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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외설적 이면의 클리나멘
정소현 소설집 『실수하는 인간』
유준 劉俊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존재론적 충일성에 대한 꿈-은희경론」 「시적 대의를 옹호하며」 등이 있음. yjnamu@hanmail.net
고속도로 위에서 몇시간째 자동인형처럼 운전대를 잡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난데없이 트럭이 맞은편에서 돌진해온다. 이는 한 주석가가 라깡(J. Lacan)의 ‘실재’ 개념을 설명하면서 든 예다. 정소현(鄭昭峴)의 소설집 『실수하는 인간』(문학과지성사 2012)에는 이러한 순간들이 가득하다. 그녀의 소설은 상징계적 네트워크의 외설적 이면들을 들춰내는 데 집중한다. 결말부의 빈번한 반전은 그러므로 할리우드식 클리셰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비틂으로써만 목도 가능한 진실의 숨은 소실점이다. 그러니까 여덟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실수하는 인간』은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여덟대의 트럭과 같다. 이 돌진하는 트럭들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뿐인데, 그건 역설적이게도 그 트럭들과 용기있게 충돌하는 것이다.
진정한 앎은 자동화된 의식을 향해 돌진해오는 트럭처럼 상징계의 장막을 찢고 나오는 순간에만 섬광과 같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은 쾌보다는 긴장과 불쾌를 요구한다. 이 긴장을 무화하거나 최소화한 상태로 유지하려는 게 이른바 쾌락원칙이고, 그 정점은 죽음(충동)이다. 그런데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앎에 대한 정열로부터 발생하는 긴장을 꾸역꾸역 탐하는 자들이 있으니, 소설가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러니까 모든 소설가들의 필명은 ‘오이디푸스’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자면 정소현은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의 트럭과도 같다. 등단작 「양장 제본서 전기」는 자신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알고자 하는 주체의 노력이 플롯을 이루고 있으며(“나는 가급적이면 살아서 내가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이후 발표한 「폐쇄되는 도시」 「이곳에서 얼마나 먼」 「너를 닮은 사람」 「지나간 미래」 등도 모두 대동소이하다. 여기에 ‘알다’라는 말과 가족유사성을 보이는 ‘찾다’까지 키워드로 넣으면 「빛나는 상처」 「돌아오다」 「실수하는 인간」까지, 여덟편의 소설 모두가 검색된다. 여기서 그(녀)들이 알고자 하거나 찾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기원이기도 하고, 자신이 살던 집이기도 하며, 함께 살았던 친구이기도 하고, 자신을 기른 할머니이기도 하며, 죽은 어머니이거나 남편(에 관한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찾는가가 아니라, 그 수색과 탐구의 과정에서 대면하는 실재의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을 통해 참과 거짓이, 가해와 피해가, 겉과 속이 격렬히 섞이고 뒤바뀌는 극한의 긴장과 충격 속에 상징계의 외설적 이면이 아가리를 벌리고 주체를 향해 달려든다. 특히 「너를 닮은 사람」이나 「지나간 미래」 「이곳에서 얼마나 먼」 등은 그 외설적 이면의 자리에서 윤리적 곤혹을 헤집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다.
이 작품 속 주인공들은 견고한 상징적 환영 속에서 자신의 순결에 대한 순진한 신뢰를 보인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되면서 환상의 스크린을 찢고 그 상징적 이면의 추악함이 드러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상징적 도식의 궤멸과 전도가 분명한 사실의 형태로 형상화된다기보다는 다소 모호하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너는 실제 인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내가 억눌러두었던 죄책감과 내 자신을 경멸하는 마음이 너를 닮은 존재로 현현한 것이 분명했다. 너는 실제가 아니라 내게서 분열되어 나온 병리학적 인격체일지도 몰랐다.”(「너를 닮은 사람」)에서처럼 이 내러티브가 주체 자신의 정신병리를 마스터플롯으로 삼고 있을 수도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단일한 해석의 결정권을 계속 쥐고 있기 힘들다. 상상과 허구의 경계 위에선 인물과 그들의 발언 및 사건을 무작정 신뢰할 수도 불신할 수도 없는, 이러한 착종에서 발생하는 아포리아야말로 우리가 그녀의 작품을 신뢰할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상징계의 장막을 찢고 그 외설적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언어가 상징계를 대표하는 매개라고 할 때, 실재는 언어화될 수 없고, 언어(화)에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수하는 인간』은 정신분석학적 독서도, 사회학적 독서도, 존재론적(실존론적) 독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그것들을 그럴듯한 레시피로 하나로 조리해내는 일도 가능하다.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간들은 예외 없이 버림받은 자들이다. 유기견이라는 말에 견주어보자면 그(녀)들은 모두 ‘유기인’이다. 이들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Wasted Lives, 바우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사회의 상징적 네트워크에 기입되기를 거부당한 것이다. 또 하나, 이들은 인간적 유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자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늘 외롭다. ‘알(고자 하)다’와 ‘찾(고자 하)다’가 작품집의 지배적 행위라면, ‘외롭다’는 지배적 느낌이다. 이는 때론 존재론적으로 스케치되고, 또 때론 그 위에 사회학적으로 채색되기도 한다. 그 심층에선 정신분석학적인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렇게 해석의 입체성을 촉발한다는 사실은 곧 이 작품집이 지닌 견고함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점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