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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우리 문학은 지금 무엇과 싸우는가
겹쳐진 세계에서 분투하는 시인들
조대한 趙大韓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낯선 몸으로 속삭이기」 등이 있음.
blackdooly16@naver.com
1. 현실세계에서 온 침입자들
‘전지적 독자 시점’이라는 소설이 있다. 웹소설 분야에서 누적판매 기록을 경신할 만큼 큰 호응을 받은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김독자’라는 이름의 회사원이다. 그는 이름과 어울리게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어떤 소설을 읽는 재미에 기대어 하루하루의 일상을 버텨나간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의 그 소설은 설정의 과잉과 방대한 세계관 때문에 점차 구독자를 잃어갔고, 김독자가 클릭하는 ‘조회수 1’의 힘에 기대어 겨우 명맥을 이어나간다. 긴 소설의 완결이 다가와 실의와 회환에 잠겨 있을 때쯤, 김독자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익숙한 이야기의 시작과 다시 마주한다. 도깨비가 나타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비현실적인 그 장면은 김독자가 수없이 읽었던 소설의 첫 장면이었다. 현실과 허구가 겹쳐지는 그 기이한 소설 속에서 김독자는 등장인물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새로이 써나간다.
이 작품에는 독특한 메타적 시선과 함께 웹소설에서 흔히 사용되는 여러 장르적 클리셰들이 공존해 있다. 그 속에서 최근 시인들의 시세계를 독해하는 흥미로운 입각점들을 짚어볼 수도 있다. 첫번째는 현실세계의 침입이다. 주인공에게 소설은 지친 일상과 분리된 위안의 공간이었으나, 현실이 침입하는 순간부터 그곳은 더이상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변한다. 이를 읽는 독자들은 익숙했던 세계의 구분이 흔들리는 데서 불안을 느끼면서도, 중첩되어 탄생한 세계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두번째는 가상세계의 위상 변화이다. 현실에서 무용했던 주인공의 소설은 이후 세계의 운명과 향방을 결정하는 시나리오로 화한다. 먼저 알고 있던 그 가상세계의 정보 우위를 이용하여 주인공은 현실의 세계를 주도해나가고, 그렇게 가상세계에서만 존재했던 영향력이 현실세계로 이어질 때 독자들은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완고하게 구획된 가상과 현실의 구분선 소거이자 익숙했던 리얼리티의 파열일 것이다. 이렇게 겹쳐진 세계의 징후들을 통해 낯선 근미래의 시간을 살아가는 최근 시인들의 시세계를 이야기해볼 수는 없을까.
딸 같아서 그랬다 귀여워서 그랬다 기억이 안 난다
고등법원 재판장 참고인으로 증언한 지도교수가 위증했다고
감 씨 고발했지만
혐의 없음 불기소처분
pass****
2018.02.23. 20 : 03
짜식아. 빨 리. 내려오고절간에. 들어가서.
이불덮어쓰고수행해라. 지옥행이다
부당 해고 당했다 억울하다
2008년 감 씨 교육부에 소청심사 의뢰
1심 패소 항소 기각
행정소송
1, 2, 3심 모두 패소
지옥행이다
이렇게 당했다 이야기하다
시인들이 일어나고 있다
시인협회는 감 시인에게 자진 사퇴를 권고했다
협회 관계자가 말했다 감 씨의 과오를 모르고 뽑은 것이다
lit0****
2018.02.23. 17 : 09
—성다영 「좋은 시」 부분1
위 시편은 언뜻 일반적인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온라인상의 목소리들이 이리저리 조합된 텍스트처럼 읽힌다. 그중 하나는 성범죄로 추정되는 ‘감 씨’의 잘못을 규탄하고 비난하는 원색적인 목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당사자의 변명과도 같은 목소리이다. 이에 더해 불기소처분, 해고, 패소, 자진 사퇴 등 사건과 관련된 듯한 공식적 언어들이 함께 나열되어 있다. 시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해당 작품의 제목은 모 문예지에서 청탁인사 문구로 남긴 ‘좋은 시를 기대하겠습니다’라는 표현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사연인즉슨 신작시의 원고 청탁을 받았는데 그 문예지의 임원이 성추행 문제로 교수직에서 물러난 이였다는 것을 사후에 알게 되었고, 청탁을 거절하는 대신 자신이 고민한 좋은 시를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상된 것처럼 이 작품은 반려되었고, 시인이 본인의 SNS에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 작품에 제기될 비판 중 하나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시가 현실의 목적의식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 이 비판 속엔 시 혹은 문학이 현실의 목적이나 담론을 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입장, 최소한 현실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담아내는 문학은 덜 아름답거나 세련되지 못하다는 미학적 태도가 담겨 있다. 시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질적 내용에 관해서는 저마다 입장 차가 존재하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제 어떤 이들에게 시의 ‘좋음’이란 작품 내의 아름다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현실의 선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전에 현실의 목소리가 개입되는 시적 경향에 대해 쓴 글이 있다.2 시인과 시의 목소리를 겹치게 하는 작품은 일견 세련되지 못한 미학적 퇴행이거나 현실의 납작한 재현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는 경향이나, 언표행위(énonciation)의 주체와 언표(énoncé)의 주체 사이의 분리가 현대시의 성취로 인정받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조금 달리, 현실의 음성들이 이중적으로 얽혀 있는 어떤 시적 세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령 이런 작품들이다.
아버지는 제기 위에 온 가족의 손바닥을 두고 못을 쿵쿵 박았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헤어질 수 없단다 가족이니까 아빠는 마지막으로 못 머리를 자르고 영원히 뽑지 못하게 두었다
이제 너와 나는 우리가 되었다
우리는 흰쌀밥을 찬물에 말아 먹었다 한지에 우리 이름을 적고, 서걱서걱 과도로 갈라 먹고 우리는 글이 되었다 꾸깃한 종이로 서로를 감싸 안고 까맣게 까맣게 종이를 채웠다
우리는 문장에 머물렀을 때 가장 아름다웠다
—이소호 「경진이네—5월 8일」 부분3
2월 27일
동생이 일기를 쓸 때
나는 낯선 우리에 대한 시를 쓴다
지긋지긋하게 우리로 묶이는 그런
시를
—「마이 리틀 다이어리—경진이네」 부분
내가 요즘 신인들 시집을 자주 보잖아. 잘 들어 시라는건 말이야 미치는 거야. 지금 네 상태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지. 독자들을 니 발밑에 무릎 꿇게 만들어야지. 선배들 니들 좆도 아니야 이런 마음으로 나도 뛰어넘어야 하는 거야. 그래 알지 너 시 잘 쓰거든? 시를 못 쓰면 내가 이런 얘기 하지도 않아. 근데 니가 가족 시를 쓴다는 그 행위 자체에 매몰되어 있는 거 같아. 니가 이해를 못하는 거 같으니까 예를 들어 볼게 너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야. 그래 최승자처럼 되고 싶다며, 근데 넌 최승자가 될 수 없어. 다르거든 이 세상에 최승자는 최승자 하나야. 니 시는 말야 뭐랄까. 끝까지 안 간 느낌? 더 갈 수 있는데, 지금보다 더 극단으로 가야 한단 말이야.
—「송년회」 부분
이소호의 시집 『캣콜링』에서 발화되는 목소리의 면면들이다. 「경진이네—5월 8일」에는 제사로 추정되는 풍경이 그려져 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온 가족의 손바닥을 두고 못을 쿵쿵 박”아 “영원히 뽑지 못하게” 하고 ‘우리’라는 혈연의 울타리를 선언한다. 「마이 리틀 다이어리—경진이네」에서 표현된 것처럼 이 시집 안에는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우리로 묶이는 그런/시”가 여기저기 담겨 있다. 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그 선험적인 현실의 원을 자신의 시적 세계에 겹쳐놓는다. 실제 시인의 동생 이름을 딴 시진이와 시인의 개명 전 이름인 경진이는 그 겹쳐진 세계 속에서 연속된 등장인물처럼 출현한다. 그리고 「송년회」는 이 가족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에 덧붙은 또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이다. 이 작품 바로 다음에는 고발을 사과하듯 비꼬는 이소호 시인의 「사과문」이 이어져 있다.
이처럼 앞의 시세계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인물과 사연의 연속체들은 마치 현실 속 작가의 시점이 직접 반영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의 핵심은 그 시적 묘사들을 실제의 사실 여부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것처럼 기입된 그 시점의 목소리들이 시와 현실세계의 경계를 흐트러트리며 발생시키는 미적 효과에 집중하는 것이다. 주네뜨(G. Genette)는 이러한 시점들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언급을 남긴 바 있다.4 그는 프루스뜨(M.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텍스트로 삼아, 등장인물의 경험적 제약과 시점에 묶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한 사례를 소개한다. 주인공인 ‘나’와 작가인 ‘나’의 시점들을 이리저리 넘나드는 이러한 서술방식은 시점의 논리를 침범할 뿐 아니라 서사적 세계의 문법 자체를 뒤흔드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관점을 최근의 시인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시적 세계에 잠시 적용해보자. 신형철은 2010년대 이전 시의 성과를 ‘시인의 내면 고백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라고 이야기하며, 한국시가 “누구도 될 수 있고 무엇이건 말할 수 있는” “위조 신분증”을 얻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5 당시 그렇게 새로운 발화의 영역을 개척한 작품들과 눈 밝은 해석자들 덕분에 한국시의 언어는 크게 확장되었고 그 미학적 치열함은 여전히 유의미하게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전위의 원심력과 문학의 자유로움을 빌미로 행해졌던 일부의 억압과 젠더적·계급적 폭력들을 경험한 이들에게, 그 위조의 미학은 의도치 않게 현실로부터의 면죄부나 모종의 알리바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시인들은 단순히 현실 재현이나 고발의 목적으로 시를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완고하게 분리된 현실과 시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겹쳐놓으며 현실과 안전거리에 있던 당시의 미학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연극적이고 다층적인 시적 주체들이 단단하고 진실된 실체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현실의 텅 빈 허위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면, 현실세계에서 침입한 이 발화자들은 이와는 정확히 반대로 실제 유효한 억압으로 작동하고 있음에도 무해한 가상의 세계로 간주되던 시의 진실과 유효성을 폭로하려 하는 것이 아닐까. “문장에 머물렀을 때 가장 아름다웠”던 이야기들은 이제 그 무용한 아름다움의 안전 공간조차 의심받게 되었다.
2. 가상세계 속의 플레이어
가상과 현실 세계의 겹침에 관한 논의를 다른 방향으로 진전시키기 위해 최근에 개설된 ‘던전’이라는 문학 플랫폼의 이야기를 잠시 꺼내보자. 매일 서비스되는 웹진이라는 점, 구독자의 후원을 상정한 매체라는 점은 여타의 대안 플랫폼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지만, 던전은 그 공간 안에 게임의 인터페이스를 적용한 점이 독특하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일종의 게임의 장처럼 공간화된 그곳에 참여한 이들은 레벨을 가지고 퀘스트 활동에 따라 아이템을 얻을 수 있으며, 물약 등의 아이템을 용사에게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작가를 후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고블린 상인’에게 일정한 입장료를 지불하는 형태를 거쳐야만 참여가 가능하다.
밤사이 벽은 얼었다
이동 상인은 이동한다 지난날보다 기울고 야윈 벽 아래로
직접 구운 유리 문진을 팔기 위해서다
이동 상인은 유리 문진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넣었다
넣을 수 없는 것을 뺀 넣을 수 있는 모든 것
자연력이나 영혼, 신념 체계를 포함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허용함에도 형체를 유지한 유리 문진만이
이동 상인의 가방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눈을 치우듯 유리 파편들을 쓸고 쓸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이동 상인은 아무런 마음도 갖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떠나보낼 심산만으로 매일 아침 눈을 떠야 한다고
기나긴 벽을 다 지나올 쯤에야
느리고 환연한 판단을 내린다
—배시은 「평균자유행정」 전문6
위 시편에는 “직접 구운 유리 문진을 팔기 위해” 이리저리로 이동 중인 상인이 한명 등장한다. 이 시적 세계가 던전이라는 시스템에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해본다면, 게임 내에서 여러 아이템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배회하는 NPC7를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그는 안이 비치는 동그란 유리 문진 안에 “자연력이나 영혼, 신념 체계” 등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집어넣는다. 다소 의아한 것은 본인이 만든 유리 문진조차도 마음껏 판매하지 못하는 상인의 모습이다. 그것은 창작의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장인의 신념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형체를 유지한 유리 문진만” “이동 상인의 가방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한 게임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의문은 이동 상인이 왜 이러한 시스템에 순응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성들여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떠나보낼 심산만으로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이 지친 매일의 반복에 “아무런 마음도 갖지 않는다”라고 되뇌는 상인은 어딘지 자포자기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던전에 직접 뛰어든 그는 왜 괴물과 싸우고 레벨업을 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그들을 보조하고 지켜볼 뿐 시스템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상인을 택했을까. 시의 제목인 ‘평균자유행정’이 기체의 한 분자가 다른 분자들과 충돌하기까지 이동할 수 있는 평균거리를 의미한다는 걸 상기해볼 때, 어쩌면 이 인물은 홀로 자유로이 행로하는 사이의 순간만을 행복하다 여기고 이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다른 이들과 부딪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갑게 얼어붙은 가늘고 야윈 벽 아래를 지나다니는 이 상인의 이미지는 여러 방식으로 해석되겠지만, 부스러기를 그러모으듯 자신의 창작물을 들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판매처를 방황하는, 그럼에도 작고 투명한 유리 문진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슬픈 시인들의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사과나무 아래. 송경련이 말한다. 죽으면 경기를 관찰할 수 있다고, 죽으면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고. 그들 듀오는 원을 향해 뛴다. 원은 어디에 생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생기고, 여기에는 약간의 운이 작용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곳에 원이 생기면 움직일 필요가 없지만, 원은 늘 우리 바깥에 존재하므로 우리는 뛴다. 널 사랑해, 널 좋아하진 않지만. 왕밍밍은 그런 말도 할 줄 안다. 나는 꿈을 꾸며 꿈에서 내가 소외되는 상황을 즐길 줄 알기 때문에. 원 바깥에 오래 있으면 체력이 닳고, 결국엔 아파서 죽어버린다. 죽기 싫다면 원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땅에서 뭔가를 줍고 그것을 먹어야 한다. 난 죽고 싶지 않다. 난 아프고 싶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 날 아픈 사람으로 생각해주는 건 좋다. (……) 다시, 사과나무 아래, 내가 있다. 너, 나무 아래서 회복되는 중이니?라고, 너는 말하지 않고, 넌 그냥 죽어 있는 게 나을 것 같다, 라고 너는 말하지 않고, 나는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뿐인데,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거기 사람 있어, 라고 너는 말한다.
—문보영 「배틀그라운드—원」 부분8
이 시편 역시 가상의 게임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전장으로 설정된 이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인물은 ‘왕밍밍’과 ‘송경련’이다. 시집에서 일관되게 형상화된 이 인물들에게도 현실과 겹쳐진 이 별도의 세계 속에 따로 참여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왕밍밍은 꿈 바깥에서 모기에 물렸”지만 “꿈 안에서 발바닥을 긁”(같은 시)는다. 문제는 이 꿈 같은 세계 안에서도 손쉬운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 강제적인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위 ‘원’과 ‘자기장’이라 불린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원 안쪽은 안전지대이고 원 바깥은 자기장으로 이루어진 위험지대이다. “원 바깥에 오래 있으면 체력이 닳고, 결국엔 아파서 죽어버린다.” 그러니 “죽기 싫다면 원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스템이 요구하는 원의 크기는 점점 더 작아진다. 그렇게 좁아진 원 안으로 달려가다보면 부득이하게 다른 이들과 마주치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그들과 강제적인 교전을 벌여야 한다.
그러니 이 세계에 참여한 이들에게 허락된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낡은 양자택일이다. 하나는 이 세계에 참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플레이어로서 죽음을 택하는 일이다. “죽으면 경기를 관찰할 수 있”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세상을 볼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이 시스템의 강제성을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플레이어로서 계속 참여하는 일이다. 이를 택한 자들은 타인을 살해하여 적군의 시체에서 습득 가능한 자원을 강탈하거나, 세계가 보급품처럼 던져주는 “뭔가를 줍고 그것을 먹어야” 타 플레이어보다 강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양자택일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이곳은 세계와의 불화와 투쟁이 전제되지 않은 곳, 즉 시스템을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소거된 곳인가?
필사적으로 원을 향해 뛰는 모습으로 미루어보건대, 시에 등장하는 이들은 언뜻 후자 쪽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한데 이들의 태도는 어딘가 조금 이상하다. 무릇 플레이어로서 참여한 자는 더욱 강해지기 위해 타 플레이어를 제거하고 그들의 자원을 선점해야 할 터인데, 이들은 마치 누군가와 대면하기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송경련은 왕밍밍에게 만류하듯 말한다. “가지 마 가지 마, 거기 사람 있어”. 다른 이들과의 충돌을 피해 그늘의 벽 아래로 쓸쓸히 이동하던 어떤 상인의 모습처럼, 송경련과 왕밍밍은 누군가와의 부딪침을 꺼려하고 두려워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이들이 강제적인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 같지도 않다. 시스템이 허락하는 원 바깥으로 뛰어나가 세계와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물론 가치 있고 영웅적인 일일 것이다. “누군가 날 아픈 사람으로 생각해주는 건 좋다”고, 그럼에도 솔직하게 “난 죽고 싶지 않”고 “아프고 싶지 않다”고 이들은 말한다. 전장의 룰을 그대로 따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시스템과 적극적으로 적대하지도 않는 이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라끌라우(E. Laclau), 무페(C. Mouffe), 그리고 지젝(S. Žižek)은 ‘적대’(antagonism)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9 그들은 시스템의 혁명을 위해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상정되는 어떤 적대의 형상이, 실은 혁명의 움직임을 지속하게 하는 조건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들은 맑스(K. Marx)의 비전을 사례로 든다. 그들이 보기에 맑스는 적대를 해결 가능한 ‘소외’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맑스는 노동자들이 자본으로부터 혹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소외가 모두 사라지는 순간에 도달할 때 궁극적 혁명이 완수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맑스는 사회의 원동력을 지속하고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자체를 없애려 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세계의 불화를 없애려는 모든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귀결된다는 사실 속에서만 존재 가능한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 논의의 틀을 일부 빌려보자. 만약 “추락하지 않는 인간은 게임 참여 의사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이 꿈 같은 가상의 세계에서 “추락으로 시작”(「배틀그라운드—사막맵」)되는 세계의 조건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속에 참여하는 이들이 세계에서 소외된 스스로를 인지하는 순간부터 이미 이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꿈을 꾸며 꿈에서 내가 소외되는 상황을 즐”기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추락을 비행의 일종으로 뒤바꾸는 정신승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저항이나 전복은 아닐 테지만, 벗어날 수 없는 잔인한 전장의 감각과 룰을 미묘하게 달리 배치하는 태도이기도 할 것이다.10 다른 “사람을 만나도 죽지 않는” “그런 세상을 믿는 자는 게임 참여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배틀그라운드—설원맵」)되는 세계에서 다른 이들이 무서워 피해 다니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길 꺼려하는 그들의 머뭇거림은, 추락으로 시작되고 죽음으로 끝나는 이 세계의 약속된 파국을 잠시 지연시킬 뿐이다. 결과적으로 외부 시스템은 견고하게 재생산되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어쩌면 이들은 “한 사람이 미치고 다른 한 사람도 미치고 모든 사람이 미치면” 종내 “아무도 미치지 않게 되”(「배틀그라운드—극단의 원」)는 기이한 내부 세계의 풍경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11
3. 가상과 현실 사이에 선 투명한 얼굴의 시인들
이처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시적 세계와 현실의 경계에서 포착되는 묘한 거리감 혹은 소극적 태도에 대해 주목해볼 만한 언급이 최근에 있었다. 그것은 한 문예지의 시 분야 공모 심사 과정에서 나온 심사평이었다. 심사자들은 응모된 수많은 원고를 검토하는 도중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흰색, 폐허, 꿈속에서 꾸는 꿈, 묘한 비현실감, 연인들이 소소하게 주고받는 대화, 조금씩 어긋나는 일상 감정” 등의 이미지를 두고 “어느덧 우리 시단의 기본값으로 축적된” “정서나 세계를 대하는 태도”12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한 심사자는 “인공적이지 않은 인공 같”은 그 묘한 시적 세계를 “낱낱이 깨진 조각을 섬세하게 이어 붙인” “백자”13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들의 언급에서 최근의 시인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시적 세계의 풍경 하나를 읽어볼 수도 있을 듯싶다.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이런 문장을 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눈을 떠보니 텅 빈 방이었고
죽지 않고 도착해서 기뻤다
(…)
눈밭 속에
홀로 절이 서 있다
하얀 문과 검은 지붕
검은 지붕 위 쌓여가는
하얀 눈
정지한 세상
고요하고 무궁하게
내가 찾는 것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이 되는 그것은 불빛 그것은 굴러가는 토마토 그것은 이국의 사람들이 마시는 뜨거운 홍차 그것은 향기 그것은 허기 그것은 치통 그것은 늙은 개의 얼굴 그것은 울리지 않는 전화벨 그것에 손을 가져가면 순간 사정없이 깨어져
무수히 많은 파편들은
흐르고 넘어지고 흐르고 슬프고 흐른 채 나에게 도달한다
눈을 질끈 감는다
—한여진 「검은 절 하얀 꿈」(『문학동네』 2019년 가을호) 부분
얼음 속에는 단단한 벽이 있어
나는 그 너머로 집 한 채를 볼 수 있었다
집에 들어가고 싶다
자꾸 무너지는데도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아이처럼
인기척이 느껴지면
사라지는 벌레처럼
주머니엔 사탕 봉지가 가득하다
(…)
창문이 깨지는 순간은
거미가 줄을 치는 모습과 비슷하고
아이가 바깥으로 밀려난다
영혼이
그곳에 있는데
귓속에서는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유리알 파편처럼
집이라는 건 다 부서지는데도
자꾸만 모으고 싶어진다
—정재율 「투명한 집」(문장웹진 2020년 3월호) 부분
한여진의 시에는 제목처럼 하얀 꿈 같은 공간이 등장한다. 흰 눈밭 위에 놓인 검은 절, 하얀 문과 검은 지붕이 뒤섞인 이 흑백의 세계는 “고요하고 무궁하게” “정지한 세상”처럼 느껴진다. ‘나’는 어떤 문장을 쓰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그곳을 방문한 듯싶다. 다만 그 탐색의 대상이 처음부터 명료하게 지정되어 있던 건 아닌 듯하다. 그것은 불빛, 향기, 허기, 치통 등의 모호한 시어들이었다가, “굴러가는 토마토”나 “이국의 사람들이 마시는 뜨거운 홍차”처럼 조금 더 구체적인 질감의 이미지들로 화한다.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이 되어버리는 그 대상들은 내가 처음부터 목표로 두고 있었던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인지 모를 텅 빈 나의 목표를 그곳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아무렇게나 채우고 마는 것 같다. 한데 그 이미지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서면 “사정없이 깨어져”버리곤 한다. 애써 만들어낸 그 고요한 순백의 세계는 손쉽게 부서져버리고, “무수히 많은 파편들”만 “흐르고 넘어지고 흐르”다가 ‘나’에게 가까스로 “도달한다”.
한편 정재율의 작품에 그려진 세계는 조금 더 투명도가 높은 느낌이다. 그곳은 얼음 너머에 있는 ‘투명한 집’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곳 역시 직접 다가갈 수 없도록 물리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집 앞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벽이 있어”서 ‘나’는 차갑고 투명한 벽 너머로만 그 세계를 훔쳐본다. 달콤한 기억과 향기에 취해 차마 “사탕 봉지”를 버리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순수한 미련처럼, 나는 눈에 아른거리는 아름다운 집의 편린을 떨쳐내지 못한 채 투명한 장벽 앞에서 비를 맞고 서 있다. 하지만 그 투명한 세계 또한 결국 부서지고 깨져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그 부서짐의 순간이 어떤 생성의 순간과 나란히 놓여 있다는 점이다. “창문이 깨지는 순간”의 실금들은 “거미가 줄을 치는 모습”과 겹쳐져 있다. 하나의 상실이 다른 발생의 조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집이라는 건 다 부서지는데도” “자꾸만 모으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은 부서지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형상화하려는 태도로 읽히기도 한다.
같은 해에 첫 작품을 발표한 두 시인의 시편들은 전혀 다른 매혹을 지녔지만, 논의의 편의와 집중을 위해 인위적으로 공통된 요소를 추출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얀 꿈이든 투명한 집이든 그 세계는 옅은 가상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 흐릿함과 거리감은 단순히 내용뿐 아니라 행갈이나 시의 구조 등 형식적 여백으로도 잘 드러난다. 그 시적 세계는 그곳에 손을 대려 하거나 들어가려 하는 순간, 다시 말해 현실의 감각과 겹쳐지려 하는 순간 부서지듯 사라져버린다.14 그럼에도 이들은 그 세계를 다시 만들려 혹은 그곳에 도달하려 애쓰고 있는 듯하다. 왜일까.
하얗고 딱딱한 그것은
의자처럼 보인다
하얀 천 위에 앉는다
나는 구름처럼 폭삭 가라앉는다
앉을자리 하나 없어
방에는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다
가면을 쓴 얼굴은 가면을 끝까지 벗지 않고
하얀 천을 걷지 않고
진짜 의자를 찾아볼까
—조해주 「의자가 없는 방」 부분
저녁 먹었어요?
어떤 사람이 그렇게 물어오면
일부러 저녁을 먹지 않는다. 먹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드라마를 본다.
행복해지거나 죽기 직전까지의 이야기.
뉴스를 본다.
신발을 훔치다가 사람이 찌른 적이 있다고 말하려고.
(…)
어디 아파요?
어떤 사람이 나의 안색을 살피면
아프지 않다. 혼자 있을 때 마음껏 아프려고.
시계탑을 지날 때
꽃을 사지 않는다.
이 침묵을 계속하려고.
송이 씨는 무얼 좋아하나요, 그 사람이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몇 가지 생각해둔 것이 있다.
—「여분」 부분
표지부터 새하얀 조해주의 시집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아침달 2019)의 시편들이다. 「의자가 없는 방」에는 작고 하얀 동그라미가 놓여 있다. “하얗고 딱딱한 그것은” 언뜻 “의자처럼 보인다”. ‘나’는 그 위에 풀썩 몸을 얹어보지만, 딱딱해 보였던 외형과 달리 그것은 실체가 없는 “구름처럼 폭삭 가라앉는다”. 그것이 의자인 줄 알았던 이유는 속을 가린 하얀 천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심 “진짜 의자를 찾아볼까” 생각하다가도 끝내 가면과도 같은 그 “하얀 천을 걷지 않”는다. 앉을 자리가 없는 까닭에 ‘나’는 이 의자가 없는 방 안에 “아무도 초대하지” 못한다. 해당 시집에는 이와 비슷하게도 의자가 하나여서 친구가 한명밖에 오지 못하는 장면(「도모다찌라고 말하자 친구가 도망갔다」), 의자의 개수와 참석자의 인원이 어긋나는 장면(「참석」) 등 의자라는 조건이 마련된 뒤에야 누군가가 나타날 수 있는 풍경들이 종종 그려진다.
「여분」을 보면 ‘송이 씨’라고 불리는 ‘나’가 등장한다. 어떤 사람이 어딘가 아프냐고 물으며 ‘나’의 안색을 살피면, ‘나’는 “혼자 있을 때 마음껏 아프려고” 지금은 아프지 않은 사람이다. 또 그 사람이 무얼 좋아하는지 질문할 때를 대비하여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답변을 미리 생각해두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언뜻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을 무탈하게 지나가려는 장면 같기도 하지만, 현실의 누군가와 접촉하는 시간을 어려워하는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홀로된 하얀 침묵의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 색채가 있는 꽃조차 사지 않는다. 이같은 시의 풍경에, 앞서 언급한 동그란 의자를 겹쳐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의 등장을 가능케 했던 의자라는 조건을, 이 시에서는 조건문이라는 언어적 형식으로 치환해보자. 가령 ‘나’는 저녁을 먹었는지 “어떤 사람이 그렇게 물어오면”, “먹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일부러 저녁을 먹지 않는다”. 하얀 천의 동그라미가 의자라는 공간을 구획하고 사람들의 방문을 결정짓는 효과를 수행한 것처럼, 그 사람이 ‘나’에게 건넬 질문의 조건은 ‘나’의 행동을 제약하고 발화의 경계를 한정하는 화행적 동그라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어딘가 기이한 점은 ‘나’의 행동이 그 조건을 예상한듯 미리 행해진다는 점이다. ‘나’는 저녁 먹었느냐는 그 사람의 질문을 미리 염두에 두고 밥을 먹지 않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대답하기 위해 몇가지 생각을 해두며, 말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뉴스”와 “드라마를 본다.” 그러니까 해당 조건들이 이후 ‘나’의 행동을 이끌어내고 제약하기도 하는 가상의 동그라미인 것은 사실이나, 그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을 ‘내’가 먼저 수행한다는 것이다. 내 행동의 원인이자 전제가 되는 세계를 내가 미리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 역설적인 선후관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가상의 원을 만들어냈던 문보영 시인의 이야기를 잠시 가져와보자. 시인은 한 산문에서 혼자 글을 쓰거나 춤을 추는 건 전혀 어렵지 않은데, 빵집에 가서 식빵을 사거나 신호등의 신호를 기다리는 일은 너무나 어려울 정도로 일상의 현실이 두려워지는 순간이 찾아온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다 시인은 누군가의 브이로그를 보았고 자신도 우연히 브이로그를 찍게 되었다고 한다. 밥을 거의 안 먹는데 “밥 먹는 척”을 하고 “우울증에 안 걸린 척” 거리를 걷다보니 정말로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게 되었다고, “안 미친 척하다 보면 정말 안 미칠 수 있을 것만 같”15았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 가상세계는 분명 시인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이후 시인의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조건이자 현실보다 앞에 놓여 있는 지침이 되었던 듯싶다.
언뜻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이 희미한 가상의 세계에 대해, 실존적 질감이나 치열함이 부족한 듯 느껴지는 이 여백의 감각들에 대해 의심이나 비판의 시선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다만 앞서 ‘적대’를 이야기하며 언급되었던 자본이라는 조건을 잠시 떠올려보자. 맑스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간극, 즉 실물과 화폐 사이에 생겨나는 불일치의 적대관계를 자본주의 파국의 원인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제 화폐라는 최소한의 물질마저 잃어가며 가상의 숫자로 작동하는 그 자본은 때로 아무런 실물 근거를 두지 않아도, 미래의 ‘잉여’와 가치를 미리 당겨와 실제 우리의 삶을 작동시킨다. 올바름의 판단은 잠시 차치해두고서라도 그 강압적인 조건을 단순한 허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어떤 시인들이 만들어낸 시적 세계 역시 아무런 물질적 기반이나 실물이 없을지라도, 근미래의 자신을 겨냥한 채 행동하고 발화하는 수행 속에서 생겨난 “여분”의 가상은 그들의 삶을 이끌어가는 유효한 실체적 조건이 되기도 한다. 하얗고 투명한 그 세계는 낯선 현실과 만나면 쉽게 부서져 내릴 정도로 허약하지만, 무너지는 누군가의 일상을 지탱할 정도로 충분히 단단하기도 하다.
‘세계의 자아화’라는 오래된 표현이 있다. ‘나’의 발화로만 환원될 수 없는 현대시의 다각적인 발화와 그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불화를 설명하기 곤궁한 까닭에, 이제는 거의 유명무실해진 개념이다. 하지만 ‘자아’라는 관습적인 맥락의 폭력성만 잠시 소거한다면, 어떤 시인들에게 이는 여전히 유효한 표현일 듯싶다. 물론 그것은 현실세계와 ‘나’가 아닌 가상의 시적 세계와 ‘내’가 겹쳐진다는 거꾸로 된 방향에서 그러하다.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에 기대어 다시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투명한 얼굴은 스스로를 무한히 분열시켜나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실물 없이 텅 빈 나를 지탱하는 것에 가깝다. 그들이 얼굴의 “가면을 끝까지 벗지 않”는 이유는 무엇을 숨기거나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가면 그 자체가 자신들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이 투명한 세계를 살아가는 시인들의 발화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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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사를 통해 진행된 성다영 시인의 인터뷰를 참조하여 시인의 트위터(@tristexxe)에 공개되어 있는 작품을 일부 가져왔다. ↩
- 졸고 「1인칭의 역습, 그리고 시」,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가을호. ↩
- 이소호 『캣콜링』, 민음사 2018. 이하 작품 제목만 표기. ↩
- 주네뜨는 ‘시점’이라는 용어가 시각적인 측면만을 유달리 강조한다고 생각하여 대신 ‘초점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한국 문학장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식 그대로 시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도록 한다. 주네뜨의 논의를 쉽게 설명한 글로는 박진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소명출판 2014, 133~64면 참조. ↩
- 신형철 「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 2010년대의 시를 읽는 하나의 시각」, 『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 365면. 현실의 ‘나’에게서 멀어진 “3인칭들의 형상”이 당시의 대의불충분성과 대의불가능성을 그 (무)의식적인 정치적 조건으로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의 신중한 논의를 받아들인다면, 최근 현실과 맞닿는 1인칭 발화의 어떤 경향은 촛불, 페미니즘 리부트 등 불완전하나마 실현되었던 대의가능성의 경험과 일정 부분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
- 던전(www.d5nz5n.com) 목요일 연재분인 배시은의 시집 ‘평균자유행정’에서 가져왔다. ↩
- Non-Player Character. 대개 사람이 직접 조작하지 않는 게임 캐릭터를 지칭한다. ↩
- 문보영 『배틀그라운드』, 현대문학 2019. 이하 작품 제목만 표기. 해당 시집의 작품들은 동명의 1인칭 슈팅게임과 기본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
- ‘적대’와 관련해서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샹탈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후마니타스 2012, 3장 참조. ↩
- 「배틀그라운드—사과」를 보면 추락으로 게임이 시작되는 것을 끝없이 지연시키는 시인의 발화가 이어진다. 또한 시스템의 의도와 무관한 혹은 시스템을 교묘히 이용한 등장인물들의 교감은 「배틀그라운드—송경련이 왕밍밍에 관해 쓴 첫 번째 보고서」 「배틀그라운드—벽에 빠진 사람」 「배틀그라운드—극단의 원」 등 해당 시집의 여러 작품에서 발견된다. 졸고 「이토록 낯설고 익숙한 세계」, 『자음과모음』 2019년 겨울호에서 위와 관련된 내용을 다룬 적 있음을 밝힌다. ↩
- 이는 물론 현실이라기보다는 가상의 세계에 마련된 전장에 가깝다. 다만 양쪽의 겹침을 명료하게 감각하는 이들에겐 이 세계 내 저항 또한 단순한 유희라기보다는 나름의 실존적인 투쟁과 질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자본에 대항하는 시인들의 직접적인 몸의 투쟁과 치열한 질감의 언어에 관해서는 나희덕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 『창작과비평』 2020년 봄호 참조. ↩
- 박상수 「옷장 깊은 곳에서 새 양말을 발견하는 시인」, 『현대문학』 2019년 6월호 211면. ↩
- 신용목 「두 개의 백자를 바라보는 마음」, 같은 책 214면. ↩
- 주인공의 생각이나 정서가 현실세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세까이계(世界系)’의 작품들이 파국과 멸망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을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일찍이 박상수가 ‘백자’와 ‘세카이계’ 등으로 명명한 황인찬의 시세계와, 최근 부서지는 미래세계의 풍경을 직조하는 여러 시인을 떠올리게 하지만 지면의 한계상 이 논의는 다음을 기약해본다. ↩
- 문보영 「대충 살고 싶어서 시작한 <어느 시인의 브이로그>」, 『현대시』 2019년 1월호 269~7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