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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세희 金世喜
1987년 전남 목포 출생. 2015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가만한 나날』,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 등이 있음.
lalie0077@naver.com
프리랜서의 자부심
1
서른살이 되던 여름, 나는 현섭과 결혼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대학 때부터 주구장창 만나온 오래된 연인이었고, 우리 주변에는 비슷하게 ‘연식’이 오래된 커플들이 몇 있었다. 그들이 하나둘 결혼식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우리도 할 때가 되었구나,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현섭과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이 걷는 길로 걸음을 옮기는 이들이었다.
그래도 결혼은 결혼이었다. 본격적인 준비로 바빠지기 전, 나는 오오사까로 혼자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오오사까에서 1박, 쿄오또에서 1박을 하고 나니 벌써 마지막 날이었다. 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여러 곳을 여행했지만, 여행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돌아오는 일이었다. 매번 그랬다. 여정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가장 행복했다.
하지만 칸사이국제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엄청난 난기류를 만났다. 내 평생 그런 난기류는 처음이었다. 비행기가 계속해서 흔들리더니 급기야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바이킹이 높이 올라갔다 내려올 때의 그 느낌이었다. 찰나보다 짧은 순간, 공중에 내던져진 듯 몸의 중력이 사라지면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정말로 바이킹에 탄 것처럼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게 신기했다. 나는 완전히 얼어붙어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비행 공포증이 생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가 어쩐지 이상했다.
나는 여행을 가면 어디서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걱정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스무살에 서울로 온 이후 내내 혼자 살았고, 부모님은 내 출발과 도착을 볼 수도 함께할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안부를 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출발하면서 비행기를 탈 때 말고는 더 연락을 하지 않았다. 가까운 곳이니까 괜찮겠지 하고 넘겼다. 설마, 내가 전화를 하지 않아서인가?
“엄마, 왜 그래? 걱정했어?”
“그럼 걱정했지!”
혹시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것 때문이었다. 엄마의 목소리에서 2박 3일간의 걱정과 속상함과 안도가 느껴졌다. 엄청난 안도에 나를 향한 책망이 섞여 있었다.
거기까지는 내가 잘 아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이상한 말을 했다.
“됐다, 난 이제 다 내려놓으련다.”
이건 무슨 소리일까.
“너 결혼한다고 하니까 이제 아무 기대도 안 해야겠다. 돈 많이 벌면 엄마랑 둘이 여기저기 여행 다니고 뉴욕도 가고 그럴 줄 알았더니.”
엄마는 화를 내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말인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 타이밍에 화를 내는 걸까? 끔찍했던 비행이 끝나고 겨우 땅에 발을 디딘 참에 갑작스럽게 마주한 엄마의 분노와 푸념이 생뚱맞게 느껴졌다.
“엄마, 결혼하면 같이 여행 못 가? 내가 뭐 이민 가?”
웃으며 말했지만 슬슬 짜증이 났다. 나는 나중에 통화하자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수하물 찾는 곳으로 가보니 벌써 캐리어들이 레일에 얹혀 밀려 나오고 있었다. 내 가방이 나오는지 주시하면서 조금 전 엄마가 한 말을 떠올려보았다.
엄마가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구나. 한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었는데.
엄마는 뭔가를 요구하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몰랐는데, 짐작조차 못했는데, 실은 그동안 은밀하게 그런 기대를 품고 있었던 건가. 엄마가 뉴욕이라고 집어서 말한 건, 내가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뉴욕주립대학에 간 적이 있어서였다. 그때 나는 집으로 엽서를 보냈었다. 갑자기 그 엽서가 떠올랐다. 내가 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게 기적 같다고, 나중에 꼭 엄마 아빠에게도 타임스퀘어와 자유의 여신상을 구경시켜주겠다고 썼다. 엄마는 그걸 약속이라고 여겼던 걸까. 설마 내가 지금껏 했던 작은 약속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엄마가 품고 있을, 입 밖에 내지 않은 기대들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왜 나한테 그런 걸 기대해? 왜 함부로 기대하고 실망하는 거냐고. 인생의 다음 단계—그게 뭔지는 나도 잘 몰랐지만—로 뛰어들기 전 몸을 가뿐하게 만들기 위해 짬을 내어 여행까지 다녀왔는데, 엄마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단지 여행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엄마의 말에서, 나는 내 결혼에 대해 엄마가 복잡한 심경을 품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것만도 내겐 놀라운 일이었다. 엄마는 늘 현섭을 좋아했고, 내게 과분한 상대라고 여겼다. 그 이유의 큰 부분이 현섭은 안정적인 직장에 속해 있고,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내 부모님은 ‘프리랜서’라는 발음을 좀처럼 입에 붙이지 못했고, 사람들 앞에서 내 자식은 프리랜서라고 말해야 할 때면 마치 내 자식은 전과자거나 불효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부끄러워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모든 것은 이제 꽤 지난 일이 되었다—나와 현섭은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를 했다. 상견례를 하고, 예식 날짜를 확정하고, 장소를 알아보러 웨딩홀 투어를 다녔다. ‘스드메’ 중 ‘스’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했고, 고민 끝에 결국 했고, 촬영 후 스튜디오에 다시 방문해 사진을 골랐다.
이와 별도로, 나는 결혼자금을 벌기 위해 여러 일거리를 맡아서 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법한 일도 했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이야기는 그 일들 중 하나에 관한 것이다. 그 일에 착수해서 마무리하기까지는 한달 남짓한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결혼을 준비하던 때를 생각하면 내게는 그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결혼 직전의 시기는 많은 에피소드로 촘촘하게 채워지고, 우리는 사는 내내 그 에피소드들을 여러 자리에서 반복해 이야기한다. 떠들썩한 웃음 속에서, 때로는 공감 어린 침묵 속에서. 하지만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아직 어디에서도 해본 적이 없다. 이런 이야기에 어울리는 자리는, 지금껏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우연히 그런 때와 장소를 만났다 해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시간이 상당히 지난 지금도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그 일을 소개해준 사람은 예전 회사 사수인 경주 선배였다.
—민용씨, 안녕. 오랜만에 연락해요. 다름이 아니라, 혹시 일 하나 맡을 생각 있어요? A교육대학에서 개교 70주년 기념 전시회를 하는데, 전시 내용을 맡아서 정리해줄 사람을 구한다고 해요. 여기 담당 교수님이 전에 알던 분이라 저한테 물어본 건데, 민용씨 생각이 나서 연락했어요. 마감은 4월 말이고, 페이는 250만원이래요. 관심 있으면 나머지는 전화로 설명할게요.
처음 문자를 봤을 때는 하지 말까, 생각했다.
교육대학. 기념전시회…… 잘 모르는 분야인 데다, 교수들과 일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골치 아픈 일을 떠맡을지도 몰라. 나를 앉혀놓고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끝도 없이 말을 늘어놓겠지. 결과물에 대해서는 영원히 만족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일을 맡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당히 후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뒤인 화요일 오전, 나는 가장 좋아하는 초록색 체크무늬 코트를 입고 작은 지갑에 명함—손수 디자인했다—을 챙겼다. 공기는 차갑지만 무척 날씨가 좋은 봄날 아침이었다. 예상시간보다 여유있게 집에서 나와 A교육대학 방면 지하철을 탔다. 그 무렵 나는 프리랜서 경력 3년을 꽉 채운 참이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이대로 일을 할 수 있겠다, 굶어죽지는 않겠다고 안심은 할 정도가 되었다. 출퇴근에서 해방되면 생활이 무너지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혼자서도 성실하게 일상생활을 하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꼬박꼬박 일을 했고, 그 패턴을 유지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맞은편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쳐다봤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오늘은 미팅 중에서도 어려운 조건이었다. 혼자 낯선 장소로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까. 장소가 그들의 홈그라운드인 데다, 그들끼리는 서로 아는 사이다. 게다가 교수들이다. 가장 어려운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곳에 도착해 벌어질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려 했지만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을 빠르게 이해하고,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핵심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무리한 일을 떠맡지 않는 거였다. 불합리한 수준의 일을 맡기려 한다면 커트하고 분명하게 조정해야 한다. 애매하게 넘어가면 안 돼, 나는 동료에게 말하듯 나 자신에게 단단히 일렀다.
A교육대학 캠퍼스는 예상보다 규모가 작았다. 교문을 지나 조금 걸어 올라가니 멀리 탁 트인 운동장이 보였고, 오른편으로는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이 나타났다. 특이하게도 벽돌 건물 가운데 아치형 지붕의 통로가 있었다. 통로라고 부르기에는 널찍해서 자동차도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지만 사람만 통행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안쪽 벽에는 각종 크기의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곳을 통과하니 작은 광장처럼 트인 공간이 나왔고, 다른 건물들도 보였다.
거기서 전화를 걸게 되어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있었다. 나는 다시 통로를 되돌아 나와, 함성이 들려오는 운동장 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 비해 운동장 지대가 낮아서 바로 옆까지 다가가서야 운동장 전체를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축구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빨간색과 노란색 반바지 유니폼을 입은 남학생들이 경기 중이었고, 한쪽에 응원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대학의 운동장이란 모두 비슷비슷하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나와 현섭이 다닌 대학의 운동장과 형태가 아주 비슷했다. 우리가 다닌 학교도 캠퍼스에 비해 쑥 꺼진 낮은 지대에 운동장이 있어서 거기로 가려면 단이 높은 계단을 몇개씩 내려가야 했다. 운동장은 아주 넓었고, 해가 지면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운동을 하러 나왔다. 조명 아래 사람들은 한 방향으로 트랙을 걸었다. 개를 데리고 나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와 현섭도 해가 지면 자주 운동장에 나갔다. 우리 둘 다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기 때문에 낮이나 밤이나 학교에 있었다. 사실 캠퍼스야말로 진정한 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운동장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걷거나 뛸 때조차 우리는 온갖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업 과제나, 시험이나, 방학 계획에 대해서. 그때도 이런저런 걱정들과 마음을 짓누르는 골칫거리들이 있었을 텐데도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운동장을 걷던 일을 떠올리면 근심이라고는 없던 것처럼 밝고 활기찬 기분이 들었다.
어느 시기에 우리는 배드민턴을 열심히 쳤다. 가을 체육대회에 과 대표로 출전하기까지 했다. 현섭이 배드민턴 남녀 혼성복식팀을 모집하는 대자보를 보고 즉흥적으로 이름을 써넣어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왠지 싫지 않았다. 혼성복식이라니, 우리가 무슨! 하고 손사래 쳤지만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밤 운동장에서 맹연습을 했다. 체육대회 날까지. 경기는 토너먼트식이었는데, 첫 시합에서는 이겼지만 준준결승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대학을 졸업한 뒤로도 우리는 새로 알게 된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상대편이 얼마나 양아치처럼 플레이를 했는지. 플레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후배로 보이는 여학생은 줄곧 뒤에 서 있고 남학생이 혼자 앞에서 서브를 넣었는데, 그 서브라는 것이 대각선으로 네트를 겨우 넘기는, 우리 쪽 서비스 코트 맨 앞쪽에 떨어뜨리는 데만 집중하는 것이었다. 받아칠 수는 없으면서 서브로는 인정되는 그 끄트머리에. 그런 건 서브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이상하리만큼 새로이 화가 치솟아서 사람들에게 말하게 되었다.
“그때 말했어야 했어요. 그렇게 양아치처럼 치지 말라고. 정정당당하게 하라고. 아, 또 열받네…… 지금 돌아간다면 말할 것 같아요. 저기요, 사람들 다 보고 있는데 그렇게 양아치처럼 치면 기분 좋으세요? 기분 좋으시냐구요……”
나는 상념에 젖어 있다가 발길을 돌려 다시 아치형 통로로 들어갔다. 끝 쪽 벽에 다소 어울리지 않게 흐릿한 사각거울이 붙어 있었다. 화장실 세면대 앞에 붙어 있는 그런 거울이었다. 나는 전화를 건 다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신호음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아케이드로 들어오셨어요?”
젊은 남자가 전화를 받아 말했다. 또렷하고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거기 터진 공간이 있죠? 보시면 돌고래 동상이 있을 거예요. 그 앞에 잠깐만 계시면 제가 금방 가겠습니다.”
나는 전화기를 코트 주머니에 넣고 동상을 향해 걸어갔다. 표면이 미끈한 커다란 돌고래가 햇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지금 막 수면 위로 뛰어오른 듯 솟구친 자세였는데, 뒤를 보니 작은 돌고래 두마리가 똑같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교사와 아이들을 상징하는 걸까? 학교 역사에 관련된 조형물이라면 알아두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설명을 찾았다. 발치에 돌고래들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사각형 팻말이 있었다. 하지만 조형물을 만든 사람의 이름과 제작연도만 쓰여 있을 뿐, 설명은 없었고 제목조차 없었다.
그때 한 남자와 여자가 빠른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먼저 나를 향해 인사했다.
“제가 방금 통화한 허재원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분은 임선혜 선생님입니다.”
“안녕하세요.”
내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재킷에 치마를 입고 있었고, 키가 상당히 큰 편이었다. 상당히,라기보다는 굉장히 컸다. 교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서 교수는 그녀를 올려다봐야만 했다.
“임선혜 선생님은 현역 교사이신데요, 지금 휴직하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이번에 저희 기념사업 일을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네,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지컬이 남다르시죠? 체육 전공이세요.”
임선혜를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 궁금증을 읽었는지 교수가 설명해주었다.
“아, 그렇군요.”
“찾기 어렵지 않으셨어요? 정문으로 오셨죠?”
교수가 물었다.
“네. 저기로 나왔더니 바로 돌고래가 보여서 한눈에 찾았어요.”
그들의 시선이 잠시 동상에 머물렀다.
“돌고래가 학교 상징물인가요?”
내가 물었다. 작업을 향한 적극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였다.
“아, 그렇진 않을 텐데요.”
교수가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그러고는 멋쩍은 듯이 체육 교사를 봤다.
“아니죠, 선생님?”
“사실 저도 왜 이게 여기 있는지 전부터 궁금했어요.”
체육 교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학교 가운데 있기에 상징물인 줄 알았어요.”
내가 말했다.
“그러게요. 한가운데 있는데. 아무거나 갖다놓지는 않았을 텐데. 이게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1992년에 제작되었다고 쓰여 있네요.”
체육 교사가 허리를 굽혀 팻말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었는데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팻말을 들여다보고 세마리 돌고래의 주변을 빙 돌기까지 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
교수가 조금 민망해하며 본론으로 옮겨갔다.
“저희가 학교 조직이다보니 거쳐야 하는 루트가 좀 있어요. 이 일을 총괄하는 분이 교무처장님이신데, 지금 처장님 방으로 가서 같이 이야기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이 시간에 가겠다고 말씀드려놨거든요.”
교무처장의 방은 기차의 한칸처럼 길쭉했다. 교수가 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서 “네”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거구의 중년 남자가 창가에 놓인 화분들에 물을 주다가 우리를 맞았다. 그는 물뿌리개를 세면대 옆 선반에 놓고 수건에 손을 닦았다.
교수가 교무처장에게 나를 소개했다.
“커피 한잔하시겠어요?”
거구의 교무처장이 밝은 얼굴로 나를 보고 물었다.
출발 전에 집에서 커피를 마셨던 터라 별생각 없이 전 괜찮습니다, 하고 말했는데 그 순간 교무처장의 표정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던 것이다. 나의 거절에 그는 큰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옆에 서 있는 교수와 체육 교사를 힐끗 봤더니 그들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에 덩달아 나도 몹시 당황했다.
“커피 안 드세요?”
교수가 난감해하며 내게 물었다.
“손님들에게 커피 대접하는 게 낙이신 분이어서요.”
특별한 원두를 막 갈아두었다고 교무처장이 말했다. 전시를 도와줄 분이 온다고 해서 맛있는 원두를 주문했다고.
“아, 그럼 주세요!”
내가 말했다. 이곳에 온 뒤로 자꾸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 나름대로 사회생활의 기술을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자꾸만 헛발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교무처장이 머뭇거렸다.
“혹시 카페인 민감 체질이십니까? 한잔 마시면 잠을 못 잔다거나. 그러면 드시면 안 되고요.”
“아니에요. 저는 번거롭게 해드릴까봐 거절한 거예요. 커피 좋아해요!”
그렇게 해서 드디어 일 이야기로 들어갈 수 있었다. 책상과 이어진 긴 테이블에 앉아, 교수가 설명을 이끌어나갔다.
“올해가 저희 학교 개교 70주년이에요. 저희에게는 의미가 큽니다. 나름대로 성대하게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중 몸통이 이 전시회입니다. 말하자면 메인 행사예요.”
전시 장소는 교내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은 현재 휴관 중인데, 이번 전시회를 기점으로 상설 운영할 계획이라고 교수가 설명했다.
“저희 학교에 학보가 있어요. 60년대에 창간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온 학교 신문인데, 이번에 팀을 꾸려서 학보를 한장 한장 전부 스캔했어요. 여기 계신 임선혜 선생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죠.”
교수가 웃음 지었고 체육 교사는 자신의 공을 인정하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보니 중요한 글들이 많더라고요. 그걸 가지고 이번에 전시를 하려고 해요. 말하자면 학생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전시를요.”
살아 있는 역사. 학보로 재구성한 전시회. 나는 수첩에 메모했다.
기사들을 내용별로 몇가지 카테고리로 나누고, 기사 내용을 취합해서 설명하는 글을 써주면 좋겠다고 교수는 설명했다.
“처장님, 저희가 그때 얘기한 구성이 뭐뭐였죠? 간단한 학교 소개로 시작해서, 여는 글, 대학생활 한꼭지, 축제 한꼭지……”
교무처장과 교수는 머리를 맞대다시피 하고 종이에 볼펜으로 메모를 해가며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수가 제안하면 교무처장이 생각을 보태고, 으음, 그보다는, 그래, 좋아, 그렇게 한번 해봅시다, 하는 식으로 그 자리에서 의견을 맞추었다. 아카이빙에 관해 질문을 던지자 체육 교사도 논의에 뛰어들었다. 그들 곁에 나는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이 일을 얼마나 중대하게 여기는지, 얼마나 열정을 갖고 있는지 느껴졌다. 몸담은 공동체가 있고, 그 공동체의 역사에 자부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 뜻밖에 나는 조금 부러움을 느꼈다. 오랜만에 그런 것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체육 교사가 손목시계를 보고 앗, 하고 놀랐다.
“저는 다음 수업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체육 교사가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어서 가보세요.”
교수가 말했다. 그들은 몇가지를 급히 상의했다.
“임선혜 선생님이 카테고리별로 기사를 정리해서 보내주실 거예요. 이번주 안으로 보내드릴 수 있게 할게요.”
그럼 박물관으로 가볼까요, 하고 교수는 말했다.
나는 교무처장에게 커피를 잘 마셨다고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교수를 따라 건물을 빠져나와 잘 가꾸어진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입구에 차들이 주차된 몇개의 건물을 지나, 한 무리의 학생들을 지나쳐, 새삼 대학 캠퍼스의 활기와 아름다움을 느끼며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길 끝에서, 정오의 햇살이 아른거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박물관 건물이 나타났다. 작은 교회당 같은 연한 색깔의 건물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벽에는 사람 머리통만 한 돌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었다.
“건물이 정말 아름답네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교수도 잠시 멈춰 서서 외관을 둘러보았다.
“일제강점기에 선교사들이 지은 건물이에요. 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 건물에서 수업을 했는데, 강의용으로 쓰기엔 무리라고 판단해서 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꾸었어요.”
그가 입구 잠금장치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안으로 들어가자 비좁은 로비 공간이 나왔다. 전시회 기간이라면 안내하는 사람이 서 있게 될 높은 데스크가 있었고, 그 옆으로 넓은 계단이 보였다. 교수는 앞장서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2층 입구 벽에 학교 역사가 연대순으로 쓰여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서 연표를 훑어보고 사진을 찍었다.
교수가 불을 켜자,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나는 전시실로 들어서면서 새삼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공간이 있구나, 생각했다. 교육대학도 그렇지만, 그 안에 있는 휴관 중인 박물관이라니. 이런 일이 아니라면 평생 인연이 닿지 않았을,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공간이었다. 벽면의 유리장에는 과거의 교복, 배지, 책들, 각종 상패와 트로피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곳곳에 사진들도 붙어 있었다. 전시실 가운데에도 허리 높이까지 오는 커다란 진열대가 있었다. 휑한 느낌은 있었지만, 여느 박물관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보시면 알겠지만, 아무 내용이 없어요. 요즘 저희 학생들 쓰는 말로 냉무, 냉텅이죠.”
교수가 진열대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면서 씩 웃었다. 그 말을 듣자 확실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문제는 없지만, 한바퀴 빙 돌아보고 나가면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런 전시였다.
“이렇게 좋은 공간에 아깝잖아요. 이걸 다 바꾸려고요.”
교수가 말했다.
“아마 새로 전시를 해도 전시되는 물품 자체는 비슷할 거예요. 하지만 배치를 다시 하게 되겠죠. 서사를 만들고 그에 따라 배치하면 물품 하나하나가 붕 떠 있지 않고 지금과 다르게 존재감이 생길 거예요. 그 서사를 만드는 역할을 부탁드린 겁니다.”
당시엔 몰랐지만, 나중에 검색해보니 그는 미술교육과 교수였다.
“어깨가 무겁네요.”
내가 말했다.
“너무 무거워하진 마시고요.”
그가 방긋 웃었다.
3
그주 주말에는 오랜만에 고속버스를 타고 네시간 걸려 본가에 갔다. 부모님의 요청 때문이었지만, 자발적으로 택한 일이기도 했다. 부모님은 이사를 앞두고 있었는데, 내 방의 책과 물건들을 직접 보고 정리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가 좀 들여다봤는데 엄두가 나지 않더라며.
부모님은 30년간 살던 오래되고 불편한 주택을 떠나 신축 아파트로 이사할 예정이었다. 30년이라니! 내 나이만큼의 세월이었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말한다 해도 부모님에게 이번 이사는 엄청난 변화였다. 아니, ‘변화’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보다는 ‘단절’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내가 돌이 되기 전, 그야말로 ‘갓난아기’일 때 이 집으로 이사 왔다. 이후로 크고 작은 공사를 거쳐 구조를 변경하고 여기저기 손을 보긴 했지만, 물건만 놓고 보자면 그건 마이너스보다 플러스에 가까운 과정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이사를 할 때 하는 일들, 그러니까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을 끄집어내 점검하고 버리고 교체하는 과정이 우리 가족에게는 없었다.
스무살에 서울로 떠난 이후로도 내 방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본가에 와서 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설 때면 잠들어 있던 공기를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촌스러운 핑크색 손잡이가 달린 길쭉한 옷장에 만화 웨딩피치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책장에는 수능 준비용 참고서가 빼곡했다. 신경 쓰이는 것들은 책상 서랍에 있었다. 세개의 서랍 안에 차곡차곡 들어 있는 여섯권의 다이어리와 수첩들, 일기장으로 쓴 여러 색깔의 노트들. 서울에 있을 때도 가끔 나는 이 방을, 이 방의 물건들을 의식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살인자가 자신이 어딘가 묻어둔 시체의 존재를 늘 의식하듯이 이 방을 의식했다. 누군가 발견하기 전에, 그걸 파내서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슈퍼에 가서 5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를 샀다. 실패처럼 감겨 있는 포장용 노끈도 한 롤 샀다. 노끈은 집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사기로 했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주인아줌마의 얼굴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아줌마네 가족—아저씨와 아줌마, 아들 셋—은 여기서 장사를 했다. 아줌마는 얼굴이 그리 변하지 않았는데, 아들들은 성인이 되어 있어 세월을 실감하곤 했다. 꼬맹이였던 내가 이 나이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 아들들은 보이지 않았고, 아줌마는 여전히 쌀쌀맞았다. 중학생 때였나, 이 아줌마가 우리 반 친구에게 과자 좀 그만 사 먹으라고 혼냈던 적이 있다. 친구에게 그 말을 들은 뒤로 슈퍼에 와서 아줌마를 볼 때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종량제 봉투와 노끈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가장 먼저 교과서와 참고서들을 끄집어냈다. 침대 옆 바닥에 책들이 깔렸다. 나는 몇권씩 적당한 높이로 쌓은 다음 노끈으로 묶었다. 내 방에는 거실로 통하는 문 말고도 옆마당에서 바로 들어올 수 있는 미닫이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어놓고 책 꾸러미가 만들어질 때마다 바로바로 밖에 내놓았다.
문제는 스크랩북이었다. 등에 네임펜으로 숫자를 매긴 커다란 클리어 파일들이 책상과 일체형인 책장 아래쪽 두단에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신문을 읽고 스크랩을 했다.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파일을 하나 빼내 손에 들고 넘겨보았다. 비닐 안 모눈종이에 반듯하게 오린 신문기사가 붙어 있고, 그 옆에 일일이 코멘트가 적혀 있었다. 내가 쓴 글씨였다. 기사를 읽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어두었던 것이다. 이건 어떻게 분류해 버려야 하는지 난감했다. 결국 나는 방바닥에 앉아 비닐 안에 들어 있는 종이를 하나하나 꺼내 종량제 봉투에 집어넣었다. 종이는 책처럼 모아서 분리배출을 해도 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싶었다. 비닐과 안에 든 종이가 한몸처럼 붙어버린 것은 비닐째로 종량제 봉투에 넣었다.
“그걸 왜 다 버려?”
엄마가 방문을 열어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걸 놔둬서 뭐 해. 다 버릴 거야.”
나는 대답했다.
그렇게 열심히 했던 건데 아깝다고, 오히려 엄마가 서운해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속도를 올려 한장 한장 제거해나갔다.
왜 이렇게 열심히 스크랩을 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사 옆에 꾹꾹 눌러쓴 글씨들은 읽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대체 청소년기의 나는 왜 이토록 나라의 미래를, 부국강병과 남북통일을 고민했던 걸까?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었을까? 나이 먹은 노인이 편향된 정보를 바탕으로 정국에 대해 핏대를 세우며 논평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이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정말이지 꼴사납고 오지랖이 넓은 애였구나…… 나는 과거의 내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다음 날 밤에는 엄마와 둘이서 목욕탕에 갔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날 밤에 목욕탕에 가는 게 언젠가부터 우리 모녀의 의식이 되었다.
묵직한 문을 밀고 수증기로 가득한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바가지로 쓸 작은 사이즈의 대야와 그보다 큰 사이즈의 대야를 두개씩 가져와 비누 거품으로 씻어냈다. 엄마는 늘 그렇게 했다. 병균이 있을지 모르니 소독해야 한다고. 엄마는 소독을 마친 대야 두개를 내게 건넸다. 우리는 김이 서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거울 앞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탕에 들어가기 전 가볍게 몸을 씻어내면서 나는 엄마에게 결혼식을 올린 뒤 바로 아이를 가질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기를 좋아했다. 내 아기를 갖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몹시 흥분됐다. 임신하고, 출산하고, 아기가 커가는 걸 지켜보는 과정이 세상에 태어나 꼭 한번은 경험해볼 만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현섭은 나만큼 아기들의 엄청난 팬은 아니었지만 내 의사를 존중했다. 어쨌거나 애를 낳아 기르는 사람은 너니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으니 잘됐다고, 아이를 돌보며 일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나와 현섭은 이야기했다.
엄마는 그래, 하고 대답하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몸이 하얗게 되도록 비누칠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 우리 딸 꿈이 대통령이었는데.”
엄마가 문득 생각난 듯, 명랑하게 말했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엄마가 방을 정리하려고 들어갔다가 뭔가를 본 게 분명했다. 다이어리나, 옛날 수첩들. 그걸 보고 생각이 났겠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엄마는 이 꿈 역시 뉴욕에 데려가겠다는 약속처럼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유 엄마,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그래. 그런 말 좀 하지 마. 진짜 쪽팔려.”
엄마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아니야, 넌 고등학생 때도 정치인이 되는 게 꿈이었잖아. 방에 행동계획을 적어놓고 하루하루 그대로 실천했었잖아. 그게 왜 쪽팔린 거야.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상하더라. 큰 꿈을 갖고 사는 게 쪽팔린 일이 됐더라.”
엄마가 말했다.
“민용아, 엄마는 네가 정말로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
“아우 됐어. 엄마, 다들 자기 자식이 그럴 거라 생각해.”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 화제를 더이상 이어나갈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엄마를 만나면 결국 이렇게 말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 좁은 우물에 사는 엄마와 달리, 식견이 있는 척.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엄마의 입을 닫게 하는 데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다. 엄마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이상 끝.
이번에도 통했다. 엄마는 더는 말하지 않고 몸의 비누 거품을 씻어냈다. 나는 먼저 일어나 탕으로 갔다. 세개의 탕 중에 가장 온도가 낮은 탕을 골랐지만 그래도 너무 뜨거워서 다리만 넣고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곧이어 엄마도 탕으로 왔다. 손을 넣어보더니 이게 뭐가 뜨거우냐며 엄마는 곧장 물로 쑥 들어갔다.
쇄골까지 물속에 담근 엄마가 나를 쳐다봤다. 샤워를 마친 엄마의 얼굴은 물기로 번들거렸다.
“내가 잘못 생각했지. 너희 어릴 때는 공부 잘하는 게 최고인 줄만 알았지. 그게 아니더라니까.”
이번에는 주장이 아니라 깨달음을 전하는 방식이었다. 살아보니 그렇더라,라는 화법. 엄마가 말했다. 반기문—그 무렵 UN사무총장 반기문씨가 귀국해 노모가 사는 시골 마을에 금의환향했다—처럼 될 것도 아닌데, 그냥 가까이 살면서 주말에 얼굴 보고 밥 먹고 같이 시간 보내는 게 최고라고.
엄마가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의 고향 친구 선화 이모와 그의 딸 유나.
“선화 이모 보면 부러워?”
장난스럽게 물었다.
“부럽지. 너무 부러워.”
“유나도 애 낳고 다 잘 살잖아. 근데 엄마는 나한테는 왜 결혼 일찍 한다고 해?”
그러자 엄마가 나를 똑바로 보면서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유나랑 너랑 같아? 그 애들은 적당히 공부하고 이런 데서 사는 거지. 너는 그렇게 공부해서 그 애들이랑 똑같이 살려고?”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표정으로 엄마는 나를 쳐다봤다. 순간 엄마가 속으로 삼킨 다음 말이 내 귀에 똑똑히 들리는 것 같았다.
어차피 그렇게 살 거, 뭐 하러 서울까지 갔어.
엄마가 탕에서 나간 다음, 나는 천천히 몸을 미끄러뜨려 목까지 물에 담갔다. 이제 물은 그다지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 머릿속이 몽롱했다.
나는 저만치서 웅크리고 앉아 손등부터 때를 밀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엄마는 항상 나한테 감사하며 살아라, 겸손하게 살아라, 하고 말했잖아. 세상일이 원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다 그런 거다, 말했었잖아. 엄마의 그 말들에 의지해 넘긴 순간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했던 엄마와 지금 저기 앉아 때를 미는 엄마는 다른 사람 같았다.
어차피 그렇게 살 거, 뭐 하러 서울까지 갔어.
그렇게 말하는 대신, 엄마가 실제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그렇게 높은 학교까지 나와서, 왜 제대로 된 일을 안 해? 아깝지도 않아?”
엄마는 여전히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프리랜서가 대세야 엄마. 출퇴근도 안 하고 짱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그 말은 부모님의 한쪽 귀로 들어갔다가 다른 쪽 귀로 흘러나왔다. 왜 멀쩡한 회사를 그만둔 것인지, 이 애한테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말하자면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닌지 의심을 내비친 적도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나의 첫 직장은 언론사였다. 그곳을 나와서는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민단체에 상근직으로 입사했다. 나는 조직과 그 안의 사람들을 사랑했고, 내게 주어진 일을 온 힘을 다해 해냈다. 실은 그 이상이었다. 자발적으로 야근을 했고, 일감을 집으로 가져가서 밤늦도록 들여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실망할 일이 일어났다. 조직에 실망하거나,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무엇보다 두 직장의 가장 큰 공통점은 살인적인 업무량이었다. 어느 날, 자정이 되도록 일감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야.
정말이지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할 일은 세상에 하나도 없었다. 나의 몸과 영혼보다, 나의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나버리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세상에 없으니까. 하지만 조직 안에서 일하는 한 평가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더 잘해내고 싶은 열망, 더 잘해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죽이는 것이 내겐 몹시도 힘든 일이었다.
어쩌면 너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을 너무 진지하게 여겼기 때문일 수도. 두번째 회사를 그만둘 무렵 나는 심리상담을 받았다. 심리상담사는 나에게 세상일에 대한, 그리고 인생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들에게, 인간관계에 많은 걸 기대한다고.
“민용씨는 어떤 것이 좋으면 전체가 다 좋기를 바라네요. 하나라도 나쁜 부분이 있으면 완전하지 않은 것이고요. 올 굿.”
“네?”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올 굿(All Good)요.”
상담사가 말했다.
“세상에 그런 건 없어요. 그리고 올 굿이어야 굿인 것도 아니고요.”
프리랜서 기자 겸 작가가 된 이후, 나는 이제 받는 페이만큼만 일한다. 그럴 수 있다는 게,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게 프리랜서 생활의 가장 멋진 점이다. 다시는 만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일은 흠 없이, 깔끔하게 처리한다. 하지만 그 이상을 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뭔가를 이루려고 할 필요가 없다. 뭔가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목욕을 끝내고 엄마와 팔짱 끼고 돌아오는 길, 4월의 밤공기가 상쾌했다. 매끈매끈해진 살갗에 닿는 옷감의 감촉이 까슬까슬 기분 좋게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 목욕바구니를 들겠다고 실랑이를 했다. 무겁잖아, 내가 들게. 아니야, 이리 줘. 엄마가 들게.
가로등 불빛은 어두웠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엄마와 목욕을 마치고 이 길을 걸어 돌아왔던 게 백번은 될 것이다.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어둠 속에서 다른 집들 뒤로, 멀리 우리 집의 한쪽 벽이 보였다.
“그래도 이사 가면 그립겠지?”
엄마가 말했다.
“다음번에는 여기 아니고 아파트로 와야 되는데 기분 이상할 것 같지 않아? 네가 집이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까봐, 그게 좀 마음에 걸렸어.”
“아.”
내가 말했다. 그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뭔가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엄마도 그렇게 느꼈는지, 그 침묵을 부자연스럽게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엄마, 난 저 집이 정말 싫었어. 그러니까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팔짱을 끼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정말 모르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4
체육 교사 임선혜 선생님이 보낸 메일은 용량이 엄청났다. 카테고리별로 만든 여섯개의 폴더 안에 관련 기사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나는 열흘에 걸쳐 태블릿 화면으로 백여개의 흐릿한 기사를 읽었다. 스캔해서 자른 이미지였는데, 지난 수십년간 학보에 실렸던, 그러니까 그 시절 학생들이 직접 작성한 기사들이었다. 학내 사건을 드라이하게 취재해서 쓴 스트레이트 기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직접 쓴 칼럼이나 기고문이 많았다. 아무래도 그런 글들에 학생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기 마련이었다. 졸업해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사람의 특별기고도 있었다. 오래된 기사일수록 상태가 흐릿했고, 세로쓰기인 데다 한자가 섞여 있어 읽기가 어려웠다. 그런 것들은 이미지 파일을 여는 순간 으악, 소리가 나왔다.
나는 책상에 태블릿과 노트북을 나란히 두고 작업했다. 태블릿으로 기사들을 하나하나 띄워놓고, 노트북에 한글로 타이핑하는 작업부터 했다.
뜻밖에도 현섭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현섭은 한자를 잘 알았고, 그 당시 가장 필요한 게 바로 한자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모르는 한자는 인터넷 사전 검색창에 똑같이 마우스로 그리면 알아낼 수 있었지만, 스캔본의 해상도가 낮은 데다 복잡한 획의 한자는 검지손가락으로 꾹 누른 듯 뭉개져 있어 따라 그릴 수도 없었다. 그럴 때는 한자의 모양과 문맥을 고려해 이리저리 궁리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틀이 지나도 도무지 무슨 글자인지 오리무중인 한자도 있었는데 갑자기 현섭이 전화를 걸어와 “나 알아냈어!” 소리치기도 했다.
한번은 우리 집에 와서 샤워를 하던 현섭이 갑자기 문을 1센티미터가량 연 다음 문틈으로 한자를 말하기도 했다.
“이야, 나 오늘 아르키메데스의 기분을 체험했어.”
나중에 현섭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눈알이 아프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읽는 재미가 있었다. 글에 학생들의 육성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풍속화를 한장 한장 넘기듯, 그 무렵 학생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지냈는지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끔 관찰력이 예리하고 글솜씨가 무척 뛰어나서 읽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재치있고 활달한 글을 만나기도 했다. 이런 글을 쓴 사람은 이후로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현직 교사로 일하고 있을까? 이후로는 글을 쓰지 않았을까?
까만 글자를 읽어가다보면 서서히 어떤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가령 오르간 연주실에 몇 안 되는 제대로 소리 나는 오르간을 차지하기 위해, 새벽 첫차에서 내려 경쟁하듯 흙길을 올라가는 학생들의 뒷모습. 나는 남극 생활 체험기를 읽거나 소도시 마을의 문화사에 대한 기록을 읽는 것처럼 어느 정도는 탐구하는 자세로 그 글들을 읽었다.
너무 몰입하지 마. 바로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기로 한 거잖아. 조금 우려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 일을 얼른 쳐내고, 다른 일로 넘어가야 해. 청첩장을 돌릴 때 밥도 사야 하고, 한복도 맞춰야 하고, 돈 들어갈 데가 아직도 많아. 이럴 때가 아니야.
오랜만에 찾아온 감정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나 자신도 놀라웠다.
무엇 때문일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이러는 거야?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이 친절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사의 내용들이, 얼굴도 모르지만 과거 이 글을 썼던 스무살 스물한살 청년들이 마음에 들어서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의 열정은 결혼을 앞둔 모종의 불안감과 관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 앞에서는 한치의 의심도 없다는 듯 말했지만 길에서 유아차를 밀고 가는 여자들의 지친 얼굴을 볼 때면 그늘 속으로 들어선 것처럼 문득 마음이 어두워졌다.
앞으로의 삶이 끝없는 공 굴리기처럼 여겨져 암담할 때도 있었다. 이 공을 굴리다가 저 공으로 갈아타고, 또 다음 공으로 갈아타고…… 그게 전부일까? 그게 전부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게 전부야. 공을 갈아타며 계속해서 굴리는 것만도 쉽지 않은 일이고, 사실 엄청난 일이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능력이 있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말귀도 잘 알아듣는다. 센스도 있다. 센스. 그건 정말 습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내게는 그게 있다.
반세기에 걸친 기사들을 읽고 있으려니, 세상이 달라지는 게, 그 변화가 확연히 눈에 보였다. 영상을 빨리 돌리는 것 같았다. 나는 한번도 교육대학에 대해서, 교육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인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랬기에 더 흥미로웠다.
학교 측에서 보내온 카테고리에는 ‘민주화운동’도 있었다. 투쟁사는 꼭 포함시켰으면 한다고, 그날 교수는 말했었다.
“괜찮겠지요, 처장님?”
교무처장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래요. 학생들이 알아야지.”
“문제없겠죠?”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폴더 안에는 학내 민주화와 관련된 기사들이 많았다.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출신 어용 총장이 임명되면서 학내 분위기가 엄혹해졌다. 서클활동은 완전히 금지되어 길이 막혔고, 캠퍼스 안에 교관들이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건물 안에서, 식당에서, 수시로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아 소지품을 검사했다. 사회과학 서적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벌점을 받고 굴욕적인 반성문을 써서 제출해야 했다. 그럼에도 간간이 캠퍼스 안팎에서 소규모 시위가 열렸는데 십분도 안 되어 제압되고 참가한 학생들은 중징계를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 학생이 학교 건물 옥상에서 투신해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났다. 1987년이었다.
이 죽음이 불씨가 되어 교내 투쟁이 다시 거세졌다. 시대 전체가 임계점을 맞았던 듯, 곧이어 6월항쟁이 일어나 전국 도시의 거리가 들끓었다.
대통령직선제를 담은 역사적인 개헌이 진행되는 동안, 학교에서도 어용 총장이 물러나고 총장 선거 역시 직선제로 바뀌었다. 몇달 뒤 학보에는 그녀를 추모하는 특집 기사가 실렸다. 거기 그녀의 일기장 일부가 실려 있었다. 일기에서 그녀는 예비교육자로서의 양심,을 말하고 있었다. 양심. 오랜만에 보는 단어였다. 그녀의 집은 서산이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동생이 둘 있었다. 서클활동이 완전히 불가능해지면서, 그녀는 학교 밖에서 운동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계속 운동을 하다가는 학교에서 쫓겨날 수 있었다. 졸업장을 받지 못한다는 건, 초등 교사가 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한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일기에는 교생실습 때 만난 학생들의 총총한 눈빛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60명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던 순간 전류처럼 온몸에 흐르던 찌르르함에 대한 이야기. 이 암흑기에 침묵한 사람이 어떻게 교단에 서서 학생들의 눈을 마주 볼 수 있겠느냐고 그녀는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묻고 있었다. 교육자란 옳은 걸 옳다고 가르치고, 그른 걸 그르다고 가르치는 사람들 아니냐고. 그러면서도 그녀는 ‘불쌍한 어린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일생을 바칠 수만 있다면 정말로 행복하겠다고 썼다.
흐릿한 화질의 글씨를 한자 한자 읽어나가다가, 나 역시 일기 속 그녀처럼 찌르르함을 느꼈다. 눈꺼풀 안쪽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고였다. 이 사람은 가르치는 일을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했구나.
그녀의 이름은 최영희였다.
나는 언론사에서 근무할 때 자살 관련 취재를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목숨을 끊지만, 그중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다음 이유는 우울증이었는데, 우울증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비롯한 경우가 많았다.
그날 저녁, 나는 밥을 먹으며 현섭에게 말했다.
“이런 이유로도 사람이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 이 시기 기사를 보면 죄다 가치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불과 삼십년 전인데 그때는 사람들이 그런 걸 고민했다는 게 참 믿기지가 않는다.”
“예전에는 그런 일이 많았잖아. 학생들이 항의의 뜻으로 많이 자살했잖아. 이제 사람들이 그 정도로 비장해질 필요는 없으니까 다행이지.”
현섭의 말이 꼭 나를 위로 밀어 올려주는 것 같았다. 가끔 현섭이 이런 말을 할 때, 그에게는 내게 없는 균형감각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에 들고 있던 컵의 무게를 느끼고 나는 컵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사람들은 보통 절망감에 사로잡혀 자살한다고, 나는 현섭에게 말했다.
“상황이 더 나아질 리가 없다,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대. 터널 비전이라고 하잖아. 터널 속에 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극도로 좁아져서 주변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저 끝에 있는 빛만 보인대. 그게 죽음인 거고. 이 사람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현섭은 그 말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같았다.
“그 사람에겐 그 시대가 터널이었던 거 아닐까.”
그가 말했다.
“그럴지도.”
확신 없이, 나는 대답했다.
늦은 밤, 나는 구글에 들어가 최영희 열사를 검색해보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그녀의 더 많은 일기들이 갈무리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훨씬 연약하고, 번민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투쟁하지 않고 지내는 동안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위선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비겁하고 또 비겁하다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일기를 읽으며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아주 가까이 느꼈다. 그녀가 쓴 문장 하나하나를, 그 생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다. 뭔가에 사로잡혀 있는 그 문장들을 읽으면서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릴 때 그녀는 스물한살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죽은 뒤 몇달 지나지 않아 세상이 크게 바뀔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 점이 나는 못내 안타까웠다.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평생 교육자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는 분명 훌륭한 스승이 되었을 것이고, 많은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었을 텐데. 그게 그녀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나는 현섭이 한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 시대가 그녀에게는 터널이었다는 말. 그 시대가 터널이었다면, 그녀는 터널이 끝나는 지점을 조금이나마 앞당긴 것일까.
그 전시회 일은 내게 특별했다. 특별하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결국 못 이기는 척, 그 특별함을 존중하기로 했다.
나는 참고가 될까 싶어 정동에 있는 서울교육박물관에도 찾아가보았다. 교육과 관련된 국내 최대의 상설전시를 관람했지만,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당위적인 설명만 붙어 있을 뿐 서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곳에 왔다면 아무렇지 않게, 약간의 즐거움과 감동도 느끼면서 전시를 둘러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내 눈에는 서로 연관 없는 한 무더기의 전시품들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교수 덕분에 알게 된 것들이었다. 비록 일상적으로 관찰하고 배울 수 있는 동료는 없지만, 프리랜서는 이처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 완성된 글은 A4 10매 분량이었다. 나는 ‘학내 민주화운동’ 꼭지의 3분의 2를 최영희 열사에게 할애했다. 그녀의 죽음은 독재정권에 맞선 저항이었으며 그 바탕에는 예비 교육자로서 괴로워하던 양심이 있었다고 썼다. 나는 그녀의 후배들이, 그녀의 동문들이 그녀를 기억했으면 했다. 이십대 초반의 그녀가 속해 있던, 사랑해 마지않았던 공동체의 사람들 안에 그녀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주제넘은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녀를 위해 내가 그 일을 해줄 수 있기를 바랐다.
작업물을 보내고 나서, 나는 교수로부터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았다. 그는 내가 쓴 글이 마음에 든다면서, 전시회는 일반인들에게도 오픈될 예정이니 꼭 한번 찾아오라고 했다.
답장을 보내면서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작업을 했는지 이 사람들은 모르겠지, 하고. 두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현섭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오프닝 날 오후, 나는 지하철을 타고 혼자서 전시를 보러 갔었다. 교수에게 연락할까 생각했지만 하지 않았다. 박물관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옷을 차려입은 나이 든 사람들과 재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 틈에 섞여서 나는 천천히 전시를 관람했다. 어디에도 내 이름은 쓰여 있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이 작업이 오랫동안 나의 자부가 되리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그곳을 나오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잘했어.
마침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