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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일기(日記)

 

 

황정은 黃貞殷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아무도 아닌』,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 등이 있음. aamudo@empas.com

 

 

건강하시기를.

오랫동안 이 말을 마지막 인사로 써왔다. 불완전하고 모호하고 순진한 데다 공평하지 않고 가끔은 모욕적일 수 있는 인사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늘 마음을 담아 썼다. 당신이 내내 건강하기를 바랐다. 지금도 당신의 건강, 그걸 바라고 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우리가 각자 건강해서, 또 봅시다. 언제고 어디에서든 다시.

작년 11월에 파주로 이사했다. 이 집에서는 경의중앙선 너머로 호수공원이 보인다. 직선거리로는 150여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철길로 길이 끊어져 1킬로미터를 걸어야 호수공원의 일부인 소리천에 다다른다. 거기서 호수 둘레를 3킬로미터쯤 걷거나 달린 뒤 다시 1킬로미터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에 5킬로미터쯤, 빠르면 46분, 보통은 52분, 걸으며 생각할 것이 많을 때에는 1시간 1분 정도의 산책을 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움직이고 나면 근력 운동을 하기에 적당한 상태가 된다. 데드리프트 90개, 스쿼트 60개, 플랭크 3분을 목표로 두고 보통 2분 30초에서 단념한다을 기본 세트로 하고 푸시업도 조금씩 한다. 센 강도의 운동은 아니지만 쉽지도 않다. 어쩔 수 없어서 이런 운동을 하고 있다. 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하루 작업의 질은 대체로, 원고 앞에서 버티는 시간의 양에 달렸다. 버티는 문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내 경우엔 척추와 디스크다. 2010년과 2011년에 앉지도 눕지도 못할 정도의 디스크 질환을 겪은 뒤로 운동을 시작했다. 걷기가 가장 유효했고 지금은 네가지 근육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 복직근, 복횡근, 기립근, 둔근. 발음해보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한번 더 써야겠다. 복직근, 복횡근, 기립근, 둔근. 이 근육들의 도움을 받아도 하루 작업을 마치고 나면 등이 뻣뻣하고 몸이 차고 팔다리엔 감각이 없다. 책상을 떠나자마자 걸으러 나가곤 했다. 의식해서 호흡하고, 먼 것을 보고, 몸을 데우고 땀을 흘려 피를 잘 흐르게 하는 운동으로 내게 가장 유효한 것은 여전히 걷기/산책이다.

서울 모처에 살 때에는 어디를 언제 걸어도 매연을 듬뿍 들이마실 수밖에 없어 산책 대신 실내 운동을 했다. 하지만 이제 ‘공원’이라는 주거 조건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서해랄지 한강 하구랄지, 하여간 서쪽출판단지 쪽이라는 것을 나는 의미심장하게 생각하고 있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상당히 차고 매서워 나가기가 매번 쉽지는 않았지만, 11월과 12월엔 그래서 거의 매일 산책이나 조깅을 했다. 1월에도 꽤 열심히 했다. 이사하자마자 발을 다쳐 운동하기에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발을 자주 다치는 편인데, 이번엔 발 모양이 달라질 정도의 부상이었다. 걷거나 달리면 통증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러지 않으면 다른 통증으로 읽기나 쓰기를 할 수 없으니까, 꾸준히 공원에 나갔다. 원고 노동자들은 알 것이다…… 척추 질환 증상을 겪는 것보다는 발이 아픈 게 낫지 않겠습니까.

 

대구에서 폭발적으로 확진자가 늘어난 시기에 내가 사는 주택 앞 주차장에서 사람이 쓰러졌다. 저물녘에 책을 읽다가 먼 데서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가까워지는 듯했다가 금방 멀어져, 구급차가 지나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아래층 이웃이 전체 세대에 사진 한장과 메시지를 보내왔다. 방호복을 입은 구급대원의 뒷모습과 이제 막 구급차에 실린 사람의 발이 찍힌 사진이었다. 양말을 신었고 두 발은 벌어져 있었다. 그 사진을 찍은 내 이웃은 구급차가 당도했을 때 마침 주차장에 있었거나 사이렌 소리를 듣고 일부러 나가본 모양이었다. 그는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급히 사진으로 담은 뒤 그 부분을 확대하고 잘라내 공동주택 연락망에 올리고 메시지를 붙였다. ‘이 사진 올린 게 저희 옆동 앞에서 코로나로 의심되는 한분이 갑자기 쓰러져 맥박도 없고 의식 불명으로 119에 실려갔습니다 동 여러분들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구급대원은 개인정보라 말해줄 수 없다고 하는데 방역복 입고 하는 거 봐서 확실한 것 같아요 당분간 창문들 닫고 조심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 메시지를 받은 뒤로 발 생각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피구조자의 신발이 구급차에 같이 실렸는지 주차장 바닥에 남았는지 누가 챙겼는지, 아무튼 신발의 행방이라거나 공동주택 연락망에서 기척 없이 사라지는 방법 등등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그 발을 자꾸 생각하고 있다. 남의 발을. 몰라서인 것 같다. 내가 가장 모르는 것이 그 발이니까.

3월엔 공원에 가지 않았다. 대신,이라고 할 것은 아니지만 공원이 보이는 창에 책상을 붙여두고 그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광화문에도 종로에도 가지 않았다. 어린 조카들이 있는 동생 집에도 가급적 가지 않았다. 파주와 종로와 강서구에 확진자가 발생하면 동선을 확인했다. 월요일 몰리김밥가명입니다(자차), 화요일 몰리김밥(도보), 수요일 몰리김밥(도보), 금요일 몰리김밥(자차). 노출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한 사람의 생활과 식사, 그런 걸 보면 그런 걸 보고 있다는 것이 민망하고 미안했다. 몰리김밥이 그 동네 맛집인가, 멍하니 생각하기도 했다. 몰리김밥 점주도 격리되었고, 확진자가 되었다면 그도 자기 일상을 고백해야 했을 것이다. 이따금 확진자의 동선이라고 공개되는 리스트를 보며 그게 작성된 과정을 상상하기도 했다. 신용카드 사용내역과 자동차 내비게이션 기록이 유용했을 테지만 일단은 확진자의 기억에서 기록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며칠간의 이동과 생활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그 사람을 생각했다. 확진자는…… 확진자의 동선/일상에 쏟아지곤 하는 비난을 걱정했을 테지만 한순간이라도 자신과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가 바이러스에 노출되었을지 모를 타인을 걱정하기도 했을 것이다. 집단적 트라우마가 사람들에게 남긴 흔적 중엔 그런 것도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내가 확진자가 된다면, 하고 생각하는 날도 있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실은 그걸 자주 생각했다.

해가 지면 경의중앙선 시간표를 확인해 동거인을 마중하러 갔다가 돌아왔다. 왕복 2킬로미터, 하루 25분 산책. 그밖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부족한 활동은 트레이닝 앱이 추천하는 플랜을 따르며 채웠다. 복직근, 복횡근, 기립근, 둔근을 단련하는 데 좋은 데드리프트, 스쿼트, 플랭크도 빼먹지 않았다. 플랭크 2분을 버티며 근래 내 동선이 선線이라기보다는 점點이라는 점을 생각했다.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일할 수 있으니까, 내 주소지에 점으로 머물렀다.

 

내 동거인의 일상은 점일 수 없다.

동거인은 매일 아침 경의중앙선을 타고 서울역까지 간 다음 종로로 출근했다가 퇴근 시간대 전철을 타고 파주로 돌아온다. 광장에서 태극기집회가 열리는 주말에도 종로로 출근해 전국 각지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대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동거인과 나는 동선의 길이가 다르고 만나는 사람 수도 다르지만 같은 집에서 여러가지 물품을 공유하며 살기 때문에 전염병 감염 확률이 같다고 판단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염 가능성을 늘 생각하고 있고, 모르는 사이에 어린 조카들에게 병을 옮길 가능성을 걱정해 각자의 조카들을 만나는 일을 줄였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다섯살 아홉살 아이들을 집에서 혼자 돌보느라 지친 동생이 그 아이들을 차에 싣고 초보운전으로 자유로를 달려 이 집에 와 있다. 열흘째+일주일 더.

아이들을 먼저 들여보낸 뒤 커다란 여행 가방을 두손으로 밀며 들어온 동생의 얼굴은 피로로 거의 구겨져 있었다. 동생은 분홍색 씽어 재봉틀과 옥스퍼드, 리넨 천을 챙겨 와 도착한 날부터 재봉틀을 돌려 마스크를 만들었다. 그는 일주일에 닷새를 출근해 일곱시간씩 일했는데 아이들 개학이 미뤄지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4인 가족의 생활비 마련은 이제 동생의 배우자 혼자 감당할 일이 되었는데 그는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공장에 다니고 있고 이 공장엔 최근 새로운 주문이 들어오지 않아 인원을 감축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한다. 내 동거인의 자매는 체육시설 휴업지원금이 지원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규모의이런 위기에 매우 취약한 구조의 체육관을 혼자 운영하고 있는데 두달째 휴업 중이다. 지난주에 그는 일주일에 두번 그 공간에서 체육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더는 고용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선생에게는 이번달과 다음달 수입이 없다. 동생과 동거인과 나는 사람들이 이 전염병을 동일하게 겪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바이러스에는 국경이 없”(「G20 ‘코로나19’ 공동선언문 채택… “바이러스에 국경 없다”」, 한경닷컴 2020.3.26)지만 “우편번호가 건강 상태를 결정”(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보건장관의 말, 「[특파원리포트] ‘재즈의 대부’ 목숨 앗아간 코로나19도 ‘인종차별?’」, KBS 2020.4.9)한다. 우리는 그 말을 얼른 알아듣는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이동이 자유롭지만 물리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에 갇혔고 거긴 각자에게 상쾌하거나 편안하거나 안전하지 않은 공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함께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정폭력이 늘어났으며 그것이 세계적 상황이라는 소식을 뉴스로 들었다. 동생은 마스크 필터로 사용할 멜트블로운 부직포를 가위로 자르면서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랫집 남자가 말이야…… 외국으로 출장을 자주 다닌다는 그가 요즘 내내 집에 머물고 있다고 동생은 말한다. 동거인과 나는 지난 주말에 그 남자가 함께 사는 여자에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고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파찰음도 없이 남자의 말만 외마디 소리로 니가, 니가, 니가, 니가, 하며 들려와서…… 그가 무언가를 찌르고 있다고 생각한 동생이 비명을 지르며 경찰에 신고했고 8분 만에 경찰이 왔으며 아이들은 겁먹어 한동안 소리를 내지 않고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여기 갇힌 사람들은 여기서 일어나지 않은 폭력을 여기서 함께 겪기도 한다……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우리가 여기, 지구에 갇힌 존재들이라는 것을 조금 더 선명하게 목격하는 경우도 있다. 동거인과 나는 거리에서 몰에서 전철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공격당하는 사람들 소식을 보고 듣는다. 시드니, 멜버른, 베를린, 뉴욕, 벨기에…… 동거인과 내가 가본 곳도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본 얼굴들을 생각한다. 사람들이 목구멍 안에 감추고 있던 것, 그런 것은 그렇게 일단 드러난 뒤엔, 어떻게 될까.

혐오는 어디에나 있어. 내게도 있다. 나는 실은 많은 순간 내 이웃을 혐오하고 먹는 입을 혐오한다. 하지만 그걸 남에게 드러낼 권리가 내게는 없어. 그런 건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그걸 한다. 어디에나 있다. 동거인과 나는 우리가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생 쉴피스 성당에서, 레 되 마고 까페에서, 얼스코트 역 앞 잡화점에서, 뮌헨에서 잘츠부르크로 넘어가는 기차 안에서, 빈 시립공원에서, 어떤 도시의 브라스리와 비스트로에서 우리가 만난 사람들, 노래로 표정으로 말로 몸짓으로 혐오를 드러내면서, 혐오를 드러낼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내 동거인은 매일 출근하는 장소에서 많은 이를 만난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이가 미래통합당혹은 새누리당을 여태 공화당이라고 부르는 육칠십대 남성이다. 동거인의 고용인이자 존경할 만한 이력을 갖춘 기술자인 그들은 노인을 혐오하고 장애인을 혐오하며 여성을 혐오하고 아시안을 혐오한다. “아침부터 여자가 재수없게.” “저것들 냄새나고 시끄럽고.” “근데 왜 우한 폐렴을 굳이 코로나라고 불러? 그게 말이 돼?”

클라우디오 마그리스(Claudio Magris)의 『다뉴브』(Danubio, 한국어판 이승수 옮김, 문학동네 2015)엔 혐오를 드러내는 잔인성이라는 것이 특별히 잔인한 어느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 안에” 있다고 말하는 페이지가 있다. 그러므로 “외적 혹은 내적 법으로 적절히 막아내지 못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 순간 약자를 찾아 난폭성을 발휘”(310면)한다고 마그리스는 쓴다. 마그리스는 이것을 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산드린이라는 학생과 트라니라는 선생을 자신의 기억에서 불러낸다. 동급생이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혐오를 드러낸 산드린 학생에게 트라니 선생이 “널 탓할 수야 없지, 이게 인생이다” 하며 일단 수긍한 뒤 똑같은 방식으로 산드린에게 혐오를 드러낸 일화를 소개하며 『다뉴브』의 화자는 말한다. “그때부터 나는 힘, 지성, 어리석음, 아름다움, 비열함, 약함이란 것이, 빠르건 늦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상황이고 부분들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삶의 숙명이나 자신의 성격 탓으로 돌리며 이를 악용하는 사람은 한 시간이나 일년 후 형언할 수 없는 똑같은 이유로 공격당할 것이다.”(311면)

 

요즘은 거의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를 쓰면서, 문장을 쓰는 동안 쌓이는 스트레스를 푼다. 소설 문장을 쓰느라고 긴장한 뇌를 이리저리 풀어준다는 느낌으로, 아무렇게나 쓴다. 하지만 어느날엔 문득 용기가 사라지고 그런 날엔 소설도 일기도 쓸 수 없다. 그럴 땐 음악의 도움을 받는다. 다른 사람이 애써 만들어낸 것으로 내 삶을 구한다. 음악 한곡을 여덟번 열번 반복해 듣는 것이 어떻게 삶을 구할 수 있기까지 하느냐고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Unbelievable, 넷플릭스 오리지널 2019)의 두 형사, 그레이스와 캐런은 한번도 만나지 못한 마리의 삶을 본인들의 일로 돕는다. 누군가의 애쓰는 삶이 멀리 떨어진 누군가를 구한다.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며, 픽션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의료인들, 질병관리본부의 공무원들, 방역물품 제조공장 직원들, 신중하게 움직인 확진자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각자의 방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 n번방을 세상에 알린 ‘추적단 불꽃’의 기자들과 최초 증언자, ‘프로젝트 리셋ReSET’의 활동가들. 타인의 애쓰는 삶은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지난 몇달 동안 그것을 생각했다. 미국의 빈곤과 인도의 빈곤과 싱가포르의 이주노동자를 향한 배제와 유럽과 호주의 아시안 혐오와 미국의 파렴치한 정치와 일본의 정치적 무능은 이런 식으로 국경을 넘어 내 일상과 연결되고 만다는 것도.

2월엔 파주에 눈이 내렸다. 쌓일 만큼 내려서, 동거인이 모자를 쓰고 베란다로 나가 눈사람을 만들었다. 배구공만 한 크기로 눈 덩어리를 만든 뒤 그보다 작은 크기로 눈을 뭉쳐 그 위에 얹었다. 스카프 삼아 손수건을 목에 둘러주고 눈〔眼〕 삼을 만한 것을 찾으러 돌아다니더니 블루베리를 눈 자리에 박아두었다. 날이 풀리고 눈이 녹기 시작하자마자 눈사람의 눈은 베란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왠지 손댈 수 없어 내버려두었는데 당일 흔적 없이 사라졌다. 까치가 먹어치웠다고 나는 믿고 있다. 오후 2시 15분에서 45분 사이에, 베란다에 늘 들렀다 가는 까치가 있다. 매일 자기 영역을 둘러보듯 난간에 앉았다가 떠나는 그 까치를 다른 까치들 속에서도 구별할 수 있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하며 나는 그가 베란다에서 잠시 쉬어가거나 주변을 관찰하는 걸 몰래 훔쳐본다. 까치는 난간을 떠날 때 아래쪽을 향해 곧장 몸을 던진다. 가붓하게 휙. 미련도 두려움도 없어 보인다고 나는 매번 멋대로 생각한다.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없어. 날개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그 몸이 맥락으로 다른 몸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와중에, 4월입니다.

4월 15일은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일찍 투표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개표 상황을 방송으로 지켜보다가 4시쯤 자려고 누웠다. 오늘이 오늘이라서 가슴 아플 사람들을 생각했다. 새벽까지 선거 결과를 지켜보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오늘이 오늘이라는 이유로 마음 아파 잠을 설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미래가 지금과 다를 거라고 말한다. 나는 미래를 잘 모르겠다. 일년 전, 육개월 전의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미래를 현재로 겪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최근 십년 동안엔 늘 그랬다는 점을 생각해도 그렇고. 정말이지 나는 미래를 잘 모르겠다. 몰라서 자꾸 생각한다. 소설을 쓸 때에도 자주 생각하고 상상하지만, 지금 이 글을 통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과거에 그랬고, 지금은 이렇다,라는 정도.

서두에 말했다시피 내 책상 앞에 앉으면 경의중앙선이 보인다. 미래를 생각하고 사람을 생각하는 일에 지쳐 그만 다 그만두고 싶을 무렵인 5시 20분, 지평행 첫차가 지나간다. 5시 28분엔 서울역행 두번째 열차가 지나간다. 그 열차를 타고 새벽부터 어딘가를 가려는 사람들을 태우려고 기관사며 역무원이, 내가 얼굴을 모르는 누군가가 더 이른 새벽에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달도 아직 지지 않은 새벽에 경의중앙선을 타고 내려오는 열차를 생각하는 일은 어쩐지 우주를 생각하는 일과 닮았다. 하지만 그건 우주의 일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일이다. 사람이 애쓴다. 저 바깥에 애쓰는 사람이 있다. 그가 지금 지나간다. 5시 20분 열차가 제시간에 선로를 달려 역에 당도할 수 있게 하는 사람들. 각자의 자리에서 그런 일을 해온 사람들.

오늘은 4월 25일이고 해는 아직 뜨지 않았고 밖은 어둡다. 책상 앞에 앉아 두번째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검은 새벽.

다음 역을 향해 가는 열차의 조그맣고 밝은 창들에 바란다.

 

건강하시기를.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