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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나오미 앨더만 『파워』, 민음사 2020
만약 여성에게 파워가 생긴다면? 21세기 페미니스트 복수 판타지
김영아 金怜雅
한성대 상상력교양대학 교수 yakim@hansung.ac.kr
올해 초 남성 독자는 물론 여성 독자에게도 불편한 한편의 페미니즘 소설이 한국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파워』(The Power, 정지현 옮김)는 소설가이자 모바일게임 작가인 나오미 앨더만(Naomi Alderman)의 네번째 소설로 2016년 영국에서, 그리고 할리우드 성추문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2017년 10월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이 소설은 발표된 직후부터 평단과 대중 양측에서 큰 관심을 끌었는데, 그 반응이 호평 일색은 아니었다. 한편에서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를 잇는 “우리 시대의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라는 칭송에 가까운 평이 이어졌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문제의 교차성에 대한 고민이 심각하게 결여된 “백인 페미니스트 소설”, 나아가 반페미니스트적 작품이자 페미니즘의 상품화를 부추긴다는 혹평까지 쏟아졌다. 혹평이건 호평이건 간에 소설에 쏟아진 뜨거운 관심은 이 소설이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기인한 면이 크다.
『파워』는 페미니스트 사이언스 픽션의 익숙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만약 남성이 아닌 여성이 세계를 지배한다면 그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사이언스 픽션이 ‘불가능한 가능성의 구축’을 통해 이른바 정상적 체제에 도전할 수단을 제공한다면, 페미니스트 작가들은 그 형식을 활용해서 젠더 간의 역학관계를 뒤집어 그 불평등을 폭로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왔다. 『파워』는 바로 그 전통에 서 있는 소설이다. 그런데 『파워』에서 앨더만이 상상하는 역전된 관계의 양상은 『가디언』(The Guardian)의 문예 편집자인 저스틴 조던(Justine Jordan)이 일찍이 이런 소설을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극단적이다.
변화는 십대 소녀들로부터 시작된다. 어느날 갑자기 전세계에서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들이 자신의 손에서 전기를 방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소녀들은 자신이 전기를 방출해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전율을 느끼며 자아상이 바뀐다. 남성들은 거리에서 십대 소녀를 피하기 시작하며, 소년들의 안전을 위해 남학생만을 위한 학교가 생기고 부모들은 아들에게 “혼자 나가거나 남들과 떨어져 있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36면) 소녀들이 파워를 통제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고 또 성인 여성도 파워를 자각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변화는 여성의 집단적 힘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여성은 자신을 학대해온 남성과 그들이 장악한 지배체제에 맞선다. 미국 남부의 혼혈 소녀 앨리는 자신에게 성폭력을 행해온 양부를 향해 “약간의 번개를 모아 곧바로 내리친다.”(50면) 전세계 성착취 인신매매의 본산지인 몰도바에선 피해자 여성들이 한꺼번에 남성 가해자에게 달려들어 모두 죽여버린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고 반여성적인 정부를 전복시킨다. 그리고 이 혁명은 쓰나미처럼 전세계로 퍼져나간다.
여성이 세계를 지배한다면?이라는 질문에 대한 앨더만의 상상은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비관적이다 못해 충격적이다. 여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범죄와 폭력은 지속된다. 이제 여성은 “그들이 할 수 있기 때문에”(357면) 남성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몰도바에 세워진 새로운 여성국 베사파라의 전제적 여군주 타티아나는 자신의 말을 끊었다는 이유로 젊은 남자에게 유리 파편과 브랜디가 범벅된 바닥을 핥게 하며, 여성들은 전기를 방출해 남성을 성적으로 고문한 후 강간한다. 그리고 그것은 남성이 원하는 일로 정당화된다. 몰도바의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난민캠프 습격은 파워 이후 세계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가장 끔찍한 사건이다. 파워에 취한 여성들은 난민캠프를 습격해 남성은 물론 남성을 보호하는 여성도 젠더의 배신자라는 이유로 모조리 살육한다.
남성과 여성의 위치만 바뀌었지 현존하는 젠더 간의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관계를 그대로, 그것도 한층 과장된 양상으로 보여주면서 앨더만이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앨더만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전하고픈 메시지를 두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그녀는 남성 독자에게 늘 두려움에 떠는 게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힌다. 앨더만은 자신의 소설을 디스토피아로 분류하기를 거부한다. 여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여성이 지금까지 겪었고 또 겪고 있는 일이며, 이것이 디스토피아라면 바로 우리 현실이 디스토피아이기 때문이다. 앨더만은 남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라는 소설의 현실을 통해 너무도 당연시되어서 저항하는 것은 물론 인지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우리 사회의 여성을 향한 폭력과 혐오를 되돌아보기를 촉구한다. 둘째, 여성이 남성보다 착하고 친절할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에 대한 도전이다. 앨더만이 보기에 그것은 억압자가 피억압자에게 주입한, 남성중심적인 이데올로기다. 피지배자의 폭력을 금하고 저항을 무력화시켜 종속을 영속화하는 주술에 불과하다. 따라서 앨더만은 여성이 남성보다 결코 더 착하고 친절하지 않다는 점,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여성은 남성이 여성에게 했던 대로 행할 것”(나오미 앨더만 홈페이지 참조)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토로한다.
앨더만이 밝힌 소설의 전략에서 ‘메갈리아’와 ‘워마드’가 목표로 했던 혐오의 미러링을 연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통제권을 쥔 여성의 이야기는 끔찍하고 공포스럽지만 고백하건대 통쾌하기도 하다. 그들의 분노에 공감하기 때문이며, 남성중심적 폭력과 편견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독자가 느끼는 은밀한 즐거움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아무리 지독해도 상상일 뿐이라는 위안 아닌 위안도 한몫을 하게 마련이다. 그보다 이 소설이 불편한 진짜 이유는 여성이 남성에게 자행하는 폭력 자체보다 그것이 전제하는 여성성에 동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앨더만의 소설은 남성성과 다른 여성성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인다. 착하고 친절한 여성상의 거부가 중요한 목표 중 하나로 설정된 탓이겠지만, 파워의 자각과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이 마치 남성과 여성이 일란성 쌍생아같이 그려진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페미니즘에서 남성성과 다른 여성성에 대한 질문은 가부장제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그를 넘어서는 여성성에 대한 고민이며 양성 간의 보다 평등한 관계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그런데 앨더만의 소설은 착한 여성, 수동적 여성상을 거부하며 여성성 자체에 대한 탐색도 함께 포기하는 듯 보인다. 그 때문에 『파워』는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을 향한 탄원처럼 읽히며, 힘없는 여성들의 복수 판타지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