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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밖/갗의 의심
이현승 시집 『친애하는 사물들』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참된 치욕의 서사 혹은 거짓된 영광의 시: 김민정론」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탯줄을 끊고 난 후 우리는 모두 ‘이미 있는’ 세계에 안착한 사람들이다. 세계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있었고 그다음에야 세계를 판별할 수 있는 순서가 내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는 일이란 그리 간단치 않은 것 같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미 있는’ 세계를 의미화하는 작업의 총화는 기실 ‘나 자신’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세계는 그다음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생각은 모두 ‘뒤집어 생각한’ 이후에야 가능함을 잊지 말 것. 제아무리 오만에 찬 표정으로 ‘나’를 최우선화해도, 당신과 나는 세계의 불가항력에 붙잡힌 인질일 뿐이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므로” (「대화의 기술」), 우리에게는 어떤 세계를 택할 수 있는 결정권이 없다. 그렇다면 ‘이미 있는’ 세계에 가담하는 일이 마치 ‘나 자신’에 의해 오롯이 가능하기라도 한 듯 여기는 태도의 한계를 누군가는 눈치챌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이의 방식이란, ‘나’와 ‘세계’ 중 무엇이 우선인지를 가늠하는 것이 아닌 ‘나’와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매개되는지를 살피는 일이 될 터이다. 이를 ‘의심’이라 하자. 몇 세기 전 한 철학자가 방법적 회의로서 수행했던 ‘의심’의 방식을 굴절시키는 그 자리에, 이현승(李炫承)의 두번째 시집 『친애하는 사물들』(문학동네 2012)이 있다.
시인에게 의심이란 자기 자신을 온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갈등을 촉발하는 것이다. 가령 「젖지 않는 사람」과 같은 시. 이 시의 시적 장면을 떠올리기는 매우 쉽다. 저녁 무렵, 텅 빈 집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이의 모습을 연상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화분에서 물이 떨어지듯 “의심은 물줄기를 따라 뿌리들의 어두운 층계에 머문다.” 의심은 계속해서 화분의 하단에 고인다. 불현듯, 화분에 물을 주는 일상적인 행위 한가운데로 세계의 안전한 질서를 거스르는 이들이 질문의 형태로 들어선다. “어떻게 돌고래들은 해안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하고/어떻게 나무는 스스로 죽을 결심을 하는가.” 자연질서에 가장 순응하리라 여겨왔던 존재들이 그에 동조하지 않는 모습으로 틈입해 시적 장면 전체를 흔들었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정황을 의심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의심할 대상이) 존재한다”를 명제로 삼을 때, ‘나’는 이제 의심할 대상으로서의 세계와 자꾸 연결되어야만 ‘나’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의심은 “물줄기를 거스르는 물고기”(「일인용 잠수정」)가 되어 견고하다고 여겨졌을 법한 당연한 질서를 다시 현상(現像)하는 역할을 한다. 빗물이 흘러가는 것이 당연할 비 오는 날, 씻겨 내려가는 흙탕물을 ‘혈흔’으로 비유하며 내리꽂히는 빗줄기가 땅을 적실 때마다 “아픈 자리는 또 맞아도 아프다”고 고백하는 장면(「굿바이 줄리」), 영하의 거리에서 얼어 죽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밤에 아이들에게는 ‘자라기’ 위해서 더 오래 ‘자라’고 강권하는 상황(「무중력 실험실」)이 그러하다. 제아무리 ‘이미 있는’ 세계에서 예고된 죽음을 내정한 채 주어진 질서와 속도를 감내하는 것이 삶이라 해도,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때문에 이를 감지하기 위해서라도 이현승의 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는 언제나 이중, 삼중의 시선이 설치되어 있다. (“당신이 나의 두려움의 근원을 추측하고 있을 때/나는 당신의 시선에서 당신의 바깥을 느낀다.”, 「궁금해」) 그리고 의심하는 자는 바깥이자 살갗인 자리, 한 철학자의 말장난(pun)을 빌리자면 ‘밖/갗’에 있다. 시인이 밖/갗에서 의심할 때, 어느 가판대에서조차 우리의 초점은 진열되어 있는 사물들의 ‘살갗’에, 또한 우리의 관심은 사물들의 ‘바깥’에, 그러니까 가판대 옆 라디오에서 “어린 부모가 탯줄을 달고 있는 아이를 피시방 화장실에 유기했”(「라디오」)다고 전하는 소식에 노출된다. 의심의 구조는 끝끝내 세계의 일부로서의 나를 요청한다.
‘친애하는’이라는 수사는 흔히 체면을 차리기 위해 사용된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체면치레를 하는 대상은 사물들이다. 그러나 이 예의는 어쩐지 복잡한 감정을 수반한다. 나보다 먼저 있는 세계에 대한 존중과 나보다 나중까지 남아 있을 세계에 대한 염려, 그리고 그 감정들 사이에서 불안정한 나의 위치가 불러일으키는, 이 세계의 질서를 향한 미심쩍음. 이 모든 것이 ‘친애하는’ 이라는 말에 수렴되고 있다. 약간 머뭇거리는, 조심스러움이 밴 이 태도는 순전히 여하한 의심을 발아(發芽)하기 위한 것이다. 지적이면서도 가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