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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시, 새로운 공동체를 향하여
생활의 발견
지금 여기의 리얼리즘 시인들
정우영 鄭宇泳
시인. 시집 『활에 기대다』 『살구꽃 그림자』 『집이 떠나갔다』 등이 있음.
jwychoi@hanmail.net
1. 부정처, 무중력의 시대
그러니까 시고 생활이고 간에 요렇게 고뿔들린 콧구멍 모냥 앞뒤 콱콱 막혀서 속 터지는 날은 이렇게 하렷다 크흠 큼큼 큰기침 몇 번 하고 가래를 돋워 카악 뱉어버리고 입가 쓰윽 소매에 문지르고 패앵 코도 풀어 쓱쓱 바람벽에 닦고는 콧굼기 발씸발씸 양볼이 쏙 들어가게 담배를 뻑뻑 피워 물고설랑 잡놈같이 쪼그려 앉아서 까마귀가 까치 떼에 쫓기는 눈발 치는 먼 논 너머 외딴집 뒤안 고욤나무 같은 거나 생각해보렷다
—송진권 「동지冬至」 부분(『거기 그런 사람이 살았다고』, 걷는사람 2018)
요즘 이런 시들이 주로 눈에 들어온다. 소리 내어 읽으면 절로 흐뭇하다. 입말은 자유롭고 동원되는 사물들도 저희끼리 거침이 없다. 게다가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원초적 지형까지 펼쳐 보이고 있다. 그의 말처럼 “시고 생활이고 간에” 이처럼 당당하게 감겨야 하지 않을까. 눈에든 입에든 맘에든 착 감기는 시가 살갑게 느껴진다.
물론 감겨 오는 게 다는 아니다. 내가 이 시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우리 생활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생하고 능청스러운 입말도 흥미롭지만 더욱 큰 울림을 전하는 것은 사내와 “까마귀” “까치” 그리고 “외딴집 뒤안 고욤나무”가 빚어내는 교감이다. 나는 이들의 오묘한 친소(親疏)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본모습을 본다.
시는 이처럼 삶과 엮여야 하지 않을까. 최근 우리는 삶을 나날의 일상으로 치환하고 산다. 물상들과 서로를 나누고 섞이면서 이뤄가는 우리의 생활은 저만치 멀어졌다. 그러다보니 현실생활에 뿌리내리지 못한 마음과 몸은 정처 없이 여기저기 떠다닌다. 그야말로 부정처(不定處), 무중력의 시대이다.
사정이 이러할 때 만나게 되는 생활 속 시인들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나는 그 고마운 시인들과 함께 ‘지금 여기의 시숲’에 들어, 만지고 냄새 맡고 숨 쉬어볼 참이다. ‘나’와 ‘너’, ‘우리’의 연대를 자신의 시작(詩作)에 착실히도 심어놓은 시인들이다.
2. 범상한 생활의 흥감한 상생
냉정하게 나는 인정해야 한다. 내가 실감하는 시들이 더이상 시의 대세가 아님을. 나와 함께 시공간을 활발히 넘나들던 시인들은 이제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우리 시대 삶의 연대기를 받아 적던 치열한 시선들은 슬슬 저물어가는 것처럼 비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여전히 ‘시를 사는’ 시인들이 있다. 생활의 중심에 시가 놓여 있고 하루의 마감과 함께 시도 저문다. 이 시인들에게 하루는 생활이자, 숱한 문학적 기척들의 집합이다. 생활에서 묻어난 아주 사소한 장면들조차 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소중한 영상으로 각인된다. 이렇게 기록된 그의 삶은 당연하게도 동시대의 우리를 어루만진다. 나의 삶이면서 동시에 너의 삶인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면모를 이명윤, 박승민, 송진권, 문동만의 시작에서 뚜렷이 확인한다. 그 실제를 실감해보기 위해 맨 처음 시숲에 초대한 시인은 이명윤이다.
이명윤: 지역에서 발화하는 범상의 비범
이명윤은 넷 중에서도 가장 덜 알려진 시인이다. 그만큼 독자적이다. 그는 지역을 지키며 그 지역의 독자성을 바탕 삼아 보편으로 나아간다. 자신이 속한 지역과 그 속에서의 삶을 세세하게 작품에 녹여낼 뿐만 아니라, 동시대와도 끊임없이 교감하려 한다. 자폐와 단절을 기본 속성으로 하는, 시대의 단독자로서의 자리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 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삶창 2008)는 이같은 ‘고투의 소산’이다. 이 시집에서 그는 지루한 나날의 생활까지도 생생한 활동사진처럼 묘사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지난한 살림살이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두번째 시집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푸른사상사 2020)에서도 이는 이어지는데 그 관심의 영역이 더 넓고 깊게 펼쳐진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생활의 이면과 그 비의적 순간을 놀라운 직관으로 꿰뚫어 보이기도 한다. 그가 발견한 시공간에서 사물들은, 홀연 뜨거운 이명윤식 의미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이른 새벽 통영 서호시장 뒷골목에 가면 술이 덜 깬 구두든 단단히 묶은 운동화든 비린내 나는 장화든 건들건들 슬리퍼든 모두들 낯선 얼굴이지만 긴 나무의자에 서로의 어색한 엉덩이를 달싹달싹 붙이고 엄마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일렬로 앉아 겨우내 그늘에 말린 배추 이파리에 된장 풀어 끓인 그 국을 공손히 먹는다 이 거룩한 예배로, 어김없이 다툼과 낭비로 살았던 우리들의 한 주를
신은 그래, 그래, 알았어, 하며 부드러운 미소로 퉁쳐 주신다
—「통영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 시락국을 먹는다」 전문
이명윤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단연 토착성이다. 그의 시적 정체성은 그가 지역을 자기 시의 중심으로 퍼올 때 더 번뜩인다. 인용한 시를 보라. 그는 그저 통영과 통영 사람들을 제시할 뿐이다. 그런데 읽고 있으면 그것이 묘하게 심금을 울린다. 이 시를 읽으면서는 누구라도 저 “긴 나무의자”에 가 함께 앉아 있는 자신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른 새벽 통영 서호시장 뒷골목”은 오늘 우리의 현재라고 생각한다. “술이 덜 깬 구두든 단단히 묶은 운동화든 비린내 나는 장화든 건들건들 슬리퍼든 모두들 낯선 얼굴”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 같이, “긴 나무의자에 서로의 어색한 엉덩이를 달싹달싹 붙이고 엄마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일렬로 앉아 겨우내 그늘에 말린 배추 이파리에 된장 풀어 끓인 그 국을 공손히” 받아먹는다. 평등이라면 이런 게 바로 평등일 것이고, 평화라면 이러한 장면보다 더 평화로운 시간은 달리 없을 터이다.
나는 여기 이 서호시장 뒷골목이 우리의 예배처이자 치유공간이라 여긴다. 누구든 공평하게 공손히 받아먹는 저 시락국 한그릇이야말로 “어김없이 다툼과 낭비로 살았던 우리들의 한 주를” 사해주십사 신께 바치는 공물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신께 바치는 공물을 내가 먹는다는 점이다. 내 몸을 보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창조하신 신께 드리는 가장 신성한 경배의식 아닌가. 그러니 서로 낯선 통영 사람들이 새벽마다 모여 시락국을 먹을 때 저 서호시장 뒷골목은 경건함으로 흥건해질 듯싶다. 이것이 이명윤 시의 울림 깊은 확장이 아닐까.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의 틈에서, 공손하고 조화롭게 나누는 한끼의 경배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이같은 발견을 가상히 여겨 신께서도 “그래, 그래, 알았어, 하며 부드러운 미소로” 저 인간들의 죄를 사하노라 “퉁쳐 주”시는 거라고 나는 믿는다.
이명윤의 시선은, 「조화」에서 좀더 빛을 발한다. 언뜻 읽으면 별 의미없는 담담한 소묘로 채워지는데 시에서 눈을 떼자마자 상황이 아연 달라진다. 예기치 않게 명치가 아리는 것이다.
울며불며한 날들은 어느새 잎이 지고
죽음만이 우두커니 피어 있는 시간,
우리는 일렬로 서서
조화를 새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술을 따르고 절을 하는 도중에
어린 조카가 한쪽으로 치워둔 꽃을 만지작거린다
죽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한 거다
세월을 뒤집어썼지만
여전히 부릅뜬 웃음을 본다
우리는 모처럼 만났지만 습관처럼 갈 길이 바빴다
서로의 표정에 대해
몇 마디 안부를 던지고 떠나는 길
도로 건너편 허리 굽은 노파가
죽음 한 송이를 오천 원에 팔고 있다
차창 너머로
마주친 마른 과메기의 눈빛
삶이 죽음을 한 아름 안고 있다,
한 줄의 문장이 까마귀처럼 펄럭이며
백미러를 따라온다
살다가 문득
삶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궁금한 순간이 있다
그런 날은 온통
흑백으로 흐릿해지는 세상의 이마를
만지작만지작거리고 싶은 것이다
—「조화」 부분
누구든 “살다가 문득/삶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궁금한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이 시는 그 오묘한 경계의 시간을 공원묘지의 조화를 통해 성찰한다. 산 자는 “습관처럼 갈 길이 바”쁜 듯 움직이지만, 오래잖아 그도 “도로 건너편 허리 굽은 노파가” “오천 원에 팔고 있”는 “죽음 한 송이”에 다다를 것이다. 이는 생명 가진 것이라면 반드시 도달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섭리이다. 아무리 고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을 비껴갈 순 없다. 그런 점에서 삶은 죽음을 이마에 두르고 소멸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살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마치 영생할 것처럼 오늘을 산다. 물론 사는 동안 여러차례 다양한 죽음 앞에 마주 서게 된다. 그러할 때마다 사람들은 “울며불며” 통곡하는 것이나, 이는 곧 잊힌다. 삶 속에서 당면하는 여러 죽음은 그저 “죽음만이 우두커니 피어 있는 시간”에 불과하다. “우리는 일렬로 서서/조화를 새 것으로 바꾸어놓는” 의례를 통과할 뿐이다. 이럴 때 애도와 추모와 그리움은 상투적이며, 아무도 그의 죽음을 실감하지 않는다. 죽음이 낯선 “어린 조카”만 “한쪽으로 치워둔” 조화를 만지작거릴 뿐. 어린 호기심은 이 “죽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한” 것이다. 이 시에서 번득이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어린 조카의 호기심이야말로 시의 눈이 아닐까 싶다. 죽음마저 일상화된 현대사회의 “흑백으로 흐릿해지는 세상의 이마를/만지작만지작거리고 싶은” 시의 눈. 아이는 이 죽음에서 본능적으로 생의 촉각을 감지해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 조카의 호기심이 삶의 이편이라면 노파의 시선은 삶의 저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차창 너머로/마주친 마른 과메기의 눈빛/삶이 죽음을 한 아름 안고 있다,”라고 그는 쓴다. 나는 이 부분이 이 시의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한아름 안고 있는 과메기의 눈빛이라니. 이러한 일상을 과연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리고 아픈 공허가 저 삶 같은 죽음에는 잔뜩 슬어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무덤덤한 무덤이다. 때로 삶은 이렇게 죽음을 살기도 하고 죽어 새로운 삶을 살기도 한다. 이런 게 바로 시적 통찰이며 비의의 포착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명윤의 생활시가 범상이되 비범을 품게 되는 것이라 여긴다.
박승민: 말간 슬픔과 허무에 고이는 상생
박승민은 아슬아슬하다. 어떻게 생활을 견딜까 싶을 만큼 슬픔과 허무가 작품마다 고여 있다. 시집 『슬픔을 말리다』(실천문학사 2016)를 지나 이번의 『끝은 끝으로 이어진』(창비 2020)에 이르러서도 그의 이러한 기조는 유지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 슬픔과 허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는다. 희한하게도 그의 슬픔과 허무는 애상(哀傷)을 비켜나 있다. 이것들이 도리어 그를 단련시킨 건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그의 시는 심저를 정화하는 애이불비(哀而不悲)로 찰랑거린다. 참척의 고통과 함께 찾아온 슬픔과 허무를 버티느라 그도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가 도회지에서 살았더라면 그는 이것들에 잡아먹혔을지도 모른다. 한데 다행스럽게도 박승민은 그를 키워준 자연의 품 안에 머물러 있었다. 자연에 마음을 의탁하면서 그는, 무지막지한 비애의 독을 덜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이러한 교감 덕분인지 그에게 밀려든 슬픔과 허무가 생활을 해치기는커녕 뜻밖에 진작시켜 삶을 진득하게 만든다. 이번 시집에 실린 「흑매 지다」에 그 정조가 잘 스미어 있다.
두 손을 등 뒤로 묶인 채 발갛게 떨어지다가 벌겋게 흩어지다가 발강에 벌겅을 도장밥처럼 몇번씩 꾹, 꾹, 눌러 찍으면서 흑매 흑매 흑매 흑매흑매흑매 하고 우는 듯, 천지 사방 소리 없이 소리 없이 내려오는 저 매화창(唱)은 만가(輓歌)인 듯 아니고 송가(頌歌)인 듯 또 아니고, 두 대목이 어느새 한 목청으로 만나, 두 손을 등 뒤로 묶고 벌겅 속마음에 발강을 한겹 한겹 더 기워 입으면서 흑매흑매흑매 하고 우는 듯, 우는 듯, 영영 져버리는 것
달빛 받아놓은 논물 안으로 후르르르륵 줄줄이 따라 들어가는 흑매흑매흑매, 긴 소리의 새끼들
—「흑매 지다」 전문
매화꽃 지는 광경이 자못 처연하다. 꽃이 붉다 못해 검게 보이는 흑매는 이리 저무는가. 박승민의 발화를 따라 “흑매흑매흑매” 따라 읊으니 흐느끼는 듯 울음 우는 듯 묘한 일렁임이 파문 진다. 시각과 청각이 화사하게 조율되면서 매화꽃 지는 찰나가 영상처럼 각인된다. 특히나, “달빛 받아놓은 논물 안으로 후르르르륵 줄줄이 따라 들어가는 흑매흑매흑매, 긴 소리의 새끼들”이라는 표현은 선득하다. 마음이 아려오는 것이다. 흑매가 단순히 매화가 아니라, 사람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는 “두 손을 등 뒤로 묶인” 누군가를 ‘흑매’에 오버랩시킨다. 그가 누구일까. 내가 보기에는 ‘흑흑 흐느끼는 누이’이다. 흑매는 그러므로 자연물로서의 흑매(黑梅)일 뿐만 아니라 ‘흑흑 흐느끼는 누이〔妹〕’로서 그 사람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 누이는 혼자가 아니다. “흑매흑매흑매” 우는 “긴 소리의 새끼들”마저 달빛 논물에 잠기는 것 아닌가. 어떤 정경이 이보다 더 처연할 것인가.
그런데 참 이상타. 내게는 이 처연함이 애절한 통증으로 박히지 않는 것이다. 저 떨어져 내리는 게 매화든 누이든 간에 하필이면 “달빛 받아놓은 논물 안으로” “따라 들어가는” 까닭이다. 나는 이 논물이 범상치 않다고 본다. 논물은 생명의 품이며 상생의 원천 아닌가. 죽이는 게 아니라 살려 키우는 것이다. 게다가 달빛마저 받아놓았으니 이는 음양의 조화가 정점에 이른 순간이다. 그러니 저 흑매의 우는 듯한 흐느낌이 곧 환생의 들뜸으로 바뀔 수도 있지 않겠는가.
처연함이 논물과 만나 홀연 상생으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박승민식 해석이다. 그의 애이불비는 이처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삶의 길을 승화시킨다. 우리 어머니들 생을 대변하는 ‘길순심 여사’의 운명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라,
하는 족족 엎어지는 박복도 있는 기라,
그르이, 누군가의 업을 짊어지고 사는 기 한생이라.
업이라고 생각하믄 몬 살지만 복이라 생각하믄 다 산다.
지 놈이 딴 데 안 들러붙고 내한테 왔구나, 그래 생각하믄 또 살아진다.
내는 말이다 평생 앉아본 적이 없는 짐승이다.
단풍놀이도 테레비에서 봤지, 송해 나오는 노래자랑도 식당에서 설거지하며 귀로 봤다.
원망은 무신 원망이 있겠노.
그래 견디고 지나뿌면 다 잊히는 기라.
(…)
이래 장판에 누워 있으믄 고향도 가보고 어매 아배도 만나고 그게 좋지.
꿈에서 만나는 게 좋지.
아이고, 올핸 서릿골 단풍이 곱기도 하네……
이제 니도 고만 집에 가라.
내는 우리 어매 만나러 갈란다.
—「길순심 여사의 장판법석」 부분
길순심 여사의 한생은 우리 어머니들의 한생이며 한국사 분단 비극의 불행한 축도이다. 중장년 이후의 세대에게 길순심 여사와 같은 삶은 아픔으로 갈앉을 것이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이들은 이미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이 시가 특별한 것은 ‘달관의 체념 속에 고이는 통증’ 때문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게 살았다고 해도 스스로를, “내는 말이다 평생 앉아본 적이 없는 짐승이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길순심 여사는 거리낌 없이 다 털어놓는다. 그는 “단풍놀이도 테레비에서” 보고, “송해 나오는 노래자랑도 식당에서 설거지하며 귀로 봤다.” 이로 미루어 그에게는 쉬는 날이라곤 단 하루도 없어 보인다. 노는 것이라곤 텔레비전 시청뿐인데 그나마도 낮방송은 지켜볼 짬이 없다.
박승민은 이를 “귀로 봤다”라고 쓰는데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낮에도 손 놀리지 않는 길순심 여사에게는 방송이라는 게 귀로 들으나 눈으로 보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이와 같은 생활이 원망스럽지 않은가 묻는다면 그는 어찌 반응할까. “원망은 무신 원망이 있겠노./그래 견디고 지나뿌면 다 잊히는 기라.” 그의 답은 이처럼 명쾌하다. 그는 삶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받아들일 뿐이다. “업이라고 생각하믄 몬 살지만 복이라 생각하믄 다 산다”라고 그는 믿는다. ‘업’을 ‘복’으로 전환하는 체념과 달관의 세계에 그는 다다라 있다. “이래 장판에 누워 있으믄 고향도 가보고 어매 아배도 만나고 그게 좋지.” 더이상 무얼 바라랴. 그는 “꿈에서 만나는 게 좋”다. 이런 만남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기 때문이다. 저 체념과 달관은 얼마나 아픈 현재인가.
이처럼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끌어오되 그것만의 독자성을 발견하는 힘, 그것이 박승민의 시적 공감력이다. 그의 이같은 공감력과 감수성이 효과적으로 발휘된 작품이 「기계의 시간」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중장비가 산을 헐고 부수는 파괴의 순간을, 들개의 야성에 비겨 기록하는데 그 시선이 상당히 냉혹하다. ‘기계라는 들개의 탐욕을 두려워하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니 미래를 잘 설계하라는 뜻일 터인데 그러자면 그 스스로도 저 슬픔과 허무라는 경계는 다소간 좀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송진권: 잃어버린 생활의 흥감한 복원
송진권은 너그럽다. 맺힌 데가 없이 눈 닿는 곳마다 다사롭게 감싸준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따뜻하고 자연은 포용적이다. 고달픈 생애나 신물 나게 어지러운 세상사는 잊으라는 듯 스스로를 통째로 내어주고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우리가 꿈꾸던, 돌아가야 할 바로 그곳이 여기라는 것을 그는 망설임 없이 드러낸다. 그는 그의 시에 들어서려는 이의 성향 같은 건 염두에 두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시대적 구분 같은 것도 무의미해 보인다. 그의 시를 읽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현실은 시공간의 동시성에 걸쳐 있다. 이러한 경향은 첫 시집 『자라는 돌』(창비 2011)보다 두번째 시집 『거기 그런 사람이 살았다고』(걷는사람 2018)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래서 때로는 그의 시가 꿈속의 고향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하는 것이다. 앞의 시 「동지」가 대표적이다. 이런 시를 접하면 어떤 이든 그가 써내려가는 생생한 입말과 다사로운 정취에 흠뻑 적셔질 것이며 잃어버린 생활의 복원에 흥감해질 것이다.
소의 배 속에서 살았습니다
소는 드문드문 털이 빠졌고 눈에 허옇게 백태가 끼었습니다
(…)
불을 넣으면 불길이 엄마 아부지 방과 형 누나의 방을 지나
입과 똥구멍으로 허옇게 연기가 새어 나왔습니다
형이랑 누나는 소의 배 속은 너무 갑갑하고 심심하다며
형은 소의 똥구멍을 따라 나가고
누나는 소의 되새김질을 따라 나갔습니다
소의 배 속에서 엄마 아부지와 살았습니다
어느 날인가
나는 나만큼 둥근 방에 엎드린 한 마리 송아지를 보았습니다.
송아지를 친구 삼아 살았습니다
송아지는 내 방까지 다리를 뻗으며 꼬리를 휘휘 둘렀습니다
너무 비좁다고 했습니다
여기가 좁아진 게 아니라 네가 큰 거야
송아지를 따라 밖으로 나왔습니다
엄마 아부지는 소의 배 속에 두고 나왔습니다
—「소의 배 속에서」 부분
송진권이 말하는 ‘소의 배 속’은 과연 어디일까. 현실 속 소와 함께 살던 오두막일까, 아니면 소로 상징되는 가상의 공간일까. 나는 둘 다일 것으로 추측한다. 저 소의 배 속은 현실의 오두막이면서 동시에 신화 속 가상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한때 사람과 소는 같은 오두막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소가 한 가족이었던 것이다. 신화로 해석해도 이는 마찬가지다. 사람이 소를 기르는 게 아니라 소가 사람을 보살피는 모양새일 뿐, 한집의 한 가족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형과 누나, 나의 집 떠남도 실은 별게 아니다. 형과 누나는 “소의 배 속”이 “너무 갑갑하고 심심”해서 나갔고, ‘나’는 소의 배 속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컸기 때문에 나왔다. 거기가 못 살겠어서 뛰쳐나온 게 아니다. 그러기에 “엄마 아부지”는 아직도 거기, 소의 배 속에 머물러 계시는 것 아닌가.
“불을 넣으면 불길이 엄마 아부지 방과 형 누나의 방을 지나/입과 똥구멍으로 허옇게 연기가 새어 나”오는 집은 우리가 살았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를 원형의 공간이다. 각기 따로따로 칸막이 쳐져 소통이 불가능한 삶이 아니라, 불길이라는 삶의 온기가 이어져 서로를 데우는 삶. “입과 똥구멍”이 한몸임을 체득하는 삶. 똥구멍에서 나온 연기와 입에서 나온 연기가 하등 다를 게 없음을 인지하는 삶, 그 순환. 바로 그곳이 우리가 돌아갈 미래라고 송진권은 제안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그가 ‘시인의 말’에 쓴 대로 “어둑어둑한, 희미한, 어슴푸레한,/뒤틀리고 흔들리며 사는 자욱한 삶들” 앞에 붙잡혀 있을 것인가.
물론 그도 안다. 신화가 다시 씌어지거나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저 ‘소의 배 속’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비극은 여기에 있다. 엄마 아부지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소의 배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찾아갈 도리가 없는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송진권은 차선책을 예비해두고 있다. ‘우리 동네’로 오라는 것이다.
탱자 가시로 살을 발라 먹고
이남박에 던진 올뱅이 껍질이 데구르르 구르다 멈춘 데쯤
올뱅이 껍질 부딪히는 소리 모이는 데에
우리 동네는 있습니다
모든 어둠들도 올뱅이 껍질 속에 들어갈 만큼만 뭉쳐져서
갯내를 풍기는 데에는 댑싸리 나울나울 일어나구요
댑싸리 밑에는 소복하니 올뱅이 껍질들이 모여 있고
댑싸리 이파리마다 반딧불은 붙어서 댑싸리를 초록으로 불태우며
한 덩어리 불꽃을 일으키기도 하지요마는
올뱅이 껍질 속 같은 꼬부랑길을 걸어 밭에 가던 할머니가
즘잖은 양반이 왜 여기서 이랴 하며
길 잘못 든 두꺼비를 물 쪽으로 타일러 돌려보내는 때
해바라기는 환하게 불을 켜며 길 밝히고요
올뱅이 껍질을 타고 내려가다 헛디뎌 미끄러진
제일 깊고 후미진 데에는
단단하니 영롱한 올뱅이 새끼들이 꼬물대고요
밝은 빛의 씨앗이 움트기도 할 것이지요
—「우리 동네」 전문
여기가 그의 “우리 동네”이다. 어떤 마을처럼 보이는가. 우선 올뱅이가 눈에 띈다. 다슬기로 흔히 불리는 “올뱅이 껍질이 데구르르 구르다 멈춘 데쯤” “우리 동네”가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의 여기저기에서 그는 올뱅이의 존재를 심심찮게 드러낸다. 심지어는 동네의 형상을 올뱅이에 빗대어 “올뱅이 껍질 속 같은 꼬부랑길을 걸어” 할머니가 밭에 간다고까지 표현한다. 다음으로 눈에 보이는 정경이 “댑싸리 나울나울 일어나”고 “댑싸리 이파리마다 반딧불은 붙어서 댑싸리를 초록으로 불태우며/한 덩어리 불꽃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전언에서 보듯 댑싸리와 반딧불이다. 그다음은 두꺼비와 해바라기의 등장이다. 할머니가 “길 잘못 든 두꺼비를 물 쪽으로 타일러 돌려보내는 때/해바라기는 환하게 불을 켜며 길 밝히고” 있다.
마치 한편의 동화처럼 ‘우리 동네’는, 할머니와 두꺼비, 올뱅이와 댑싸리, 반딧불 등이 조화롭게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의지하면서 북돋는 것처럼 보인다. 할머니가 두꺼비에게 “즘잖은 양반이 왜 여기서 이랴 하며” “길 잘못 든 두꺼비를 물 쪽으로 타일러 돌려보내”고, 그러면 또 두꺼비는 알았다는 듯이 느긋하게 물 쪽으로 몸을 트는 것. 그러한 상생.
그런데 이러한 삶이 지속적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연 그대로의 청정을 유지해야 한다. 그가 자꾸 올뱅이를 들먹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터이다. 올뱅이는 청정지역이 아니면 살 수가 없으므로. 이렇듯이 자연이 더렵혀지면 자연과 연결된 원시 공감대가 사라지고 할머니와 두꺼비의 상생도 끊어지고 말 것이다. 당연하게도 “단단하니 영롱한 올뱅이 새끼들”도 “꼬물대”지 못할 터이고 “밝은 빛의 씨앗”도 “움트기” 어려울 것이다.
왜 그가 ‘우리 동네’를 이렇게 그렸는지 이제야 감이 잡힌다. 저 과거의 원시 공동체처럼 자연과의 공생공락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그는 전달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못내 아쉬운 건 그의 상상이 주로 과거 생활에 몰려 있다는 점이다. 지금 여기를 통해 미래의 어느 날에도 은근 가닿길 바란다.
문동만: 쇠의 속살과 기계 인간
문동만의 하루는 노동으로 열리고 노동으로 닫힌다. 지금도 여전히 그는 노동현장에서 몸을 부리고 있다. 그래 그런지 그의 시에서는 노곤한 땀내와 뿌듯한 성취, 기계와 인간의 긴장과 조화 등이 구체적인 실감으로 다가온다. 관념적인 진술이라든지 억지스러운 계몽이 없다. 그에게 노동현장은 삶의 공간이며 뜨거운 생명 연장으로 기능한다. 본원적으로 그는 일과 시가 동급인 인간이다. 흉내 내는 노동자가 아닌, 그야말로 진짜 노동자이자 시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문학적 감수성이 옅은 시인으로 인식해서는 곤란하다. 노동으로 단련된 굳센 열정과 의지 못잖게 그는 부드럽고 섬세한 시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인간 소외와 물질문명의 폐해를 드러낸다고 할 때조차 그는 그것을 선동의 방식으로 표출하려 하지 않는다. 세번째 시집 『구르는 잠』(반걸음 2018)에서 이는 더 두드러진다. 그는 시인의 직관과 감성을, 선동이라는 관념의 앞자락에 펼쳐두는 것이다.
늙은 부부가 한 몸으로 사는 일을
바짓단 줄이는 일을 구경하였다
서로 퉁바리도 주며 손을 모아 사이좋게
내 다리를 줄여주는 일을
여자는 실밥을 풀고 남자는 박으며
풀며 박으며 이으며 다리며 가는
황혼의 동사를 구경하였다
(…)
저이들의 솔기를 다시 뜯어
다시 옷을 짓는다면
어떤 누에가 되어 푸른 실을 쏟을까
부라더미싱,
부부가 형제가 되도록
늙는 일이여
달팽이처럼 느려터진 밥벌이여
삼천 원 받는 바짓단 줄이기가
이십 분 만에 끝났다
공손히 줄어든 몸을 받았다
—「부라더미싱」 부분
평생 동안 부라더미싱을 돌리며 한몸처럼 살았다면 그 노동은 어떨까. 달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을까. “여자는 실밥을 풀고 남자는 박으며/풀며 박으며 이으며 다리며 가는/황혼의 동사”가 참으로 황홀했을 듯싶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시행에 드러나는 저 부드러운 역동만으로도 사뭇 떨려오는데. 우리 주변에는 평생 동안 오로지 한길의 노동을 닦아온 이들이 적잖다. 하지만 그들의 노고에 비해 대우는 박하다. 그늘진 노동의 무게가 얼마만큼일지 짐작하기 쉽지 않을 만큼 열악하다. 수십년 일해온 달인들 앞에서 노동의 가치라는 말은 허랑하다. “부부가 형제가 되도록/늙”었으나 밥벌이는 “달팽이처럼 느려터”지게 반응하는 게 현실이다. 부부가 한몸처럼 합심하여 일한 이십분의 댓가가 단돈 삼천원이다. 저들은 삼천원에도 즐거워했을지 몰라도 일을 맡기고 댓가를 지급하는 쪽에서는 설핏 민망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시인은 경배하듯 “공손히 줄어든 몸을 받았다”라고 썼을 것이다. 내가 문동만에게서 감탄하는 부분은 여기다. 그는 돈이 아니라 노동의 가치를 알고 있다. 그 가치를 알고 있을뿐더러 그 노동에서 어떤 생명성을 이끌어낸다. 노동이 만들어내는 게 재화라기보다는 새로운 생명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스스럼없이 “바짓단 줄이는 일을”, “내 다리를 줄여주는 일”로 치환할 수 있으며 수선한 바지를 “줄어든 몸”이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짐작건대 그의 이러한 인식은 오랜 노동 경험의 소산이지 않을까 싶다. 평생 동안 기계와 동무해온 그이므로 그와 기계의 관계는 남다를 것이다. 고장 난 기계를 고쳐 움직이게 만드는 순간, 그에게 기계는 더이상 단순한 물체가 아니지 않을까. 형질상으로는 여전히 차가운 기계로되 그 나름의 유기성을 가진 생명체처럼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시 「녹의 중심」은 바로 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묵은 누유漏油를 흘리며 고되게 굴러가고 있었다
뻐걱거리는 관절에 오일을 주고
녹슨 피부에 로션을 발라주었다
거미도 없는 거미줄을 떼어주었다
쇠의 푸르고 차가운 속살
나는 쇠의 속살을 본 자,
산다는 게 이딴 걸레질이었다
콧구멍에 검디검은 먼지였다
먼지 한 점이 세상의 기원이자
우리의 생몰지였다
당신은 평범하게 녹슬며
선연하던 죄나 부식시키자고 한다
단단한 지반을 품고 버릴 수 없는 서사를
코일처럼 감고서,
발화를 기다리자고 한다
이렇게 닦아봐야 안다
닦아봐야 동력의 중심을 알게 된다
묵직한 전기가 통하자 저릿저릿한 구동을 일으킨다
낡은 것들이 더 세련된 기계음을 내며 척척척
불경한 운율이다 괴로운 운율이다
지치지도 않았던 운율이다
내 몸으로 옮겨진 당신을
경건하고 외롭게 닦는다
검은 때를 밀며
숫눈의 세계도 생각한다
—「녹의 중심」 전문
문동만의 “나는 쇠의 속살을 본 자”라는 선언은 충격적이다. 백무산의 「노동의 밥」(『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1988)에 나오는 “살아 튀는 밥”처럼 너무도 선연해서 차라리 아프다. 쇠의 저 속살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그는 얼마만큼 쇠와 지난한 드잡이질을 펼쳤을 것인가. “묵은 누유를 흘리며 고되게 굴러가”는 기계의 “뻐걱거리는 관절에 오일을 주고/녹슨 피부에 로션을 발라주”며 “거미도 없는 거미줄을 떼어주”는 게 그의 생활이다. 기계의 오작동으로 죽어간 노동자들이 절로 떠올라 아찔하다. 그의 험난한 노동의 무게가 짓눌러와서 내 어깨가 다 무지근해진다. “묵직한 전기가 통하자 저릿저릿한 구동을 일으”키는 저 기계는 엘리베이터. 그는 이 기계를 움직이며 하루하루 “우리의 생몰지”를 넘나든다. 그의 손에 의해 “낡은 것들이 더 세련된 기계음을 내며 척척척” 돌아가는 것이나 그에게 이 소리는 “불경한 운율이”며 “괴로운 운율이”고 “지치지도 않았던 운율이다”. 어쩌면 벗어나고픈 운율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이랴. “당신”은 이미 “내 몸”에 옮겨와 있는 것을. 그는 “숫눈의 세계도 생각”하고 “검은 때를 밀며” “내 몸”인 “당신을/경건하고 외롭게 닦는다”. 문동만은 인간의 기계화, 기계에 종속된 인간의 탄생을 이렇게 그린다. 쇠의 속살을 본 자는, 수많은 드잡이질 끝에 기계에 동화된 인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탐욕의 자본주의는 마침내 그에게서 인간의 본성을 빼앗고, 그를 단순한 기계 인간이라는 부속품으로 전락시키고 만 것이다. 이런 면에서 문동만은 디스토피아를 예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나는 문동만의 시에서 이와 같이 현실 너머를 예감하는 징후들이 더 자주 피어나길 기대한다.
언젠가는 기계가 인간을 부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쩌면 그날이 이미 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 최근 네팔 이주노동자들이 펴낸 시집을 보면 그 제목이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삶창 2020)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도시가 그들이 보기에는 ‘기계의 도시’라는 것이다. 기계가 중심이 되어 굴러가는 도시든, 사람이 기계의 부속처럼 여겨지는 도시든 간에 아찔한 전언이 아닐 수 없다.
3. 내일의 시
최근의 리얼리즘 시를 말할 때 평단에서는 백무산, 김해자, 송경동 시인을 흔히 언급한다. 이들 시인이 그만큼 현실세계와 시적 격돌을 활발히 하고 그 위의(威儀)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드러나지 않아 그렇지 삶의 시를 펼쳐가는 시인들이 실로 상당하다. 경향 각지에서 현실과 부대끼며 치열하게 지금 여기의 우리를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졸필이긴 하나 이 글이 그러한 시인들의 시적 고투를 세상에 드러내는 작은 시도가 되길 기대한다.
네 시인의 자취를 따라 걸으며 나는 우리 시의 숲에서 여전히 리얼리즘이 온존함을 확인했다. 우리의 생활이 요구하는 한 이들은 이같은 삶의 태도를 벗지 않을 것이다. 네 시인의 삶을 살펴보면 이들에게 어떤 거소나 생활 조건은 그리 종요롭지 않다. 현실이 끓어오르면 이들은 언제 어디서건 뜨겁게 발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디 이들뿐이랴. 생활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벅찬 오늘을 기록하는 시인들은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공생공락이라는 ‘내일의 시’를 적어가는 공감의 리얼리스트로 부르려 한다. 이들의 분발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