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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뻐라짓 뽀무 외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삶창 2020
민낯 기계 도시, 이주노동자의 낮은 합창
이세기 李世起
시인 halmibburi@hanmail.net
이주노동자의 합동적 노고가 깃든 시 앤솔러지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모헌 까르끼·이기주 옮김, 이하 『기계 도시』)가 여간 반갑지 않다. 한국에서 일하는 네팔 이주노동자 35인의 시를 묶은 시집이다. 시집을 펼치는 순간 기억 속에서 왈칵 외침이 떠오른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때리지 말고 욕하지 말라”. 1995년 네팔에서 온 산업연수생 13명이 명동성당에서 온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노예제도라 일컬어지던 산업연수제 철폐를 요구하는 농성을 했다. 저임금, 임금 강제 적립, 장시간 노동, 사업장 내 폭행, 송출기관의 횡포 등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제도로 발생한 이주노동자의 노동과 인권 문제를 세상에 알렸다. ‘코리아 드림’을 좇았던 장밋빛 꿈의 역설이었다.
그후 한국은 달라졌는가. 애면글면했지만 이주노동 문제의 해결만큼은 더딘 답보상태다. 거기에는 이주노동의 단기계약도 한몫하지만, 이상하리만큼 한국사회는 인종과 노동이 결부된 문제에 있어 아예 맥을 못 쓴다. 여전히 한국 내 아시아인 이주노동 현장은 배제와 차별의 온상지다. 한국의 노동인권은 이주노동자가 겪는 인종차별에서 딱 멈춘다.
『기계 도시』에는 이주노동자의 노동과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모든 이주는 떠나온 자의 꿈과 남겨진 자의 희망이기에 시편 곳곳 이주노동의 깨어 있는 육성은 종요롭다. 에베레스트산을 닮은 힘찬 융기가 옹골차다. 다성의 목소리로 터져 나온 발화는 한국사회가 망각하고 있는 노동현실을 호되게 소환한다. “죽음의 계약서에 서명하고/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고향을 떠나 사람을 사고파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전쟁터” 같은 노동은 뻔한 감상적인 동정과 연민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꿈을 찾아와 “동굴 같은 배 안에서 숨을 헐떡이”며(수레스싱 썸바항페 「나는 배를 만들고 있다」) 극한 노동에 내몰리지만 돌아오는 것은 인간 노동을 욕되게 하는 수모와 폭력이다. “새꺄, 이리와”(선저여 꺼우짜 「머던의 넋두리」) 같은 모멸 찬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그들이 “신”이라고 여기는 한국인 “사장님”(러메스 사연 「고용」)의 폭언은 이제 부끄럽게도 한국산 보편어가 되었다. 어디 이뿐이랴, 가혹한 자본은 자비가 없다. “미치광이가 되어”(끄리스나 끼라뜨 「욕망」), “땀을 흘린 대가로 /왜 무시를 당해야 하나요?” “당신처럼 감각을 가진 사람”(니르거라즈 라이 「슈퍼 기계의 한탄」)이라고 항변해도 모르쇠로 일관할 뿐. “꿈들이 삶을 죽이는 것이다”(수레스싱 썸바항페 「꿈」)라는 절규는 전태일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이런 속물적인 반응은 우리 자신이 키워온 자화상이 아닌가.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이 인정하는 민주주의를 성취한 한국사회의 낯부끄러운 현실이다. 죽음을 상상하기(딜립 반떠와 「내일」)에 이르면 이들의 시는 지옥선에 함께 탄 이 시대 우리 모두를 향한 쓸쓸한 만가(輓歌)다. 자살하고, 성폭행을 당하는 일(디알 네우빠네 「외국에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편지」)이 비일비재하다. 오죽하면 죽음이랴. 왜 죽었는지 묻고 따지는 일 따위가 무용하다. 죽음에는 관용이 없다. 사망 보고는 간단하고 망자의 짐과 한줌의 재를 보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죽음을 걸고 월경하는 모든 이주노동자는 알고 보면 한 어머니의 자식이자 아버지의 아들이고 애인이자 친구다. 그들 각자가 거대한 히말라야를 품은 숭고한 인간의 추락인 셈이다. 뼈아픈 서사가 아닐 수 없다. “글을 썼더라면 에베레스트산만큼이나 쓸 수 있었을 것이다”(순덜 가울레 「사진이 스스로 말한다」)라고 울부짖는 밑바닥에는 아시아의 ‘국가주의’에 갇힌 슬픈 이주노동의 그늘이 깔려 있다.
아시아의 거개 나라가 그렇듯, 정치·경제의 불안정은 많은 이들을 목숨을 건 이주노동으로 내몬다. 세계경제의 하위체계 속에 갇힌 희생양이 된다. 벗어날 수 없는 덫이다. 노동과 죽음의 추도는 그저 내 안에 있는 신이 당신 안에 있는 신에게 안부를 전하는 “너머스떼”(어이쏘르여 쉬레스터 「너머스떼!」)일 뿐이다. 기계가 되어 잔혹한 노동을 견딜 때 위로가 되는 것은 달콤한 말이 아니라 기억을 담은 온기 없는 사진(비스누 와글레 「기억의 물결들」)일 뿐, 신이 죽은 시대에 신은 이주노동자의 골방과 작업장에, 지친 육체와 영혼에, 좌절과 절망과 죽음에 깃들어 있다. 그러니 『기계 도시』는 기계를 자처한 물신이 된 자의 노래다.
앤솔러지의 시 속에는 ‘병든 한국사회’에 새로운 구원을 요구하는 고갱이가 숨 쉰다. 단순히 노동이 자본에 순응하고 패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성찰의 치열함은 한국사회의 민낯을 날카롭게 포획하고 응시한다. “기계와 같이 놀다가/어느 사이/나도 기계가 되어버렸구나”(서로즈 서르버하라 「기계」). “로봇을 만드는 나라에서”(딜립 반떠와 「나」) “슈퍼 기계가 되어서 움직이고 있”(니르거라즈 라이 「슈퍼 기계의 한탄」)는 기계로 전락한 무의식의 굴종을 질타하매, 그것은 비단 이주노동자의 한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갱신과 망각의 지점을 일깨운다.
한국사회에서 아시아 노동자는 값싼 노동력일 뿐 ‘말하는 자’는 추방된다. 자유로운 노동권을 옥죄는 고용허가제는 미등록자를 양산한다. 사업장에서 ‘쫓겨난 불온’은 언제든지 ‘토끼몰이식’ 표적의 대상이 된다. 쫓기듯 살아야 하는 벌거벗은 이주노동자의 영혼은 늘 불안하다. 우리는 이러한 추적 단속에서 아시아 경제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만나지만, 이는 도리어 아시아 만국의 노동자에게는 좌절과 실패를 지루하게 견디는 ‘순치(馴致)의 시간’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이주노동이 경제주의를 넘어 ‘불온한 정치성’을 띠는 것은 필연이다. 동시에 그것은 아시아 근대성에 대한 항거를 포함한다. 네팔을 포함하여 방글라데시, 몽골, 미얀마, 베트남,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필리핀, 캄보디아, 타이 등에서 온 이주노동자의 노동은 정치성과 결합한다. 그러기에 이 앤솔러지는 아시아 이주노동의 삶과 지향을 시의 언어로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기계 도시』의 낮은 합창은 히말라야 봉우리보다 더 높고 고귀하다. 시편을 읽다보면 서늘한 빙벽처럼 에베레스트산의 눈물과 용솟음치는 불온한 상상력과 만난다. “오늘은 일이 너무 많으니/그 일들을 모두 끝내도록 해라/그리고 내일 죽으렴!”(러메스 사연 「고용」)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슬픈 저음의 메아리가 통절하게 가슴을 친다. 시집은 이주노동자가 겪는 노동과 일상을 통해 일국성을 뛰어넘어 전지구적인 규모로 확산하고 있는 오늘날 이주 문제와 노동의 민낯에 대한 통찰을 전한다. 이주노동자의 생생한 육성을 통한 깊은 울림은 한국 독자에게 꺼지지 않는 ‘아시아의 등불’을 밝히는 헌사에 값한다. 우리의 빈곤한 영혼을 깨우고 일으켜 세우는 데 이만한 문학적 심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