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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신동엽기념사업회 엮음 『다시 새로워지는 신동엽』, 삶창 2020

신동엽을 ‘기념’하는 행위로서의 글쓰기

 

 

장은영 張恩暎

문학평론가, 조선대 교수 pome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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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은 작고한 문인이 남긴 빈자리에서 그의 흔적을 만나는 현장이다. 빛바랜 원고 뭉치와 필기도구, 희귀본이 된 초판이나 흐릿한 사진 등에 둘러싸인 관람자는 작품을 읽는 행위에서 얻을 수 없는 과거를 체험하게 된다. 관람자가 작가의 삶을 상상하는 동안 작가의 시간이 관람자의 현재로 밀려들어 오면 문학관은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통합적인 현실로 실감하는 장소가 된다.

『다시 새로워지는 신동엽』의 출간 배경을 생각하다보니 문학관을 비롯한 문학제, 학술대회 그리고 문학상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기념사업이 목적하는 ‘기념’의 의미를 묻게 되었다.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은 기념비가 망각의 심연을 넘는 가교이자 망각의 심연을 나타내는 유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을 응용하면 기념이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수행성(performativity)인 동시에 시간의 간극을 나타내며 역사를 환기하는 말과 행위들이다. 그렇게 보면 여지껏 무심히 지나쳐온 기념사업은 과거와 현재를 접속시키며 과거가 깨어나는 현재를 만드는 실천을 일컫는 말이 아니었을까.

신동엽(申東曄) 기념사업의 일환인 이 책은 시인의 50주기를 맞아 열린 학술 행사의 결과물과 2010년대 이후의 주목할 만한 신동엽 연구를 모았다. 문인과 학자 등 열한명의 공저자는 신동엽 문학의 현재성과 역사성을 교차시키며 미래에의 비전을 그리는 ‘기념’ 행위로서의 글쓰기를 시도한다. 1부가 신동엽 문학의 현재성을 발굴하고 연구 주제와 대상의 범주를 넓힌다면 2부는 대안적 사회를 꿈꾸었던 신동엽과 당시 문학장의 파동을 포착해낸다.

1부에서는 신동엽의 현재성을 탐색하면서 시어 ‘하늘’의 의미를 달리 분석한 두편의 글이 인상적이다. ‘하늘’을 중심으로 한국인의 영성(靈性, spirituality)을 이끌어낸 김형수는 서구적 근대를 가로지르며 신동엽이 추구한 이상적 세계의 알맹이를 토착적 영성이라 보고, 인간을 고립시키는 서구 문명에 맞서 반봉건을 지향하는 영성적 근대에서 신동엽의 현재성을 논한다.(「신동엽의 고독한 길, 영성적 근대」) 그에 따르면 신동엽 시에 나타나는 영성의 본질은 토착사상에 뿌리를 두고 삶 전체를 아우르는 궁극적인 가치로 그 핵심에는 생명이 있다. 외경의 대상인 ‘하늘’과 인간의 앎 너머에 있는 생명을 등가에 두는 김형수는 그것이 절박하게 요청되는 시기라는 점에서 신동엽과 현재를 연결하고자 한다. 탈근대 사회의 실존 상황에서 대두된 범종교적 차원의 영성적 전환이라는 오늘날의 현상을 보더라도 그가 신동엽에게서 발견한 “생명의 모심!”(35면)으로 축약되는 삶의 태도는 우리가 처한 정신사적 결여를 메꾸기 위한 가치임이 분명하다. 다만 영성 자체가 명쾌히 설명될 수 없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김형수가 주장하는 영성적 근대는 다소 선언적인 뉘앙스를 남기기도 한다. 영성적 근대가 어떻게 서구적 근대를 극복하는 전술로 활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각자의 추론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부제가 붙은 조강석의 글은 랑시에르(J. Rancière)나 아감벤(G. Agamben), 바디우(A. Badiou) 등이 펼친 민주주의 담론을 전제로 신동엽의 시를 분석한다.(「신동엽 시의 민주주의 미학 연구」) 통치체제 내에서의 삶을 부정하고 새로운 감각의 질서를 구축하는 신동엽 시의 정치미학적 힘을 돌출시키는 이 글에서 조강석은 ‘하늘’을 현재와 대립되는 역사적 과거나 미래를 향한 추진체로서의 전통이 아니라 차이를 생산하는 공시적 구조라고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이 “공시적 구조가 시를 통해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규정적 판단 없이 무제약적 희망을 품는 것”(107면)이다. 신동엽의 시와 시론을 에두르며 민주주의 미학으로서 희망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무제약적 상상력을 발견하는 이 글은 미학과 정치에 대한 철학적 이론을 반드시 경유해야 하지만 그에 값하는 성과도 보여준다. 정치적·사회적 차원에서 신동엽이 제시한 꿈과 비전의 구체적 의미 해명에 몰두했던 기존 논의의 방향을 틀어 무한 부정과 삶의 재발명을 가능하게 하는 시의 언어 쪽으로 향하게 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2부에는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에 기반한 ‘65년체제’를 기점으로 한국 문학장을 재구성하며 그 안에서 신동엽의 위치를 밝히는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 신동엽과 김수영은 1960년대 참여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나란히 호명되고 있지만 ‘65년체제’에서 그들이 다시금 주목되는 이유는 하상일이 말한 대로 “1960년대 문학은 곧 4월혁명 문학이라는 도그마”(「신동엽과 1960년대」 244면)를 균열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신동엽과 김수영을 매개로 1960년대 한국문학의 또다른 가능성을 톺아보는 2부는 이 도그마의 해체 과정과 더불어 그들이 보여준 대안세계에 집중한다. 여러 논의가 공통적으로 말하듯이 신동엽이 ‘65년체제’에 대항하며 내건 핵심어는 ‘중립’이라는 시어이다. 검열을 피해 ‘중립’을 ‘합창’으로 수정해서 잡지에 실어야 했다는 일화는 그것이 불온한 기표인 동시에 체제를 위협하는 상징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중립’이라는 말을 금지함으로써 그 의미에 대한 상상까지도 차단했던 시대 한복판에서 신동엽은 다시 ‘중립’이라는 말을 살려 쓴 바 있다. 고봉준이 논의한 대로 ‘완충지대’, ‘정전지구’와 계열체를 이루는 ‘중립’은 부정적 문명과 대립하는 대안 세계를 상징하는 기표였기 때문이다.(「1960년대 사회 변화와 현대시의 응전」) 구체적으로 그 이상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민족 문제에 대한 대안적 사유로서 ‘중립화 통일론’(고봉준), 무정부주의 유토피아의 비전을 실현하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민주사회주의(박대현 「‘민주사회주의’의 유령과 중립통일론의 정치학」) 등 조금씩 다른 의견이 나와 있다. 물론 각 의견의 타당성도 차근히 따져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 대안 세계의 가능성‘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그 가능성들이 지금 이곳의 억압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신동엽의 시(「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를 빌려 말하자면 분단체제를 극복하지 못한 “반도”에서는 “평화로운 논밭”을 꿈꾸는 일, 즉 다른 체제를 희망하는 일이 자유로울 리 없다. 민주주의의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무제약적인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중립의 분수”가 “나부끼”지 못한다.

‘다시 새로워지는’이라는 제목의 힘 때문인지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신동엽 연구의 결산이라기보다 새로운 신동엽 연구의 출발점으로 읽힌다. 신동엽의 시를 비롯한 수필, 평론 등의 산문과 시극, 오페레타, 방송대본 등이 논의의 장으로 들어옴으로써 신동엽 문학은 더 많은 이견과 전망이 제출되는 장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예감도 든다. 학술 논문과 비평을 오가는 글쓰기로 채워진 이 책은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에 다소 버거운 대목들도 있지만 이전의 신동엽 연구를 갱신하는 실천의 결과물임은 분명하다. 이 책이 신동엽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고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기념’의 성실한 전형을 실천하고 있다는 말도 끝으로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