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이가림 李嘉林
1943년 만주 출생.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빙하기』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순간의 거울』 『내 마음의 협궤열차』 『바람개비 별』 등이 있음. garimlee@hanmail.net
내 이름은 투구게
내 이름은 투구게
낮은 포복이 주특기인
키 작은 전사
“나는 공격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나는 방어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하면서
4억 4천년 동안
용케도 잘 견뎌왔다
이 세상은
공격만으로는,
또한 방어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곳
내 생김새를 두고
전투적이라거니,
방어적이라거니
제멋대로 말들을 하지만,
난 그저 타고난 포월적(匍越的) 체질로
하루하루
돌파해나갈 뿐이다
장갑차를 타고
상륙하는 해병이 되어
델라웨어 만(灣)을 장악하기까지
4억 4천년 동안
지구의 밑바닥에 엎드려 살았다
하지만
알과 새끼들을 훔쳐먹는
붉은가슴도요와의
오랜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피에서
뛰어난 항균 유주세포(遊走細胞)를 추출한답시고
무차별 포획하여
강제 헌혈시키는
가공할 프레드 뱅(Fred Bang) 실험실까지
생겨났으니,
얼마나 많은 이웃이
학살당할 것인가
그래도
내 이름은 투구게
낮은 포복이 주특기인
키 작은 전사
두만강 심청
온다던 봄은
우표를 붙이지 못해
오지 않고,
인신매매 브로커가
두만강 강둑에서
도라지꽃 같은 북한 여자를
고작 350위안에 팔아먹었다는
슬픈 소식만
황사 바람에 실려온다
“아버지는 미공급(未供給) 때* 상(喪)하고,
어머니는 못 먹어서 앞을 보지 못한다”는
두만강 심청,
꾸어다먹은 강냉이, 콩, 쌀
그 300kg의 빚을 갚기 위해
씨받이로 팔려갔단다
언젠가 백두산 여행길에
도문(圖們)에서 들었던 두만강 여울 소리가
아직도 내 귓가에
마르지 않는 한탄가로
출렁이고 있는데
자유왕래의 다리 놓는
망치소리는 들리지 않고
어린 심청 잡는 갈대밭의 총소리만
메아리치는구나
아아,
이 어지러운 귀울음
언제 그치려나
--
*1990년대 후반의 극심한 식량난 시기를 가리킴.