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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성희 尹成姬

1973년 경기 수원 출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 『거기, 당신?』 『감기』 『웃는 동안』 『베개를 베다』, 중편소설 『첫 문장』, 장편소설 『구경꾼들』 『상냥한 사람』 등이 있음.

hitchike@hanmail.net

 

 

 

블랙홀

 

 

1

 

모든 일은 그 망할 놈의 옆집 할아버지가 넘어졌기 때문이라며 오빠는 술에 취하면 전화를 걸어 말하곤 했다. 부모님이 시골로 내려간 것은 십년 전쯤이었다. 시골로 내려가기 전에 아버지는 우리 삼남매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자 갚는 것도 지쳤다. 이제 그만 집을 팔련다.” 나는 부모님이 노후 자금을 모으지는 못했어도 빚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버지는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의 관리부에서 삼십년을 근무했는데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퇴직을 했다. 그후로 몇달 쉬었다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얻은 아파트 경비 일을 오년째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경비 일을 시작했을 때 어머니도 동네 세탁소에서 수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생활비가 부족하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심심해서 하는 거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깔끔세탁소는 우리가 그 동네로 이사를 갔을 때부터 있던 곳이었다. 한때 어머니는 세탁소 주인아주머니가 꾸린 계원 중 한명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수선을 잘해서 옆 동네에서도 옷을 맡기러 올 정도로 실력이 있었는데, 그만 치매에 걸리고 말았다. 마침 실직을 한 아들 부부네가 세탁소를 이어받겠다고 해서 주인아저씨는 가게를 넘겨주었다. 그래서 손재주가 좋은 어머니가 가끔 가서 일을 돕고 세탁소집 며느리에게 바느질을 가르치기로 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양장점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원피스도 직접 만들어주곤 했다. 아버지의 경비 월급과 어머니가 수선을 해서 받는 돈까지 합하면 두분이 사는 데 그다지 부족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공과금을 내고, 먹고 싶은 거 사 드시고, 설날이나 어린이날에 손주들에게 용돈 정도는 줄 수 있는 삶. “그동안 번 돈은 어디 갔어요?” 오빠가 물었을 때 아버지가 화를 냈다. 우리가 그 집을 산 뒤로 단 한번도 빚이 없었던 적이 없다고. 부모님이 처음으로 산 집이었다. 은행 대출이 절반을 넘었고 그 절반을 갚기도 전에 우리 삼남매가 줄줄이 대학에 입학했다. 그래서 또 대출을 받았고 그걸 다 갚기도 전에 언니가 임신을 해서 결혼을 했다. 그때 다시 대출.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봐 언니가 결혼을 하고 이년 후에 오빠도 애가 생겨서 결혼. 그때 다시 대출. 뭐 일이 그렇게 된 것이었다. 재개발만 되면 아파트값이 오를 것이라는 희망으로 버텼지만 이제 그것도 지쳤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면서 당숙이 사는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아버지의 외사촌 형인 당숙은 오십대 초반에 대장암에 걸렸다가 그 일을 계기로 귀향을 했다. 딸기 농사를 크게 지었는데 자식들 중 아무도 농사를 이어받지 않아 일손이 부족하다고 했다. “딸기 농사도 돕고 이런저런 농사도 좀 직접 짓고 그러면 둘이 먹고살지 않겠냐.” 어머니는 말했다. 부모님은 집을 팔아 빚을 갚았고 우리들은 삼천만원을 만들어 부모님의 귀촌 자금에 보탰다. 이사를 하고 며칠 후 어머니는 내게 전화를 걸어 옆집에 사는 할머니랑 같이 나물을 캐고 왔다고 말했다. 저녁에 쑥국을 끓이고 씀바귀와 냉이를 무쳐 먹었다고 했다. “그 형님이 내일은 산마늘 캐러 가자 하네. 산마늘 넣고 삼계탕 끓이면 몸에 그리 좋다고.” 어머니보다 나이는 많지만 그래도 의지할 이웃이 생긴 것 같아 나는 안심했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둘은 맛있는 음식을 하면 나눠 먹고 볕이 좋은 날엔 평상에 앉아 남편 흉을 볼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옆집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너무 울어 목이 잠겼고 일주일 동안이나 말을 못했다. 그랬는데 혼자가 된 옆집 할아버지가 부모님 집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을 밟고 넘어져서 허리를 다쳤다며 소송을 걸었다. 평소에는 담 넘어온 가지에 달린 건 다 자기네 거라며 모조리 따 먹었으면서 이제 와서 우리 탓을 한다고 어머니는 담벼락에 서서 옆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치료비의 일부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은 날 아버지는 감나무를 잘라버렸다. 감나무가 쓰러지면서 담을 건드렸고 담이 무너지면서 아버지 발등을 덮쳤다. 그 일로 아버지는 두달 동안 깁스를 했다. 걷지 못하는 동안 아버지는 평상에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며 옆집을 향해 계속 욕을 했다. 그때부터 부모님이 조금씩 변한 거라고 오빠는 말했다. 나는 아버지는 원래 술을 마시면 화를 잘 냈다고 대꾸하려다가 말았다.

 

언니는 부모님이 판 아파트가 재개발이 된 게 원인이라고 했다. 그때 생긴 마음의 병이 다른 방식으로 폭발한 거라고. 어머니는 이사를 한 뒤에도 103동 아주머니랑 통화를 하며 동네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 어머니랑 같이 동사무소 노래교실을 다니며 친해진 아주머니였다. 시골로 내려간 첫해에 들은 소식은 세탁소 아들 부부가 이혼을 했다는 거였다. “세탁소를 하기 전에는 주말부부였대. 그러다 하루 종일 얼굴을 보려니 못 참겠는 거지.” 103동 아주머니의 말에 어머니는 수선을 가르칠 때도 며느리는 웃는 법이 없었다고 대꾸했다. 그다음 해에는 노래교실 선생님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혼 안 한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 어째. 불쌍해서.”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그다음 해에는 아파트 후문에 있던 치킨집에서 불이 났다는 소식. 그다음 해에는 경비 아저씨들끼리 싸움이 나서 한명이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 그런 소식을 듣는 날이면 어머니는 내게 전화를 걸어 그 이야기들을 전했다. 그러고는 아버지 흉을 보다가 전화를 끊었다. 어떤 날은 통화가 한시간씩 이어지곤 했다. 그래도 나는 전화를 안 받거나 먼저 끊거나 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시골로 내려갈 때 오빠 언니와 달리 오백만원밖에 보태지 못한 게 늘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매달 용돈도 보내지 못해서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언니가 내게 전화를 걸어 아파트가 재개발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디서 들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말해줬다는 거였다. “아파트값이 일억이나 올랐대. 얼마나 속상하셨는지 십분이나 우셨다니까.” 나는 그때 어머니에게 좀 섭섭했다. 사람들 흉을 볼 때면 내게 전화를 해놓고 정작 마음속 이야기는 언니에게 하는 눈치였다. 재개발 소식을 들은 이후 어머니는 불면증에 걸렸다.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입맛이 떨어졌어. 도통 먹고 싶은 게 없네.” 어머니는 말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없어지자 어머니는 음식을 대충 하기 시작했고 그 일로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아버지는 일주일 내내 쉰 김치에 된장찌개만 먹었다며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했다. 아파트 하나 지키지 못한 가장이라 그런 대우를 받는 거라고. 오빠는 그 이야기를 언니에게 전했고 언니는 또 내게 전했다. 나는 홈쇼핑에서 고등어와 불고기와 곰탕을 사서 시골로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 이제부터 요리에 재미를 붙여보시라고 권했다. “엄마도 밥 하는 게 얼마나 지겹겠어요. 그리고 아버지 비빔국수도 잘하시잖아요.” 내 말에 아버지가 알았다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는 언니가 해준 한약을 먹고 입맛이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예전처럼 달게 드시지는 않았다. “억지로 먹는 거야.” 어머니는 늘 그 말을 달고 살았다. 그 시기에 옆집 할아버지가 감을 밟고 넘어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언니는 재개발로 아파트값만 오르지 않았다면 부모님이 옆집 할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가서 인사도 하고 병원비도 냈을 거라고 말했다. “엄마가 얼마나 정이 많았니?” 언니의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새언니는 이사를 간 집에 귀신이 붙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시골집이라지만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집이 나왔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고. 그 집에서 누군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이사를 간 해에 맞이한 추석날이었다. 집은 디귿자 모양이었는데, 안채는 니은자로 되어 있고 사랑방이 독채처럼 있었다. 사랑방에는 장작을 때는 아궁이가 있었다. 시골로 내려간 후 처음으로 맞는 명절이어서 오빠네 식구만 아니라 언니네 식구까지 다 내려갔다. 안채에는 방이 두개였다. 안방에서는 남자들이, 작은방에서는 아이들이, 그리고 사랑방에서는 여자들이 잠을 자기로 했다. 아버지가 아궁이에 장작을 가득 넣고 불을 땠다. “종일 고생했으니 뜨끈한 방에서 푹 자라.” 아버지가 새언니에게 말했다. 그날 사랑방에서 잠을 자던 새언니는 악몽을 꾸었다. 누군가 밤새 목을 졸랐다는 거였다. 뜨거운 방에서 찜질을 했더니 몸이 개운해졌다는 어머니는 새언니에게 방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 꿈을 꾼 거라고 말했다. 언니도 거들었다. 목이 말라서 그런 악몽을 꾸게 된 거라고. 그랬는데 차례를 지내고 당숙 댁에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당숙모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집에는 딸을 혼자 키우던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고. 할머니의 남편은 결혼한 지 이년 만에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려 집을 나갔다. 그래도 할머니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악착같이 일을 해서 딸을 공부시켰다. 그 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할머니는 소를 두마리나 잡았고 이웃마을 사람들까지 이틀 내내 먹고 마셨다. 그랬는데 그 남편이 사십팔년 만에 돌아왔다. 남편이 돌아오자 어찌 된 일인지 할머니는 한달 동안 극진히 음식을 대접했는데, 화를 내지 않아 더 무섭다고 남편이 동네 경로당에 가서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날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미국에 사는 딸한테 가버린 것이다. “혼자 남은 남자는 내내 술만 마시다가 자살을 했대요. 바로 그 사랑방에서요.” 새언니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오빠는 그런 집을 소개했다고 화를 냈다. 그러자 당숙 아저씨가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집은 거기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생각하기 나름이지. 그 집 딸은 미국에서 교수를 한다. 그런 자식이 나온 집이라고.” 어머니는 차례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사랑방 방문 앞에 두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러고는 사랑방을 허물어버리자는 우리 삼남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아무 데도 못 산다. 전쟁통에 이 마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아버지는 깁스를 풀기 전에 넘어져서 골반을 다쳤다. 막걸리를 마시고 화장실에 갔다가 슬리퍼를 잘못 밟아 넘어졌는데 어머니가 외출을 하는 바람에 몇시간 후에야 발견되었다.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목이 쉬도록 사람 살려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 소리는 옆집까지만 들렸고, 옆집은 할아버지가 허리를 다친 뒤 요양원에 들어가서 빈집이었다. 어머니는 창고로 쓰던 사랑방을 황토방으로 개조했다. 아버지를 거기로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아버지는 짜증이 많아졌고, 어머니를 아주머니라고 부르더니, 나중에는 욕창이 생겨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일년 반을 누워 있다가 돌아가셨다. 몇몇 동네 주민들이 감나무를 잘라 저주를 받았다는 뒷말을 했다. 옆집 할머니가 그렇게 잘해주었는데 그 정을 생각해서라도 옆집 할아버지에게 그러면 안 되었다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니는 마을회관으로 달려가 화투판을 뒤집었다. 그리고 화투를 치던 아주머니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소리쳤다. 어머니가 체포되었을 때 경찰은 그 사건을 거론했다. 그게 동기였다고. 저녁 뉴스에는 어머니가 병을 들고 마을 체육대회가 열리는 운동장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찍힌 CCTV 화면이 나왔다. 그리고 삼십분 후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도. 음식을 내기 전 부녀회장이 간을 보지 않았다면 동네 사람들이 전부 죽을 뻔했다고 경찰은 오빠에게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오빠가 다그쳤을 때 어머니는 말했다. “나는 그게 매실 엑기스인 줄 알았다.” 어머니의 말은 터무니없었다. 농약과 매실액을 헷갈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오빠는 그 말을 믿고 싶어했다. 새언니는 육개장에 매실액을 넣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그 말에 오빠가 발끈했다. “우리라도 믿어야 해. 믿어야 한다고.” 오빠는 새언니한테 소리치며 울었다. “뭐에 홀린 거야. 홀린 거라고.” 새언니도 울며 오빠한테 소리쳤다. “이놈의 집에 귀신이 붙어서 그런 거라고.” 나는 새언니가 계속 귀신 탓을 하길 바랐다.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았다.

 

 

2

 

오빠가 시골집에 내려간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는다며 새언니가 전화를 걸어 왔다.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와 내려갔다는 거였다. 그런 집을 누가 살까 싶어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옆집과 부모님 집을 허물어 펜션을 짓겠다는 작자가 나타났다. “계약이 미뤄져 하루 자고 온다고 하더니 지금까지 안 와요.” 새언니가 말했다. “내가 거기서 자지 말고 당숙 댁에 가서 자고 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통화가 되느냐고 물었더니 하루에 한번씩 잘 지낸다는 메시지가 온다는 거였다. 처리할 일이 있다고. 내일 간다고. 늘 같은 내용이라고 했다. 새언니랑 통화를 하고 오빠한테 전화를 했더니 받지 않았다. 조금 기다렸다 다시 했는데 역시나 받지 않았다. 나는 언니한테 전화를 걸어 새언니에게 들은 말을 알려줬다. 그랬더니 언니가 어제 오빠 꿈을 꾸었는데 나쁜 일은 없을 거라며 안심하라고 했다. 둘은 쌍둥이라 그런지 서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꿈에서 미리 알아차리곤 했다. 오빠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여자친구에게 차였는데, 그 여자친구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을 오빠보다 먼저 안 것도 언니였다. 언니가 결혼 전에 임신을 해서 고민할 때 먼저 알아차린 사람도 오빠였다. 언니 대신 태몽을 꾼 것이었다. 어제 언니는 이런 꿈을 꾸었다. 오빠랑 학교 앞 문방구에서 달고나를 만드는 꿈이었다. 언니랑 오빠는 여덟살. 둘은 똑같은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어머니가 떠준 옷이었다. 언니는 연탄불 앞에 앉아 달고나를 만들다가 스웨터의 소매를 태웠다. 혼날까봐 언니는 울었다. “그랬더니 오빠가 스웨터를 바꿔 입어줬지. 그래서 나 대신 혼났고.” 오빠는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았다. 언니는 예전에도 몇번 같은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 그 꿈을 꾸었을 때 오빠는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 언니가 자신의 꿈 덕분이라고 말하자 오빠가 오천원을 주었다. 두번째 그 꿈을 꾸었을 때 오빠는 길에서 넘어진 할아버지를 발견하고는 도와드렸다. 그 손녀가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그걸 계기로 둘은 잠깐 사귀었다. “내일 월차 낼 수 있어?” 언니가 물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오빠를 찾으러 시골집에 가자고 했다. “새언니는?” “귀신 붙은 집이라고 얼씬도 안 할걸. 괜히 같이 내려갔다가 부부싸움 생길지도 모르고.” 그러면서 언니는 우리끼리 갔다 오자고 말했다. “미리 학교 태워다주고 너한테 가면 여덟시 정도 되겠다. 내일 보자.” 언니가 전화를 끊었다. 우리 집안의 첫째 조카인 미리. 뭐든지 미리미리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이름을 미리로 지었더니 정말 뭐든지 스스로 준비하는 아이. 내 생일날 종이백에 샤넬 로고를 붙여 선물했던 아이. 나는 미리가 성년이 되는 날 처음으로 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건 미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품어온 소원이었다. 자신에게 그런 피가 흐를까봐 끔찍하고 징그럽다고, 외가 쪽 식구들 얼굴도 보기 싫다고, 미리는 말했다. 그 이후로 나는 미리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미리는 내년에 스무살이 된다.

새벽에 일어나 동네를 돌아다녔다. 네시 반. 나는 가로등을 세면서 걸었다. 작년 겨울, 폭설이 내리던 날이 시작이었다. 옆방에서 여자가 신음 소리를 내는 바람에 눈을 떴다. 새로 이사 온 여자였는데 악몽을 꾸는지 새벽마다 소리를 질렀다. 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창을 열어 몸을 반쯤 밖으로 내밀고 눈을 맞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신발을 창밖으로 던졌다. 아침에 누군가 그 신발을 본다면 지나온 발자국도 지나간 발자국도 없는데 신발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궁금해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신발 주인은 어디로 사라진 건가? 그러면서 하늘을 한번 쳐다보겠지. 그런 상상을 하면서 나는 눈을 맞았다. 나는 어릴 적 눈이 내리면 일찍 학교에 갔다. 초등학교가 가까워서 방학 때도 눈이 내리면 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학교 운동장을 뒤로 걸었다. 내가 지나온 발자국을 보면서 걷는 것. 그 발자국을 보면서 나는 유령이 된 또다른 내가 나를 따라온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날 나는 밖으로 나가 맨발로 동네를 돌아다녔다. 가로등을 서른개까지 세면서 걷다가 되돌아왔다. 그리고 집 앞에서 눈에 파묻힌 신발을 찾아 신었다. 집에 돌아와 뜨거운 물에 발을 담갔다. 발바닥이 간지러워서 나는 오랫동안 울었다. 그날 이후로 옆방 여자가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새벽이면 눈이 떠졌다. 오늘은 가로등을 백서른개까지 세며 걸었다. 서른번째 가로등에는 낙서를 했다. 어제는 마흔번째 가로등에 병신이라고 썼다. 그제는 쉰여섯번째 가로등에 바보라고 썼다. 오늘은 꼴값하네,라고 적었다. 오빠와 언니는 초등학생 때 그 말을 자주 썼다.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할머니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그 할머니는 족발집을 운영하며 손자들을 키웠는데 술 취한 손님이 허튼소리를 하면 그렇게 받아쳤다. 오빠와 언니는 꼴자를 길게 늘였다가 값자에 힘을 주며 말하는 것까지 흉내를 냈다. 길을 걷다 오줌을 누는 강아지를 보아도 꼴값하네. 옆집에 사는 미희가 생일잔치를 한다는 소문을 들어도 꼴값하네. 언니가 좋아하는 가수의 열애설이 나와도 꼴값하네. 그러다 둘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 생겨도 그 말을 쓰기 시작했다. 오빠가 시험 백점을 받아도 꼴값하네. 언니가 달리기에서 일등을 해도 꼴값하네. 꼴값하네 놀이. 언니 오빠는 그 놀이에 나를 끼워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나 혼자에게 하곤 했다. 집에 돌아와 벽에 귀를 대고 옆방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언니는 일곱시 오십분에 도착했다. 휴게소에서 우동을 사 먹었다. 언니는 먹지도 않는데 자꾸만 살이 찐다며 우동을 반만 먹었다. 어머니가 살인미수로 오년형을 받은 뒤 언니는 급작스럽게 살이 쪘다. 그랬는데도 면회를 가면 어머니는 왜 이렇게 말랐냐는 말만 한다고 언니는 말했다. 고속도로 옆으로 하얀 꽃들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었다. 나는 자동차 창문을 내렸다. 향긋한 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아무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니는 그 꽃이 이팝나무 꽃이라고 했다. 나는 조팝나무 꽃이라고 했다. “내기할까?” “응, 내기하자.” 우리는 무엇을 걸지 한참을 생각했다. 터무니없는 것을 거는 것. 그게 우리 자매의 내기 방법이었다. 나는 나무 위에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단, 계단은 없으니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고. 언니는 화장실만 있다면 괜찮다고 했다. 한번 올라간 다음 다시는 안 내려오면 된다고. 그리고 집을 선물받았으니 자신도 내게 집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호수 한가운데 별장을 지어줄게. 그런데 그 호수에는 악어가 바글바글해.” 나는 언니한테 악어고기가 의외로 맛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니 악어를 잡아 매일 바비큐를 해 먹지 뭐.” 나는 휴대폰을 꺼내 이팝나무와 조팝나무를 검색해봤다. 세상에. 이팝나무는 물푸레나무과이고 조팝나무는 장미과였다. “이름만 봐서는 쌍둥이 같은데 말이야.” 내 말에 언니가 쌍둥이들도 얼마나 성격이 다른데, 하고 받아쳤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저 꽃은 뭐야?” 언니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 너무 멀어서 그런가. 똑같아 보여.” 우리는 확실해질 때까지 당분간 고속도로 옆에 핀 흰 꽃을 이조팝나무 꽃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시골집에 도착하기 전에 언니는 어제 꾼 꿈 이야기를 마저 해주었다. 정말로 그 스웨터 소매를 태운 적이 있었다고. 달고나를 만들다 그렇게 된 건 아니고 난롯불을 쬐다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학교 난로가 아니라 만화방에 있던 난로였다. “그런데 그게 내가 아니라 오빠였어. 오빠가 겁쟁이잖아. 엄마한테 혼나는 게 무섭다며 막 울더라. 그래서 내가 스웨터를 바꿔 입었어.” 언니는 그날 어머니한테 등짝을 맞았다. “그때 내가 혼난 게 억울했는지 자꾸 그 꿈을 꾸네. 오빠가 엄마한테 혼나는 꿈.” 가족 앨범에는 둘이 똑같은 스웨터를 입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쌍둥이였지만 둘은 똑같은 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 스웨터가 유일했던 것 같다. 집에 도착해보니 오빠는 없었다. 오빠한테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아서 메시지를 남겼다. 한시간쯤 지났을까. 오빠가 왔다. 어디 갔었느냐고 물었더니 뒷산에 다녀왔다고 했다. 뒷산은 정상까지 한시간 정도 걸리는데 그 정상에 너럭바위가 있다는 거였다. 오빠는 도시락을 싸서 산에 올랐다. 반찬은 김치 하나면 되었다. “거기 앉아서 밥을 먹으면 그렇게 꿀맛이다.” 소박한 식사를 하고 돌에 누워 낮잠을 자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질 수가 없다고 오빠는 말했다. “왜 그런 프로그램 있잖아. 산속에서 은둔하며 혼자 사는 사람들이 나오는.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이 한심해 보였는데 막상 내가 해보니 어떤 마음인지 알겠어.” 오빠의 말을 들어서인지 오빠의 얼굴이 맑아 보였다. “그래서 일주일이나 집에 안 돌아가고 이러고 있는 거야? 나는 자연인이다, 그거 흉내 내면서?” 그렇게 말하고 언니는 한숨을 쉬었다.

 

 

3

 

오빠가 일주일이나 시골집에 머문 이유는 꼭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계약하기로 한 사람이 오는 도중에 차가 고장 났다며 세시간이나 늦게 왔다. 은행 영업시간이 지나 계약금을 입금할 수 없어서 다음 날 아침에 만나 다시 계약하기로 했다. 그래서 하루를 잤다. 계약을 하고 오빠는 시내에 있는 ‘중고의 모든 것’이라는 가게에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사장이 장례식장에 왔다며 다음 날 가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하루를 더 잤다. 중고가게 사장은 집을 둘러보더니 세탁기와 김치냉장고 그리고 텔레비전 정도만 사겠다고 했다. 다른 것들은 쓸 만한 게 별로 없다고. 김치냉장고는 부모님이 귀촌을 할 때 언니가 사준 것이었다. 그 전에 쓰던 김치냉장고는 십오년이나 사용한데다가 뚜껑형이어서 안쪽에 있는 김치통을 꺼낼 때마다 고생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김장도 안 해 먹고 살 거라며 이사를 가면서 김치냉장고를 버렸다. 그랬는데 이사를 간 그해 겨울 언니는 스탠드형 김치냉장고를 사서 배달시켰다. 형부가 승진을 해서 월급이 올랐다는 거였다. “이걸 사줄 테니 나보고 김장을 해달라는 말이지.” 부모님은 텃밭에서 직접 키운 배추와 무로 김장을 해서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세탁기는 몇년 안 된 거라 돈을 좀 받았어. 그런데 세탁기를 살펴보던 중고가게 사장이 갑자기 우는 거야.” 오빠는 세탁기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우는 사장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양말 한짝을 오빠에게 보여주며 사장이 말했다. “이게, 이게, 여기 들어 있어요.” 사장은 뒤꿈치가 해진 양말이 슬퍼 운다고 했다. 오빠는 사장이 갱년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빠의 직장상사 중에서 그렇게 심하게 갱년기를 보낸 사람이 있었다고. “주꾸미를 먹다가도 울었다니까. 이름이 슬프다나.” 오빠는 그때 그 상사와 매일 술을 마셔주었다. 다른 동료들은 피곤하다며 상사를 피했지만 오빠만은 그러지 않았다. 상사가 울 때면 오빠는 첫사랑에게 차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헤어지면서 여자가 했던 말을. “너 코 파는 버릇 있는 거 알아. 더러워서 못 만나겠어.” 오빠는 여자의 목소리로 흉내를 냈고 그러면 상사는 울다가도 웃었다. 어머니의 일이 뉴스에 보도되어 오빠가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을 때, 그 상사만이 오빠에게 술을 사주고 밥을 사주었다. 오빠가 퇴사를 했을 때 회사 앞까지 나와 잘 살라고 인사를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빠는 사장이 울도록 그냥 두었다. 한참을 울던 사장은 오빠에게 전날 장례식장에 갔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중학교 때 같이 야구를 한 친구였는데 그만 자살을 했다고. “전 어깨를 다쳐 일찍 운동을 포기했지만 친구는 유망주였거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팀에 입단한 친구는 2군에서 육년을 버텼다. 그리고 칠년 만에 찾아온 기회. “1군에서 공 열두개를 던졌어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록이었죠.” 열두개의 공 중 볼이 아홉. 스트라이크가 둘. 몸에 맞는 공이 하나. “그후 고향으로 내려가 큰형이 운영하는 돼지갈비집에서 일을 했어요. 그렇게 돈을 모아 자기 가게도 차리고. 일주일 전에 내게 전화를 해서는 곧 가게를 확장할 거라며 자랑을 했거든요.” 그랬는데 길 가던 사람의 머리를 벽돌로 내려치고는 자살을 했다. CCTV에 찍힌 영상에는 사건 전에 둘이 잠깐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파악할 수 없다고 경찰은 말했다. “맞은 사람도 혼수상태거든요. 왜 그랬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사장이 떠난 뒤 오빠는 왠지 마음이 아파 술을 한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트에 가서 막걸리 한통하고 두부 한모를 사 왔다. 술 한잔을 하고 낮잠을 자면 저녁에 운전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빠는 막걸리를 한잔 마시고 두부를 한점 먹었다. 그러다 김치냉장고를 팔면서 버리려고 꺼내놓은 김치통이 생각났다. 첫번째 통을 열어보니 파김치가 있었다. 두번째 통은 깍두기. 세번째 통을 열어보니 총각김치. 쉰 냄새가 코를 찔렀고 하얀 골마지가 가득했다. 골가지. 어머니는 골마지를 골가지라고 불렀다. 오빠는 마지막으로 네번째 통을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손을 대지 않은 김장김치가 한통 들어 있었다. 비닐을 벗기고, 또 배추 겉잎까지 걷어내니, 멀쩡한 배추김치가 보였다. “두부에 그 배추김치를 싸서 먹는데 젠장, 너무 맛있는 거야.” 그날 오빠는 막걸리를 세통이나 마셨다. 그래서 또 하룻밤. “그럼 그후로는?” 언니가 묻자 오빠가 배추김치가 아까워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떠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침에는 라면이랑 먹고, 점심에는 도시락을 싸서 뒷산 정상에서 먹고, 저녁에는 막걸리에 두부랑 곁들여 먹고. “그렇게 먹는데도 김치가 줄지 않아. 그래서 못 갔어.”

 

오빠가 말한 김치통을 열어보니 배추김치가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내가 오늘 이거 다 먹는다. 다 먹으면 집에 갈 거지?” 언니의 말에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싱크대에서 커다란 냄비를 꺼내더니 남은 김치를 다 집어넣었다. 그리고 참기름 통을 꺼내 냄새를 맡았다. 먹어도 될라나,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참기름도 다 쏟아부었다. “이제 한시간만 기다려.” 언니가 평상에 누워 나도 그 옆에 누웠다. 그러자 오빠도 내 옆에 누웠다. 아버지는 이사를 하자마자 평상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목공소까지 직접 가서 나무를 사 왔는데 그만 만들다 실패를 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인부를 불러 마무리를 했다. 그 일로 어머니는 못질 하나도 제대로 못한다며 아버지 흉을 오래 보았다. “끝말잇기 할까?” 오빠가 하늘을 보다가 갑자기 말했다. “구름.”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언니가 먼저 말을 했다. “그거 하려 그랬지? 내가 먼저 할래. 구름.” 나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언니를 한번 보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오빠를 한번 보았다. 마흔여섯살이나 되었는데도 둘은 같이 있으면 언제나 십대처럼 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그때 오빠랑 언니가 캔맥주 두개를 사서 내 가방에 넣어주었다. 그러면서 버스 안에서 끝말잇기를 할지도 모른다며 필살기를 알려주겠다는 거였다. “기름. 구름.” 오빠가 말했다. “고드름. 여드름.” 언니가 이어 말했다. “그거만 기억해도 반은 이기는 거야.” 오빠의 말에 나는 끝말잇기 같은 유치한 게임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때 수학여행에서 나는 끝말잇기로 두번이나 이겼다. “구름, 주름, 흐름, 여름, 이름, 보름, 늠름.” 오빠가 름으로 끝내는 단어들을 중얼거렸다. “늠름. 난 그 단어가 좋네.” 언니가 말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언니의 얼굴에 손바닥 그림자가 드리웠다. “내가 미리 임신했을 때였는데.” 언니가 말을 시작했다. “지하철역에서 사람을 때린 적이 있어.” 언니는 임신한 사실을 알고도 형부에게 바로 말을 못했다. 그즈음 형부의 큰형이 사기를 당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집은 물론 부모님 집까지 넘어갈 지경이 되었다. 형부는 언니한테 자주 짜증을 냈다. 그리고 자기 형수의 욕을 했다. 언니는 형이 아니라 형수를 욕하는 형부가 이해되지 않았고 그런 남자랑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언니는 형부에게 말하지 않고 아이를 없앨 생각이었다. 친구가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자며 전화를 했을 때 언니가 거절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 가서 술도 한잔하고 신나게 수다도 떨려고. 그랬는데 막상 가니 술이 마셔지지 않았다. “그때 한 아이가 다음주에 세계일주를 떠난다고 하더라고. 고등학생 때부터 꿈이었대.” 언니는 그 아이의 이름을 떠올려봤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항상 창가 쪽에 앉아서 쉬는 시간이면 멍하니 밖을 바라보던 모습만 생각났다. 그랬는데 갑자기 그 아이의 얼굴이 빛나 보였다. 언니는 불쑥 눈물이 났고 친구들한테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다 꽃다발을 든 사람을 보았다. 한명. 두명. 세명. 꽃다발을 든 사람을 세명이나 보다니. 언니는 누군가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역 입구에 도착해보니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꽃다발을 팔고 있었는데 가판대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오늘 하루가 행복했다면 꽃다발을 사세요.’ 언니는 가판대 앞에 서서 이렇게 물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요?” 그러자 할머니가 옆에 적힌 문구를 가리켰다. ‘오늘 하루가 힘들었다면 꽃다발을 사세요.” 언니가 그 문구를 보고 또 물었다. “힘들지도 않았고 행복하지도 않은 사람은요?” 그러자 할머니가 꽃다발을 언니에게 주었다. “그냥 가져가요. 선물이에요.” 언니는 꽃다발을 받았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열차를 기다리는데 젊은 여자 둘이 다가와 언니에게 영혼이 맑아 보인다는 말을 했다. “그 말에 갑자기 화가 났어. 나도 모르게 여자를 밀었지.” 두 여자 중 한 여자가 넘어졌다. 언니는 들고 있던 꽃다발로 넘어진 여자의 얼굴을 때렸다. 붉은 장미가 떨어지고, 분홍 장미가 떨어지고, 노란 장미가 떨어지고, 마지막으로 안개꽃이 날렸다. 꽃다발을 휘두르면서 언니는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니가 내 영혼을 어떻게 알아. 나도 모르는데.” 언니는 미리를 낳을 때까지 매일 그 일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뭐랄까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아. 블랙홀 같은 거. 조금만 잘못해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어.” 언니는 말했다.

언니의 말을 가만히 듣던 오빠가 이런 고백을 했다. “나는 군에 있을 때 후임병을 괴롭힌 적이 있어.” 오빠는 스무살에 군대를 갔다. 쌍둥이 언니랑 같은 해에 대학을 입학했는데, 부모님 등록금 걱정을 덜어드린다며 한 학기를 마치고 바로 군대를 간 것이다. “상병 때였는데 이병 중 좀 어리바리한 녀석이 들어왔어. 뚱뚱하고 얼굴이 하얀 친구였는데 조금만 훈련을 하면 금방 양 볼이 새빨개졌지.” 처음 시작은 병장이 이병을 불타는 돼지라고 놀리면서 시작되었다. 병장이 놀릴 때마다 오빠도 속으로 놀려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자연스럽게 이병을 놀리게 되었다. 한번 놀리자 다른 것들은 다 쉽게 되었다. 욕을 하는 것도. 구타를 하는 것도.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괴롭히는 것도. “병장이 제대를 한 다음 날이었어. 이병을 화장실에서 마주쳤지. 늘 그렇듯 자연스럽게 뒤통수를 때렸는데, 그날은 뒤돌아 나를 보더라. 그 눈빛을 뭐라 해야 할까. 분노가 가득한 눈빛이었다면 나도 지지 않으려고 화를 냈을 텐데 그게 아니었어. 연민이 가득한 눈빛이었어.” 오빠는 그날 이후로 제대할 때까지 이병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대신 오빠는 아침저녁으로 이를 닦으면서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자신에게 욕을 했다고 한다. “엄마가 그렇게 되고…… 자꾸 그때 그 일이 생각나. 원산폭격을 시켜놓고 그 옆에서 웃으면서 빵을 먹던 내가.” 오빠는 울었다. 하지만 나도 언니도 오빠를 달래주지 않았다. 오빠, 그런 이야기라면 나는 수십개도 더 말할 수 있어.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내 안에는 언니가 말한 구멍보다 더 큰 구멍이 있다고.

 

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달려갔다. “탔네, 탔어.” 언니의 말과 동시에 어디선가 탄 냄새가 났다. 내가 따라가 보았더니 많이 타지는 않아서 위의 것만 건져 먹으면 될 듯싶었다. 언니가 식탁 가운데 냄비를 올려놓았다. 오빠가 밥을 펐다. “젠장.” 언니가 말했다. “왜?” “오빠 말이 맞았어. 젠장. 맛있네.” 우리는 말없이 밥을 먹었다. 밥 한숟가락에 김치를 올리고 또 올려 먹었다. 그래도 김치는 줄지 않았다. 오빠는 밥을 세그릇이나 먹었다. 나와 언니는 두그릇씩. 타서 바닥에 눌어붙은 김치만 남았다. 언니가 냄비를 들어 오빠 쪽으로 기울였다. “이제 됐지? 집에 갈 거지?” 언니의 말에 오빠가 고개를 끄떡였다. 언니는 어차피 다 버려질 거라며 설거지도 하지 말자고 했다. 우리는 먹은 그릇과 냄비를 식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밥공기 세개. 수저 세벌. 언니는 낯선 사람이 우리 가족 앨범을 보는 게 싫다며 그걸 태우겠다고 했다. 오빠는 사랑방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폈다. 언니가 아궁이로 사진을 한장 한장 던졌다. 나는 그 앨범에 오빠랑 언니랑 똑같은 스웨터를 입고 찍은 사진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오빠는 혹시 태워야 할 서류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안방 옷장과 화장대 서랍들을 뒤졌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언니의 얼굴에서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나이가 들면 점점 더 똑같아질 것이다. 쌍둥이인데 오빠의 얼굴에서는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사진을 태우는 언니를 보면서 나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길 간절히 기도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했다. 사건의 실체가 밝혀졌을 때 나는 오빠 언니에게 말했다. 치매 검사를 받아봐야 한다고. 치매라는 판정만 나면 모든 게 해결될 수 있었다. 실형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된 뒤로 나는 밤마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잠을 잤다. 어머니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의 기억만 간직하도록. 쑥버무리를 해서 먹었던 행복한 어린 시절만 기억하도록. “난 이런 생각이 들어. 엄마가 평생 새엄마를 미워했잖아. 거기서부터 잘못된 거라고.”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열살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재혼을 해서 들어온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몹시도 괴롭혔다. 그게 어머니의 상처이면서 무기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조금만 무심하게 굴어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울었다. 부모 복이 없어서 남편 복도 없는 거라며. 우리들이 조금만 속을 썩여도 그랬다. “그 여자는 겨울에도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하라고 했어. 겨울이면 동상으로 손등이 터졌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손등에 남아 있는 흉터를 어린 우리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나는 늘 그게 무서웠다. 어머니가 지금 언니보다 더 젊었을 때. 일곱살인 나를 데리고 어딘가를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두번 갈아탄 다음 낯선 동네 골목길을 한참이나 걸었다. 같은 길을 돌고 또 돌았다. 마침내 어머니는 철문 아래가 녹슬어 삭아버린 대문 앞에서 숨을 골랐다. 마당에는 수도가 있었다. 나는 그 수돗가에 앉아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더운 여름이었다. 수도꼭지에 기다란 호수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수도를 틀어 호수가 뱀처럼 꿈틀대는 것을 구경했다. 수도꼭지를 열었다 닫았다, 몇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에 어머니가 나왔다. 어머니의 뒤에 처음 보는 이모가 서 있었다. 어머니랑 얼굴이 너무 닮아서 누가 말을 해주지 않아도 이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나는 인사를 했다. 그때 어머니가 소리쳤다. 못된 년. 어머니가 마당 가운데에 침을 뱉었다. 골목길을 내려오는 동안 어머니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너무 꽉 쥐어서 손이 아팠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못된 년. 나쁜 년. 어머니는 계속 그 말만 중얼거렸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마당에 침을 뱉을 때의 얼굴 표정은 사라진 뒤였다. 어머니는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어머니의 면회를 갈 때마다 나는 그때 그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꾸만 마당에 침을 뱉던 모습만 떠올랐다. 오빠가 김치를 너무 많이 먹어서 물이 먹힌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당에 있는 수도에 입을 대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나는 언니가 어느 사진 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걸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는 걸 보았지만 못 본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