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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장애여성공감 엮음 『시설사회』, 와온 2020

도대체 누구를 위한 시설인가

 

김재형 金宰亨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hyungjk7@kn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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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은 사전적으로 도구, 기계, 장치 등이 설치된 상태 또는 장소를 뜻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시설은 다수의 사람을 공동으로 수용해 관리하는 건물, 기관 등을 지칭하기도 한다. 장애인, 미혼모, 탈가정 청소년, 노숙인, 난민, 환자 등으로 호명되는 사람들이 이러한 시설에 수용되어 관리받는다. 이들에게 시설은 어떠한 의미일까? 우리 대다수는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의 분리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시설에 거주하는 이들은 사적인 삶이 부재한 상태로 살아야만 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은 개인의 일상이 사라진 시공간을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 즉 시설의 중요한 특징으로 봤다.

사적인 시공간이 부재한 삶에는 ‘나 자신’이 존재하기 힘들다. 나를 정의하고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내 행동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과정에 ‘나’는 개입할 수 없고,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관리자인 타인이자 제도이다. 시설은 그 자체로 인간성에 대한 부정이다. 이 책 『시설사회: 시설화된 장소, 저항하는 몸들』은 바로 시설의 이러한 폭력성을 지적한다. 공저자 중 한명인 김순남은 다음과 같이 썼다. “느끼지 못하게, 꿈꾸지 못하게, 관계 맺지 못하게, 에로틱함과 무관하게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 국가가 채택한 시설 정책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국가가 인간됨을 무력화시키는 최고의 전략이자 ‘나는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 ‘나는 누구와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 맺기를 욕망하는가?’를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잔인한 전략이었다.”(42면)

이 책은 장애여성공감의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에서 IL(independent living, 독립생활) 운동의 하나로 2018년부터 시작한 ‘ IL과 젠더 포럼’에 참여한 활동가와 연구자 21명의 글을 모아 만들어졌다. 저자들은 장애인, 미혼모, 탈가정 청소년, 노숙인, 난민, 환자 등 시설화의 대상이 겪는 제도와 사회의 폭력 양상을 묘사하고, 그것의 구조적 원인을 설명하며, 탈시설운동의 경험에 근거한 대안까지 제시한다. 즉 이 책은 단순히 문제를 지적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동안의 탈시설운동 경험을 통하여 탈시설뿐 아니라 ‘탈시설사회’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 책 자체가 이러한 목적의 운동이기도 하다.

이 책의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우리 사회가 시설사회라는 것이다. 평자가 생각하기에 이 책에서 묘사하는 시설사회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인구를 분류하여 문제적 집단을 시설에 수용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고 보편화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는 ‘시설이 자연스러운 사회’다. 특정 집단의 시설 수용을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애 어느 시점엔 노인시설 등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시설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둘째, 시설이 돌봄과 치료가 필요한 집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귀찮고 위험하다고 인식되는 이들을 편의적으로 가두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는 ‘시설을 요구하는 사회’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요긴한 문제의식으로, 특정한 집단에는 시설 바깥과 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는 ‘시설과 같은 사회’라 할 수 있다. 시설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이들의 삶은 시설 바깥에서도 낙인과 차별 그리고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나 자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사회는 시설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탈시설운동은 단순히 시설을 폐쇄하는 것을 넘어서 탈시설사회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또다른 주장이다. 그렇다면 탈시설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사고하기 위해서는 시설을 정당화하는 사회의 정상성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사회에서 각 개인에게 요구하는 ‘정상성’이 너무 경직되어 있으며, 지위와 위치가 다르고 성격도 다양한 개인들에게 일괄적으로 강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정상성에서 벗어난 이들은 문제로 인식되고, 그러면서 낙인과 차별이라는 폭력을 경험하게 되며 긴장이 발생한다. 하지만 사회는 그 긴장 해소의 방법으로 정상성을 문제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시설에 수용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이 수용은 폭력이나 적응의 어려움에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포장되며, 사회는 그들을 수용함으로써 사회적 긴장이 완화되었음에 안도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가족도 아니고 시설도 아닌 제삼의 공간인 사회에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드는 우리 사회의 경직된 인식, 담론, 제도이다. 독립할 능력이 없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시설에 가둬 비가시화한 후 그 안에서 어떠한 삶을 살든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비인간성이 시설을 유지시키는 힘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위한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문제를 외면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 하는 우리 사회의 냉담함이 시설이 존재할 수 있는 배경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들은 탈시설운동의 목표는 시설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담론을 공격하고, 시설 수용의 대상인 이들이 실제로는 독립적이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며, 이를 위한 공간을 우리 사회가 만들어야 함을 주장하는 일이라 말한다. 그들이 시설에 나와서 돌아갈 곳이 마련되어야만 탈시설도 가능한 것이다.

근래 학계에서는 사회의 다양한 집단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문제화되고 배제되며, 시설에 고립되거나 격리되는지에 대한 연구결과들이 점차 쌓이고 있다. 한센인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평자 역시 사회적 배제로 인한 시설화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확장되고 발전되었는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바는 시설은 결코 시설에 수용된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의 인구통제와 사회의 필요, 그리고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해 시설은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발전했다. 그러나 시설의 대상인 이들 역시 인간이며 동료 시민이다. 이 책을 읽고 평자는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소록도라는 시설/섬이 있고, 그 안에서 또다른 한센인들이 자신을 잃고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저자들은 새로운 저항의 현장 경험들을 기록하고 있다. 진은선은 “국가가 수용시설 정책을 옹호하고 시설을 재생산하는 구조에서 장애인은 동료시민으로 살아갈 수 없”(268면)음을 지적하면서, 중요한 것은 “발달장애인과 조력자의 관계에서 당사자의 발언권을 존중하고, 비발달장애인과의 위계를 경계하는 등 긴장을 유지하는 것”(276면)이라고 썼다. 이 책에는 여러 활동가의 새로운 시도와 교훈의 다양한 사례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탈시설사회’가 가능해지기 위해 우리 사회의 정상성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재구조화할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없다는 점은 아쉽다. 하지만 이같은 책들이 계속 나오고 새로운 대안적 공간들이 더 많이 시도되며,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질 때 탈시설사회가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몫이고, 그러한 사회의 도래를 위하여 여러분이 먼저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