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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촛불혁명, 제21대 총선 그리고 87년체제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 『연대와 열광』 『에밀 뒤르켐을 위하여』 『분단체제와 87년체제』, 편서 『87년체제론』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80년대』 등이 있음.

jykim@hs.ac.kr

 

 

1

 

제21대 총선이 끝났다. 수치로 표현된 선거 결과는 분명하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지역구에서 163석을 얻었고, 미래통합당(이하 통합당)은 84석을 얻었다. 더불어시민당과 미래한국당의 의석수를 각기 민주당과 통합당에 합산할 경우, 전자는 180석이고 후자는 103석이다. 제20대 총선과 비교해서 민주당은 57석을 더 얻었고 통합당은 19석이 감소했으니, 민주당의 큰 승리라 할 수 있다. 선거 결과가 함축하는 권력 상황도 명료하다. 민주당은 국회의장 선출과 상임위원회 위원장 배분 등에서 확연한 우위에 서게 되었고, 입법 주도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몇개의 상임위에서 야당에 의해 제동이 걸린다 해도 야당들과의 힘겨운 협상 없이 쟁점 법안을 ‘신속처리 법안’으로 지정할 수 있다(이른바 ‘패스트트랙’에 올릴 수 있다). ‘국회선진화법’의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상징성을 띤다 하겠다.

하지만 총선 결과는 그 ‘의미’ 면에서는, 즉 총선에 드러난 ‘민의’나 이러한 결과를 야기한 인과적 메커니즘, 그리고 총선 결과에 근거해서 펼쳐질 정치 과정의 전망과 관련해서는, 마치 사회적 상형문자와 같다. 지속적인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형성된 여론에 의해 매개된 것이라 해도, 개인적 판단과 결정의 합계로 이루어진 결과로부터 ‘인민의 의지’ 또는 ‘일반 의지’(volonté générale)를 읽어내려 하는 것은 땅바닥에 흩어진 뼛조각들에서 신의(神意)를 읽어내는 주술사의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술사의 작업이 그릇된 것은 아니고, 우리의 작업이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서 자조할 일도 아니다. 의미에 대한 욕구는 인간학적 상수(常數)이기도 하거니와, 선거로부터 그저 다수의 의지(volonté de la majorite)를 읽어내면 될 뿐이라는 ‘게으른’ 인식 태도야말로 그 다수조차 개인들로 낱낱이 분해되는 결과에 직면할 뿐이다. 왜 그런지, 필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필자는 민주당과 정의당 모두에 대해 ‘양가감정’을 품고 있으며, 통합당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때 양가감정이나 반감은 말이 ‘감정’이지, 각 정당의 정책적 지향과 행태에 대해 여러해 동안 관찰해온 것을 총괄한 ‘입장’이다. 필자가 취한 입장이 우리 사회에서 그리 드문 것은 아닐 텐데, 그런 이들에게 기다란 투표용지에 적힌 정당 또는 후보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일은 ‘강요된 선택’일 뿐이다. 그러니 열렬한 선택뿐 아니라 여러 유형의 수많은 강요된 선택이 합산된 결과가 다수의 의지라 불릴 수 있겠는가? 열렬한 선택은 또 각기 얼마나 다른 (때로는 상반된) 열망들을 담고 있겠는가?

하지만 투표는 사회적 결정의 기법이다. 그것은 주어진 선택지와 그로 인해 야기되는 온갖 제도적 프리미엄 혹은 박탈 가능성에 ‘복종하는’ 과정을 전제한다. 또한 결정은 단순한 합계를 따라 이뤄지지만, 그 합계가 임계점 전후로 전혀 다른 수준의 효력을 낳는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의지들의 결합‘으로서’ 작동한다. 투표 참여란 그런 결합 효과의 발생 가능성을 모두가 예상하는 동시에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위다. 즉 투표 행위는 개별적 의지를 넘어서는 사회적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미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바는 주술사와 달리 세속적 비전을 가지고 가설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며, 가능하면 해석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다른 관점을 적용해보는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이 글이 염두에 두고자 하는 것이 ‘촛불혁명’ 그리고 ‘87년체제’이다. 총선의 의미를 좀더 중장기적인 전망 아래 놓아보자는 것이다.

 

 

2

 

제21대 총선 국면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선거법과 관련된다. 이번 선거만큼 선거법 자체, 그리고 개정 선거법에 따른 비례대표 선거가 관심의 초점이 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직관적으로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선거법은 개정 과정도 복잡하고 갈등적이었을뿐더러 시행 결과도 개정 의도와 전혀 다르게, 거의 정반대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러므로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거법은 구성적 규칙, 즉 어떤 사회적 사실의 발생 자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규칙이다. 가령 교통법규에 관련 규정이 없어도 전동 킥보드를 타고 도로를 주행하는 것은 가능하다. 민법의 규제 규칙을 따르지 않아도 사실상 혼인생활을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바둑 규칙 없이 바둑은 실존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선거법 없이는 선거 자체가 존립할 수 없다. 축구경기의 사소한 규칙 하나가 바뀌면, 그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고 경기 참가자 모두가 그것에 적응해야 하는 것처럼, 선거법의 작은 개정도 참여자들의 전략과 행동을 전부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일단 선거법이 수용되고 작동한다면, 그 선거법에 대한 적응 행위가 누적되고, 그것과 관련된 이해관계가 조직된다. 선거법은 시간이 갈수록 수혜 집단을 만들어내고, 그들은 몸에 잘 맞는 옷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1987년 만들어진 선거법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민주화 이행기에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그리고 그들이 주도했던 정당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지역대표제 중심의 소선거구제 선거법이 채택되었는데, 일단 그것이 작동하게 되자 정당 자체가 선거법에 적응된 형태로 진화했을 뿐 아니라 지역주의와 결합된 지역 맹주로 활동할 수 있는 모든 정당이 그 제도로부터 이탈할 유인요인을 잃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법 개정을 향한 압력은 87년체제를 통해서 다음 세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첫째, 규범적 압력이다. 소선거구 단순다수제가 너무 많은 사표를 야기하며, 지역구 1위 득표자에게 매우 큰 제도적 프리미엄을 제공한다. 이번 총선에서도 253개 지역구 정당 득표율은 민주당 49.9%, 통합당 41.5%로 8.4% 차이지만, 의석수는 민주당 64.4%, 통합당 33.2%로, 31.2% 차이다. 당연히 가능한 한 사표를 줄여서 대표성을 개선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헌법재판소의 결정이다. 헌법재판소는 87년 헌법의 가장 역동적인 요소로 작동해왔는데, 선거법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좀처럼 선거법을 개정하기 어려운 정당과 국회가 어쩔 수 없이 개정에 나서게 했다. 그런 결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정당의 지역구 득표율을 기준으로 비례대표를 배분하는 선거법 조항에 대해 2001년에 내린 위헌 판결이다.1 이 결정으로 정당의 비례대표에 대한 투표와 지역구 후보에 대한 투표가 분리되었는데, 그것이 세번째 요소가 출현할 기반을 마련했다. 위헌 판결 때문에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치러진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단숨에 10석(지역구 2석, 비례대표 8석)을 얻어 원내에 진출했는데, 그것은 비례대표제의 개선과 확장에 사활적 이해관계를 가진 정당이 국회 내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렇게 세 측면에서 제기된 선거법 개정 압력은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특정했다. 규범적 압력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결선투표제나 선호투표제 등 다양한 방안이 고려될 수 있었지만, 둘째와 셋째 요인으로 인해 비례대표제의 개선과 확대로 방향이 잡힌 것이다. 경과가 경로의존적이라 해도 그것이 잘못된 방향은 아니다. 국민국가는 기본적으로 지역 연합에 토대를 둔 기구이므로 지역대표제의 합리성을 무시할 수 없지만, 지역 간 인구이동이 빈번해지고 시장과 산업의 통합도가 높아지며 직업 분화가 심화되는 만큼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대표성의 원리에 더 부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례대표 수를 늘리는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구 의원들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거나 되도록 적게 건드려야 한다. 가장 쉽게 목표를 달성하는 길은 현행 지역구 의원 수를 그대로 유지하고(또는 가능한 한 적게 줄이면서) 비례대표 의석수를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국회의원 총수가 늘어나는 것을 어리석게도 우리 사회 성원 다수가 반대한다.2 그래서 이전 시기에도 그랬지만, 이번 선거법 개정 과정에서도 국회의원 정수 확대 논의는 계속해서 좌절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이번에 개정된 선거법에 따른 선거가 도착적(倒錯的) 효과를 낳게 된 핵심이다(다시 말해 뒤에서 언급할 여러 요인들은 이것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의석 확대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는 지역구 의석과 비례대표 의석의 조정이 필수적이다. 국회 정개특위의 조정 작업은 2015년 중앙선관위가 권고했고 정의당뿐 아니라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민주당도 당론으로 내건 지역구 200석과 비례대표 100석 안(案)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선거법 개정 자체를 수용하지 않는 통합당(당시 자유한국당)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4+1협의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가 마련되었지만, 이들은 선거법 개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릴 수는 있어도 지역구 축소에 합의하기는 어려운 모임이다. 4+1협의체 내에서 지역구 축소에 의한 비례대표제 확대가 자신의 이익에 완전히 부합하고 그래서 그것을 고집할 정당은 정의당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종적으로 지역구와 비례대표 사이의 의석수 조정이 무산된 것은 충분히 예견 가능한 일이었다.

남은 가능성은 비례대표제의 개선, 즉 소선거구·단순다수제로부터 거대정당이 얻는 제도적 프리미엄을 삭감하기 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뿐이었다. 이 제도는 매우 다양한 설계가 가능하며 그것에 따른 효과도 복잡하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매우 치밀한 논의가 필요했다. 하지만 선거법이 정개특위를 통과한 2019년 8월 29일 이후에, 우리 사회는 검찰개혁 문제와 ‘조국 사태’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로 인해 여러 제도적 카드가 논의 테이블 아래로 밀려났다. 지난해 12월 말 시간 압박 속에서 본회의를 통과한 최종안은 봉쇄조항 3%를 유지하고, 비례대표 의석 전체 47석 가운데 30석에 대해 50% 비율로 연동제를 실시하는 안이었다. 연동된 비례대표 의석수가 적고 비율도 100%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실시된 것인데, 그렇게 된 데는 최종 국면에서 선거법 개정 효과를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위성정당’의 출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 크게 작용했다.

 

 

3

 

지난해 12월 27일 개정된 선거법은 법 적용 효과에 대한 예상이 법 형성 과정에 지나치게 개입한 경우에 속한다. 입법은 언제나 기대효과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지만, 이 경우는 그 정도가 지나쳤고, 그만큼 법 형성에서 규범적 타당성의 작용이 약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일차적인 선거 결과도 가변적인데, 지역구 선거와 비례대표 선거 사이의 연동 방식에 따라 최종 결과마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당들 사이의 입장차는 물론이고, 시뮬레이션을 거듭해도 각 당조차 최적의 연동 방식을 확정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개정안의 최종 확정 국면에서 통합당은 4+1협의체가 마련한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비례대표 전문당, 또는 ‘위성정당’을 창당할 것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그런 ‘위성정당’의 현실적 가능성 때문에 연동 규모가 다시 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관련해서 두가지에 주목하고 싶다. 하나는 비례대표 전문당을 둘러싼 여론의 향배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한국당에 이어 민주당 계열의 비례대표 전문당이 창당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지이다. 앞의 문제부터 보자. 먼저 통합당이 제기했고, 실제로 ‘미래한국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된 비례대표 전문당을 둘러싼 논란에서 특징적인 것은 여론의 반응이다. 대부분의 언론매체가 비례대표 전문당을 ‘위성정당’이라고 불렀고, 그것의 창당을 ‘꼼수’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묘수’가 될지 ‘악수’가 될지 논의했다. 언론매체들은 규범적인 관점에서는 수용될 수 없는 정치적 행동을 규범적으로 다루지 않고 사실적으로 다룬 셈이다. 우리 헌법은 정당을 국가적 제도로서 대우하고 보호하며, 그것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막대한 국고보조금을 지급한다. 그러니 선거법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서 처음부터 선거용으로 100일 정도 존속하도록 설계된 정당은 규범적인 관점에서 다룬다면, 그리고 국민적 관점에서 다룬다면, ‘위헌정당’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하지만 언론매체들은 국민의 관점이 아니라 그것을 설립하는 당의 입장에서나 타당할 명칭인 ‘위성정당’으로 불러주었다. 더 나아가서 그런 ‘짓’을 ‘꼼수’라고 불러주었는데, 그것은 경멸적인 표현이긴 해도, 어쨌든 하나의 정치적 ‘수’로 대우해준 것이었다.

그런 언론의 보도행태 자체가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지 않고 통용되고, 어처구니없게도 중앙선관위가 ‘위성정당’의 설립을 인가해준 것은, 한편으로는 보수 우위의 언론지형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타당성보다 사실성을, 규범보다는 현실을 우위에 두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습속과 관련된 것이다.3 사실성이 타당성을 압도하는 사회에서는 규범의 힘이 일관성 요구로 축소되고 그것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다(흔히 ‘내로남불’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규범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서 일관성 규범은 전체 사회의 도덕 기준을 높이자고 주장한 쪽에만 그 높아진 도덕 기준을 적용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런 문화에 비춰보면 자신이 반대한 선거법의 효과를 무화시키기 위해 ‘위성정당’을 만든 통합당과 그런 통합당의 시도를 막기 위해 자신이 주도한 선거법의 효과를 무산시키는 (연합이라고는 해도) ‘위성정당’을 만든 민주당 가운데 후자가 더 가혹한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애초 선거법 개정이 표의 대표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서 폭넓은 사회적 동의를 획득했고, 국회선진화법의 모든 절차를 통과한 것을 생각하면, 나중에 민주당에 퍼부어진 비난 이상의 강력한 문제제기가 ‘위성정당’ 창당을 개시한 통합당, 규범적 기준이 느슨하고 편향적인 언론매체들, 그리고 형식적 태도로 심사에 임한 중앙선관위를 향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고, 중앙선관위가 정당 등록을 받아줌으로써 호미로 수호할 수 있었던 선거법 개정 취지가 가래로도 막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일단 미래한국당이 창당되고 나자, 현행 선거법이 도착적 효과를 낳을 것이 명약관화해졌다. 대응 방안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민주당, 그리고 정의당을 비롯한 몇몇 소수정당이 선거용 연합비례대표 정당을 창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권자의 ‘지혜로운’ 선택을 믿고 맡기는 것이었다. 어느 방향이 더 낫다거나 옳다는 규범적 논증은 가능하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해야 하므로 그런 논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주장된 방안이 기대된 효과를 산출할지는 아주 불확실했다. 개정 선거법이 입증했듯이, 규칙은 사용되고 활용되는 것이며, 악용을 포함해 모든 활용을 미리 통제할 수 없다. 마치 축구에서 오프사이드 규칙이 오프사이드 트랩을 낳고, 다시 그것을 무너뜨리는 패스 전술이 개발되는 것처럼, 구성적 규칙의 이차적 활용 범위는 쉽게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이 사용법을 익히고 가능한 변주를 실험하는 과정을 밟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실현된 것은 앞의 두가지 대응 방안과는 한참 동떨어진 더불어시민당과 열린민주당의 창당이었다. 전자는 정의당을 비롯한 주요 소수정당은 빠진 채 기본소득당, 시대전환, 시민사회 추천 비례대표 그리고 민주당에서 보낸 비례대표로 구성된 엉성한 연합 비례대표 정당이었고, 후자는 민주당의 위성정당임을 ‘자임한’ 정당이었다. 선거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대로 미래통합당 19석, 더불어시민당 17석, 열린민주당 3석이었다.

이런 선거 결과는 서늘한 마음이 들게까지 한다. 대표성 강화와 소수정당의 원내 진출 촉진을 목표로 개정된 선거법에 따른 선거 결과가 두 거대정당이 비례대표 의석을 거의 양분해서 갖는 것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개혁 의도에서 어긋나는 것을 넘어 아예 정반대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중앙선관위가 미래한국당의 등록을 받아준 한에서, 통합당이 그런 이득을 취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더 나아가서 민주당이 기대 밖의(어느 정도나 기대 밖인지는 논란거리이지만) 성과를 거둔 것도 씁쓸한 일이지만,4 정의당이 비례대표 5석을 얻는 데 그친 것은 곱씹어볼 점이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된다면, 봉쇄조항 3%를 통과한 모든 소수정당이 큰 이익을 얻지만, 역시 최대 수혜자가 될 정당은 정의당이었다. 선거법 개정이 무산되지만 않는다면 정의당 의석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고, 늘어날 의석수가 수십석일지 십여석일지가 문제인 듯 보였다. 따라서 정의당은 정개특위에서나 4+1협의체에서 매우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정의당이 그런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면 4+1협의체가 합의에 이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협상의 최종 국면에서 통합당이 위성정당을 만들 가능성이 대두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이 한석도 늘지 않는 데까지 양보했던 정의당은 연동의 규모를 줄여달라는 요구마저 수용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조치만으로는 미래한국당의 몫을 삭감하기에 부족했기에 정의당은 연합 비례정당에 참여할 것까지 요청받았고, 결국 현실주의적 노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누구도 정의당이 끝까지 현실주의적 노선을 택해서 민주당과 연합 비례 정당을 만드는 데 힘을 모았어야 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앞서 지적했듯이 정당의 정체성을 유지하겠다는 것, 그리고 꼼수라고 비난했던 것을 이기기 위해 똑같이 꼼수를 쓸 수는 없다는 규범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변화하는 상황에 대해 학습하기를 거부하는 완고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유연한’ 적응은 자칫하면 그렇게 적응해야 했던 이유를 망각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양자 사이 어느 지점이 균형감 있는 위치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당이 최종적으로 받아든 성적표는 참담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런 성적표가 정말로 감수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는지, 계속해서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의문의 연장선상에서 정의당은 아마도 자신의 선택이 다음과 같은 점을 완전히 고려한 것인지 스스로 되묻게 될 것이다.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기를 기대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정의당이 연합 비례대표 정당에 참여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그러한 정당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고, 그로 인해 연합 비례대표 정당이 쓸 만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적지 않은 유권자들을 화나게 할 것이었다. 정의당이 생각한 국민의 ‘현명한’ 선택이 광범위하지 않을 가능성은 정의당 자체의 예상보다 더 클 것이다(현명한 정치인은 자신의 희망사고wishful thinking에 대해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4

 

제21대 총선에 대해 세가지 총괄적 평가가 가능하다. 첫째, 민주당의 승리(통합당의 패배는 아니다), 둘째, 통합당의 패배(민주당의 승리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민주당의 승리인 동시에 통합당의 패배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마지막 입장이다. 아마도 첫번째 평가를 지지하는 이들은 코로나19에 대한 성공적인 방역이 여당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고, 그것이 선거를 앞두고 여당이 얻은 우연한 행운이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방역 성공이 여당의 승리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되거니와, 선거 직전에 정부가 거둔 인상적인 성과가 선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일이다.

쟁점은 그것이 ‘우연한’ 행운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대단한 수준의 성공, 전세계 언론과 정치인들이 찬사를 보내는 수준의 성공이라 해서 우연한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는 법은 없다. 실제로 하나의 방역 모델(이른바 봉쇄 lockdown 없는 감염차단containment으로서의 ‘K-방역’)로까지 치켜세워지고 있는 우리의 방역도 미시적으로 보면 여러 작은 선택의 경로의존적 누적의 산물이다. 그리고 바이러스의 전파력, 마스크의 효력, 무증상 상태의 감염 가능성, 평균 잠복기간 측정과 격리조치 기간 설정, 위반자에 대한 처벌 수위와 구상권 청구, 이동 통제의 범위와 원칙, 출입국 관리 규칙의 정비, 진단검사비 부담의 원칙, 선별 진료소 및 의료기관 운영지침 등 숱한 문제들에 대해 내려야 할 판단과 결정 전반이 불확실성 아래 있었다.

문재인정부 방역 당국이 택한 전략은 과도하다 싶은 철저함의 연속인데, 그것은 엄청난 비용과 경제적 후퇴를 요구하는 정책이었다. 만일 바이러스가 상충관계(trade-off)에 있는 전파력과 독성 사이에서 인간에게 불리한 절묘한 균형점에 도달했고, 그로 인해 의료붕괴에 이어 사회적 공황심리 그리고 심각한 경제적 후퇴를 야기할 자질이 있다면, 문재인정부식의 방역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효율적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유지 가능성이 없는(unsustainable) 정책의 추구였고, 그로 인한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실패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큰 성공이라고 해도 거기에 ‘행운’의 몫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재인정부의 방역 성공에는 우연과 행운을 넘어서는 면이 있다. 무엇보다 코로나19 방역의 성공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 관련해서 환기하고 싶은 것이 지난해 고성-속초 산불과 올해 코로나19 방역 중에 발생한 안동 및 고성 산불의 성공적인 진화(鎭火)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지난해 4월 뉴스를 통해 전국의 소방차량들이 새벽에 고성-속초 산불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인상 깊게 보았을 것이다. 그 장면이 말해주는 바는 재난이 지방정부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즉시 모든 국가 역량을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재인정부가 그런 과제를 잘 감당해내고 있다는 것이다.5 그것이 코로나19 사태와 함께 반복해서 입증되었다.

이 점에서 문재인정부는 세월호사건과 메르스사태의 교훈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셈인데, 축자적이다시피 한 이런 실천은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가 ‘능력’이 어떤 영역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어떻게 평가되는가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해방 후 우리의 국가 능력은 대체로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신장했다고 할 수 있다(박정희 시대의 ‘경제기획원’은 그것의 한 상징이다). 그리고 능력의 입증 또한 경제성장을 통해서 이뤄졌다. 발전주의의 시대에는 경제성장이 국가가 공급해야 할 안전과 복지 같은 공공재의 기능적 등가물이었기 때문이다. 발전주의의 문화적 유산은 지금도 매우 강력해서, 국가가 경제성장을 향도하기 매우 어려워진 시대에조차 여러 정부가 발전주의의 환상을 동원했다. 이명박정부는 ‘747 공약’, 박근혜정부는 ‘474 경제 비전’을 내걸었고, 문재인정부도 ‘소득주도성장론’을 제기했다.6

그러나 이명박정부로부터 문재인정부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공급해야 할 공공재로서의 안전 문제가 감염병과 대형 재난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이명박정부 시기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와 신종플루의 유행, 박근혜정부의 세월호사건과 메르스사태, 그리고 문재인정부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과 코로나19 사태는 국가 능력의 입증 무대가 경제성장이 아니라 안전 문제로 옮겨졌음을 의미한다.7

이 점은 2008년 촛불항쟁과 2016년 촛불혁명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잘 드러난다. 두 사건은 모두 국가의 안전보장 ‘능력’에 대한 불신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런 불신이 엄청난 대중적 저항과 동원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전자에 비해 후자가 더 큰 폭발력을 가진 사건이었는데, 국가 능력과 민주적 정당성이 맺고 있는 내적 연관이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세월호사건과 메르스사태에 이어진 국정농단 사태는 국가 능력 약화의 원인이 민주적 정당성의 붕괴로 소급된다는 것, 그리고 둘 사이에 상호강화적 악순환이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문재인정부의 방역 성과는 촛불혁명에 힘입어 정부가 공급해야 할 최우선 공공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자의식이 선명하게 내면화된 덕분인데, 그런 점에서 그런 내면화를 ‘강제한’ 촛불항쟁과 촛불혁명의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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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보기에 제21대 총선 결과는 통합당의 패배이기도 하다. 이런 주장에 당연히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선거조작 운운하는 현실 부인적 주장을 진지하게 취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구 정당득표율의 양당 간 8.4% 차이와, 비례대표 경우에도 더불어시민당과 열린민주당의 득표율을 합친 것이 38.77%이고 미래한국당의 득표율은 33.84%로 차이는 4.93%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평이 필요할 것 같다.

확실히 두 당의 의석수 차이는 단순다수제의 효과이긴 하다. 그러나 단순다수제의 효과는 87년체제 내내 유지된 현상이며, 우리의 총선은 늘 그런 차이를 둘러싼 게임으로 고착되어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지금까지 보수파가 승리한 총선이라고 해서 이들이 민주파의 득표율을 크게 압도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총 273석을 놓고 다툰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39.0% 득표로 133석을 얻은 데 비해, 새천년민주당은 35.9% 득표로 115석을 얻었다. 득표율 차이는 3.1%에 불과했다. 또 2012년 19대 총선에서 152석을 얻은 새누리당의 득표율은 42.8%인 데 비해 127석을 얻은 민주통합당 득표율은 36.5%로 둘의 차이는 6.3%였다. 과거의 그런 차이가 보수 우위의 정치지형 때문이라고 이야기되어왔으니, 지금의 차이는 민주파 우위의 정치지형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뿐 아니라 열린민주당과 정의당의 득표율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경우 범보수파와 범민주파의 득표율 차이는 더 커진다. 제 3당이었던 자민련이나 자유선진당이 범보수파에 속했던 제19대 총선 이전과 비교해보면, 이런 차이는 다시 한번 구조적 변동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구조적 변동의 발생은 물론 인구학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수도권으로의 인구 집중, 세종시 발전에 따른 수도권과 충청권의 정치문화적 연동 강화, 냉전적인 노년 세대의 자연 감소, 그리고 전반적인 학력 상승과 의사소통 채널의 다원화와 민주화가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점들과 두루 관련되는 동시에 더 중요한 요인은 국가정체성을 둘러싼 문화적 변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제21대 총선에서 통합당은 강원과 영남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패배했다. 패배의 요인은 분명하다. 수도권과 충청권에서의 패배는 통합당 정치인이 ‘멋지게’ 표현했듯이, “탄핵의 강”을 건너지 못해서이다. 그 말을 했던 정치인조차 결국 탄핵의 강을 절반도 건너지 못하고 이전 강변으로 되돌아가버렸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통합당은 물론이고 시민사회의 보수파는 현 정부와 여당의 실수와 오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촛불혁명처럼 국민적 정체성의 구성요소가 된 사건과 화해하지 않는 한, 그런 공격이 효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선거가 끝나고 국토 위에 그려진 정당 색깔의 양상은 많은 사람에게 ‘지역감정’이라는 87년체제의 고질적 속성으로의 회귀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남 지역에서 민주당의 패배와 호남 지역에서 통합당의 패배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통합당은 광주광역시를 포함한 28개 호남 지역구에 12명의 후보자밖에 내지 않은 반면, 민주당은 영남의 모든 지역구에 후보를 냈다. 통합당은 후보도 내지 못할 만큼 강한 호남 지역의 반(反)통합당 정서를 탓할지 모르지만, 사태를 정직하게 본다면 그것이 드러낸 것은 호남의 배타성이 아니라 영남의 배타성이다. 민주당이 영남의 지역선거에 꾸준히 도전하며 조금씩 성과를 높여가는 것과 달리 통합당이 후보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강’을 건너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강을 건너려고도 하지 않은 것은 호남을 ‘버리고도’ 집권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규범적으로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적으로도 잘못된 국면으로 가고 있다. 제주도에서의 총선 결과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4·3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난 뒤 치러진 2004년 제17대 총선 이래로 통합당 계열 정당의 국회의원 후보는 단 한명도 제주도에서 당선되지 못했다. 통합당이 ‘4·3사건의 강’을 건너지 않은(그리고 건널 생각이 없는) 탓이다.

87년체제를 통해서 우리 사회는 국민적 정체성을 새롭게 주조해왔다. 그 과정에서 4·3사건, 5·18광주항쟁, 세월호사건은 6월항쟁과 촛불혁명을 경유하며 우리가 화해하고 인정하고 보듬어야 할 사건이라는 인식이 대단히 폭넓은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았다. 통합당은 바로 그런 사회적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국민 다수가 건너간 강의 저편에 아직도 머무르고 있다. 통합당은 그리고 보수파는 그 강을 건널 수 있을까? 건넌다면 언제 건널 수 있을까?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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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체제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날이 복잡해지는 사회분화에 조응하는 사회적 대의를 가로막고 있던 선거법의 개정은 체제변동의 징후로 반길 만한 일이었다.9 선거법은 개정을 위해서는 사실상 가중다수결(supermajority)이 필요한 일종의 헌정적 요소이므로 그것을 개정한다는 것은 중요한 변화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칙 변화가 체제변동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서 규칙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활용(심지어 악용)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개정 선거법에 따라 치러진 제21대 총선은 그 점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며, 87년체제의 한계를 돌파할 가능성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실망을 안겼다.

그러나 87년체제를 세력 관계의 관점에서 교착의 체제로 파악한다면, 이번 총선 결과는 교착이 타개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곳에서 필자는 민주파 중심의 세력 재편을 87년체제의 극복 징후로 제시한 적이 있는데,10 이번 총선은 그런 기준에 상당 정도 부합한다. 민주파의 승리와 보수파의 패배라는 정치적 성과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보수파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운동장의 기울기가 변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총선이 가져온 변화는 정치지형의 변화가 이미 완료되었음을 확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활발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강력해진 여당의 뒷받침에 힘입어 문재인정부가 스스로 자임한 촛불정부 역할을 더 제대로 실천할 기회를 얻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구조적 제약으로부터 풀려나왔다는 것이 성공적인 실천적 개입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180석에 육박하는 의석을 얻은 민주당은 갑자기 체중이 불어난 사람처럼 뒤뚱거릴 수도 있다. 의석수를 믿고 몇가지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다가 역풍을 만나지 않을까 조심하다보면,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왜 이 의석을 가지고도 소심하게 구느냐는 거센 비난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도는 신중함과 결단력을 결합하는 것이지만, 대중은 그것을 오만함과 소심함 사이의 우왕좌왕으로 볼 수 있고, 그런 여론에 당황한다면 그 당황해하는 모습이 추가적인 비난을 부를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협상의 대상으로 삼을 일을 선명하게 분별하고 있지 않다면, 수적 우위는 금세 대단치 않은 것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11

관련해서 최근 취임 3주년을 맞은 대통령의 특별연설을 주목할 만하다. ‘반드시 해야 할 일’, 즉 양보하지 않고 추진할 정책에 대한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서두에서 “공공보건의료 체계와 감염병 대응역량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것을 약속했는데, 이는 충분히 예상된 발언이었다. 더 의미심장한 발언은 뒤이어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이다. “모든 취업자가 고용보험 혜택을 받는 ‘전국민 고용보험시대’의 기초를 놓겠습니다. 아직도 가입해 있지 않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보험 가입을 조속히 추진하고,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 예술인 등 고용보험 사각지대를 빠르게 해소해나가겠습니다. 자영업자들에 대한 고용보험 적용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확대해나가겠습니다.” 전국민 고용보험시대를 ‘열겠다’고 하지 않고 “기초를 놓겠”다고 한 것이 실망스러운 이들도 있을 것이고 어디까지가 기초인지도 논쟁적이다. 그렇지만 전국민 의료보험의 가치를 농밀하게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19 시대에서 영감을 길어올려 ‘전국민 고용보험’ 시대로 나아가겠다는 정책적 의지는 매우 반가운 일이다.

대통령은 또한 기자와의 문답 과정에서 “북미대화가 당초 기대와 달리 부진한 상태에 있고, 그것이 언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므로 “이제는 북미대화만 바라보지 말고, 남북 간에 있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찾아내서 해나가”며, 북을 향해 “기존의 안보리 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사업들도 있고, 또 일부 저촉된다고 해도 예외사업 승인을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사업들을 함께 해나가자고 지금 제안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를 비롯한 감염병 예방에서의 남북협력은 물론이고 남북 철도 연결, 비무장지대의 국제 평화지대화를 비롯한 여러 기존 제안들이 여전히 유효함도 지적했다. 대통령이 제대로 된 지도를 손에 들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길을 가게 하는 것은 지도가 아니라 발걸음이다. 잠시일지 모르지만, 비가 개고 길이 말랐으니, 그 발걸음의 템포를 이렇게 권하고 싶다. Allegro ma non troppo(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진 않게).

 

 

  1. 위헌 판결 근거는 대략 다음 네가지이다. 첫째, 유권자가 후보와 정당 가운데 일방만을 지지할 경우 자신의 진정한 의사를 발휘하기 어렵다. 둘째, 지역구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것을 통해서 비례대표에게 투표하게 되는 것은 직접선거의 원칙에 위배된다. 셋째, 정당 소속 후보자를 향한 투표는 정당명부의 비례대표에게도 투표하는 효과를 갖지만, 무소속 후보에 대한 투표는 그렇지 않아서 평등선거의 원칙에 위배된다. 마지막으로 이런 식의 투표방법은 신생정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어 기존 거대정당이 국민의 실제 지지도를 초과하여 의석을 획득하게 만든다.
  2. 반대 주장의 요지는 제대로 일도 하지 않으면서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국회의원의 수를 더 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라면 제대로 된 문제 해결 방안은 그들의 특권을 줄이고 더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이며, 그렇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것이다. 국회의원 수가 늘면 그만큼 개별 의원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의 양은 줄어든다. 그리고 의원 간의 경쟁이 치열해져서 입법 활동과 행정부 감시에 매진할 수밖에 없다.
  3. 타당성보다 사실성을 우위에 두는 문화는 두말할 나위 없이 분단체제의 산물이다. 장기 예외상태라고 할 수 있는 분단체제 아래서 살아온 우리 사회 성원은 규범과 타당성을 강조하고 고수하는 것을 고결하긴 해도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도덕적 행동으로 여기거나 현실을 학습하지 않으려는 완고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이 상황에 대한 놀랍고 신축적인 적응을 가능하게 하지만, 뛰어난 적응력은 자칫하면 적응 자체에 매몰되는 경향을 유발한다.
  4. 민주당은 애초에 개정 선거법 아래서 7석의 비례대표 당선을 전망했고, 그래서 연합 비례대표 정당인 더불어시민당에 참여할 때도 그 이상의 당선을 바라지 않음을 내세우며 자당 출신 비례대표 후보들의 순번을 11번부터 받았다. 하지만 더불어시민당 당선자 17명 가운데 14명이 민주당 의원이 될 예정이다. 위성정당으로부터 얻는 통합당의 이득을 삭감한다는 명분으로 한 일이 민주당에게 그 이상의 큰 이익이 된 셈이다.
  5. 올해 발생한 안동과 고성의 산불 진화 작업은 지난해보다 더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는데, 문재인정부가 추진한 소방직의 국가직화가 큰 도움이 되었다. 국가직화로 전국 어디서 불이 나든 소방관들이 진화에 책임을 느끼게 되었으며, 소방청장의 명령만으로 전국의 소방관을 산불 발생지로 집결시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6. 소득주도성장론은 그것에 입각한 최저임금 인상이 실제로 경제성장을 유발하는가 하는 논쟁에 빨려들어갔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검증하기 까다롭고 시간도 많이 필요하며, 종국적으로는 인과적으로 모호해서 분명하게 판가름 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최저임금 인상을 처음부터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정책으로 제기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불필요한 논란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명칭을 내건 이유는 경제성장을 통해서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는 문화적 강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7. 이런 안전보장은 ‘전통적’ 문제인 분단체제의 ‘관리’까지 포함한다. 이명박정부 시기의 금강산 관광 중단이나 천안함사건 처리, 그리고 박근혜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등은 보수정부가 분단체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문재인정부는 안정적으로 관리해왔다고 할 수 있다. 관련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미 동요하고 있는 분단체제의 안정적 관리는, 관리가 아니라 극복을 지향하고 실천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보수파 정부는 구조적으로 분단체제 관리에 실패하기 십상이지만, 민주파 정부는 분단체제 극복의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도 극복을 위한 바로 그 노력 때문에 분단체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된다.
  8. 쉽지 않을 것이다. 선거 결과에서 보듯이 통합당이 국회의원을 다수 배출한 지역은 영남이다. 당연히 그들이 통합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보수파가 선거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혁신이 필요하지만, 바로 그 선거 패배로 인해 혁신에 가장 저항적인 분파가 더 큰 권력을 갖는 악순환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9. 그런 입장을 피력한 글로는 졸고 「6월항쟁과 87년체제: 헌정체제의 관점에서」(백영서 엮음 『백년의 변혁』, 창비 2019) 참조.
  10. 졸저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비 2017 참조.
  11. 또한 다음 대선에서 민주당 우위의 정치 구도가 지속하리라는 예상은 당내 경선이 곧 본선이나 다름없다는 인식 아래 후보 경쟁을 과열 상태로 이끌 위험이 있다. 승리 전망이 높았던 지난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이미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 상당한 반목이 싹텄으며, 그 후유증이 이제는 해소되었는지도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