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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잉여의 세계를 창조하고 은폐하는 비평의 잉여
이수형 평론집 『문학, 잉여의 몫』
이선우 李宣旴
문학평론가. 공저로 『서울의 문화적 완충지대』가 있음. damdam328@naver.com
군더더기 없이 자신의 문학관을 짧고 명료하게 밝히고 있는 이수형(李守炯)의 서문은 이 평론집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허세도 없고 엄살도 없다. 화려한 수사나 장황한 인용 없이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가고자 하는 길이 어디인지 안다. 멀리 나아가기 전에 뒤를 돌아보고, 섣불리 도약하기보다 기본에 충실하고자 한다.
싸르트르(J. Sartre)와 임화(林和), 김현과 이청준(李淸俊), 백낙청(白樂晴)까지 소환하며 이수형이 다시 확인하는 이 기본이란 바로 잉여로서의 문학, 그 무상성(無償性)의 힘과 윤리다. 2000년대를 가로지른 ‘근대문학의 종언’ 논의와, 참여와 순수를 넘어선 ‘문학의 정치’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이 문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에 대해 다시 사유하게 한 듯하다. 많은 전거가 달린 「근대문학의 기획」과 「욕망과 상상력」은 그 고민의 크기와 깊이를 짐작케 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 반복되는 이 질문들은 지금 우리 문학이 처한 곤경을 그대로 드러내거니와, ‘반복’에서 ‘억압된 것의 귀환’을 발견하고자 하는 이수형 역시 이 곤경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임화의 「작가와 문학과 잉여의 세계」에서 주목한 것은 “문학에서는 애초에 내재한 의도나 의미보다 잉여 자체가 본질적”이라는 것이지만, 그 글의 부제가 ‘특히 비평의 기능을 중심으로 한 감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의 질문은 문학비평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가 아닐까.
그러나 임화가 “현대와 같이 착잡한 시대에 작자가 의도에 반하여 잉여의 세계를 결과하고 그것의 가치를 의식함으로써 제 의도를 개변하는 것이 현실의 직관이라면, 의식되지 않았던 것을 의식화하고 직관 내용에 불과하였던 것을 지성 가운데 정착하는 비평의 직능도 실상은 이 현실 가운데 연원한다”고 강조하는 데 반해, 이수형은 그러한 “비평적 원천으로서의 현실”보다는 “미적 혁명으로서의 문학”을 규명하는 데 더 공력을 기울인다. 문학 하는 사람에게 문학의 종언이 선고되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태도일는지 모른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끄덕끄덕, 그의 글을 따라 읽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이 미진함은 뭘까. 공격보다는 방어에 가깝고, 개척보다는 재확인에 가깝지만 여러 글을 넘나들며 유려한 논리를 펼쳐나가는 그의 글이 가끔씩 범하는 어떤 비약. 그것은 그의 글에도 어떤 억압이 있기 때문은 아닌가. 문학의 존재론이 기능론과 잘 분리되지 않듯이 대개의 경우 논리는 신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논리와 경험이 신념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이 논리를 구성하는 경우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빈틈이, 그리하여 또다른 의미의 잉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일테면 그의 문학관을 가장 자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문학의 무상성」. 이 글은 근대 이후의 문학은 ‘쓰기-읽기’라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맺어진 관대함의 협약”을 전제한다는 싸르트르의 문학론으로 시작한다. 작가의 쓰기와 독자의 읽기는 모두 ‘자유에서 우러나는 동시에 자유를 목적으로 삼는 행위’이며 이에 대한 서로의 신뢰를 통해서만 구축된다는 점에서 ‘관대한 교환’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수형이 문제 삼는 것은 이 전제의 현실정합성이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현실의 구조와 모순을 파고드는 대신, ‘등가교환의 불가능성’을 문학의 본질을 논하기 위한 기본전제로 다시 상정한다. 김현과 이청준이 소환되는 것이 이 지점이다. 그러나 백낙청을 경유한 뒤 이수형이 내리는 결론은, 문학은 보상과 무관한 듯하지만 독자의 계속된 읽기와 작가 되기로 뒤늦게나마 보상되고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지금 무상의 노고를 하고 있는 작가들 역시 선배 작가들로부터 받은 선물에 뒤늦게 답례하는 것이니 억울할 것도 없다는 것. 그러니 “착한 마음에서 정녕 안하지 못하여 하는 일”(백낙청)로서 문학을 하라, 말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자발적으로 선택”(이청준)하라는 것이다. 운명, 즉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노예에서 주인으로 바꾸기. 문학은 결국 사회의 윤리가 아니라 개인의 윤리에 대해서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문제로 제기되었던 것이 묘한 의미변용을 거쳐 결국 답변으로 제출되는 이 원점회귀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의 말처럼 “문학이라는 체계는 애초부터 정해진 코드가 없다.” 그러나 본질론으로 회귀한다고 해서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코드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을 은폐하는 또다른 기제로 작동할 수도 있다. “진정한 문학의 자율성은 바로 주어진 코드로부터의 자유, 혹은 자유라는 이름의 코드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다. 그의 새로운 트임이 우리 문학에 진정한 활력을 불어넣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