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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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孫宅洙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이 있음. ststo700@hanmail.net

 

 

 

폭포를 향하여

 

 

산정을 오른다.

몸을 통과하는 공기가 바늘 끝으로 콕콕 살갗을 찔러대는 지점

그 어디에 나를 들어올렸다 철썩, 날카로운 낙차로 가슴을 치는 폭포가 있다.

 

폭포소리는 폭포소리를 삼킨다. 삼킨 소리를 삼키며 점점점 드세지는 게 폭포다.

마지막 소리마저 집어삼킨 뒤 남는 것은 침묵의 아찔한 높이,

그 높이는 차라리 절벽이다.

 

절벽까지 나를 밀어붙인 뒤의 너른 잎그늘의 고요를 찾아왔으나

해발 일천 몇백미터 가차이까지 들어올린 몸에서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 것은

땀냄새를 맡고 따라온 날벌레들과 휴대폰 벨소리, 찰싹

귓전을 때리는 한마리의 잉잉대는 모기다.

 

주총자리에서의명예훼손관련마포서경제2팀으로출두바람

이번달생계가막막하다큰애등록금을내야하는데인세를좀당겨줄수없겠니

프란치스코형제님피정마감이틀전입니다

명멸하는 문자메시지들

 

절벽을 감추는 게 폭포다. 아니, 감춘 절벽이 드러내는 게 폭포다.

아니 아니 마빡 깨어지면서도 절벽을 쓰다듬는 게 폭포다.

 

폭포를 삼킨 모기 한마리가 쩌렁쩌렁 산을 흔들고 있다.

 

 

 

가자지구 당나귀의 얼룩에 관하여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가자지구 동물원의 얼룩말 두마리가 굶어죽었습니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얼룩말을 보여주긴 해야겠는데 봉쇄는 풀릴 기미가 없고 이를 어쩐다? 동물원 주인 모하메드씨는 몇날 며칠 궁리 끝에 얼룩말과 비슷한 골격의 만만한 당나귀를 데려와 털을 깎았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발가벗긴 당나귀의 몸에 그는 신중히 검은 페인트 줄무늬를 그려넣었지요 영락없는 얼룩말이었습니다 팔자에 없는 창씨개명을 한 이 당나귀가 가자지구 동물원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나귀로선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텐데, 시절이 하 수상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애먼 당나귀 한마리마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대를 증명해야 하는 일이 이 지구상에서는 종종 일어납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은 빗속에 줄무늬가 반쯤 지워진, 얼룩말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낯선 동물이 무언가 께름칙해하는 표정의 아이들 앞에서 난감해하는 일도 일어나곤 한다는 것입니다 당나귀의 변신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속아넘어가주는 아이들을 위해 그건 참 안된 일입니다 오늘도 줄무늬가 지워지는 일이 없도록 노심초사할 모하메드씨와 묵묵히 치욕을 견디고 있는 당나귀가 얼룩말의 얼룩보다 더 얼룩이 진 얼굴로 하루 속히 봉쇄가 풀릴 날만 기다리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