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마지막 소원
고 이이효재 선생을 추모하며
강인순 姜仁順
경남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전)한국여성학회 이사. 공저서로 『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 2』 『여성의 시민적 권리와 사회정책』 『나는 대한민국 경남여성』 등이 있음.
insoon@kyungnam.ac.kr
내가 이이효재(李李效再, 1924~2020) 선생님을 만난 것은 1973년이었다. 짙은 회색 모직정장을 입고 회색 털양말을 신고 줄 달린 안경을 목에 걸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셨는데, 그 강의실에서 처음 뵌 선생님은 키가 크고 서양 사람같이 큰 코를 가진 얼굴이었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 당시 내가 다닌 대학의 경우, 문리대학은 과별이 아닌 계열별로 신입생을 모집했고 그렇게 입학한 학생을 상담하거나 가르치기 위한 지도교수가 있었다. 인문사회계열 1학년 7반 지도교수가 선생님이었고 나는 바로 그 7반이었다.
1970년대는 긴급조치 때문에 휴강이 잦았지만 강의시간에는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이 힘을 주어 강조하셨던 “지역사회 주인은 여성이다”라는 말은 잊히지 않아서 훗날 나도 내 수업시간에 자주 인용하며 강조했다. 선생님이 고향인 진해에 ‘기적의 도서관’을 유치하고 난 후 89세 때 지역방송국과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이 화두는 선생님이 사회학 교수가 된 동기와 무관하지 않다.
내가 크면 여성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어요. 해방이 되어도 우리 여성들의 삶이 전혀 나아지지 않으니까 내 생각이 내 삶으로 이렇게 나타난 것 같아요. (…) 유학 중 분단된 조국에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생각을 해보니, 미국에서 여성들이 사회적 역할을 잘하고 있더라고요. 지역사회를 위한 역할이라든지, 유권자 활동이라든지. 그런 걸 보면서 민주주의라는 것도 결국 여성들이 사회참여를 해서 민주시민으로 당당하게 국민 노릇, 시민 노릇을 해야 되는가보다, 사회참여를 통해서 여성이 민주시민 노릇을 하려면 먼저 가정이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가 하게 되고, 귀국 후 가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성의 사회참여를 주장하게 되고 이렇게 사회학 교수 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 내 개인적인 연구와 더불어 진해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정책적으로 제안하기 위한 연구를 하다가 결국 우리 아이들이 아무런 문화적 혜택을 못 받고, 그런 데서 기적의 도서관을 세우게 된 것이지요.(「한국 여성학의 큰어머니 이이효재 선생」, MBC경남 2012)
가부장적 가족구조에서 여성과 가족에 대한 선생님의 열정과 학문적 관심은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적 활동으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재직 중엔 사회학자요 여성해방운동가요 평화통일운동가로서, 정년퇴임 후엔 지역사회활동가로서 평생을 보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선생님은 미국의 주류 사회학 이론인 구조기능주의가 한창일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타국에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박사학위를 뒤로하고 귀국을 서둘렀다고 한다. 귀국 후 이화여대에 교수로 부임했다가 잠깐 서울여대에 머물렀고, 다시 이화여대로 돌아와 1980년대 초 해직 시절을 거쳐 이화여대에서 정년을 마쳤다.
이화여대 교수 시절인 1966년, 선생님은 이스라엘의 노총 초청으로 3개월간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운동을 시찰했다. 이스라엘의 국가재건설 과정을 직접 경험한 선생님은 그곳의 협동조합운동에 감동을 받아 이화여대에 ‘여성자원개발연구소’를 창설했다. 그리고 한 이화여대 졸업생이 거주하는 화곡동에서 지역사회 여성을 대상으로 협동조합운동을 펼쳤다. 이는 생활공동체가 사회 건설 모델로서 실현 가능한지 실험해본 것이었는데, 선생님의 관심이 연구에서 실천 쪽으로 기운 큰 변화를 보여주는 일이다. 이때 화두가 그 유명한 ‘지역사회 주인은 여성이다’였다.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가 바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험은 유신체제의 등장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실험은 오늘날 하나의 대안 사회경제로 떠오른 협동조합이나 마을 만들기와 비슷한데, 선생님은 몇십년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 같고 이 혜안에는 지속적인 사회개혁을 통한 진보에 대한 생각이 깃들어 있었던 것 같다. 협동조합에 대한 선생님의 열정은 1980년대 ‘여성민우회’ 생활협동조합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1974년에 선생님은 미국 테네시주에 있는 피스크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한국사회의 가족’이라는 강의를 하게 되었다. 이때 선생님이 접한 ‘흑인 사회학’(Black sociology)이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실천에 나서는 데, 그리고 ‘분단시대 사회학’을 제기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피스크대학 교수들은 백인 중심의 미국 주류 사회학(White sociology)에 대항해 ‘검은 것이 아름답다’라며 인종해방을 위한 흑인 사회학을 주창했는데, 선생님은 이들의 학문적 주체성에 감동함과 동시에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이들이 ‘흑인 사회학은 인종해방’이라고 주장하며 미국사회의 당면 과제인 인종차별 문제를 흑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인종해방을 도모했듯이, 선생님도 우리 시대의 사회학과 민족통일을 연결하게 되었다. 분단 문제를 ‘민중의 한’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1960 ~70년대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였고, 경제적으로는 수출 위주의 산업화와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급성장을 꾀했다. 반공을 국시로 한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노동기본권은 계속 유보되었고 저임금 노동자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저곡가 정책이 시행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노동자와 농민은 일한 댓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 노동자 전태일은 분신을 택했으며,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권 보장과 사회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상황은 선생님의 연구방법론적 인식도 변화시켰다. 체제 유지를 핵심으로 하는 미국의 구조기능주의 이론이 한국사회의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주류 사회학의 이론과 방법론에 대해 지속적인 회의를 품게 된 것이다. 시대정신에 충실한 학자로서 군사독재와 분단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적 인식은 사회진보를 위한 사회학, 즉 인간해방의 한국 사회학을 모색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분단시대의 사회학’이 ‘여성’, ‘민족의 통일’, ‘민중’이라는 시대적 키워드와 이어져서 연구와 실천이 병행된 것도 이 때문이다.
민중과 통일에 대한 사회학적 문제제기에 이른 결정적인 계기는 1980년대에 있었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 ‘레드 콤플렉스’에 따른 피해로 인한 가족의 고통을 목격하면서다. 선생님은 1983년 6월 30일 생방송된 KBS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나 분단 가족의 고통을 그린 소설 등에서 이산가족과 분단가족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가족 찾기를 보면서, 그리고 레드 콤플렉스로 인한 가족의 고통을 들으면서 그것이 시대의 아픔이라고 느꼈다. 이때 화두가 된 것이 ‘한’인데, ‘가족을 찾지 못한 한’, 남편을 잃어 가장이 된 ‘여성들의 한’, 납북으로 인해 고통받는 가족들의 ‘레드 콤플렉스의 한’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풀어내야 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사회적 사실로서 ‘여성 민중의 한’을 중요시했는데,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해내기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남편과 자식, 부모, 형제자매를 잃은 ‘한’을 분석의 도구로 삼은 것이 ‘분단시대의 사회학’이다. 분단이라는 현실에서 출발해 가부장사회에서의 ‘여성과 가족 문제’에 다다른 것이다.
흑인 사회학에서 영향을 받은 분단시대의 사회학은 ‘인간해방을 위한 사회학’이었다. ‘민족’이라는 말은 민중의 이성과 감정을 혼합시키는 상징으로 쓰였고, ‘한’은 그 민중의 가장 밑바닥에 처한 아낙네들의 행동을 좌우하는 심리적 요인이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권력 아래 삼중 사중으로 착취당해온 여성의 존재, 그리고 분단 때문에 민중이 겪는 ‘한 맺힌 삶’이 비인간화로 이어진다는 문제의식이 선생님 학문의 바탕이었는데, 따라서 분단시대의 사회학은 곧 ‘해방의 사회학’ ‘분단시대의 여성학’ ‘분단시대의 가족사회학’으로 바꿔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비주류인 ‘여성’ 사회학자가 아니면, 그리고 사회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통해 사회적 진보를 도모하는 사회학자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전쟁의 아픔과 이념 갈등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 많았음에도 대부분의 사회학자가 이를 분단 문제에 따른 ‘사회적 사실’로 파악하고 연구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 아닐까.
분단시대의 사회학이 인간해방의 사회학이어야 한다는 뜻은 실천적 삶으로 이어진다. 선생님이 인생의 마지막 길목에서 나눈 앞서의 인터뷰에는 이를 잘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제 마지막 소원이 있어요.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통일 이루는 것. 한반도 분단의 질곡을 넘어서 평화스럽게 이웃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우리 민족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죠. 그게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지만, 내 삶이 그리고 결국 우리 여성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어쨌든 분단을 우리가 극복해야 되잖아요. 그게 어렸을 때부터 내가 바라던 것이에요. 우리 민족, 우리 여성들이 행복하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내 바람이고, 삶의 어떤 희망이라고 할까? 부족하나마 그런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 지금까지의 열정으로 나타난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소원으로 평화통일, 그리고 여성 민중의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말한 그 열정이 저 운동적 인생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여성 민중의 한을 풀기 위해서 선생님은 무엇보다 평등하고 평화로운 가족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사회개혁과 통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는 가족을 사회의 가장 원초적인 공동체 형태로 본 것이고, 가족공동체를 자율적인 사회변혁의 주체로 본 것이다.
한편 1980년 전두환정권의 등장과 함께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항쟁의 진압과 함께 ‘지식인선언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선생님이 이화여대에서 해직당한 것도 이 시기다. 해직 기간에 선생님은 해직교수협의회를 조직해 활동했으며,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활동도 했고 한국여성민우회 창립에 앞장섰으며 한국여성노동자회의 이사장을 역임하고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조직될 당시 공동 대표도 맡았다. 그러나 선생님이 무엇보다 독자적으로 한 일로 꼽는 것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활동이다.
1990년에 선생님은 정대협을 창립한 후, 1992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아시아연대회의를 조직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문제를 넘어 전쟁과 여성 인권의 문제로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 간 연대 활동 및 국제적 연대 활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UN인권위원회, 여성차별철폐위원회, ILO전문가위원회 등의 국제기구와의 연대를 이끌어냈다. 이는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 의회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배경이 되었다. 2000년 12월에는 토오꾜오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전 일왕 히로히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는 여성들의 힘으로 연 민중법정이었는데, 성노예 범죄의 ‘가해국’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1997년 퇴임 후 선생님은 정대협 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후학들과 후배 운동가들에게 자기의 일을 물려주고 낙향하여 정대협 활동을 후원하거나 알리는 역할을 했다. 낙향 후 선생님의 활동은 ‘남북이 화해하여 평화통일을 이루자’는 마지막 소원에 집중되어 있다. 고향인 진해에서는 지역활동가인 ‘효재 할머니’로서 기적의 도서관 유치, 지역여성운동 활동가들의 공부 모임, 도서관 자원봉사, 북한 어린이를 위한 털모자와 장갑 뜨기, 북한 어린이병원 건립 활동 지원 등의 실천을 했다. 또한 여든을 넘은 고령에도 여성 문제의 핵심인 가부장제의 근원을 찾고자 『조선조 사회와 가족』(한울 2003)이라는 책을 펴냈다. 귀천할 때까지 선생님에게서 학문과 실천은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선생님이 평생에 걸쳐 여성과 가족 관련 연구를 하고 여성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실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심성이 있었다. 이러한 인간다움은 선생님의 일상에 배어 있었다. 긴급조치 시대에 사회 민주화를 갈망했던 학생들은 대체로 소위 운동권이었다. 선생님은 운동권 서클에 몸담은 제자들이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댁으로 불러 따듯한 밥이나 칼국수, 수제비 등을 종종 먹였다. 지금도 그 제자들이 모이면 그때 칼국수와 수제비가 참 맛있었다고 얘기한다. 심지어 임신으로 가사노동과 연구를 병행하기 어려웠던 어떤 제자는 선생님 댁에 두세달 머물면서 논문을 쓰기도 했다. 한번은 선생님이 조화순 목사와 함께 여성공동체를 만들려고 한 일이 있었다.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투신해 어렵게 살던 여성들의 노후를 염려한 것이다. 여성공동체를 조성하기 위해 농사짓고 집 지을 땅을 샀는데, 그 땅이 하필 맹지여서 바람대로 쓰지 못한 채 지금도 모처에 그대로 있다. 당시 선생님은 대학에서 대출을 받아 출연을 하셨다고 한다.
어린이에 대한 사랑도 남달라서 앞서 썼듯이 기적의 도서관도 유치하셨고 종종 그곳에 들러 어린이들에게 책도 읽어주셨지만, 유난히 추웠던 어느 초겨울에 선생님은 무엇보다 북한 어린이들의 겨울나기를 걱정하셨다. ‘남한보다 더 추운 북한의 어린이들이 겨울을 잘 날 수 있도록 털모자, 털목도리, 털장갑을 직접 떠서 보내자’라고 하셨다. 나중엔 후원을 해주는 분이 생겼지만 처음엔 선생님이 털실값을 대셨다. 나도 틈만 나면 선생님 댁에 가서 털목도리를 떴는데, 선생님이 힘에 부쳐 병이 났던 기억도 남아 있다.
이처럼 따뜻한 인간다움의 심성이 있는가 하면 김영삼정부 시절 훈장을 거부할 정도로 당차기도 하셨던 선생님은 1924년 11월 14일 늦은 가을, 풍성한 계절에 태어나 2020년 10월 4일 가을이 무르익기 시작할 때 하늘로 돌아가셨다. 평소 선생님은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을 좋아해서 하늘이 맑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종종 하늘을 보고 이 시를 읊조리셨다. 이 시에 쓰인 것처럼 선생님의 생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에 가까웠을까? 선생님이 평생 바라던 평화적으로 통일된 조국, 성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은 아직 오지 못했다. 이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선생님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실천적 삶을 살았다. 학자로서, 운동가로서 많은 상을 받았지만, 상금과 재산은 모두 여성운동 단체에 조건 없이 기부했다. 기부에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았던 것은, 여성운동을 하는 후배들이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는 바람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야말로 선생님은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하늘로 돌아가셨다. “남북이 화해하여 평화통일을 이뤘으면 좋겠다. 욕심을 부리면 통일되는 것을 보고 죽고 싶다”라고 하시던 마지막 소망을 뒤로 한 채로……
아름답게 사시다가 이슬처럼 하늘로 돌아가신 이이효재 선생님, 다시 한번 이름을 불러보면서 선생님이 가신 길을 기억하면서 열심히 뒤따라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