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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새로운 관조
황인찬 시집 『구관조 씻기기』
김나영 金娜詠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신(新)-자궁에 흐르는 세 혈맥(血脈)」 등이 있음. kfbs4@naver.com
‘나는 생각한다’라는 견고하고도 희미한 문장이 이 시집을 관통한다. 이 문장의 주어와 술어의 자리에 무엇이 놓여야 마땅한지, 그 자리의 특성이나 권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오래된 철학적 화두이기도 하거니와, 황인찬(黃仁燦)의 시집에서라면 시적 화자와 대상을 이해하는 데 꽤 중요한 물음이기도 하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기호명은 끊임없이 자문(自問)을 유도한다. 여기에 ‘나는 생각한다’고 자답할 때, 그 말에 가려진 무수한 목적들은 겨우 내놓은 그 한마디의 진심을 거듭 의심스럽게 한다.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에서 ‘나’라는 주어와 ‘생각한다’는 술어는 지워지기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이 시집에서라면 ‘나는 생각한다’라는 문장은 주어와 술어 사이의 거리에 대한 실감의 기미로, 그로써 이미 항상 사라지고 없는 ‘나’라는 존재를 짐작하는 방식으로 읽혀야 하지 않을까. 표제작인 「구관조 씻기기」를 예로 들어보자.
이 시가 그리는 정황은 간단하다. ‘나’는 도서관에서 한권의 책을 읽고 있다. 도서관은 조용하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펼쳐놓은 책을 비추고 ‘나’는 그 책을 보다가 도서관의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로 나간다. 주목할 것은 이처럼 단순한 시적 상황에 입체감을 더하는 일이 구체적인 묘사와는 정반대의 방법에 있다는 점이다. ‘나’는 보고 있는 책을 세밀하게 그리지 않을뿐더러, 눈으로 훑는 것보다 소리 내어 읽는 행위를 강조한다(“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시는 그런 ‘나’의 의지나 행동과는 무관할 수밖에 없는 한줄기 “빛”을 허용할 뿐이다. 그것은 도서관 바깥에서 책으로, 다시 책의 삽화 속으로 뻗어 들어간다. 이 빛 한줄기가 ‘나’의 자리와 ‘나’가 거느리는 무수한 술어의 자리를 이어주면서 ‘나’의 공간을 확장한다.
황인찬 시의 특장은 무엇보다 자신의 세계를 한정하고 실감하는 일이 그 세계의 확장을 도모하는 것임을 아는 화자에게 있다. ‘나’는 도서관 바깥을 “풍경”이라는 이름으로 틀 짓고, 한권의 책에서조차도 그 내부를 만들어 ‘지금 여기’와 별개의 깊이를 갖는 곳으로 경계 짓는다(“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 그러니 ‘나’가 보는 빛은 세개의 서로 다른 세계를 이어놓으면서 ‘나’의 실감을 통해 궁극에는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매개이다. 즉 황인찬의 시적 공간의 확장은 ‘나’의 실감을 통한 ‘나’라는 세계의 확장이기도 하다.
도식적인 이해를 추가해보자. 도서관이 정제된 현실이고 새에 관한 그 책이 영문 모를 텍스트로서 한편의 시였다면, 바깥에서 뻗어 들어와 삽화 속 한 쌍의 새를 조명하는 희미한 빛은 시인의 눈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시는 현실 바깥에서(“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 현실에 침입한 무엇이 현실에 틈을 내고 그 무엇에 주목하게 하는 일로써 마주하게 되는 어떤 깊이가 아닐까. 그리하여 도서관 밖으로, 시 바깥으로 나온 ‘나’가 목격한 젖은 거리는 세개의 세계를 통과하고 통합함으로써 현실과 현실감의 거리(距離)를 보아버린 자의 눈에서 벗겨진 방수막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 황인찬 시 특유의 관조라고 부를 수 있을까. 빛이 있었을 바깥과 도서관의 안쪽과 책 내부의 표면을 모두 통과하는 것은 빛이자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나’이기도 하다. 황인찬의 시는 빛과 마음과 사물의 표면이 서로 조응하면서 각자의 세계를 서로에게 열어 보이고, 그로써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나’라는 한 세계를 끝없이 확장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그 방식은 ‘나’를 극도로 환하게 조명하여, ‘나’라는 것을 무어라 호명할 수 없게 하고, 끝내는 ‘나’가 사라진 세계를 지어보이기를 기획하는 듯하다. 무릇 ‘관조’라고 쓰일 때 관조하는 자와 관조되는 대상이 각기 처한 현실에는 무심해지는 반면, 황인찬의 ‘나’는 창틀처럼 견고한 현실로부터 관조의 대상을 만나거나 혹은 그 스스로 관조되기를 기다리듯 현실의 실감들 속에 놓여 있기를 자처한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나는 생각한다’는 문장이 황인찬의 시를 관통할 때, 그것은 끊임없이 시적 대상들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 내지는 관심에서 출발하여, 바라보는 일로써 대상의 표면을 뚫고 그 빈자리에 ‘나’를 “빼앗기”는 데까지 이른다(“오래 보면 영혼을 빼앗길 거야”, 「말종」) 그리하여 남는 것은 무엇의 것인지도 모를 “허물”과 같은 한 세계이다. 가만히 바라보는 일로 그것과 조응하는 능력이 애초의 ‘나’라는 견고한 세계를 폐기하고 그것의 피부를 뚫고들어가 좀더 부피감 있는 세계를 이룩하는 기묘한 실감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사라지고 ‘나’의 목소리만 점점 희미하게 울리는 공간이 시라는 이름으로 생겨난다는 것을 그의 시는 보여준다. 이렇듯 황인찬의 시에서 ‘나는 생각한다’는 문장은 새로운 관조의 문법으로 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