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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원 李源
1968년 경기 화성 출생. 1992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가 있음. oicce@daum.net
사람은 탄생하라
우리의 심장을 풀어
발이 없는 새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던
하나의 돌은
바닥까지 내려온 허공이 되어 있다
더이상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
봄이 혼자 보낸 얼굴
새벽이 받아놓은 편지
흘러간 구름
정적의 존엄
앞에
우리의 흰 심장을 풀어
꽃
손잡이의 목록
그림자를 품어 그림자 없는 그림자
침묵으로 덮여 그림자뿐인 그림자
울음이 나갈 수 있도록
울음으로 터지지 않도록
우리의 심장을 풀어
따뜻한 스웨터 한벌을 짤 수는 없다
끓어오르는 문장이 다르다
멈추어 섰던 마디가 다르다
그러나 구석은 심장
구석은 격렬하게 열렬하게 뛴다
눈은 외진 곳에서 펑펑 쏟아진다
거기에서 심장이 푸른 아기들이 태어난다
숨이 가쁜 아기들
이쁜 벼랑의 눈동자를 만들 수 있겠구나
눈동자가 된 심장이 있다
심장이 보는 세상이 어떠니
검은 것들이 허공을 뒤덮는다고 해서
세상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심장이 만드는 긴 행렬
더럽혀졌어
불태워졌어
깨끗해졌어
목소리들은 비좁다
우리는 다만 심장을 풀었어요
공평한 점심
되돌려주는 방
우리의 심장을 풀어
비로소 첫눈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허공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우리의 심장을 풀어 다시
우리의 심장
모두 다른 박동이 모여
하나의 심장
모두의 숨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심장
우리의 심장을 풀면
심장뿐인 새
--
*사람은 절망하라/사람은 탄생하라: 이상(李箱) 「선에 관한 각서 2」 중에서.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
소리내지 말자 귀들이 다 없어지도록
칼날을 내부의 사랑이라고 하자
피 묻힌 손으로 얼굴을 지우고 있다고 하자
얼굴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고 하자
그 어떤 소리도 없다 하자
말들은 모두 울다 잠들었다고 하자
미친 사람은 울부짖던 말에 칭칭 묶였다고 하자
묶은 것이 지상의 사랑이라고 하자
사랑은 사로잡힌 것이라 하자
사로잡힌 것에 타들어갈 수 있다고 하자
미친 사람은 씻지 않고 검어진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몸으로부터 놓여난다
밝아오는 것은 묶인 것이다
허공은 다 타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라고 하자
숲길은 세상에 없다고 하자
숲길은 세상에 있다고 하자
배가 제일 고파질 때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라고 하자
죽음은 가장 끝의 식욕이라고 하자
가장 절박한 식욕이라고 하자
생존이었다면
굶주림은 제 입도 같이 씹었다
제 살을 쉴 새 없이 삼키며 돌아갔다
나온 곳으로
거기가 시작이었다고 하자
거기를 봄이었다고 하자
거기에서 숨이 아예 막혔다고 하자
거기에 항문을 빠트리며
호명을 빠져나갔다고 하자
절연이라고 하자
몇날 며칠이고 땅을 팠다고 하자
거짓말
뼛가루를 묻은 땅을 두드렸다고 하자
나오지 마라
여기로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틈을 막아버렸다고 하자
입만 삼킬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하자
오도 가도 못하는 허기가 몇년째 목구멍에 걸려 있다고 하자
느닷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목구멍의 불편함이라고 하자
세상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목구멍이 잠시 뚫린 것이라고 하자
그 순간 뛰어올랐다고 하자
다 잃어버리고 남은 손 두개와 발 두개라고 하자
거짓말
손 두개와 발 두개만 남기고 싶은 거라고 하자
텅 빈 곳에서 뻗어나간
손과 발은 그 누구의 뜻은 아니었다고 하자
장대의 기울기는
아무 뜻도 아니었다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