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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주철 安舟徹
1975년 강원 원주 출생. 2002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rire010@empal.com
혀로 지은 집
죽은 노인의 혀를 잘라냈다.
달빛을 한근이나 사용하고 나서
노인의 질긴 혀를
노인이 유일하게 물려받은 묵은 나이에서
잘라낼 수 있었다.
살아온 일생을 반에 반도 담지 못한 가죽과
마누라와 자식을 패다 남은 힘이
뒤란에는 아직 몇병 남아 있다.
계란 껍데기같이 도랑에 말라붙어 놀던 아이들이
논둑에서 먹지도 않을 전통을 캐고 있다.
저녁이 될 때까지 아이들의 놀이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뽑아낸 나물자리같이 노을이 진다.
문중 산에 묻히지 못한 한이
죽은 자의 한은 아니어서 다행이고
산 자들의 푸념이어서 다행이다.
둘 다 슬픔이 적다.
그믐이 시작되는 혀도
곱게 잘라간다. 이 사내는 덤으로 다리도 잘라간다.
세상에 자신의 발자국을 절반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몇근 되지는 않지만
남은 허벅지라도 잘라간다.
어둠을 한 박스 다 사용했다.
나는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혀로 집을 지을 것이다.
무덤 위 얼어붙은 동지(冬至)의 눈같이 앉아서
혀를 깎을 것이다.
간판을 내걸고
세련된 침묵을 진열할 것이다.
함부르크
새롭게 죽을 고향과 새로운 무덤이 생겼다
어둠을 오랫동안 만질 수 있는
머나먼 항구가 생겼다
내가 태어난 고향이 나보다 먼저 죽어서
고향도 아버지에 불과하다는 거
인정하게 되었지만
미련한 비유에 기대어 살기에도 지쳐서
잘게 떠는 손끝에 걸리는 술잔이 무거워서
해변으로 바다의 나이를 세는
파도가 밀려온다 엄마의 발가락을 감고 있던
붕대가 풀린다 피에 젖은 거즈가 밀려온다
등을 돌리고 밀려온다
내가 낳은 딸아이의 고향은
수평선 위에 꽃이 피는 먼 나라이기 때문에
내가 태어난 마을과 쑥스러운 국적을 잊기로 한다
죽은 나무에 물을 주듯이
죽은 나무에 내 손의 떨림을 기울여 주듯이
잊기로 한다
방파제에 앉아 삶은 문어를 들고
삶은 방파제를 떠올리다 낚싯바늘에 걸린
잡어처럼 피식 웃는다 딸아이의 발가락에
모래가 낀 거 같지만 파도가 센 것이 꼭
모래의 나이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