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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정록 李楨錄
1964년 충남 홍성 출생.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풋사과의 주름살』 『의자』 『정말』 『어머니학교』 등이 있음. mojiran@hanmail.net
내가 좋다
온천탕 귀퉁이
노인의 왼 어깨에 터를 잡은 초록 문신,
참을 ‘忍’은 漢字인데 ‘내’는 한글로 팠다
문신 뜨는 이도 ‘耐’란 한자는 쓸 줄 몰랐을까
한국과 중국은 이웃이니까 한 글자씩 선린외교하자 했을까
한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면 두 글자의 터울은 몇살일까
등을 밀어드리는 내내 입술 근질거린다 민망하게 터진 웃음의 솔기
얼마나 많은 키득거림이 그의 얼굴을 구석으로 돌려놓은 걸까
혀뿌리에서 솟구치는 끝없는 치욕을 잘디잘게 토막 쳐서
심장 속 칼날에 잘 벼렸을까, 돌아보니
‘忍’은 비누거품에 들고 ‘내’만 훌쩍이고 있다
내는 깡패 아니다
내는 이런 걸 새기고 싶지 않았다
내는 한글도 모른다 내는 한달에 한번 목욕탕 오는 게 좋다
내는 ‘내’ 때문에 웃어줘서 고맙다 몸뚱이가 보물이다
‘내’가 없으면 누가 내를 쳐다보겠나
옷 입고 나가면 내는 다시 쓸쓸한 노인네다
젊은이들이 간혹 밖에서도 내를 알아보고 웃는다
내는 그게 비웃음으로 안 들린다 내는 저녁 같은 사람이다
그늘이 어둠이 되지 않게 나지막이 살아온 사람이다
내는 땅 한평 없는데 ‘LH’사장님이라고 부른다
내는 아이들이 별명을 불러줄 때가 그중 행복하다
‘내’ 할아버지다! 꼬마들이 윗도리를 벗어보라고 보챌 때는
팔뚝만 보여준다 내는 국민할아버지다
와, 알통이다! 내는 매일 팔굽혀펴기 한다.
‘내’가 내를 살린다
내는 ‘내’가 참 좋다
화가 났다
1.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동화책을 읽다가 “화가 났다.”란 구절만 보아도 “화가가 태어났다.”로 읽었다. 이장 육년, 준공무원인 아버지는 구급공무원 시험을 치라고 했다. 미술선생님께서 신흥고교 미술장학생으로 추천하겠노라 했을 때, 신이 나서 십리 길을 달려왔다. 상엿집도 공동묘지도 무섭지 않았다. 캔버스를 달리는 묽은 붓질처럼 경쾌했다. 아버지가 집 앞 다랑이 논을 천리 밖인 듯 내다보았다. 한참 지나 한마디,
“읍내 동보극장, 간판쟁이 젊더라.”
2.
아파트는 주방 위에 주방 있고 변기 아래에 떡꼬치처럼 변기 있다. 위층 화장실에서 걸쭉한 국물이 흘러내렸다. 화가 났다. 고무장갑 끼고 닦다보니 대형 유화작품 같다. 설원이었던 벽지에 누런 보리밭이 펼쳐진다. 만종이라도 울릴 듯하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라는 말은 지금, ‘똥칠 잘 마쳤으니 승천하시오.’ 위층에게 보내는 조사다. 구린 속을 들켜버린 위층 주인은 “보리바심 할 때가 지났네요.” 피식 웃는다. 지 말 하는 줄 어찌 알고 옥상 쪽으로 올라가려던 용이 눅진 비늘을 튼다. 꼬리로 바닥을 짚고 선 황룡의 등줄기가 찬란하다. 용 문양 기둥이 덤으로 들어서니 자못 든든하다.
3.
시집에 넣으려고 어머니의 캐리커처를 그렸다. “어미를 무덤에다 처박았다가 꺼내서 그렸구나.” 책이 나와서 몇권 놓고 가겠다고 하니, 그냥 가져가란다. 다시 예쁘게 고쳤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칠순 넘어서도 꽃무늬 팬티다. 마음 편치 않아 불뚝거리자, “화가 났구나. 읍내극장 간판쟁이 죽었다더라.” 병아리 꽁지처럼 웃는다. “둘째 놈 미대 합격했어요.” 받아치니, 울 밖 선산을 태산인 듯 바라본다. 두어참 지나 한마디,
“우리 손자를 수렁논 왜가리로 만들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