낯 부끄러울 정도로 진지하고 치열한”(38면) 태도로 임한다. 도박이라도 해야 다른 인생의 가능성을 ‘보너스’로라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청년들이 ‘비트코인’ 열풍의 주역이었음을 떠올리면, 소설 속 오빠의 기이한 집념은 납득이 된다. 요컨대 그는 ‘할 수 있다’는 모토를 뼛속까지 새긴 채 눈앞의 과제 해결에 몰입해온 능력주의의 화신인 것이다. 문제는 그가 ‘노오력’을 하느라 자기를 돌보는 데 무관심했고, 속수무책 사망에 이르게 됐다는 점이다. 그의 시체 곁에 나뒹굴던 빈 자양강장제 병들은 그가 무수히 치러낸 극기의 증거인 동시에 가까스로 막아낸 앞선 죽음들의 흔적일 것이다.

서울의 대학에 진학해 캠퍼스커플로 연애하다 결혼과 출산까지 한 지방-청년-부부의 이야기인 「가져도 되는」에서 ‘인희’가 강남 출신의 동창 ‘조명아’에게 느낀 박탈감 역시 이런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다. “아, 저 아이는 자신의 기분을 살피면서 살고 있구나,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나빠지지 않게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아는구나. (…) 나는 기분 따위를 돌보며 살 여력이 없었어. 학업을 이어가고,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으니까.”(236~37면) 능력주의가 이미 허구로 판명된 이데올로기라 해도 하는 수 없다.13 지역적-가족적 불평등이 인생의 상수로 설정돼 있는 지방-청년에게 능력주의 신화 이외에 달리 기댈 곳은 없다. 학벌의 사다리를 겨우 올라탄 「가져도 되는」의 인물들이 “그 자체로 커다란 허방”(211면)인 지방-가족과의 거리를 멀찍이 조정하면서 아이의 사교육 문제로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그들이 능력주의 신화의 맹목적 신봉자들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은폐하는 세습사회의 민낯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다. “부모가 얼마나 서포트해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고. 솔직히 그건 우리 때도 마찬가지였지.”(210면)

강력한 상속의 욕망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내 부모에게 (…) 지독하게 나쁜 것들만 물려받았다”(226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인생은 ‘자기돌봄’을 담보 잡혀 학벌을 취하고, 학벌을 담보 잡혀 일자리를 구하고, 일자리를 담보 잡혀 빚을 내고, 그 돈으로 허방을 메우다 일순간 봉쇄·폐기·축출되는14 궁지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므로 「핀 캐리」의 죽음을 ‘산화(散華)’라고 부르는 데 주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죽음은 세습사회를 온존시키는 능력주의의 기만을 그 체제가 강권하는 ‘노오력’에의 투신으로 내파하면서, 차별을 긍정하는 기존의 분배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 재고를 촉구한다. 그 죽음 앞에 구의역 김군과 태안 화력발전소 김용균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지역적-가족적-교육적 불평등이 서로를 강화하는 세계에서 존재의 가치는 그 자체로 의심에 부쳐진다. ‘기본소득’을 비롯한 새로운 분배 시스템의 원리가 ‘존재 자체의 몫’을 명명하는 방식으로 상상되고 있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15 ‘도움’도 ‘보상’도 아닌 분배에 대한 이 존재론적 발상이 “정의로서의 평등”16을 앞당기는 단초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3. 행위자로서의 여성과 돌보는 권력의 탄생: 강화길의 경우

 

미투 운동에서 n번방 사건까지 페미니즘을 통과하여 제출된 한국사회에 대한 폭로와 고발들은 촛불혁명이 젠더 불평등 해결을 중요한 과제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차례 경고했다. 그 경고들은 엄중한 사회적 갈등과 혼란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바야흐로 페미니즘은 미진한 법과 제도를 보완해나가는 가늠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됐다. 행정·입법·사법의 영역을 막론하고 다방면에서 서서히 진행 중인 변화를 보면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더라도 위안이 되는 한편, 종종 이런 의구심이 든다. 이게 전부일까. 페미니즘은 이미 정초된 체제의 결함을 발견하고 비판하며 빈 곳을 메우고 고장을 손보는 보조적 사상일 따름인가. 어쩌면 갈등은 불식해야 하고 혼란은 진정돼야 한다는 우리의 관성적 사고방식이 페미니즘의 무한한 잠재성을 사장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태껏 실험된 적 없는 다른 체제, 즉 ‘다음 민주주의’를 설계하는 원리로서의 페미니즘은 불가능한가. 이런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 한 페미니즘적 약진이 돋보이는 문학작품을 읽으며 ‘여성주의 정치학’을 구성해보는 모험을 멈출 수는 없을 듯하다.

장편 『다른 사람』(한겨레출판 2017)을 비롯한 강화길의 이전 소설들에 대한 긴 분석 끝에서, 나는 그의 소설들이 “여성 주체성의 특질과 그 가능성을 살피고 시민사회의 새로운 연대 형식을 제시하는 한 사례로서 가치를 갖는다”17라고 평가한 바 있다. 강화길의 소설이 여성주의 정치학의 비전을 암시하고 있다는 기왕의 짐작은 최근 상재된 「음복(飮福)」(『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0)과 「가원(佳園)」(『자음과모음』 2020년 봄호)을 읽으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는데, 이 소설들이 정치학의 중심 개념인 ‘권력’에 대한 재해석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음복」부터 살펴보자. 시조부의 제사를 지내러 시댁에 들른 화자 ‘세나’는 단 하룻밤 동안 이 집안의 내력을 속속들이 꿰게 된다. 시조모의 돌봄 문제를 둘러싼 시부모와 시고모 사이의 협의, 남편 ‘정우’를 향한 시고모의 해묵은 미움과 그 까닭, 시조모가 치매에 걸리고서도 잊지 못한 시조부의 사납고 신산한 과거, 시부와 시모가 제사와 관련해 맺은 비밀스러운 계약, 그리고 이 모든 속사정을 모르는 남편의 무지까지를 세나는 알아챈다. 그처럼 과속으로 체득된 세나의 앎은 혈연적으로 이어져 있으면서도 서른두해 동안 기적적으로 지연돼온 정우의 무지와 대조를 이루면서, 가부장제의 젠더 불평등 권력구조를 남성의 무지와 여성의 앎의 위계에 유비해 보여준다. 이 소설에 대한 평문들이 정우를 가리키며 “몰라도 되는 것. (…) 악역을 맡지 않아도 되는 것. 그것이 권력”18이라거나 “온 집안을 표표히 떠도는 그 모든 사랑과 증오의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그 구김살 없이 해사한 면상이 바로 권력의 얼굴”19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여성) 독자에게 선사하는 모종의 만족감에 대해서는 더 해명해야 할 것이 있어 보인다. 가부장제라는 ‘구조’에서 종속적 위치를 할당받는 ‘여성’의 부당한 현실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이 소설을 읽을 때, 말미에서 세나가 “진짜 악역”(38면)인 남편을 두고 동정적으로 “과연 그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라며 회의하거나, 미래의 아이를 떠올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딸이었으면 좋겠다고”(39면) 말하는 대목은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다시 읽으면 「음복」의 주요한 성취는 시모와 시고모가 제사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의 제약과 ‘협상하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소원을 성취해왔는지를 세나가 발견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협상에서 악역을 ‘맡아온’ 시고모의 모습에 세나는 외갓집에서 목격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을 겹쳐본다. 아들만 살뜰히 챙기면서 가부장제를 체현해온 시할머니와, 외할머니 때문에 우는 일이 많았을 시고모와 엄마, 그럼에도 자신들의 엄마를 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령까지 감당해온 두 여성. 그녀들에게 세나는 “나만은 엄마를 절대 미워하면 안 된다고”(35면) 다짐했던 유년시절의 감정으로 결속된다. 더욱이 세나는 시모의 문자를 통해 시모와 시고모가 각각 가부장제가 가하는 유무형의 강제에 맞서서 자녀들의 삶을 보전하기 위해 어떤 수고스러운 과업들을 ‘선택’해왔는지도 알게 된다. 시모가 제사를 열심히 챙기는 대신 시부는 아들의 삶에 일절 개입할 수 없게 됐으며, 시조모의 감정적 의존처가 돼주는 댓가로 시고모는 집안의 반대와 종용을 저지하고 딸의 재수와 약대 졸업과 ‘멋진’ 삶을 지켜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에 대해 우리는 정확히 양의적 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 구조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젠더적 억압을 받으면서 ‘동시에’ 동력을 얻는 길을 내고 그리로 나아갈 때 여성은 시고모와 엄마의 경우처럼 악역을 ‘맡는’ 과감함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소설은 그것을 ‘선택’이라고 부른다.

「음복」이 주목한 것은 자신을 구속하는 힘을 실감하면서 그 힘의 방향을 굴절시키고 강도를 조율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종내에는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짜고 실천하는 ‘선택’의 당사자들, 즉 행위자(agent)로서의 여성들이다.20 따라서 정우가 ‘진짜 악역’이라고 하더라도 무지의 장막 속에 있는 그의 인생은 ‘선택’에 미달한다. 세나가 딸의 출산을 계획하는 자신이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기를 기도하며 “걔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어. 아무것도”(39면)라는 시모의 소원을 그대로 물려받는 이 소설의 결말은 행위자-여성으로 성장해갈 그녀의 앞날을 예감하는 표지처럼 보인다. 이렇게 행위자-여성으로의 성장의 문턱에 ‘출산과 양육’이라는 사건을 배치하면서, 강화길의 소설은 행위자-여성이 획득하고자 하는 ‘모성적 권력’의 가치를 사유할 준비를 마친다. 잇달아 발표된 「가원」은 외조모의 일대기가 손녀 ‘연정’에 의해 다시 쓰이는 과정을 따라 전개되는데, 그 끝에서 밝혀지는 것은 친절하고 다정했던 외조부 ‘박윤보’의 양육과 대비돼 냉정하고 엄혹하게만 느껴졌던 외조모의 양육 안에 숨겨진, 손녀가 (자신이나 딸과는) “부디 다른 삶을 살았으면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114면)이다. 기억을 재구성해 다시 쓴 외조모의 일대기를 반성적으로 곱씹어보는 연정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인식적 낙차를 강조하는 대목들, 가령 “그러나 지금 와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정말로 알고 있었을까?”(107면)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그러나 그날은 몰랐다”(109면) 등은 외조모의 삶을 회고하며 얻은 앎이 의사로서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게” 된 그녀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게 될지를 기대하게끔 한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든, 그녀가 온종일 일했기 때문에,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다녔기 때문에, 내게 윽박지르고 몰아붙였기 때문에, 때리고 실망하고, “유지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이 동네를 떠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게 되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밥값을 하게 되었다. 박윤보와 같은 남자들을 만나고 얼마든지 그들을 떠나고 다시 만나고 잊었다. 그런 사람으로 자랐다. 나만은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살게 되었다. 살고 있다. 그래. 정말로 안다. 사실 박윤보는 나의 인생, 나의 삶, 나의 미래를 자신의 무엇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래서 나의 웃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었던 거라는 것.(119~20면)

 

절약을 강요하고 성공을 채근했던 외조모의 훈육이 연정의 어린 마음에 생채기를 낸 적이 분명히 있지만, 돌이켜보면 그 행위가 자기 삶의 가능성을 확장시킨 동력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연정은 안다. 모성신화가 조장하는 ‘모성’의 이미지에 꼭 들어맞을 부드러움과 미소를 내주던 외조부의 양육이 차라리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방임에 가까웠다는 각성에 이를 때, 이 소설은 때로 가부장의 외피를 쓰는 듯이 보이기도 하는 ‘모성적 권력’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바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돌봄의 수행’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돌보는 권력’은 ‘~보다 우위에 있는 힘’(power over)이 아니라 ‘~를 하는 힘’(power to)으로서의 권력 개념, 관계를 중시하고 타인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힘으로서의 권력 개념(power as empowerment), 미래지향성과 재생산성 그리고 이타성을 함축하는 권력 개념에 부합한다.21 강화길의 소설을 읽은 뒤 (여성) 독자가 얻는 위안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소설 속 여성들이 가부장의 권력에 얼마나 심각하게 종속돼 있는지를 들춰냄으로써 권력 비판을 용이하게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소설은 대안적 권력 모델을 추구하고 행사해온 행위자-여성들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그러한 대안적 권력을 이미 가졌거나 앞으로 가질 수 있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긍정하게 해주고, 돌보는 권력을 향한 여성들의 헌신을 북돋운다. ‘돌봄’과 ‘권력’은 얼마든지 결합할 수 있고, 그럴 때 정치는 불평등을 심화하는 이해당사자들의 아귀다툼이 아니라 양육의 주체인 모든 시민, 공동체, 국가의 평등하고 다양한 미래에 대한 소원이자 그 소원을 이루려는 끝없는 경주를 가리킨다는 것을 ‘집단모성’의 이름으로 정치를 하는 한 시민단체의 사례가 넉넉히 입증해주고 있다.22 강화길의 소설이 제안하는 여성 행위력의 발견과 권력 개념의 재해석을 참조해 ‘돌보는 권력’을 요체로 한 다음 민주주의를 예감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공상만은 아닌 것이다.

 

 

4. 회계하는 인간의 회개: 장류진의 경우

 

다음 민주주의의 실현이 돌봄에 대한 책임을 숙의하는 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주장은 여러 겹의 난제를 포함한다.23 ‘돌봄’을 둘러싼 재래의 인식적 영향하에서 그 주장은 공동양육 시스템의 기반이었던 봉건적 위계구조를 복원하자는 말로 곡해될 수 있고, 신뢰할 만한 공공시스템이 부재하는 현실을 환기하면서 공적 과제가 오롯이 사적 해결에 전가되는 불의(不義)의 사태를 예상하게도 한다. 게다가 새로운 연대의 형식이 ‘집단모성’으로 제안될 때, 그것은 본래의 취지를 거슬러 돌봄에 대해 남성보다 여전히 더 많은 책임감을 느끼는 여성들의 정체성 정치로 게토화될 위험을 갖는 한편, ‘여성적’ 책무로 구획돼 있는 과업들의 실천을 거부함으로써 성별 구분의 근간을 겨냥하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외면당할 우려까지 안게 된다. 결정적으로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시장에 의한 식민지화’로 지칭한 사회적 변동이 돌봄을 거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든 지 오래이고, 그런 탓에 계급적 차원의 적대와 긴장을 살피는 경제정의의 구상으로까지 시야를 확대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전통과 관습, 낙후된 현실과 현실추수적 순응, 페미니즘적 의혹과 한계, 자본주의의 포박과 위협까지, 중층적 난관을 극복하고 돌봄이 다음 민주주의의 화두가 될 수 있을지를 착실히 검토해보는 것이 우리의 남은 과제다.

이와 관련해 장류진의 소설들은 인상적이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지금-여기 한국사회의 이삼십대 직장인 여성들인데,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로 무장한 그녀들은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고,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겠다고 결의한다. 맞벌이의 일반화 경향에 발맞춰 살아온 그녀들은, 가부장제의 유해함이 일소되지 않은 현실 속에 잔존하는 전통적 젠더종속의 압력에, 결혼과 출산으로 빚어질 노동시장에서의 불확실성과 그로 인한 미래의 불평등(후-전통적인 젠더종속)을 더하고 싶지가 않다.24 “단 한번도 충분하다거나 여유롭다는 기분으로 살아본 적 없는 삶이었다. 삼십대 중반, 이제야 비로소 누리게 된 것들을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안정적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25 「도움의 손길」의 화자가 주장하는 안정지향의 “합리적인 선택”(같은 면) 저변에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불안정성의 공포가 짙게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녀가 돌봄의 구매자가 되면서 생계부양자로 규정된 남성이 돌봄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으며 누려온 ‘생산형 무임승차권’을 획득하게 된다는 점이다. 가부장제와 은밀히 공모하며 자본주의를 영속시켜온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돌봄의 책임은 두번 하청된다. 한번은 성차별적 분업에 의해, 또 한번은 생산자로서의 지위 유무에 의해. 각 단계에서 발행되는 ‘보호형 무임승차권’과 ‘생산형 무임승차권’을, 맞벌이 가정의 남편은 중복하여, 아내는 후자에 한하여 소유한다.26

여기서 ‘소유한다’라는 표현은 비유가 아니다. 임금노동자, 달리 말해 상품의 생산자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일하는’ 여성들은 인생 전체와 맞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유권의 보호·주장·행사·침해에 예민해진다. “집도 내 것이고,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내가 고른 내 것인데, 그런 집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 내 것 같지 않았다”(130면)라는 문장이 암시하는 대로, 좀처럼 실감되지 않는 소유권에 대한 화자의 불안이 「도움의 손길」의 숨은 주제다. 이 소설이 화자와 (그녀와 거래 관계인) 아주머니를, 성경 속 ‘부자’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137면) 하는 ‘거지’의 이미지에 겹쳐놓는 대목은, 이른바 ‘낙수효과’를 연상시키면서 돌봄 수혜자와 그 제공자를 자본(소유)의 크기에 비례해 서열화된 지위로 형상화한다. ‘부탁과 감사’라는 호혜적 형태로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하면서도 아주머니의 업무 추진에 대한 감시와 사찰을 멈추지 않는 화자의 모습은, 그녀가 신자유주의적으로 협소화된 ‘정의’, 즉 책무성(accountability)의 관리자라는 직접적 증거다. 실제 직업이 회계사(accountant)이거나 관련 업무를 맡는 것으로 설정되기도 하는 장류진 소설의 여성들은 ‘숫자를 세고 계산을 맞추며 장부를 기재하는 일’에 능숙하고 그 회계적인 실천을 통해 ‘투명성, 반부패, 청렴’ 같은 책무성의 윤리가 일상의 도덕으로 안착하기를 욕망한다.27 그렇다면 「도움의 손길」은 ‘비윤리적’ 거래를 시도하는 아주머니를 향한 화자의 ‘정당한’ 불만에 대해, 또 충분히 ‘정의’롭지 못한 데서 오는 불쾌감을 감수하며 거래를 유지해온 화자에게 도리어 ‘정직’을 명분으로 ‘손해를 끼친’ 아주머니의 적반하장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작가 자신이 한쌍이라고 소개한28 다른 작품 「연수」와 함께 읽을 때 「도움의 손길」의 진가는 명확해진다. 「연수」는 지역 맘카페에서 추천받은 강사 ‘아주머니’에게 연수를 받으며 운전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는 회계사 비혼주의자 여성의 이야기다. 회계적 사고를 편안하게 여기는 화자의 재무제표식 산술을 거쳐 돌봄의 수혜-제공 관계가 형성되고, 그 거래의 당사자인 두 여성의 상이한 세대와 계급, 그로 인한 가치관과 태도의 차이가 부각된다는 점에서 「도움의 손길」과 「연수」는 동일한 얼개를 갖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두 작품이 갈라지는 지점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한데, 결론부터 말하면 두 소설에서 화자는 돌봄 제공자 여성에게 신뢰와 호감을 갖는 데 각각 성공 또는 실패한다.

성공의 사례부터 살펴보자. 「연수」에서 운전 초보자인 화자는 자신을 “갓 태어난 갓난아기”29로 여기며 가르치는 아주머니의 돌봄에 힘입어 연수가 끝날 즈음 “비포장도로, 말 그대로 흙길”(280면)을 무사히 통과해 “그냥 운전이 하고 싶어 핸들을 잡는 사람들의 마음”(282면)마저 이해하는 단계에 진입한다. ‘비법’의 이름으로 전수받은 아주머니의 ‘경험적 지식’ 덕에 화자가 9년 동안의 낭패감을 삽시간에 떨쳐버리는 이 소설의 줄거리는, 미숙한 주인공이 숙련된 교사의 지도로 거듭나는 도제식 성장 플롯과 겹쳐지면서 아마도 그녀들을 매개한 맘카페와 흡사할 여성 주도의 양육 공동체를 상상하게 한다. 화자가 아주머니에게서 ‘딸의 성취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을 경신해간 엄마’를 발견하는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세대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계급의 격차가 축약되는 긴 시간의 축 위에 두 여성을 배치한다. 그 인류학적 선 위에서 인간은 마치 도로의 차들처럼, 빼곡하게 줄지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만 멀리서 보면 멈춰 선 듯이 보일 것이다. 전진하는 문명의 도로에서 차선 실수를 범한 화자가 원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아주머니가 “뒤에서 막아”주고 대신 “차갑고 신경질적인 경적”을 받아내고 고맙다는 인사는 사양하며 “전방 주시”를 “스피커폰으로 조언”(284~86면)할 때, 이 장면은 여성연대가 이룩할 진보의 서사를 함축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주는 만족감에 취하지는 말자. 우리는 아직 「도움의 손길」의 실패를 점검하기 전이다.

「도움의 손길」에 나타난 연대의 실패를 재생산노동(돌봄)의 상품화 사태와 관련해 해석한 이지은의 글은, 이 소설의 화자에게 아주머니가 ‘구원’을 언급하며 요청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교회의 맹목적인 가르침, 곧 신앙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질문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의 일방적 교육이 문제였고, 오늘날 공동체 윤리를 기획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페미니즘의 언어를 경유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화자가 아주머니에게 신뢰와 호감을 갖는 데 실패한 것은 신앙의 실패이지, 끝없는 축적을 통해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소비 주체로서 “시혜적 연민” 이상의 배려를 하기는 곤란했던 화자의 실패로 보지는 않은 것이다.30 진상이 그렇다면, 신앙과 같은 맹목적 힘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은, 시장이 존재하는 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에서 얼마든지 자유로워져도 무방한 것이 아닌가. 이런 오해를 막기 위해, 연대 실패라는 이 소설의 결과를 초래한 ‘원인-실패’의 현장으로서 화자가 기억하는 교리교실 장면을 섬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칠판에 두개의 그림을 붙였다. 하나는 천국이고 하나는 지옥이었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긴 숟가락으로 서로에게 밥을 떠먹여주고 있었고,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혼자만 먹으려고 하다보니 밥을 하나도 먹지 못해 뼈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그들의 하반신은 불구덩이에 잠겨 있었다. 나는 교리 선생에게 물었다.

“그러면 숟가락 안 쓰고 그냥 손으로 먹으면 되지 않아요?”

선생은 약간 당황하다가 곧 싸늘한 표정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게 마음대로 될까요? 지옥에서는 숟가락을 불로 녹여서 손바닥에 붙여버린답니다.”

그 후로 나는 숟가락이 손에 붙어버릴까 몇번이나 확인하며 밥을 먹느라 곧잘 체하는 아이로 자랐다.(139면)

 

이 소설에서 ‘체기’는 인용문에서, 그리고 화자가 아주머니의 대가족 사진을 메신저 프로필에서 확인하고 남편에게 소화제를 사 오라고 부탁할 때 각각 등장한다. 두번의 체기 사이에 나오는 것은 화자의 비출산 결정에 대한 장황한 이유 설명, 집을 보러 다니다 만난 양육자 여성들의 지친 얼굴에 대한 회상, 아들의 계좌로 임금을 입금해달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이상스레 상하는 마음이다. 세개의 삽화는 별개로 보이지만 실은 어릴 적 교리교실에서 거부하고자 했던 ‘긴 숟가락’의 상징과 포개진다. 인간은 ‘긴 숟가락’을 이용해서만 밥을 먹고 생존할 수 있다는 선생의 전언은 책임을 요청하는 타인과 어떤 식으로건 묶이고 싶지 않은 화자의 욕망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고, 타인과 연결되지 않고도 생존할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는 그녀의 질문은 손바닥과 숟가락을 하나로 만들어버린다는 지옥의 풍경과 함께 우문이 돼버린다. 인간의 관계성을 불가피한 인간의 조건으로 못박는 교회로부터 화자는 멀리 떠나왔지만, 떠나온 곳으로 다시 자신을 불러들이는 세개의 삽화가 징검다리처럼 놓이면서 어릴 적 ‘체기’는 돌아온다. 소유권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화자에게 관계적 존재로서 자기를 바라보라는 주문, 가까스로 취득한 소유권을 더 불안하게 만들지 모를 그 지식은 아직 소화하기 어려운 것으로 남아 있다.

돌봄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떠맡기는 현실을 생각하면 ‘긴 숟가락’에 대한 화자의 진저리가 납득이 된다. 그러나 ‘긴 숟가락’ 일화를 통해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규정하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그 존재론적 지식 안에 새겨져 있다고 이야기하는 교리교실은 신앙을 주입한다기보다 인류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화자는 신앙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인류학적 지식을 부정한 것이며, 틀린 지식에 붙들려 있는 한 연대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쯤에서 「연수」가 도로에 세대와 계급이 다른 여성들과 그녀들을 배려하거나 위협하는 여러 차주를 끌어들이면서, 혼잡한 듯 보여도 옳은 길을 찾아 전진하는 인간사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도움의 손길」은 성경책이 “관성적으로 계속 가지고”(137면) 다니는 짐이자 무상으로 기증해도 아깝지 않은 값없는 진리가 된 시대에, 진정한 의미의 ‘구원’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가 기반을 둔 참된 인류학적 지식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수」가 선보인 스마트폰을 통한 ‘원격 돌봄’의 장면은 새삼 흥미롭게 읽힌다. 소비사회의 회계-주체로 조형돼온 우리가 당장이라도 실천 가능한 연대의 형식은 그와 같은 ‘느슨한 연결’일지 모른다. 인간은 돌봄의 수혜자이자 제공자인 관계적 존재라는 점에 수긍하면서도, 돌봄의 책임을 과거와 다르게 어떻게 해석·배분·실천할지 토론하는 세간의 공동체 실험들에는 공통적으로 저 ‘느슨한 연결’의 기획이 있다.31 오래전 익힌 인류학적 지식에 합당하게 살아보려고 뒤늦게나마 모의 중인 우리의 노력 속에서 ‘구원’은 조용히 발명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5. 포스트 코로나 시대와 돌봄 민주주의

 

팬데믹 사태를 마주하고서 새삼스레 깨우치게 된 인류학적 기초지식은 인간이 호흡기 달린 생명체로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매일 늘어나는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는 대기 중에 노출된 호흡기들이 불가피한 상호의존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투명하게 일러준다. 날숨[呼]과 들숨[吸]이 우리가 타인과 세계와 관계하며 돌봄의 제공자이자 수혜자로 살고 있다는 생래적 흔적으로 보일 때, 호흡이 놓인 사회경제적 환경을 점검·개량하고자 노력 중인 오늘날의 분주한 움직임들은 다음 민주주의의 태동으로 읽힐 수 있다. 모두가 돌봄의 수혜자(care receivers all)라는 합의에서 시작해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구상하는 ‘돌봄 민주주의’32가 촛불정신의 비전이 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촛불혁명기 한국문학이 ‘자기돌봄’을 약탈당한 청년들의 희망 없는 삶과 소리 없는 죽음에 대해(김유담), ‘돌보는 권력’을 향해 모여든 여성들의 역사와 그 잠재력에 대해(강화길), 시장이 분할하고 줄 세우는 돌봄 관계의 느슨하고 수평적인 연대 가능성에 대해(장류진) 부지런히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촛불정신의 구체화가 여기까지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데서 일단 이 글은 멈춘다. 다만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에 ‘덕분에’의 윤리가 깃들고 있는 상황은 퍽 의미심장해 보인다. ‘덕분에’라고 표현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의존성을 겸허히 인정하게 되지 않는가. 불평등이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자연처럼 일상을 장악해가는 동안에도 우리가 평등에 대한 염원을 포기해본 적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돌봄(care)을 다루는 촛불혁명기 한국문학과, 타인의 호흡을 걱정(care)하고 자신의 호흡을 조심(care)하는 시민들 ‘덕분에’ 알게 됐다.

 

 

  1. 이종혁·최윤정·조성겸 「정치 효능감과 관용을 기준으로 한 바람직한 소통 모형: 참여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를 위한 제언」, 『한국언론학보』 59 (2), 2015, 11면.
  2. 졸고 「소설, 정치를 하다: 『82년생 김지영』을 다시 읽으며」, 『안녕, 오늘의 한국소설!』, 민음사 2017(『82년생 김지영(코멘터리 에디션)』, 민음사 2018에 개고 후 재수록).
  3.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 2017년 한국소설의 안팎」, 『움직이는 별자리들』, 갈무리 2019, 80면.
  4. 「‘쓰기’의 존재론: ‘나-우리’라는 주어와 만들어갈 공통장」, 같은 책 96면.
  5. 최진석 「공-동적 사건의 비평을 위하여: 문학이라는 커먼즈와 비평의 문제」,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66면.
  6. 한기욱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디디의 우산』을 읽고」,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사유·정동·리얼리즘: 촛불혁명기 한국소설의 분투」, 『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
  7. 백낙청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 320면.
  8. 황정아 「불평등의 재현과 ‘리얼리즘’」, 『창작과비평』 2019년 가을호 19면.
  9. 이러한 상황의 문제성에 대해서는 김종엽 「조국사태, 대학입시 그리고 교육불평등」(『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에 잘 지적되어 있다.
  10. 「‘한국 청년 100명’ 만나봤더니… “계층 이동 가능성 크다” 6명뿐」, 한겨레 2019.12. 2.
  11. 졸고 「지방-여성 서사의 문학사적 반격: 강화길론」,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8년 가을호.
  12. 엄기호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창비 2016, 21면.
  13. 스티븐 J. 맥나미·로버트 K. 밀러 주니어 『능력주의는 허구다』, 김현정 옮김, 사이 2015.
  14. 노동을 지배하는 자본의 달라진 방식에 대해서는 한기욱 「사유·정동·리얼리즘」 20면 참조.
  15. 제임스 퍼거슨 『분배정치의 시대』, 조문영 옮김, 여문책 2017, 318면.
  16. 황정아, 앞의 글 31면.
  17. 졸고 「지방-여성 서사의 문학사적 반격」 138면.
  18. 인아영 「눈물, 진정성, 윤리: 한국문학의 착한 남자들」, 『문학동네』 2019 겨울호 100면.
  19. 오은교 「여성주의 가족 스릴러」,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49면.
  20. 페미니즘 담론에서의 ‘행위자’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 단락을 인용함으로써 설명의 부담을 덜기로 하자. “페미니스트의 원칙과 그 자기주도성(initiative)에 반대하는 이들은 대다수의 여성들이 지배적인 여성적 규범에 기꺼이 순응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때 페미니스트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그 규범에 순응하지 않았을 때 얻게 되는 불이익이 없었더라면, 거기에 더해 편재하는 전통적 이성애 역할모델과 미디어의 표상이 없었더라면, 여성들은 다르게 살기를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Feminist theories of agency, Encyclopedia Britannica) 강요되는 규범과 편재하는 표상 속에서도 여성이 다르게 살기를 ‘선택’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행위자로서의 여성의 행위력(행위자성, agency)을 믿는 일이다.
  21. 권력 개념에 대한 이같은 방식의 페미니즘적 재해석은 Nancy Hartsock, Money, sex, and power: toward a feminist historical materialism, New York: Longman 1983; The feminist standpoint revisited and other essays, Colorado: Westview Press 1998 참조.
  22. ‘정치하는엄마들’을 생각하며 썼다. 그들의 최근 관심사는 ‘스쿨미투’ 과정에서 드러난 폐단의 수정과 n번방 사건의 발본적 해결이다. “정치하는엄마들의 ‘엄마’란 단순히 생물학적 여성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등 성별이나 연령을 넘어서 모든 성인들에게 주어지는 이름이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나아가 국가와 사회 시스템 역시 아이를 돌보는 엄마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확장하기로 했다. (…) 아이들은 물론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모두가 모두의 아이를 키우는 사회를 집단모성의 힘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정치하는엄마들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 생각의힘 2018, 47~48면)
  23. 더 자세히는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참조.
  24. 전통적 젠더종속과 후-전통적 젠더종속의 구분은 낸시 프레이저 「페미니즘과 자본주의, 역사의 간계」, 『전진하는 페미니즘』, 임옥희 옮김, 돌베개 2017에서 가져왔다.
  25. 장류진 「도움의 손길」, 『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143면.
  26. 돌봄의 책임에 대한 두개의 무임승차권에 대해서는 조안 C. 트론토 『돌봄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옮김, 아포리아 2014, 특히 2부를 참조.
  27. 신자유주의적 정의 개념인 책무성과 그 윤리의 측정·관리자인 회계사의 형상에 대해서는 서동진 「이 윤리적인 사회를 보라: 신자유주의적 윤리로서의 정의」, 이택광 외 『무엇이 정의인가?』, 마티 2011 참조.
  28. 장류진 「작가노트: 흘러들어온, 그리고 이어가는」,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9. 같은 책 266면.
  30. 이지은 「재생산노동력의 상품화와 여성 연대의 곤경: 장류진, 「도움의 손길」에 부치는 주석」, 『문학동네』 2019년 겨울호 446~47면.
  31. 페미니스트 비혼주의자 여성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공동체 실험의 현장들에 대해서는 2020년 3~4월 경향신문에 연재된 「언니들의 플랫한 생활」을 참조할 수 있다.
  32. 조안 C. 트론토, 앞의 책 83~8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