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존 란체스터 『더 월』, 서울문화사 2020
익숙하고도 낯선 벽
복도훈 卜道勳
문학평론가 nomadman@hanmail.net
벽은 다른 소설 장르보다 SF에서 더욱 다양한 의미론적 전통을 지닌 은유이자 사물이다. 벽은 때로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를, 때로는 비참한 현실과 대안적 공간을 가르는 경계였다. 1832년 빠리의 혁명봉기에 등장한 첫 바리케이드, 그리고 68혁명의 바리케이드와 더불어 벽은 혁명의 은유로 한세기 이상 역사와 문학적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일찌감치 예브게니 자먀찐(Yevgeny Zamyatin)의 반(反)유토피아 소설 『우리들』(1927)에서 ‘녹색의 벽’은 빛으로 가득 차 있고 숫자와 규율로 통제된 29세기의 수정궁인 ‘단일제국’과 이에 대항하는 유토피아 공동체 ‘메피’를 가르는 경계이자 문턱으로 등장한 바 있다. 어슐러 르 귄(Ursula K. Le Guin)의 유토피아 SF 『빼앗긴 자들』(1974)에서 ‘벽’은 물리적 경계는 아니지만, 아나키 유토피아 행성 아나레스와 자본주의 행성 우라스가 서로에 대한 고립을 강화하는 엔트로피적인 은유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자먀찐의 영구혁명, 르 귄의 아나키즘 등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말소되다시피 한 21세기에서 ‘벽’ 또한 ‘그 너머’의 대안적 세계를 지시하는 기능을 거의 상실한 것만 같다.
영국의 소설가 존 란체스터(John Lanchester)의 근미래 디스토피아 소설 『더 월』(The Wall, 2019, 서현정 옮김)에 등장하는, 길이 1만 킬로미터의 벽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벽 위의 삶은, 소설 초반부의 생생한 묘사가 드러내듯이, 지극히 춥다. “그렇지만 바다, 하늘, 바람, 추위 또한 존재한다. 바다, 하늘, 바람, 추위는 항상 존재하고 물론 콘크리트도 존재하기에 때로는 콘크리트바다하늘바람추위가 존재한다. 그 모든 게 한 덩어리로, 단일체로 뭉쳐 주먹을 날리듯 콘크리트바다하늘바람추위가 몰아친다.”(19면) 심지어 그것은 “내 안에서 내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한다”(23면)는 점에서 가히 존재론적이다. 이 추위는 어디서 온 것일까?
금융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작가의 전작 『캐피탈』(한국어판 서울문화사 2019)을 잠시 일별할 필요가 있다. 리얼리즘적 필치로 부동산 가격 상승을 꿈꿨던 이들의 천태만상을 묘사한 『캐피탈』의 상상력 밑절미에는 금융버블의 붕괴가 있었다. 말하자면 『캐피탈』에서 감지되는 금융버블에의 열기가 푹 식어버린 곳에 『더 월』의 도저한 추위가 들어선 것이다. 이 추위는 주인공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석유(가스) 시추 시설 안에서 불을 그리워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과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더 월』의 추위는 탄소 연료의 부재를 환기하는 기후변화의 상징인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금융버블의 리얼리즘적 열기가 가라앉은 허방에 깎아지른 듯 차가운 알레고리의 벽을 세운다. 알레고리는 독자가 저마다의 해석을 넣으면 의미가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기호다. 『더 월』의 벽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자국 요새화를 의미하는 브렉시트이자, 브렉시트를 주도한 세대와 이후 세대 간의 단절이며, 도널드 트럼프가 “크고, 강력하고, 철통같고, 아름답다”라고 말한 미국-멕시코의 장벽이기도 하겠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국립 해안 방어벽’은 해수면 상승과 기후난민의 ‘침탈’을 막는다는 점에서 인류세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더 월』은 ‘벽’ ‘상대’ ‘바다’ 3부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과 줄거리는 간단한 편이지만, 다소 불만족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다. 1부에서 ‘벽’ 위에서의 주인공의 단조로운 삶은 2부 후반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이 부분이 소설의 절반을 훌쩍 넘긴다. 주인공 일행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난민이 되어 바다에서 표류하는 3부가 그나마 서사적으로 흥미를 돋우지만, “모든 게 잘되는” “이야기”(309~10면)로 결말을 맺으려는 방식은 디스토피아나 아포칼립스 서사의 끝에 희망(‘새 하늘 새 땅’)을 새기려는 전형적인 강박에 슬쩍 굴복한 것 같다. 줄거리를 더 들여다보겠다.
드론과 로봇이 일을 하고, 저마다의 집에 도우미를 두며, 누구도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 ‘대격변’(Change) 이후의 근미래 영국에서 남녀 불문하고 모든 젊은이는 벽의 경계병으로 2년을 복무해야 한다. 자국민과 난민을 분별하는 생체 인식 ID칩을 신체에 이식한 젊은이들은 경계병으로 복무하되, 아이를 낳는 ‘번식자’를 선택하면 좀더 나은 조건에서 복무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이 소설에서 ‘상대’는 ‘Others’의 역어이지만, 벽 위의 ‘우리’와 구분되는 ‘타자’나 ‘그들’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겠다)로 명명되는 난민의 침탈을 막지 못하면 난민과 마찬가지로 바다로 추방된다. 카프카적인 이름(요셉 K)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조셉 카바나는 여느 경계병처럼 임무를 수행하다가 벽을 넘어온 난민을 막지 못하고 동료 및 애인과 함께 바다로 추방되어 표류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어느 섬의 무풍지대에서 뗏목난민으로 살아가던 ‘상대(그들)’를 만나 “새로 ‘우리’가 되는”(226면) 삶을 살아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또다른 ‘상대’인 해적의 습격을 받게 되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애인과 함께 또다시 표류하다가 가스(석유) 시추 시설의 정체불명 노인에게 구출되어 함께 산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국민이 난민이 되고, ‘우리’가 ‘타자’로 전락하는 역지사지의 감각은 설득력 있고 실감난다. 그럼에도 『더 월』은 세계구축이나 비전, 문체 면에서 J. G. 밸러드(Ballard)의 『물에 잠긴 세계』(1962),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로드』(2006), 파올로 바치갈루피(Paolo Bacigalupi)의 『와인드업 걸』(2009)이 도달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수다스러운 일인칭 화법은 경험과 시야의 폭을 다소 좁히고, 작중인물은 주인공의 보조수단으로 기능하는 듯하며, 서사는 어딘지 익숙한 토포스를 답습했다고나 할까.
2020년을 사는 우리는 이미 도처에서 적과 동지를, 국민과 난민을 가르는 높고 길며 튼튼한 벽과 감시자들을 만나고 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2011~19)에서 나이트 워치가 경계 서는 벽, 만화 「진격의 거인」(2009~연재 중)에서 식인 거인들을 막으며 심지어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격상된 삼중의 벽, 영화 「월드워 Z」(2013)에서 좀비 떼를 막는 이스라엘의 벽 모두 벽 이편의 세계를 안전한 요새로, 저편의 세계를 위험한 야만으로 분리한다. 마치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동서양의 제국이 저마다의 긴 장벽을 세우던 중세로 회귀한 꼴이다(「왕좌의 게임」과 「진격의 거인」의 배경은 중세다). 『더 월』은 이러한 중세적 토포스에 기후변화의 원소를 더했다는 데서, 최근 부상하는 기후소설(Climate Fiction, Cli- Fi)의 적실한 예다.
코로나19가 시작된 지 한해가 다 되어가고, 기후변화를 고스란히 체감하는 2020년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류세적인 현실을 한국문학과 관련지어 숙고하는 일은 기이할 정도로 (아직까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런 것일까. 기후변화 안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소설을 논평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듯 자연스럽지 않고 익숙한 듯 낯설다. 두 제곱된 이러한 감각을 한국문학에서 발견하는 일이 그리 요원하지만은 않으리라. 그런 면에서 『더 월』이 우리에게 줄 교훈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